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250
제249화 거기까지다
내 복부를 유심히 지켜보던 나나가 호기심을 드러냈다.
[혹시 목이 잘려도 도로 붙나요?]나도 궁금했다. 하지만 시험해 볼 생각은 먼지 한 톨만큼도 없었다. 진소월은 독의가 옆에 있어 숨이 끊어지기 전에 재빨리 이어줬다지만 나나가 그의 역할을 해내리라는 보장이 없지 않은가.
나는 나나의 질문을 묵살하고 반문했다.
“너희 일족의 남은 두 명도 네 눈을 통해 나와 난쟁이의 싸움을 지켜보았나?”
나나가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먼저 가 버리는 바람에 나도 마지막 장면밖에 못 봤어요. 몸이 잘린 당신을 보고는 다 끝났다고 여겼는데 공중에 떠 있던 주우의 머리가 갑자기 터지지 않겠어요. 놀랄 겨를도 없이 구우가 당신에게 다가가는 걸 보고는 정신없이 달려왔던 거예요.]잠시 나를 지그시 바라보던 나나가 심어를 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알고들 있을 거예요. 주우와 구우의 진기가 소멸되었으니까. 틀림없이 혼란스러워 어쩔 줄 모르고 있을 거예요. 내 눈으로 본 나조차도 믿기지 않는데. 주우가 죽다니. 이런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주우는……, 그는 진짜 신 같은 존재였어요.]“…….”
[나는 당신의 업적을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알릴 거예요. 아카와 두란은 그렇다 쳐도 주우를 처치하다니. 꿈조차 꾸지 못했던 일이에요. 그는 살육엔 취미가 없지만 가끔 그저 심심풀이로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안 돼.”
[뭐가요?]“나에 관해 알리지 말란 말이다.”
[이런! 겸손하기까지. 점점 당신이 좋아…….]“그게 아니라 당장은 알리지 말라고. 한두 달쯤 있다가 해라.”
[왜요?]“소문이 나기 전에 할 일이 있다.”
절단부위는 그럭저럭 반나절 만에 붙었지만 외상이 워낙 심하고 내상도 중해서 운신이 가능하기까지는 사흘이나 걸렸다. 나나와 산을 내려오는데 두 개의 그림자가 들판 좌우에서 접근하는 게 보였다. 나나는 그들이 자신의 일족인 사라와 이안이라고 했다.
사라는 내가 여태껏 본 여인들 중 최장신이었다. 나보다도 머리 하나가 컸다. 하지만 몸매는 버들가지처럼 가늘었다. 마치 여자 검왕을 보는 것 같았다.
이안은 땅딸막한 중년 사내였는데 찬탄만 연발하는 사라와 달리 나를 두려워하고 어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나에게서 그의 주특기를 들은 나는 귀가 솔깃해져서 의식적으로 살갑게 굴었다. 긴장을 푼 사내는 흔쾌히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 * *
우리는 중원으로 향했다. 올 때와 달리 시간의 압박을 받지 않았기에 느긋하게 동진했다. 그렇더라도 준마의 속도로 나아갔지만 직선거리로만 이만 리가 넘는 장도인지라 서역의 경계에 들어섰을 때는 스무 날 이상 지나있었다.
천랑성이 가까워짐에 따라 나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목관(木棺) 속으로 들어갔다. 내 덩치에 걸맞게 보통 관보다 두 배는 크고 세 배는 두꺼웠다. 장정 스무 명이 들어도 버거워할 무게였지만 나나는 솜뭉치인 양 가볍게 들어올렸다. 중원 무림의 기준으로 보면 그녀는 초절정 극상과 절대지경 초입의 중간쯤에 위치한 강자였다. 아마도 순수한 무력만 따졌을 시 나를 제외하면 당금 천하에서 가장 강할 터였다.
그러나 천랑성의 절벽을 올라갈 때는 사람들을 불러 도움을 받았다. 대두노인의 반응을 보기 위해서는 그녀의 진신무력을 감추어야 했다.
관을 열고 내 시체를 본 대두노인은 경악성을 내질렀다. 그러고는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소리를 질러댔다. 나는 그가 성모의 예언에 대해 떠들고 있으리라 짐작했다.
나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을 테지만 그녀의 심어는 특정상대에게만 전해지니 내 귀에는 대두노인의 목소리만 들어왔다. 그의 음성은 격앙과 침중함 사이에서 널을 뛰고 있었다. 무슨 얘기들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만약 대두노인이 내가 우려했던 행위를 하려 들 시엔 나나가 알려줄 것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한참 후에야 알게 될 터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나는 내가 든 관을 지고 ‘무사히’ 천랑성을 나왔다. 그로부터 얼마 후 나나가 관을 두드려 신호를 보냈다. 밖으로 나가보니 스앙카로 가는 경로에 있는 인적 없는 험산이었다.
