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246
제245화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어이, 입술에 침이나 바르고 그런 소리를 해라.”
[나나에요.]“뭐?”
[내 이름은 어이가 아니고 나나라고요.]“…….”
[그런데 무슨 말이죠?]“멍청한 거냐? 아니면 기억력이 나쁜 거냐? 네 입으로 나 대인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하지 않았더냐?”
[내가 언제요?]“그에게 먼 이국의 공주라고 했다며?”
[아! 그건 당신이 곡해한 거예요. 잘 기억해 봐요. 그 배불뚝이 노인에겐 편의상 그렇게 말했다고 했잖아요. 그리고 거짓말이 아니었어요. 내가 든 적합지체는 진짜 공주니까. 나는 그 노인에게 내 진짜 정체를 말하지 않았던 것뿐이에요.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제발 이러지 말아요. 이렇게 빌게요.]눈물을 뚝뚝 흘리며 손바닥을 비비는 소녀를 보니 마음이 약해졌다. 그래서 더 강하게 나갔다.
“시끄러워. 이미 마음을 정했어. 난쟁이와의 싸움이 먼저다.”
[안 돼요.]“어째서?”
[몰라서 물어요? 주우를 만나면 당신은 다음날의 태양을 볼 수 없게 될 거예요. 그러면 두란을…….]“그러니까 뒈지기 전에 그 두란이란 놈을 먼저 죽이란 말이지?”
[그래요. 어차피 저 세상으로 가야 한다면 가기 전에 좋은 일을 하고 가는 게 낫잖아요. 당신이 떠난 후 당신의 업적은 길이길이 기릴 게요. 약속해요.]“빌어먹을.”
[그런 말은 입 밖으로 안 꺼내도 돼요.]“나는 여전히 너를 믿을 수 없다. 일견 그럴싸하지만 꼼꼼히 살펴보면 죄다 허술하단 말이지, 예컨대 두란이란 놈이 그런 악종이라면 서방 세계는 벌써 멸망했을 거 아니냐?”
[그렇지 않아요. 왜냐하면 두란은 부활한 지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았거든요. 지금까진 그의 추종세력인 부우들을 장악하느라 잠잠하지만 곧 고란 일대를 피바다로 만들 거예요. 그러니 늦기 전에…….]“잠깐! 한 달이라고? 그러면 너희들 전부가 되살아난 지 얼마 안 된단 말이냐?”
[맞아요. 물론 적합지체를 선정하고 진체를 이전시키기 시작한 건 십 년이 넘었어요. 그러나 우리 중 제일 먼저 육화에 성공한 ‘사라’도 불과 두 달 전에 깨어났어요. 나는 그보다 보름 늦게 나왔고요.]“이런, 제길. 햇병아리들이었군.”
[또 욕!]* * *
[이렇게 된 거예요.타이가 주우와의 결전에서 패한 후 그를 숭배했던 무리가 그를 구해 바다로 달아났어요. 타이처럼 치명상을 입은 건 아니었지만 부상이 작지 않았기에 주우는 그들을 바로 추격하지 못했어요.
승부욕의 화신이었던 주우는 회복한 후 몇 년이나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타이를 찾았지만 결국 실패했어요. 그러더니 엉뚱한 데 분풀이를 했어요. 덕망 높은 타이와 친하게 지냈던 이들을 마구잡이로 해치기 시작한 거죠. 그때 그의 사냥개 노릇을 했던 자들이 아카와 두란이에요.
우리 일족을 몰살시키다시피 한 주우는 그러고도 분이 안 풀렸는지 생존한 이들 전원에게 분체를 강요했어요. 인간의 육신을 버리고 도로 광물로 돌아가라는 거였죠. 그러다 진체가 말라붙을 우려가 상당했으나 어차피 말을 듣지 않으면 주우의 손에 절멸될 터였기에 모두들 따를 수밖에 없었죠.
나를 포함해 정확히 아흔여덟 명의 동족이 분체에 성공해 깊은 잠에 들었어요. 주우는 맨 마지막에 그랬을 테고요. 우리는 아마도 먼저 분체를 시도했을 타이가 적합지체를 찾아 진체를 옮긴 후 본기를 발산하기를 기다렸어요. 그래야 우리도 깨어날 수 있을 테니까요.
장구한 세월이었어요. 하지만 의식하지는 못했어요. 실은 깨어난 후 그렇게나 많은 시간이 흘렀다는 걸 알고는 깜짝 놀랐지 뭐에요. 아무튼 어느 날 고대하던 신호가 왔어요. 아지랑이처럼 미약하긴 했으나 분명 타이의 기운이었죠. 각자 우리를 신으로 받들던 부족을 거느리고 있던 우리는 그들 중 적합지체를 찾아 깨어날 채비를 했어요. 인간의 시간으로 따지면 십오륙 년쯤 걸렸을까요.
