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28
제27화 묵은 약속을 지킬 때가 되었다는 소리요
우리는 마차에 올랐다.
대흥관의 일꾼들을 부려 신필주의 시신을 넣은 관을 마차 뒤에 실은 진청운이 마부석에 앉았다. 한쪽 손이 불편한 그가 마차를 몬다고 하자 광객이 의아해했다. 그러나 잠시 후 그의 능숙한 솜씨를 확인하고는 납득한 표정을 지었다.
기실 광객은 진청운에게 주의를 기울일 여력이 없었다. 그는 검황자와의 비무 결과를 들은 후 피 냄새를 맡은 흡혈박쥐처럼 흥분해서는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나는 그가 괴선 못지않게 말이 많은 사람임을 처음 알았다.
광객은 또한 내가 검왕을 만났음을 알고는 큰 관심을 보였다. 그는 십왕 중 누구하고도 대면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더니 내가 검왕에 대한 감상을 솔직히 털어놓자 급격히 시무룩해졌다.
이상하게도 그 반응에 마음이 놓였다. 광객은 오대세가와의 충돌도 꺼리지 않는 용자였다. 그러나 십왕은 차원이 다른 존재들이었다. 그들에게도 몸을 사리지 않고 맞서려든다면 말로가 불 보듯 훤했다.
강자에게 강한 기질은 듣기엔 멋져 보이지만 개죽음으로 가는 첩경이었다. 생존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는 전장에서 반생을 보낸 아버지는 그런 부류를 평가절하 했다. 위급지경에 처한 ‘진정한 전우’를 구해야하거나 어쩔 수 없이 옥쇄를 택해야 하는 등의 특별한 상황이 아닌 한 질 게 빤한데 싸우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만용이라며 아버지는 내게도 역불급의 상대와 조우했을 시엔 바짝 엎드리거나 무조건 달아나라고 여러 차례 일렀다.
머리가 커지면서 아버지와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늘어났으나 이 사안에 관한 한 나는 기본적으로 아버지의 가르침에 동의했다. 일단 목숨을 부지해야 후일을 도모할 수 있을 게 아닌가.
하지만 말처럼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가령 검왕과 만났을 때 나는 그 원칙을 적용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내가 철저하게 자세를 낮추며 비굴하게 굴었어도 그에게 나를 해할 의사가 있었다면 무의미한 굴욕이었다. 도주도 불가능했다. 요컨대 내가 잘 대처한다고 위기를 모면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내 생사는 전적으로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괴물의 손에 달려있었다.
다시는 그런 경우에 처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려면 강해져야 했다. 지금보다 훨씬 더. 최대한 빨리.
무슨 일이 있어도 나 자신에게 부과한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대흥관을 나온 지 일다경도 지나지 않아 마차 안이 갑갑하다며 광객이 달리는 도중에 창문을 열고는 밖으로 나갔다. 놀란 진청운이 급히 말들을 멈춰 세웠다. 그러나 경공으로 따라갈 테니 그냥 가라는 광객의 말에 다시 고삐를 잡아당겼다.
두서없이 언설을 쏟아내던 광객이 빠지고 진소월과 둘만 남자 어색하면서도 흡족했다. 서늘한 월광을 받아 뽀얗게 빛나는 그녀의 뺨을 흘깃거리며 나는 반 시진 전부터 목구멍에 걸려있던 말을 토해냈다.
“나 때문에 고초가 많았소, 진 소저.”
진소월의 분홍빛 입술에 특유의 쓴웃음이 걸렸다.
“전 공자 탓이 아니에요. 그러니 괘념치 말아요.”
뭔가 더 위로의 언사를 잇고 싶었지만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한 나는 화제를 돌렸다.
“그들이 어떻게 나올 것 같소?”
미리 생각해 두었던 듯 진소월이 즉답했다.
“아마도 간을 볼 거예요.”
“무슨 말이오?”
“현가는 조만간 전 공자를 보성으로 부를 공산이 커요. 혼자 오라는 조건을 달고서.”
“광객 어르신과 나를 분리하려 들 거란 말이오?”
“그래요. 그리고 전 공자의 대응에 따라서 다음 수순을 결정할 거예요. 만약 전 공자가 그들의 요구대로 홀로 보성을 찾으면…….”
“말을 끊어서 미안하오만, 나는 그럴 생각이 없소.”
“나도 전 공자가 그러지 않기를 바라요.”
“혹시 그들이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고 넘어갈 가능성은 없겠소?”
진소월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부정적인 답변이 나올 거라는 징조였다.
