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26
제25화 근데 나를 믿나?
내가 무기들을 든 양팔을 늘어뜨리자 신필주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내 말만 잘 들으면 이 아이는 물론이고 너도 무사할 게다. 단순히 목숨을 부지하는 정도가 아니다. 세상 누구도 부럽지 않을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주마. 이 아이도, 아니, 이 아이보다 더 예쁜 계집들도 안겨주마. 청초한 년이든 요염한 것들이든 취향대로 취하려무나. 매일 밤 계집들을 바꿔가며 즐겨도 좋다. 네가 무얼 원하든 다 이루어 질 게다.”
신필주의 말을 듣고 있던 창을 든 무인이 진소월을 힐끔거렸다. 그의 동공에 끈적끈적한 욕정이 반들거렸다. 나는 비로소 그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채화창(采花倉) 고상주(高祥柱).
사파칠문의 하나인 효성창문(曉星槍門) 출신의 고수였다. 나이는 오십대 중반, 무위는 절정 극상으로 추정.
고상주는 역겨운 습성을 가진 탐화랑이었다. 그는 설사 경국지색의 미녀라도 기루에 있는 미기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가 노리는 이들은 여염의 여인들이었다.
규중의 처자를 납치한 고상주는 그녀에게 온갖 추잡한 짓거리를 하도록 강요한 후 그녀가 음약의 부작용과 그의 상시적인 폭행으로 인해 정신이 반쯤 나가면 신체 주요부위를 훼손시키고는 매음굴에 팔아버리곤 했다. 그런 잔혹한 짓을 한 까닭은 그 여인이 그가 버린 폐품임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천인공노할 그의 만행에 분노한 정협단(正俠團)과 칠걸방(七傑幇)의 협사들이 그를 처단하러 나섰으나 특징 없는 용모의 소유자인데다 무공까지 고강해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경쟁자들이 워낙 막강한 탓에 강호십대악인에는 들지 못했지만 고상주는 중원 전역에 악명을 떨친 악종이었다.
진소월에게 들은 고상주의 내력을 상기하는 동안 신필주가 말을 이었다.
“너는 다만 나와 계약을 맺고 때때로 내가 부탁하는 일을 수행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방금 말한 모든 혜택을 안겨주마. 내가 이런 후한 조건을 제시하는 것은 너를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마웅. 그러지 않았다면 노구를 이끌고 이 먼 곳까지 오지도 않았을 게다. 어떠냐? 내 제안에 응하겠느냐?”
나는 묵묵부답했다. 신필주가 설득의 방향을 바꿨다.
“네 사부의 일은 유감이다. 그가 네게 어떤 말을 했을지는 모르나 사실 네 사부와 나는 나쁜 관계가 아니었다. 그러기는커녕 서로 끔찍이 아끼고 위하는 사이였다. 당시 여러 가지 악재가 발생해 곤경에 처한 나를 돕겠다며 그가 용병대에 지원하겠다고 했을 때 적극적으로 만류하지 못한 것을 아직도 후회하고 있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아무리 어려운 형편이었대도 그를 보내지 않았을 게다. 물론 내가 그랬어도 네 사부는…….”
나는 신필주의 장광설을 끊었다.
“어이, 늙은이. 하나 물어보자. 내가 거래를 받아들인다 치자고. 근데 나를 믿나?”
내 호칭과 말투에 개의치 않고 신필주가 파안대소했다.
“크하하핫, 얼뜨기였던 네 사부와는 달리 말이 통하는 종자로다. 그렇다, 아이야. 그게 가장 중요한 점이지. 물론 나는 너를 믿지 않는다. 언짢아하지는 마라. 나는 천하의 모든 사람을, 심지어는 나 자신조차도 믿지 않는 의심쟁이니까. 하여 나는 안전장치를 두고자 한다.”
비수를 치운 신필주가 품에서 작은 목갑(木匣)을 꺼냈다. 그 순간을 노려 그에게 옥구슬을 날릴까 했지만 보류했다. 팔방권 초우나 도치 소대성에게 걸릴 확률이 너무 높았다.
“이건 중원육기의 독의(毒醫) 오중이 제조한 신단이다. 엄청나게 비싼 귀물이지. 하지만 제값을 하고도 남는다. 내공을 크게 증진시켜주니까. 물론 약간의 부작용은 있다. 주기적으로 새로운 신단을 복용하지 않으면 간과 콩팥이 녹아내릴 게다. 그렇지만 걱정할 것 없다. 내가 안정적으로 제공할 테니까.”
신필주가 소대성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여기 도치가 내 말이 사실임을 보장해 줄, 아! 도치가 누군지는 알 테지?”
