Kings RAW novel - Chapter 245
제244화 너를 어떻게 믿지?
“신들의 산이 어디 있는지 아나?”
[당연하죠. 거기서 왔는데.]“거리가 얼마나 되지?”
[여기에서요?]“그래.”
계산을 하려는지 소녀가 뜸을 들였다.
[이곳의 기준으로 하면 삼만 리쯤 되려나.]어마어마한 장도였다. 그러나 나는 안도했다. 일직선으로 갈 수 있다면 아무리 늦어도 나흘 이내에 도달할 수 있을 터였다. 무리할 시 사흘도 가능했다. 달이 완전히 찰 때까지는 아직 열하루가 남아있었으니 충분한 여유가 있었다.
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만약 나현에게 들르지 않고 곧장 천랑성으로 향했다면 천추의 한을 남길 뻔했다. 삼만 리라니, 필히 망연히 헤매다 난쟁이가 정한 날짜를 넘겼을 것이었다.
[마침 잘 말했어요. 여기서 이렇게 노닥거릴 시간이 없어요. 당장 출발해도 빠듯해요. 어서 가요.]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녀를 붙잡았다.
“앉아라. 아직 물어볼 게 남았다.”
[안 돼요. 설마 잊은 건 아니겠죠? 주우가 당신이 보름달이 뜨는 날까지 산에 오지 않으면 이 땅의 인간들을 몰살시킨다고 했다면서요? 그는 허언을 일삼는 위인이 아니에요. 당신이 시혜를 기만으로 갚았다고 간주하고는 협박을 실행에 옮길 거라고요.]“앉으라니까. 내일 떠나도 시간 안에 갈 수 있다.”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얼마나 빠른지는 모르겠지만 그럴 수 없어요. 왜냐하면 도중에 들러야 할 데가 있기 때문이에요. 거기서 할 일도 있고.]“무슨 소리냐?”
[설마 내가 단지 길잡이 노릇을 하려고 이 먼 길을 불철주야 달려왔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당신을 신들의 산으로 안내해 주는 대신 당신도 내 부탁을 들어줘요. 그래야 공평하지요.]“무슨 부탁인데?”
[일단 가요. 가면서 얘기해요.]소녀는 내 동의를 구하지 않고 부리나케 다실을 빠져나갔다. 강제로 그녀를 붙잡을까 하다가 생각을 바꿔 그녀의 뒤를 따랐다.
* * *
소녀의 경신 속도는 놀라웠다.
나에 비해서도 그다지 손색이 없었다. 물론 가속을 발하면 차이가 벌어지겠지만 나를 제외하면 당금 중원 무림의 누구도 그녀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었다. 만리풍도 어림없을 터였다.
하지만 소녀에겐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지구력의 부족이었다. 호기롭게 앞서 나가던 소녀는 불과 반 시진 정도만 날고서는 완전히 지쳐서 나가떨어졌다. 땅바닥에 엎어져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헐떡거리는 소녀를 내려다보노라니 기가 막혔다. 이래서야 대화가 불가능하지 않은가.
어찌 하려나 두고 보았더니 대자로 뻗어있던 소녀는 한 시진 이상 경과한 후에야 몸을 추스르고는 경공을 재개했다. 휴식 시간이 행군의 두 배를 잡아먹으니 배보다 배꼽이 큰 격이었다.
나는 비로소 소녀가 보챈 이유를 납득했다. 이런 식으로 간다면 열흘도 넉넉지 않을 터였다. 더욱이 도중에 어딘가를 경유해야 하고 거기서 모종의 일로 지체된다면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 몰랐다.
나는 병아리를 낚아채는 매처럼 뒤에서 소녀의 허리를 팔로 감았다.
[어마! 뭐하는 짓이에요?]“군소리 말고 길이나 안내해. 아니, 그럴 필요 없다. 어차피 서역까지는 가야 할 테니까.”
내가 시험 삼아 순간이동을 펼치자 소녀가 비명을 내질렀다.
“깍!”
이제 보니 육성을 토해낼 수 있었군.
막대한 원력을 소모하는 순간이동을 가속으로 대체한 나는 소녀에게 궁금한 점을 물었다.
“대체 어떻게 우리말을 아는 거냐?”
소녀는 반문했다.
[대체 어떻게 이 속도로 날면서 말을 할 수 있는 거죠?]“내가 좀 잘 났다고 해 두자.”
[흥, 교만한 사람 같으니.]“대답이나 하시지.”
[설명하기 어려워요.]“그래도 해 봐.”
[…….]“해 보라니까.”