이미 말했듯 재(再)육화에 성공한 이는 일곱 밖에 안 돼요. 나머지는 전부 진즉 사망했죠. 하필이면 가장 위험한 자들이 되살아났어요. 아카와 두란 말이에요.
웬일인지 우리를 깨웠던 타이의 기운은 한 번 강하게 타올랐다가 꺼져버렸어요. 두 악당을 제어했던 그가 없으니 인간세상은 이제 지옥으로 화할 터였어요. 그렇게 절망에 빠져있던 차에 당신 얘기를 들었죠. 내가 얼마나 솔깃했겠어요? 그래서 선천지기가 상할 위험을 무릅쓰고 진력을 총 동원해가며 당신을 찾아 나선 거였어요.
내가 어떻게 그 먼 길을 거슬러 올라가 당신을 만날 수 있으리라 판단한 곳에 당도할 수 있었는지 궁금했을 테죠? 이 모든 게 미리 짠 게 아닌지 의심스러웠을 테죠? 그럴 만해요. 하지만 나에겐 나만의 비결이 있어요. 나는 진심을 전하면 거의 모든 이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어요. 그게 내 능력이에요.
나는 그때그때 필요한 사람을 찾아 필요한 정보를 얻으면서 전진했어요. 시간이 촉박했기에 정말 필사적으로 달렸죠. 정성이 헛되지 않아 결국 당신에게 이르렀어요. 실은 당신이 머나먼 남방으로 떠났다기에 심히 낙담했어요. 배불뚝이 노인이 급히 알린다고 했지만 며칠이 지나도록 당신이 오지 않아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가 당신을 보고는 얼마나 반갑던지. 눈물이 날 뻔했지 뭐예요.
그거 알아요? 당신이 내 진심에 호응하지 않는 극소수의 인물들 중 하나란 걸. 정말 당황스러웠어요. 선심이라곤 한줌도 없는 순수 악당들에게만 내 호소가 통하지 않는데……. 아무튼 이제 나에 대한 의심일랑 거두고 나를 믿어요. 그럴 거죠?]
* * *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최후까지 저항했다.
“만약 내가 끝내 거부하면 어쩔 테냐?”
소녀가 울먹였다.
[제발…….]하아, 이렇게 순진할 데가. 두란이란 작자를 먼저 처치하지 않으면 난쟁이에게 데려다 주지 않겠다고 협박하면 될 일이 아닌가. 중원의 수천만 목숨을 인질 삼아!
나는 칼자루를 쥐고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소녀가 한심하면서도 애처로웠다. 그래서 그녀의 애원을 초장에 끊었다.
“일단 가자. 두란이든 도란이든 가면서 생각하자.”
소녀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두른 나는 천공으로 솟구쳤다.
* * *
사막을 지났다. 서역도 통과했다. 그러고도 수천 리를 더 나아갔다. 우한에서부터 따지면 족히 일만 리는 날았을 터였다. 초기에 잠시 지상에 내려 소녀와 실랑이를 벌인 걸 제외하면 단 한 번의 휴식도 없이. 그럼에도 소녀는 아직 절반도 오지 못했다고 했다. 정말 까마득히 먼 곳이었다.
가면서 서서히 두란이란 자를 먼저 보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소녀가 끈질기게 설득한 탓이 아니었다. 대체로 신뢰하긴 했지만 나는 아직 그녀를 완전히 믿지 못했다. 그러므로 내가 두란과 일전을 벌이기로 한 건 다른 동기에서 비롯된 결정이었다.
소녀의 말에 따르면 두란은 내가 천벽에서 간신히 해치웠던 덩치와 동급의 강자였다. 나는 그자와의 사투를 통해 현재 나를 가로막고 있는 벽의 돌파구가 열리길 기대했다. 원래는 난쟁이와의 결전에서 기적적으로 ‘마지막 패’가 주어지기를 바랐지만 미리 얻을 수 있다면 그 편이 백배는 나았다.
설사 원하는 바를 실현하지 못하더라도 두란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소녀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그자는 만인을 위해 반드시 처치해야 할 악종이었다.
한 가지 불안요소는 두란과 동사(同死)하는 경우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사태만은 피해야 했다. 하지만 십 할의 장담은 불가능했다. 하여 나는 설혹 내가 죽더라도 내 시체를 난쟁이에게 가져가달라고 소녀에게 요청했다. 소녀는 ‘흔쾌히’ 수락했다. 신바람을 내며! 제길.