“어떻게 됐냐?”
[두 번째 예상이 맞았어요. 내가 요청한 대로 당장 중원에 당신의 변고를 전해주겠대요. 당신을 넣은 관은 정확히 보름 후 정오경에 갈 거라고 했어요.]의외였다. 나는 대두노인이 나나를 억류하거나 심할 경우 그녀의 입을 영원히 봉하려 들 가능성도 있다고 보았다. 내 죽음이 알려지면 천랑성은 서역의 지배자에서 내려와야 할 뿐만 아니라 존립마저 위태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대두노인의 입장에서는 내 사망사실을 은폐하는 게 최선이었다.
“혹시 그 요상한 술수를 쓴 거 아냐, 나나?”
내가 의심하자 나나가 억울해했다.
[술수라뇨? 무슨 표현이 그래요? 나는 당신이 시킨 대로만 했다고요. 그 노인에게 진실과 진심을 감추느라 얼마나 애를 먹었는데요.]기실 나나와 대두노인은 구면이었다. 전날 나를 찾아 중원으로 왔을 때 나나는 천랑성을 경유했고 거기서 대두노인에게 나에 대한 정보를 얻어냈다. 그녀에겐 요마의 요력을 지닌 꼬마가 그랬던 것처럼 사람을 제 뜻대로 부리는 재주가 있었다.
“알았다. 그냥 물어본 거니까 화내지마.”
[몰라요.]토라진 나나를 달래지 않고 나는 작별을 고했다.
“그럼 먼저 가마. 잘 찾아올 수 있지?”
[벌써 가게요? 소식이 거기까지 가는데 닷새는 걸릴 거라던데. 당신 비행술이면 하루면 되잖아요? 그러면 나흘 동안 나하고 같이 있다가…….]“거기 가기 전에 몇 군데 들를 곳이 있다. 이 관을 갖고 다니면 아무래도 눈에 띌 테니까 곤란해. 보름 후에 보자.”
나는 나나가 특기를 발휘할 겨를을 주지 않고 천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녀를 전적으로 신뢰하게 된 지금은 그녀가 작심하고 ‘요상한 술수’를 시전하면 저항하기 어려웠다.
* * *
나는 계획을 수정했다. 어차피 모두들 정맹으로 올 터이니 굳이 북천맹과 명교의 친인들에게 사전 공지할 필요가 없을 듯싶었다.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그들이 드러낼 날 것 그대로의 반응도 보고 싶었다. 그래서 봄기운이 완연한 산하를 감상하며 곧장 원중으로 날아갔다.
불야성을 이룬 천하제일도의 상공을 지나 정맹에 든 나는 태평전 지붕의 처마 안쪽에 똬리를 틀었다. 주위에 태평전보다 높은 전각들이 더러 있었지만 사각지대였기에 아무도 나를 볼 수 없을 터였다.
너무 일찍 온 탓에 나흘 가까이 지루한 기다림에 시달렸다. 그러다 드디어 예기했던 소요가 일었다. 천랑성에서 보낸 전갈이 도착한 모양이었다. 새벽녘이었음에도 정맹의 원로들이 속속 태평전으로 모여들었다. 그러고는 갑론을박을 시작했다.
논의의 주제는 북천맹과 명교가 무단으로 차지한 영토와 백성과 재화의 ‘회수’ 방안이었다. 마치 처음부터 자기들의 소유였던 양 모두들 당연시했다. 특히 해왕도의 침공으로 터전을 잃은 주천 백가와 오중 황가의 인사들이 적극적이었다. 그들은 즉각 무도한 무리를 몰아내 실지를 수복하고 정의를 구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른 세가들도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나는 정맹 원로들의 작태에 화가 나기보다는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설마 이 정도로 뻔뻔하게 나올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오가는 호칭으로 판단하건대 보성 현가와 도원 소가의 원로들로 추정되는 자들은 상대적으로 신중했다. 그들은 내 사체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대업을 보류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두 동강 난 시신’이란 서신의 문구를 들어 반박하던 백가와 황가의 원로들은 나에 대한 공포가 남아있었던지 결국 열흘의 유예기간을 두는 데 동의했다. 한시라도 빨리 탐스러운 먹이를 취하고 싶어 하는 그들의 욕망이 두꺼운 벽을 뚫고 내게로 생생하게 전해졌다.
* * *
거리가 훨씬 떨어져 있음에도 명교의 소면통달이 제일 먼저 정맹에 도착했다. 비보를 접하자마자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왔음에 틀림없었다. 그 다음날 나현을 비롯한 북천맹의 수뇌부들도 정맹에 들어왔다. 볼 수는 없었지만 귀를 간질이는 대화들로 보건대 광객과 이제는 남천은군으로 불리는 은수독군도 동행했음에 분명했다.
