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25
제24화 눈깔 안 깔아?
길이 낯선지라 생각보다는 오래 걸렸다.
그렇지만 나는 해가 뜨기 전에 목적지에 이를 수 있었다. 산정에서 내려다보는 신창은 새벽어둠에 잠겨있었다. 신창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하지만 규모로 보건대 안평이나 전원보다는 큰 도시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신창으로 내려가지 않고 산 주위를 돌아다니며 운공에 들 수 있는 곳을 찾았다. 구태여 신필주가 알린 시한보다 일찍 갈 필요가 없었거니와 최대한 좋은 몸 상태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 외에 다른 목적도 있었다.
검황자와의 비무에서 입은 내상은 거의 아물었지만 완치된 건 아니었다. 신필주가 어떤 덫을 준비했을는지는 알 수 없지만 최종적으로는 무력에 의해 승부가 판가름 날 터였다. 나는 필요할 시 원력의 최대치를 쥐어 짤 각오도 했다. 그러려면 내부의 상처를 치유해두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혈맥이 터지는 등 후유증이 극심할 터이기 때문이었다.
은신처를 물색하는 동안 작전을 구상하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바탕이 되는 형세판단을 할 수 없어서였다. 적의 전력은 안개 속에 가려져있었다.
다만 나는 신필주가 나를 보성 현가의 영역이 아니라 중립지대에 속하는 신창으로 부른 것을 바람직한 징조로 받아들였다. 이는 그가 현가를 등에 업지 않고 자기 심복들만으로 나를 상대할 거라는 의미였다.
하긴 그로서는 떠들썩하게 일을 처리하는 게 부담스러울 것이었다. 진소월에 따르면 ‘부용 아씨’의 부군인 진천수(震天手) 현상인(玄常仁)은 그녀가 자신과 혼인하기 전에 딸까지 낳은 유부녀임을 전혀 모르고 있을 거라고 했다. 기실 그는 부용 아씨를 정실로 맞아들일 때 그녀가 처녀지신이라고 확신했을 터였다. 신필주가 진청운과의 결합으로 인해 손상된 그녀의 수궁사(守宮絲)를 복원시켰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사정이 이러하니 신필주로서는 여식의 과거를 들추어낼 우려가 있는 소동을 벌이기는 어려웠을 것이었다. 이점은 내게 크나큰 호재였다. 현가의 무인들을 배제하면 신필주가 지닌 패는 한계가 자명했다. 아마도 진소월을 잡아간 자가 그가 동원할 수 있는 최강의 고수일 터였다.
하루하고 반나절이 지났다.
운공을 마치고 동굴에서 나왔지만 나는 신창의 저자로 내려가지 않고 산중에 머물렀다. 가급적 시한에 맞춰 등장할 작정이었다.
이윽고 해가 지고 사위가 어둑어둑해졌다. 하지만 신창은 점점 밝아졌다. 쌍십절의 축제분위기가 내가 서있는 산허리까지 올라왔다. 나는 좀 더 시간을 보낸 후에 하산했다.
나는 대놓고 거리를 활보했다. 잠입과 염탐, 그리고 기습은 진즉 선택지에서 지워버렸다. 아버지와 달리 그 방면으로는 재주가 없거니와 신필주가 대비하고 있을 게 빤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정공법으로 나가기로 했다.
대흥관을 찾는 건 쉬웠다. 제법 알려진 명소인지 처음 만난 행인에게 묻자마자 바로 답을 얻었다. 그러나 나는 대흥관으로 직행하지 않고 저자를 배회하며 시간을 때웠다. 그러는 동안 나는 나에게 달라붙은 은밀한 시선들을 느꼈다. 기실 그들은 내가 산을 내려온 직후부터 나를 감시하고 있었다.
해시(亥時)를 알리는 종이 열두 번 울린 후 나는 대흥관의 담장을 따라 빙빙 돌았다. 자시가 되면 바로 대문에 들어설 참이었다.
대흥관은 꽤 넓었다. 정밀히 측정한 것은 아니지만 못해도 일만 평은 넘을 것 같았다. 담벼락이 높아 안쪽의 구조는 알 수 없었다.
밤이 이슥했다. 자시가 임박했으리라 생각한 나는 어슬렁거리며 대문으로 향했다. 경비무사들이 있었지만 따로 언질을 받았는지 나를 제지하지 않고 길을 터주었다. 나는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그러자 기가 막히게 종소리가 들렸다. 자시였다.
원숭이처럼 생긴 사내가 나를 맞았다.
“어서 오시오. 내가 안내해 드리겠소.”
언사는 정중했지만 나를 흘깃거리는 눈길에 적의가 깃들어있었다. 나는 그를 무시했다. 그는 무인이 아니었다.