“유감스럽지만 극히 희박해요.”
“어째서 그렇소? 나이답지 않게 정정하다고는 하나 그 늙은이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는 고령이 아니었소? 내가 조금 일찍 염왕에게 보냈다고 현가에 큰 손해를 끼친 건 아닌 것 같소만. 그리고 어찌됐든 그 늙은이는 현가의 혈족이 아니잖소? 그들이 광객 어르신과 척을 지는 위험을 감수하고서까지 나를 징치하려 들 것 같지는 않소만. 전날 광양 성가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오.”
“보통의 경우라면 전 공자의 예상대로 흘러갈 공산이 커요. 하지만 이번 일엔 상궤를 벗어나게 만들 중대한 변수가 있어요.”
“그게 뭐요?”
잠시 뜸을 들인 진소월의 뜻밖의 답을 내놓았다.
“부용 아씨예요.”
마차는 아슬아슬하게 동 트기 직전에 장원에 닿았다.
햇살이 대지에 깔리기 전에 진소월은 서둘러 와옥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휴식과 취침을 위해 지하석실로 내려가자 나도 운공에 들었다. 광객은 내 호위를 자처했다. 그를 온전히 믿었기에 나는 안심하고 내상 치유에 전념할 수 있었다.
운공을 마치고 눈을 뜨자 난데없는 욕설이 내 귀를 때렸다.
“야, 이 썩을 놈아! 어째서 태극검문의 사마귀를 꺾었다는 말을 하지 않은 게냐? 세상 천지에 다 네놈 얘기뿐인데 정작 처음부터 관여한 나만 몰랐잖으냐? 나를 바보로 만들 셈이었더냐?”
나도 욕설로 되갚았다.
“아, 제길. 기껏 운기조식을 취했더니 효과가 다 날아가 버렸네. 그런데 언제 왔소?”
“말 돌리지 마라, 이놈아. 아니, 말이 나온 김에 말해야겠다. 어째서 저치만 부르고 나는 쏙 빼놓았더냐? 사람 차별하는 게냐?”
“노인장은 멀리 있었잖소? 시간이 촉박해…….”
“어디서 새빨간 거짓말을, 이놈이. 누가 모를 줄 알고. 쌍십절 자시면 네놈이 백중을 들러서 나를 모시고 신창으로 가기에 충분한 여유가 있었다. 그런데 그 사내 같은 계집을 보내, 잠깐, 말하다 보니 더 열 받네. 그 계집이 저치에게 가지 않고 나한테 먼저 왔으면…….”
“여기서 주원이 가깝소, 아니면 백중이 가깝소? 가까운 곳부터 들르는 게 당연한 거 아니오?”
“괴변 늘어놓지 마라, 이놈아. 그러니까 애당초 그 계집은 저치에게 보내고 너는 내가 있는 백중으로 왔으면 되는 것 아니냐?”
“나는 검황자와의 비무에서 입은 내상을 다스려야 했소. 백중을 경유해서 시한 내에 신창에 당도하려면 이틀 내내 경공을 전개해야 할 터인데 그 몸으로 어떤 적들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를 험지로 뛰어들 수는 없잖소? 그 정도도 이해를 못 해 주오?”
“…….”
입씨름은 나의 승리였다. 나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해 씩씩거리는 괴선에게 퇴로를 열어주었다.
“그래도 노인장이 와서 든든하오.”
분이 덜 풀렸는지 괴선이 뒤끝을 보였다.
“약은 놈 같으니. 뭔 소린지 안다만, 꿈도 꾸지 마라, 이놈아. 내가 네놈 방패 노릇을 해 줄줄 아느냐? 애당초 첫 단추를 잘못 꿰었으니 네놈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 나를 그 자리에 불렀으면 후환을 염려하지 않았어도 되었을 것을. 어째서 그 늙은이의 목을 부러뜨렸느냐, 이놈아. 사마귀에게 했던 것처럼 팔이나 부러뜨리고 말지. 성질을 부릴 일이 따로 있지…….”
“아, 그쯤 하쇼. 이제 와서 떠들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소? 나와 한편이 되는 게 내키지 않으면…….” “어럽쇼? 이제 배짱으로 나오겠다, 이거냐? 너와 저치 둘만으로 현가의 맹수들을 감당할 수 있을 성싶으냐?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 이놈아.” 나와 괴선의 언쟁을 묵묵히 듣고 있던 광객이 끼어들었다.
“함께 하지 않을 양이면 그냥 가시오, 괴선. 나와 은공 둘이서…….”