희색을 자제하려 용을 쓰는 정맹의 인사들과는 달리 내 친인들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들 같은 심사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그들이 내 장례를 구실 삼아 자신들을 부른 정맹 원로들의 속셈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거부하지 못한 건 불참을 빌미로 트집을 잡힐 것을 우려해서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내 죽음을 믿기 어려웠기 때문일 터였다. 그래서 정맹으로 온다는 ‘관’을, 그리고 그 안에 들었다는 ‘반 토막 난 시신’을 보기 전에는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었다.
일부지만 오대세가의 중진들은 노골적으로 북천맹의 중역들에게 거만하게 굴었다. 종을 대하는 주인의 태도였다. 귀를 자극하고 심기를 긁는 그들의 무례한 언사에 몇 번이나 뛰쳐나가려다 자중했다. 그 동안 기다린 시간이 아까워서였다.
드디어 천랑성의 대두노인을 통해 예고했던 날이 왔다.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천공에서 목관을 양손에 받쳐 든 나나가 나타났다. 고양광장에 운집한 군중이 그녀의 경이로운 경공을 보고는 술렁거렸다. 정맹 원로들의 안색도 변했다. 하지만 나나가 관을 내려놓고는 훌쩍 떠나버리자 다들 반색했다. 천랑성에서 보낸 서신에 따라 그들은 그녀가 서방의 악신(惡神)과 싸우다 동귀어진 한 나를 고향에 데려다주는 친절을 베풀기 위해 왔을 뿐이라고 알고 있을 터였다.
변수가 사라지자 안도한 정맹의 고수들이 관 주위를 둘러싸고는 내 친인들의 접근을 막았다. 오대세가의 가주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달려들어 관 뚜껑을 열었다. 그러고는 각기 다른 소리들을 입 밖으로 내보냈다.
신음성, 탄성, 그리고 경악성.
광객과 소면통달이 저지선을 뚫고 달려왔다. 오대세가의 수장들은 구태여 그들을 막지 않고 관을 볼 수 있도록 비켜섰다.
“아아, 은공. 이게 무슨 일인가?”
광객이 관 앞에 엎어지며 부르짖었다. 소면통달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들의 언행에 관 속에 어떤 내용물이 들었을지 짐작한 내 친인들이 사색이 되었다.
주천 백가의 가주이자 정파제일검의 명성을 지닌 자령검군 백성호가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랏. 무황, 아니 마웅은 죽었다. 이제 천하는 정맹의 것이다.”
노인의 선포에 오대세가의 무인들을 중심으로 환호성이 일었다.
누군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그들의 열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예의를 차리게, 자령검군. 그런 염치없는 소리를 할 때인가? 그 아이는 천하를 몇 차례나 위난에서 구한 일대영웅이 아닌가. 비록 주검으로 돌아왔으나…….”
“가당찮은 소리! 돼도 않는 궤변 늘어놓지 마라, 괴선. 이 자는 불요불급한 전란을 일으켜 평화롭던 무림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강호를 도탄에 빠뜨린 원흉이다. 게다가 해왕도와 천마의 난에서는 생색을 내기 위해 일부러 늦게 나타나는 바람에 수많은 이들을 희생시키지 않았던가. 작은 공이 있다 하나…….”
“그렇게도 염치가 없다니. 이보게, 자령검군. 자네 가문을 포함한 정파 무림은 그 아이의 은덕과 아량을 대대손손 갚아도 모자랄…… .”
“닥쳐라, 괴선! 호가호위 시절이 끝났음을 모르겠느냐? 닭 모가지 비틀 힘도 없는 주제에 제멋대로 직제에도 없는 대판관이 되어서는 맹의 대소사에 관여한 죄가 태산이다. 주둥이를 다물고 있으면 목숨만은 살려줄 터이나…….”
“지금 내 형님을 협박하는 게냐?”
듣다 못한 광객이 끼어들자 그와 구원(舊怨)이 있는 광양 성가의 가주가 호통 쳤다.
“갈(喝)! 멍청한 위인 같으니. 어떤 형국인지도 모르고 설치는가. 네놈은…….”
불문곡직 성가의 최강 도호(刀豪)에게 달려들려는 광객을 말리느라 소면통달이 진땀을 흘렸다.
“진정하게, 광객. 지금은 싸울 때가 아닐세. 자네 책무를 잊었는가. 북천맹의 태상호법으로서 자네는 저들을 보호할 의무가 있지 않은가. 부디…….”
소면통달이 겨우 광객을 만류하고 있는데 상황이 급전직하했다. 성가의 가주가 다짜고짜 칼을 빼들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가주들도 강맹한 기운을 일으키며 가세하는 바람에 삽시간에 공기가 흉흉해졌다. 일촉즉발의 순간 원력을 실은 내 목소리가 광장을 울렸다.
“그만! 거기까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