화려한 전각들을 통과한 원숭이 사내가 걸음을 멈춘 곳은 직방형의 단층건물 앞에서였다. 입구 양 옆에 나와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 체격의 거한들이 석상처럼 서있었다. 외공을 익힌 듯 둘 다 징그러울 정도로 근육질이었고 인상도 험악했다.
그 문지기들이 겁도 없이 나를 노려보았다. 원숭이 사내에게 했던 것처럼 그들을 무시하려다 나는 심술기가 발동했다.
“눈깔 안 깔아?”
내가 눈을 부라리며 내기를 발산하자 덩치들이 혼비백산했다. 그러더니 바닥에 엎드릴 듯 한껏 자세를 낮추었다. 원숭이 사내까지 덩달아 겁에 질렸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이놈들은 내가 누군지 몰랐단 말인가.
내가 개문을 지시하자 엄동설한의 고추처럼 오그라든 덩어리들이 허둥지둥 문에 달라붙었다. 그들이 문을 여는 동안 나는 문에 관해 두 가지 사실을 파악했다.
첫째, 겉은 나무로 되어있었지만 속은 철로 이루어져있음에 틀림없었다. 둘째, 지나치게 두꺼웠다. 족히 한 자는 될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 건물의 벽도 그만큼의 두께를 가진다는 뜻이었다.
나는 건물 자체가 일종의 덫임을 알아차렸다. 문을 닫은 후 밖에서 빗장을 걸어버리면 안에 든 이는 꼼짝없이 갇히게 되는 셈이었다. 물론 나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일이었다. 한 자 두께의 석벽은 내 철봉에겐 종잇장에 불과했다.
예상대로 내가 건물 안에 들어가자마자 문이 닫혔다.
나는 재빨리 내부를 살폈다. 휑뎅그렁한 공간이었다. 가장자리에 원기둥이 늘어선 것이 궁궐의 대전 같은 구조였으나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아니, 뭔가 있기는 했다.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대전 맞은편에 모여 있었다. 어두운 데다 거리가 십칠팔 장이나 되었지만 안력을 돋운 나는 그들의 면면을 식별할 수 있었다.
제일 먼저 눈에 띈 이는 진소월이었다. 그녀는 유일하게 의자에 앉아있었다. 혈도가 찍혔는지 미동도 없었다. 그녀 뒤에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서있었다. 주름으로 덮인 면상에 진물이 흐르는 눈과 이가 다 빠져 오므라든 입이 박혀있었다. 그러나 허리가 꼿꼿했고 안광도 형형했다. 그 노인이 누군지는 불문가지였다.
노인, 신필주의 좌우엔 각각 두 명의 무인들이 시립해있었다. 나는 그들 중 둘을 알아보았다.
하나는 진소월을 납치해갔음에 분명한 초로의 사내였다. 좁은 어깨, 냉혹한 눈빛. 여인처럼 가냘픈 체구였지만 그는 바위도 부수는 주먹을 가진 권사(拳士)였다. 나는 진소월이 알려준 그의 정보를 되새겼다.
팔방권(八方拳) 초우.
나이는 환갑 언저리. 무위는 초절정 초입에서 하(下)로 추정됨. 오랫동안 평북 일대에서 활약했으나 십사오 년 전 사파의 거두인 한월도(寒月刀) 설견과 갈등을 빚은 후 잠적. 정사 중간으로 분류되지만 잔혹한 성격에 살인에 거리낌이 없음.
초우에 대해 알려주며 진소월은 그가 신필주의 사냥개 노릇을 하고 있을 공산이 크다고 덧붙였다. 이틀 전 강태수로부터 장원에 침입한 ‘좁은 어깨의 냉혈한’에 대해 들었을 때 바로 그를 떠올릴 수 있었던 이유였다.
노인의 왼쪽에 선 자는 후덕한 인상의 중년인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실제나이가 초우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도치(賭痴) 소대성일 터이기 때문이었다.
소대성은 명문 출신이었다. 그것도 보통 명문이 아니라 오대세가에 속하는 도원(桃原) 소가(蘇家)의 직계였다. 그럼에도 그가 혈족들처럼 끝에 도(刀)가 붙은 근사한 별호가 아니라 흑도들도 부끄러워 할 도치라는 조롱을 얻게 된 연유는 그의 기벽에 기인했다.
그는 한 마디로 도박에 미친 사내였다. 젊은 날 자기 처자식을 판돈으로 걸 정도였다. 나중에 그의 정체를 알게 된 도방(賭房)에서 채권행사를 포기했지만 그 사건은 한동안 호사가들의 단골 술안주가 되었다.