[알았어요. 할 테니까 닦달하지 마요.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독심술이에요. 물론 실제로 마음을 읽는 건 아니에요. 뇌에서 나오는 파장을 분석하고 해석해 의미를 알아내는 거죠. 나로서도 매우 힘든 작업이에요. 위험한 작업이기도 하고요. 당신들 식으로 비유하자면 이를 위해 선천지기까지 쥐어짜야 했으니까. 수명이 십 년은 줄었을 거예요.]“신들은……, 아니 너희는 모두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나?”
[천만에요. 타 생명체와 감응하고 그들의 본의를 해독할 수 있는 이는 우리 일족 중에 나밖에 없어요.]“거짓말하지 마라. 그 주우라는 난쟁이도 내 속을 들여다봤다.”
[그건 전혀 다른 비술이에요. ‘리언’의 효능이죠. 주우가 그걸 획득한 건 서열 싸움에서 최종적인 승자가 된 덕분이었어요.]“리언? 그게 뭔데?”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렇다면 해보나 마나가 아닌가. 난쟁이가 내 패를 사전에 인지한다면 승부수를 날릴 기회조차 없을 것이었다.
절망감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던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했다.
“누구든 보자마자 안단 말이냐?”
[그렇진 않아요. 우마(牛馬)처럼 단순한 종류라면 즉각 전생(全生)을 볼 수 있지만 인간 같은 복잡한 존재는 시간이 걸려요. 물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요.]혹시나 하고 던져본 지푸라기는 한 줄기 빛이 되었다.
“그자가 싸우다 말고 그 기물을 활용할 수 있을까?”
[모르죠.]“…….”
[정말 몰라요. 리언을 부려본 적이 없으니까. 주우가 자랑하는 걸 들었을 뿐이에요.]“주우란 놈은 특기가 뭐냐? 무기를 소지하지는 않았던데.”
[손가락이에요.]“뭐?”
[주우는 손가락에서 빛을 쏘아내요. 무엇이든 쪼갤 수 있는 빛이죠. 그를 우리 일족의 최강자로 만든 빛이기도 해요. 현재의 일곱 중에서가 아니라 예전의 일천 중에서.]“몸뚱이는 얼마나 단단하지?”
[엄청 단단하죠. 소라의 보호막을 둘렀으니까. 주우와 끝까지 맞섰던 ‘타이’만이 그에게 흠집을 낼 수 있었어요. 아, 가여운 타이. 그가 일인자가 되었더라면 많은 게 바뀌었을 텐데.]나는 타이가 빙족의 신화에 나오는 전신(戰神)을 말함을 알았다. 하지만 그는 내 관심사가 아니었기에 화제로 삼지 않고 넘어갔다.
“빠른가?”
[누가요? 주우요?]“그래.”
[당연하죠. ‘두란’보다 빨리 나는 건 주우밖에 없어요.]나는 두란이 누군지 묻지 않았다. 소녀의 일족 중 한 명일 게 뻔했다.
* * *
소녀에게 얻은 정보를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있는데 그녀가 물어왔다.
[다 끝났으면 이제 내 부탁을 말해도 돼요?]“아직 남았다.”
[또 뭐요?]“너는 어째서 나에게 네 두목의 비밀을 알려주는 거지?”
[주우는 내 두목이 아니에요.]“그럼 뭔데?”
[말했잖아요. 우리 일족의 우두머리라고.]“장난 하냐? 같은 말이잖아?”
[그렇지 않아요. 나는 그를 우두머리라고 인정하지 않으니까.]“반역자란 말이냐?”
[어휴, 말을 해도! 지향하는 바가 다르다는 정도로 해 둘 게요.]“내가 그를 이기기를 바라냐?”
[그러면 좋겠지만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잖아요? 나는 주우가 왜 심복인 아카를 해친 당신을 놓아주었는지 이해가 안 가요. 그 성질 급한 위인이 대체 왜 처벌을 연기했을까요?]나는 소녀의 질문을 묵살하고 생각에 잠겼다. 소녀도 집요하게 캐묻지 않고 본인의 용건으로 돌아갔다.
[이제 내 부탁을 말해도 되죠?]“뭔데?”
[두란을 죽여줘요.]“뭐?”
이번에는 두란이 누군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소녀의 설명은 간단했다.
[우리 일족 중 하나예요.]“그를 왜 죽이라는 건데?] [위험한 놈이니까요. 나쁜 놈이기도 하고.]
“그게 다냐?”
[더 있어야 하나요?]“…….”
