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248
제247화 무조건 두고 갈 테다
당혹스럽기 그지없었으나 나는 이 기이한 사태가 반드시 내게 불리한 것만은 아님을 알아차렸다. 오히려 잘만 활용하면 이점으로 작용할 터였다. 하지만 그러려면 두 가지가 전제되어야 했다.
“그 난쟁이가 듣고 보고 있는데 우두머리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따위의 소리를 태연히 했다고?”
[절반만 맞아요. 내 일족은 내 눈을 통해 볼 수는 있지만 내 말을 듣지는 못해요. 안 그러면 말을 가려서 했겠죠.]역시.
만족감을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나는 턱짓으로 두 쪽으로 갈려 바닥에 엎어진 절세미남자를 가리켰다.
“저자와 나는 암흑 속에서 싸웠다. 네 눈이 매개체라면 난쟁이는 우리 싸움을 보지 못했겠지?”
[미안해요. 두란과 마찬가지로 나도 어둠에 구애되지 않고 사물을 분간하고 식별할 수 있어요. 그러니 주우도 다 보았을 거예요. 그를 위해 그런 건 아니에요. 나는 그저 당신이 어떻게 싸우는지를 보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래도 미안해요. 본의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당신에게 피해를 주었네요. 주우가 당신의 솜씨를 더 잘 파악하게 되었으니.]짐짓 미간을 찌푸렸으나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전력을 쏟았으되 난쟁이와의 일전에 대비해 마련했던 비장의 패를 꺼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격전 중에 뇌리에 번득인 깨달음도 구현하지 않고 끝냈다. 후자를 드러내지 않은 것은 천우신조였다. 만약 부지불식간에 성과를 확인한답시고 노출했다면 난쟁이는 내가 그가 알지 못하는 수법을 새로 개발했다고 여기고는 경계심을 품었을 터였다. 그랬으면 낭패였다. 내 승부수는 난쟁이의 방심을 필수조건으로 삼기 때문이었다.
안도감을 감추고자 일부러 눈을 부라리며 소녀를 을렀다.
“더는 나를 속이지 마라.”
[속인 게 아니에요. 다 밝히지 않았을…….]말끝을 흐리더니 소녀가 꼬리를 내렸다.
[알겠어요. 이제 원을 이루었으니 남김없이 털어놓을 게요. 하지만 솔직히 더 내놓을 것도 없어요.]“두고 보자. 또 한 번 나를 기만했다고 판단되면 용서하지 않을 거다.”
[나를 죽이겠다는 소린가요?]나는 단호한 눈빛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 *
당황스러웠다.
‘검은 골짜기’를 벗어나 서진(西進)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익숙한 광경과 마주쳤다. 살겁의 희생양이 된 도시였다. 곳곳에 널브리진 시체들과 도시 전역을 덮은 죽음의 그림자는 소녀의 주장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웅변하고 있었다. 두란과 부우들은 골짜기 서편의 땅에서 학살을 저지른 것이었다.
소녀는 ‘내 말이 맞죠?’라며 망발을 떨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내 팔뚝 위에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며 소리 내어 울었다. 하도 구슬프게 울어대는 통에 피해가 확산되기 전에 막아 그나마 다행이라며 달래줘야 했다.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면서도 소녀는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놀랍게도 그녀의 눈물은 무려 나흘간이나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놀림감으로 삼을 일이 아니었기에 잠자코 있었지만 이것도 이른바 신적 능력인지 궁금했다.
일천 리 간격마다 바뀌는 이국적인 풍광들을 끊임없이 뒤로 보내며 이어진 여정은 소녀가 허허벌판의 지평선에 솟은 하얀 산을 가리키며 ‘신들의 산’임을 알렸을 때 종료되었다. ‘검은 골짜기’에서부터 쳐도 일만 리가 넘는 대장정이었다.
나는 속도를 줄이고는 광대한 들판 가장자리에 내려앉았다. 신들의 산까지는 대략 오륙십 리쯤 될 터였다. 내 경신으로는 엎어지면 코가 닿을 거리였다. 난쟁이가 지정한 날까지는 아직도 이레나 남아있었다. 일찍 간다고 그가 상을 줄 리 만무하니 나는 남은 기간 동안 광야에서 수련을 하며 보낼 작정이었다.