“자네는 입 다물고 있게, 태산. 앞뒤 가리지 않고 치받기만 할 줄 알지 도통 머리를 쓸 줄 모르는 자네가 참견해봤자…….”
“나를 모욕하지 마시오.”
“모욕이라니? 이 정도의 고언도 받아들이지 못할 만큼 속이 옹졸해서야 어디…….”
“옹졸하다니? 누가 할 소릴.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시오, 괴선. 진짜 옹졸한 사람이 누군지.”
“자네 지금 나하고 한바탕 하자는 소린가, 태산?”
“못할 것도 없지.”
절로 한숨이 나왔다. 사정을 모르는 이들의 눈엔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보이겠지만 실상은 두 노인 모두 손을 섞을 의사가 없었다. 일단 붙으면 생사결로 치달을 터이기에 그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자중이었다.
말려주기를 바라는 노인들의 노골적인 눈빛을 외면하던 나는 생각을 바꿔 먹었다.
“이번엔 저에게 양보해주시지요, 어르신.”
광객을 보며 얘기했지만 괴선이 내 말을 받았다.
“무슨 소리냐, 이놈?”
나는 괴선에게 눈을 돌렸다.
“묵은 약속을 지킬 때가 되었다는 소리요, 노인장.”
아름다운 노을이 졌다.
와옥 밖으로 나온 나는 한나절이나 운공에 들었었음을 알았다. 그리고 괴선이 강태수를 백중에 떨궈놓고 혼자서 장원을 찾은 것도 비로소 알았다. 괴선과의 경신속도의 차이가 상당했기에 강태수는 밤이 이슥해서야 장원에 당도할 것이었다.
조금 난감했다. 장원 마당은 괴선과 비무를 치르기에 너무 좁았다. 담장 노릇을 하는 주위의 수풀은 괴선의 화염장에 홀라당 타버릴 게 뻔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광객에게 와옥 지하석실에 든 진소월의 경호를 부탁했다. 나와 괴선의 대결을 관전하고픈 욕구를 만면에 드리웠으나 광객은 내가 거듭 청하자 마지못해 수락했다.
장원을 나온 나와 괴선은 주변을 돌아다니며 적당한 장소를 물색했다. 장원에서 서쪽으로 십 리가량 떨어진 곳에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늪지가 있었다. 우리는 늪지 가장자리에서 거리를 벌리고 섰다.
내가 옥소와 철봉을 꺼내들자 괴선이 기형적으로 긴 검지를 까딱거렸다.
“어디 재주를 피워봐라, 이놈아.”
골수에서 끌어올린 원력을 철봉과 옥소에 주입한 나는 괴선에게 달려들었다. 내 접근을 허용하지 않고 괴선이 불벼락을 날렸다.
이차전의 전개는 일차전과 사뭇 달랐다. 서로의 무공과 무력에 대해서 잘 알기에 탐색전을 생략하고 초장부터 쌍방 전력을 쏟아낸 탓이었다.
최대치에 준하는 원력을 동원했지만 나는 공력 면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실은 약간이나마 열세였다. 예상했던 바였다. 최대치라 해도 괴선의 선력(仙力)을 능가하기는 어려울 터였다. 그의 선력의 크기는 이십여 일 전 불귀곡에서 확인한 바가 있었다.
나는 실망하지 않았다. 내 골수에 깃든 어머니의 원력은 성장하는 나무와 같았다. 묘목의 상태는 벗어났지만 거목으로 자라려면 아직 요원했다. 정확한 시점은 알지 못하나 나는 대략 오륙 년쯤 후에 완전한 성장을 이루리라 예견했다. 절곡을 나오면서 오 년을 무림의 패왕에 등극할 기한으로 설정한 이유였다.
나는 궁금했다. 원력이 완성되면 검왕에 필적할 수 있을까. 원력의 증가와 더불어 무학도 한층 정심해진다면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 같았다. 기실 전자보다 후자가 더욱 중요한 과제였다. 무위가 올라갈수록 내공보다는 무학의 깊이가 차이를 결정하기 때문이었다.
먼 훗날의 목표를 떠올리며 찰나지간 한눈을 팔았던 나는 목전의 승부에 집중하기로 했다. 어린아이 같은 언행을 일삼지만 괴선은 무력만큼은 진짜배기였다. 그는 내가 전력에 전력을 다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강자였다. 그렇기에 그를 이기고 싶었다. 벅찬 상대에게 거둔 승리는 나를 진일보시켜 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