소대성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나는 그가 도박에 빠져있으면서도 무력이 상승한 비결이 뭔지 알 것 같았다. 그에 관한 불가사의 하나가 풀린 셈이었다.
“어떠냐? 지금 이 자리에서 신단을 먹고 나와 계약을 맺는 게. 그리 되면 너는 다시는 나를 볼 일이 없을 게다. 내 부탁은 다른 이를 통해 전달할 테니까. 자주 부르지는 않을 것을 약속하마. 너는 평소엔 천상의 쾌락을 만끽하면 된다. 자, 이제 결정하려무나. 현명한 선택을 하리라 믿는다. 너도 살고 이 어여쁜 아이도 살릴 선택 말이다.”
신필주가 떠드는 동안 계속 빈틈을 노렸지만 끝내 암습을 결행하지 못했다. 그의 좌우를 막고 선 소대성과 초우 때문이었다. 원력의 최대치를 끌어올리더라도 진소월에게 영향을 주지 않고 그들과 신필주를 동시에 날려버리는 건 불가능했다.
나는 문득 검왕을 떠올렸다. 그라면 어땠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쉽게 나왔다. 검왕은 그러고자 마음먹은 순간 거리와 무관하게 저들을 절명시킬 수 있었을 터였다. 진심으로 부러웠다. 어서 그러한 무위에 도달하고 싶었다. 반드시 해낼 작심이었다.
하지만 우선은 목전의 사태부터 해결해야 했다. 나는 신필주의 제안을 검토했다. 솔직히 귀가 솔깃했다. 내게 그의 뒤통수를 칠 수단이 있기 때문이었다.
신단은 독단일 터였다.
그러나 어떤 성분으로 되어있든 내게는 별 효과가 없을 것이었다. 어머니는 천지간에 가장 맹렬하다는 심해청사(深海靑蛇)의 독도 나를 어쩌지 못할 거라 호언장담했다.
일단 신단을 복용해 신필주를 안심시켜 놓고 나중에 기회를 보아 처치하는 게 상책이었다. 그러면 진소월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 방안을 택하지 않기로 했다.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를 독단의 부작용을 우려해서가 아니었다. 신필주에게 한시라도 만족감을 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에게 끌려가고 싶지 않아서였다. 내 방식대로 처리하고 싶어서였다.
진소월의 운명은 하늘에 맡길 참이었다. 그녀를 살릴 수 있으리라 여겼지만 최악의 경우도 각오했다. 불상사가 발생하면 그녀의 원혼에 사죄할 참이었다.
방침을 정한 나는 입을 열었다.
“잘 들어, 늙은이. 한 번만 말할 테니까. 나는 그녀를 구하러 여기 온 게 아냐. 늙은이를 죽이러 왔지. 하지만 그녀를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러면 지옥의 고통을 맛보게 될 테니까. 대신 그녀를 놓아주면 고통 없이 염왕에게 보내주지.”
신필주의 안면에 경련이 일었다. 나는 말을 이었다.
“거기 너희들. 지금 물러서면 살려준다. 하지만 나를 막으면 머리통들을 부숴버릴 테다.”
사인(四人)의 무인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공유했다. 다만 소대성의 눈엔 흥미롭다는 빛이 감돌았다.
철봉과 옥소를 십자(十字)로 엇갈린 나는 돌진할 채비를 했다. 미리 최대치에 육박하는 원력을 끌어올려두었기에 극상의 섬을 발하면 단숨에 적진에 이를 수 있을 터였다. 나는 신필주의 목을 최우선적으로 날릴 작정이었다. 그를 곱게 보내는 건 심히 아쉬웠지만 그에게 진소월의 목에 비수를 들이댈 시간을 허용할 수는 없었다.
다행히 내 광오한 선언에 적들이 동요해 준 덕분에 나는 반 호흡을 빼앗았다. 이로써 성공 가능성은 절반에서 칠팔 할로 상승했다.
하지만 나는 기껏 얻은 절호의 기회를 활용하지 못했다. 섬을 발하려는 찰나 뜻밖의 기변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쾅!
굉음과 함께 내 뒤쪽의 철문이 박살이 났다. 그리고 양손에 강기를 두른 괴인이 대전으로 뛰어들었다.
“괜찮은가, 은공?”
질문과 함께 나에게로 날아온 이는 광객이었다. 나는 쓴웃음이 났다. 하필이면 지금. 좀 더 빨리 오거나 아니면 아예 늦게 올 것이지.