두란이란 자와 일전을 치르던 도중 명멸했던 빛줄기를 소환해 실체화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으나 소녀의 눈을 통해 지켜보고 있을 난쟁이를 의식해 자중했다. 결국 실전에서 시현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난쟁이가 알고 있을 모든 절기들을 아낌없이 펼쳐 보이며 수련에 몰두했다. 그를 현혹시키려는 목적에서만은 아니었다. 임박한 결전에 앞서 결의를 다지고 내 심신의 상태를 최상으로 끌어올리고자 함이었다.
난쟁이가 내려오는 경우 말고는 수련을 방해하지 말라고 일러놓았던 소녀가 오랜만에 심어를 보냈다.
[때가 되었어요. 이제 곧 해가 지고 보름달이 떠오를 거예요.]좌정한 채 묵상에 잠겼던 나는 눈을 뜨고 시선을 올렸다. 온 하늘이 붉게 물들어있었다.
내가 몸을 일으키자 소녀가 나직한 심어를 보냈다.
[기분이 어때요?]내 묵묵부답에 소녀가 질문을 구체화했다.
[두려운가요?]이번에도 묵살할까 하다가 답을 주었다.
“천만에.”
진심이었다. 두려움 따윈 개구리 코딱지만큼도 없었다. 필승을 자신해서라거나 자포자기해서가 아니었다. 그저 최선의 최선을 다한 결과를 어서 확인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승패와 생사에 대한 초연함은 도후와의 대결에서 얻은 전리품이었다.
내 말이 믿기지 않는 듯 소녀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어왔다.
[혹시 남길 말은 없나요? 당신을 아끼는 이들에게 말이에요. 내가 책임지고 전해줄 게요.]먼 산을 응시하고 있던 나는 소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보다 몇 가지만 물어보자.”
[뭔데요? 뭐든지 다 말해줄게요. 내가 아는 거라면.]“너희는 신은 아니지만 하늘에서 왔으니 많은 것을 알 테지?”
[꼭 그렇지는 않지만……, 뭐가 궁금한 거죠?]“사후 세계라는 게 있냐?”
[…….]“죽은 이들을 다시 만날 수 있느냔 말이다.”
[아! 보고 싶은 사람이 있는 모양이죠?]“대답이나 해.”
[나도 몰라요. 하지만 이건 알아요.]“뭘?”
“몰라도 돼.”
[칫.]내가 그대로 대화를 끝낼 기미이자 소녀가 미련을 보였다.
[물어볼 게 몇 가지라고 했잖아요?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긴장도 풀 겸 나머지도 다 꺼내 봐요.]“…….”
[어서요.]“그 작자들은 왜 벌거벗고 있었지?”
[무슨 말이에요?]“너는 번듯한 의복을 갖춰 입고 있잖아. 두란이란 자도 그랬고. 그런데 난쟁이하고 덩치는 벌거숭이였단 말이지. 왜 그런 거냐? 변태라서? 둘 다 거시기도 보잘 것 없던데.”
소녀가 낯빛을 붉혔다.
[그건 주우와 아카가 반인반수(半人半獸)족인 아드라에서 적합지체를 골랐기 때문이에요. 짐승의 본성을 지닌 족속이니 옷 같은 걸 걸칠 까닭이 없죠.]“그렇군.”
[또 있나요?]“이제 없어.”
[거짓말. 두 가지를 몇 가지라고 하지는 않잖아요?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을 테니까 속 시원히…….]“야!”
[깜짝이야. 왜 갑자기 고함을 지르고 그래요?]“어째서 내가 난쟁이에게 당할 거라 단정하는 거냐?”
[그럼 주우를 이길 수 있어요?]“…….”
[그것 봐요. 당신이 이기길, 아니 살아남길 간절히 바라지만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그게 내 특기야.”
[네?]“기적 같은 역전승을 일구는 게 내 특기라고. 나보다 세다고 거들먹거리던 위인들은 죄다 염왕에게 가 있지. 난쟁이도 곧 그치들의 뒤를 따를 거야.”
소녀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육성으로 들릴락 말락 한 소리를 중얼거렸다.
“띠다.”
나는 그 말의 의미를 묻지 않았다. 보나마나 ‘허풍’ 비슷한 뜻일 터였다.
* * *
광채를 잃은 해가 지평선에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나는 발목 높이의 풀들이 무성한 초원으로 걸어갔다. 소녀가 나를 졸졸 따라왔다.