소대성의 일탈행위로 골머리를 앓던 도원 소가는 그의 도박장 출입을 금해달라는 도방 연합의 호소와 그가 진 빚을 변제해달라는 도박장 주인들의 아우성에 시달리다 그를 파문하기에 이르렀다. 소대성은 소가는 물론이고 오대세가를 통틀어서도 손꼽히던 후기지수였으나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개선의 여지를 보이지 않았기에 그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
가문의 족쇄에서 풀려난 소대성은 본격적으로 도박판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강호의 골칫덩이가 되었다. 희한하게도 그는 그토록 빠져있으면서도 도박의 재능이 전무했다. 무얼 해도 늘 돈을 잃었다.
그는 도박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암계의 해결사 노릇도 마다치 않았다. 그가 정맹이 독림(毒林)을 상대로 치렀던 전쟁에 용병으로 참전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였다.
도박장에서 돈을 잃고 밖에서 벌기를 반복하던 소대성은 십여 년 전쯤부터 전자에만 전념했다. 그에게 뒷돈을 대주는 자가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 전주가 누군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나는 소대성과 잠시 눈을 마주쳤다.
진소월의 평가에 따르면 그는 초절정 중(中)의 무위를 지닌 강호였다. 태극검문의 단천검이나 백도방의 독두귀도보다 상수라는 뜻이었다. 원력을 사용하지 않는 한 처리하기 힘든 상대라는 뜻이기도 했다.
내 시선을 받은 소대성이 미소를 머금었다. 나는 그가 싫지 않았다. 기실 그는 여러 의미에서 강호의 불가사의로 통하는 괴짜였다.
도박판에서의 백전백패는 납득불가였다. 일부러 그러지 않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모두들 그가 일부러 지는 거라고 의심했지만 도박에 임하는 자세가 워낙 진지한 탓에 확신하기는 어려웠다.
한편 도박으로 세월을 허송한 그가 시나브로 초절정의 무위에 도달한 것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이를 두고 그가 숨만 쉬어도 무공이 느는 마공을 익혔을 거라느니 아니면 몰래 수련을 했을 거라느니 등등의 억측이 난무했지만 진실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초우와 소대성 외의 이인(二人)은 정체불명이었다. 거리가 먼 탓에 기감으로 무력을 가늠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공히 강태수보다 윗길의 고수이리라 추정했다. 초절정은 몰라도 절정 상(上)은 될 듯싶었다.
적진을 훑어본 나는 피아의 전력을 분석했다. 내 우세였다.
신필주가 제법 그럴듯한 진용을 꾸렸으나 내겐 역부족이었다. 최대치의 절반가량만 원력을 끌어내도 능히 적들을 처치할 자신이 있었다. 건물 외부에 대기하고 있을 조무래기들은 변수가 될 수 없었다.
나는 작금의 상황이 우스꽝스러웠다. 나를 덫에 가두었으리라 여기고 희희낙락할 적들은 실제로는 자기들이 옥쇄를 택한 것임을 상상도 못할 터였다.
그러나 승리를 장담하기엔 일렀다. 내게도 약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진소월이었다.
나는 적들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들의 삼십 보 앞에 이르렀을 때 신필주가 걸걸한 음성을 토해냈다.
“거기 서라.”
그의 명을 묵살하고 내처 전진하려던 나는 생각을 바꿔 걸음을 멈추었다. 무슨 수작을 벌일 참인지 두고 봐서 나쁠 건 없었다. 진소월의 안위도 고려해야 했다.
“제법 용기가 가상하구나. 아니면 어리석은 겐가? 아니, 십중팔구 이 아이에게 홀려 죽을 둥 살 둥 모르고 사지에 뛰어든 게지. 여하간 이곳에 들어선 이상 네 목숨은 내게 달려있다, 마웅.”
나는 철봉과 옥소를 꺼내들었다. 신필주의 안색이 변했다. 팔방권 초우를 제외한 세 무인이 일제히 무기를 손에 쥐고 그를 보호하듯 앞으로 나섰다. 소대성은 칼이었고 나머지 둘은 각각 창과 철륜이었다. 내가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두 괴인은 나에게 돌진하려는 듯 무게중심을 앞발로 옮겼다. 그들을 제지하며 신필주가 내게 소리쳤다.
“이 아이를 위태롭게 할 셈이냐?”
관절이 불거져 갈고리 같이 생긴 신필주의 손엔 비수가 들려있었다. 그리고 그 비수는 진소월의 희디흰 목덜미에 닿아있었다.
“한 발짝만 움직여도 이 아이의 명줄을 잘라버릴 테다.”
내 본능은 신필주가 협박을 실행하고도 남을 위인임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