* * *
무쇠로 만든 철인보다 단단한 동체를 자랑했지만 나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었다.
바다 같은 호수를 건너자마자 더 견디지 못하고 추락하듯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내내 내 팔에 안겨 편안하게 이동한 소녀가 착지의 충격을 피해 냉큼 내게서 벗어나더니 얄밉게 물었다.
[괜찮아요?]괜찮겠냐? 반문할 기력도 없었기에 나는 말을 목구멍에 가두었다.
[정말 굉장해요. 단 하루 만에 여기까지 오다니. 수고했어요.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요. 두란이 있는 고란까지는 이천 리도 안 돼요. 푹 쉬었다 가도 오늘 중으로 도달할 수 있을 거예요. 당신네 표현으로는 뭐라고 했더라? 맞아! 엎어지면 코가 닿는다고 했지. 그만큼 가까워요.]이천 리가 지척이냐? 절로 욕지기가 치밀었지만 나는 소녀를 상대하지 않고 바로 운기조식을 취했다. 그러지 않으면 절규하고 있던 온 몸의 근골이 숫제 터져나갈 것 같았다.
어느 정도 회복한 나는 비행을 재개하기 전에 다시 한 번 점검했다.
“그자들의 싸움에 대해 얘기해봐.”
[또요? 벌써 열 번도 더 말했잖아요? 거기서 보탤 게 없어요.]“찬찬히 떠올리면서 가능한 한 자세하게 설명해봐.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글쎄, 똑같다니까요.]“그래도 다시 해 줘.”
[둘 다요?]“그래.”
[아이 참.]“어서.”
[알았어요. 할 테니까 그렇게 노려보지 마요. 자기 눈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요?]“…….”
[한다고요. 하면 될 거 아니에요.]소녀가 난쟁이와 그의 호적수였던 타이란 용자의 혈전을 관전자의 입장에서 풀어내기 시작했다. 자신의 말마따나 벌써 열 번 이상 말했음에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제풀에 흥분해서는 자그마한 두 주먹을 꽉 쥐고는 몸까지 부르르 떨었다.
이미 외울 만큼 내용을 숙지하고 있었으나 나는 경청했다. 그러면서 타이에게 나를 대입시키며 막연했던 작전을 구체화하고 여러 변수와 대응방안을 검토했다.
난쟁이는 말하자면 원거리 공방전의 대가였다. 전체적으로 평하자면 타이가 상성 상 그의 천적에 가까웠음에도 무력의 격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패한 일전이었다. 결국 난쟁이를 내 거리 안에 끌어들일 수 있느냐가 관건이었다. 그래야 승부수를 작렬시킬 수 있었다.
두란의 경우는 별 보탬이 되지 않았다. 그와 아카, 즉 나에게 죽은 덩치가 한바탕 크게 충돌한 적이 있었다고 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소녀는 그 싸움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두란과 관련해 그녀가 목격한 건 그보다 한참 하수들을 상대로 한 일방적인 학살극뿐이었다. 그렇더라도 아주 쓸모가 없지는 않았다.
두란은 난쟁이와는 반대로 접근전의 명수였다. 그는 빠른 몸놀림을 이용해 상대를 농락하는 유형이었다. 만약 그의 최고속도가 내 순간이동에 미치지 못한다면 의외로 싱거운 승부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방심을 경계했다. 덩치와 대등하게 겨뤘다면 절대로 만만하게 볼 자가 아니었다.
한 시진에 걸쳐 소녀의 진을 빼놓은 나는 다시 그녀를 안고서 붉은 노을이 깔린 하늘로 날아올랐다. 부우족의 터전이라는 ‘검은 골짜기’까지는 일천칠팔백 리쯤 된다니 전속력을 유지할 시 두 시진 이내에 당도할 수 있을 터였다.
어느덧 해가 지고 대지에 어둠이 깔렸다. 하지만 나는 대낮처럼 환하게 이방의 산하를 볼 수 있었다. 바다 같은 호숫가에서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심중에 움튼 의구심이 목적지에 가까워짐에 따라 점점 커져갔다.
자기가 싸울 것도 아니면서 결전을 앞두고 긴장했는지 어느 시점부터 소녀는 말이 없어졌다. 나는 그녀가 알아차리지 못하게끔 은밀히 그녀의 눈을 훔쳐보았다. 그러고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소녀가 오랜 침묵을 깨고 ‘저기에요!’라고 소리쳤을 때 곧장 그곳으로 향하지 않고 수직 낙하했다. 이대로 갈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