[이봐요. 배불뚝이 노인에게 들었는데 당신은 악당들을 처단하는 정의의 용사라면서요? 두란은 딱 그런 악당이에요. 당신이 죽인 아카는 난폭할 뿐이지만 두란은 잔혹하기까지 해요. 그의 취미가 뭔지 알아요? 갓난아이를 어미에게서 빼앗아 그 앞에서 산 채로 씹어 먹는 거예요. 그걸 보면서 미치지 않는 어미는 없어요, 그러면 이번엔 발광하는 어미를 잡아먹죠.]듣기만 해도 역겨웠다.
“식인종이란 말이냐?”
[그에겐 별미일 뿐이에요. 주식은 피죠. 초경을 치르지 않은 순결한 여아들의 피.]점입가경이었다.
[아카처럼 마구잡이로 학살을 저지르는 성향은 아니지만 두란도 그 못지않게 인세에 재앙을 일으킬 위인이에요. 그를 추종하는 자들이 ‘부우’니까요. 그들은 흡혈부족이자 살인광들이에요.]문득 해귀들이 떠올랐다.
“두란이란 자는 얼마나 강하냐?”
[엄청 강해요. 주우를 빼면 아무도 그를 제어할 수 없어요. 하지만 당신이라면 어렵지 않게 처치할 수 있을 거예요. 두란은 아카와 막상막하지만 아카를 두려워해 피해 다녔어요. 당신은 아카를 손쉽게 이겼잖아요? 그러니 두란도 가볍게 날릴 수 있을 테죠?]손쉽게? 가볍게? 어처구니가 없었다.
* * *
나는 소녀의 요청에 선뜻 응하지 못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는 내 상태였다. 보다 정확하게는 조건이었다. 나는 난쟁이와 붙기 전에 전력을 쏟아 붓는 전투를 치를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그러다 ‘비장의 패’가 상하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두란이란 자가 천벽에서 맞붙었던 덩치와 대등한 무력의 소유자라면 정상적으로 겨루어도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무력의 일부를 봉인한 채 싸워야 한다면 고전은 필연지사였다.
어쩌면 난쟁이와 대면조차 못해보고 끝장날 수도 있었다. 그 경우 난쟁이가 내 사정을 참작하지 않고 기한을 어겼음을 빌미로 중원에 가서 살겁을 저지른다면 그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두 번째 이유는 소녀의 진정한 의도를 헤아리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정말 천인공노할 악당을 죽여 인세를 구하자는 갸륵한 목적에서 나온 청일까. 혹시 내 힘을 빌려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려는 속셈은 아닐까.
소녀에게 이런 저런 비사를 듣긴 했지만 진위 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 그녀가 작심하고 나를 속인들 알아챌 방도도 없었다. 진소월이라면 모를까 내 능력으로는 소녀의 속을 읽는 게 불가능했다. 솔직히 나는 소녀가 하는 말이 다 사실로 들렸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의혹이 일었다.
한없이 맑고 순수한 소녀의 눈망울은 내게 요마의 요력을 내재한 꼬마를 연상시켰다. 그 아이도 천연덕스럽게 거짓을 진실인 양 떠벌리지 않았던가. 도왕이나 무왕은 몰라도 나는 결코 꼬마에게 추잡한 짓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도후에게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일순 나 자신을 의심하기까지 했다. 도후가 현혹되었던 것도 놀랄 일이 아니었다.
소녀도 꼬마와 같은 부류가 아닐까. 시종처럼 굴었던 나현을 보건대 소녀 또한 꼬마처럼 자기가 점찍은 이를 부리는 요상한 재주를 갖고 있을 공산이 컸다. 꼬마를 겪지 않았다면 나도 넘어갔을 터였다.
한 번 체에 걸러보니 모든 게 의문투성이였다.
이대로 갈 수는 없었다. 하여 나는 지상으로 하강했다. 소녀가 약 올리듯 물었다.
[지쳤어요? 하긴 그 속도로 날면서 나하고 대화까지 하니 그럴 만도 하죠.]소녀를 내팽개치듯 땅에 던져버린 나는 미끼를 던졌다.
“내가 거절한다면 어쩔 테냐?”
소녀의 동그란 눈이 화등잔 만해졌다. 그러더니 별안간 눈물을 그렁거렸다.
[그러지 말아요. 당신밖엔 의지할 사람이 없어요. 제발 세상을 구해줘요.]수락하고 싶었다. 손을 내밀어 소녀의 뺨에 흐르기 시작한 눈물을 훔쳐 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내 욕구를 억제했다. 그러고는 단도직입했다.
“세상을 구해? 다른 속셈이 있는 거 아냐? 너를 어떻게 믿지?”
처연했던 소녀의 눈빛이 일순 강렬해졌다.
[나는 거짓말을 할 줄 몰라요. 그러니 내 말은 무조건 믿어도 돼요.]이것으로써 확실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