광객이 이곳에 나타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나는 주원(周原) 해우정(解憂亭)에서 내 연락을 기다리기로 한 그에게 강태수를 보냈다. 신필주가 현가의 강호들을 대거 동원했을 경우를 대비한 조치였다. 중립지대인 신창으로 나를 부른 것으로 보아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했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진즉 신창에 당도하고도 대흥관에 들지 않고 미적거린 것은 내상을 다스리는 한편 광객의 도래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시가 되도록 그가 오지 않아 의아했다. 강태수가 제대로 전했다면 광객은 아무리 늦어도 해시 경에는 신창에 도착했을 터였다.
시한에 임박해 대흥관 대전에 든 다음에는 그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난 것이었다. 한 자 두께의 철문을 깨고.
광객이 복날의 개처럼 헐떡거렸다.
“늦어서 미안하네, 은공. 길눈이 어두워서 오다가 좀 헤맸다네.”
광객의 호칭이 ‘젊은이’에서 ‘은공’으로 바뀐 것은 헤어지던 날 주막에서였다. 그때는 술에 취해 나를 그렇게 부르는 거라 생각했는데 주정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턱까지 차오른 숨을 고른 광객이 신필주 일당이 선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고는 내게 물었다.
“저놈들을 때려잡으면 되는가, 은공?”
신필주를 비롯한 적들의 낯빛이 사색이 되었다. 채화창 고상주처럼 광객은 길을 지나다 마주치면 그가 광객인지 알아보기 힘든 인물이었다. 학창의를 입고 문사건을 쓴 중년인은 거지만큼이나 흔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용모를 가진 이가 선연한 수강(手剛)을 둘렀을 때는 한 사람밖에 떠올릴 수 없었다. 십대악인에 속하지 않음에도 독의 오숭과 더불어 강호 제일의 기피인물로 통하는 광인이었다.
적들은 저항을 단념하는 기색이었다. 광객의 위명에 압도당한 탓이었다. 기실 그들 넷이 한꺼번에 덤벼도 광객에겐 조족지혈에 불과했다. 그들이 약해서가 아니라 광객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었다.
“저 자인가, 은공? 학림수호령을 기만하고 사지로 몰아놓은 악적이?”
광객의 시선을 받은 신필주가 부들부들 떨었다.
“오, 오해십니다, 광객. 소, 소인은 오히려 그를 보호하기 위해…….”
광객의 호통이 신필주의 변명을 뭉개버렸다.
“닥쳐라, 악적. 내 은공이 거짓말을 했을 리가 없다. 감히 학사에게 위해를 가했으니 너와 네 동패는 응당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주름으로 덮인 신필주의 노안에 원초적인 공포가 여과 없이 드러났다. 나는 그의 절망감을 이해했다. 보성 현가를 들먹이며 위기를 모면하고 싶어도 광객은 그런 류의 협박이 통할 부류가 아니었다. 오히려 역효과만 초래할 터였다.
신필주는 엉뚱하게도 나를 구명줄로 삼았다.
“나를 살려주게. 그 보답으로 억만금을 줌세. 그리고 자네도 알겠지만 나에겐 여식이 있다네. 그 아이의 부군이 누군지 알리라 믿네. 내 신변에 이상이 발생하면 사위는 결코 묵과하지 않을 걸세. 내가 막아줌세. 약속하네. 그리고 오늘 부로 강호에서 은퇴해 염왕이 부르는 날까지 자네 사부에게 속죄하며 살겠네. 제발, 제발 나를 살려주게나. 자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바침세.”
신필주가 필사적으로 구명을 청하는 동안 나는 그에게 걸어갔다. 광객이 내 뒤를 따랐다.
내 태도에서 타협의 여지가 없음을 깨달았는지 신필주가 최후의 발악을 했다. 비수를 꺼내든 것이었다. 그가 진소월을 마지막 생명 끈으로 잡으리라 예상했기에 나는 그의 손이 올라가기 전에 옥구슬을 날리려 했다. 그러나 나보다 채화창 고상주가 한 발 빨랐다.
번개 같은 손놀림으로 신필주의 마혈을 찍은 고상주가 소리쳤다.
“저는 이 추악한 노물에게 속아 여기에 왔을 뿐입니다. 저는 이 일과 아무 상관이 없으니 허락하신다면…….”
고상주는 말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섬을 발하며 내가 쏘아낸 뇌전이 그의 안면을 쪼개버렸기 때문이었다.
내 기습에 대경실색한 삼인이 흩어졌다. 나는 그들을 쫓지 않고 진소월을 확보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며 광객에게 요청했다.
“저자를 잡아주십시오, 어르신.”
광객은 지체 없이 내가 지목한 팔방권 초우에게 날아갔다. 비수를 쥔 채로 뻣뻣하게 굳은 신필주를 일별한 나는 진소월의 혈도를 풀어주며 재회인사를 했다.
“내가 왔소, 진 소저.”
진소월의 봉목에서 이유를 짐작하기 어려운 옥루가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