[걸어가게요? 그러기엔 먼데.]“…….”
[말 좀 해 봐요. 아까부터 왜 벙어리가 됐어요?]“…….”
[나도 심장이 터질 것 같은데 당신은 오죽하겠어요? 말이라도 하면 긴장감이 아주 조금이나마…….]나는 걸음을 멈추고 소녀를 노려보았다.
“정신 사나우니까 그만 종알거려. 자꾸 귀찮게 굴면 떼놓고 간다.”
[흥, 자기를 위해서 그러는 건데.]“…….”
[알았어요. 그러면 아무 거나 좋으니까 질문 하나만 더 해 봐요. 몇 가지라고 하고는 달랑 두 개만 해서 찝찝해 미칠 지경이라고요.]하아. 절로 한숨이 나왔다.
소녀를 무시하려다 마침 미진했던 부분이 생각나 말이 나온 김에 입 밖으로 뱉어냈다.
“이번에 부활한 나머지 네 일족은 어떤 자들이냐?”
덩치와 미남자가 내 손에 죽었으니 소녀와 난쟁이를 빼면 셋만 남았을 터였다.
[그들은 사라와 이안, 그리고 구우예요. 앞의 둘은 나하고 같이 이른바 선신(善神)에 속해요. 구우는 악신(惡神) 계열인데다 고약한 습성을 가진 괴짜이긴 해도 별 문제는 안 돼요. 나보다 약하니까. 자랑은 아니지만 아카와 두란이 없으니 내가 제일 세요. 아! 물론 주우는 예외고요. 주우는 우리와는 차원이 다른…….]“됐어. 거기까지만 해. 이제부터 입을 벌리면, 아니 말을 건네면 무조건 두고 갈 테다.”
소녀의 심어를 봉쇄한 나는 보행을 재개했다. 그러다 해가 지평선 너머로 넘어간 직후 경신을 전개했다. 순식간에 뒤처진 소녀가 항의의 심어를 날렸다.
신들의 산은 바위산이었다. 만년설이 덮여 하얬던 게 아니라 산을 이룬 바위들이 백암인 탓에 그렇게 보였던 것이었다. 기실 만년설을 두르기에는 너무 낮았다. 정상의 높이가 일백 장 어림에 불과했다.
나는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은 민둥산을 올랐다. 중턱에 오르자 소녀가 알려주었던 신전이 보였다. 신전이라고 했지만 지붕도 없고 무너진 기둥들이 이리저리 나뒹구는 폐허나 다름없었다.
난쟁이는 금세라도 허물어질 듯 금이 쫙쫙 간 돌 의자에 앉아있었다. 문득 황금 태사의에 앉아 짧은 다리를 대롱거리던 독왕이 떠올랐다. 마치 곰을 위해 만든 의자에 원숭이가 앉아있던 것 같았던 그 모습처럼 난쟁이도 그의 체구에 비해 터무니없이 커다란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었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병색이 완연해 초라해 보였던 독왕과 달리 난쟁이는 태산을 방불케 하는 위압감을 발산하고 있었다. 꽤 먼 거리였음에도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난쟁이가 시야에 들어온 순간 내 머릿속에 천둥이 울렸다.
[드디어 왔구나, 괴물. 어디 재롱을 떨어봐라.]나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아직도 의자에 붙어있는 난쟁이를 향해 전속력으로 날았다. 그와 말을 섞을 의사는 병아리 눈곱만큼도 없었다. 속전속결은 불가피했다. 그가 ‘리언’이라는 기물을 부리기 전에, 그래서 내가 염두에 둔 수순을 읽어내기 전에 급전으로 치달아 그의 정신을 사납게 만들어야 했다.
난쟁이와의 거리가 팔구 장으로 줄어들었을 때 나는 광환을 발출함으로써 개전을 알렸다. 난쟁이는 이형환위의 비술을 과시하며 내 공격을 가볍게 피해냈다. 그를 대신해 빛의 고리에 걸린 돌 의자가 도끼에 찍힌 장작처럼 쪼개졌다.
선공을 했지만 그 이후의 국면은 각오했던 대로 내 입장에서 수세일변도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공방전의 양상 자체는 내 예상과는 전혀 딴판으로 흘러갔다. 초장부터 불길한 예감이 내 심혼을 휘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