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3
제02화 기어이 싸우겠단 말이냐?
비무대 왼편을 바라보며 외쳤다.
“판정을!”
떨떠름한 표정을 여과 없이 드러낸 판정관이 마지못해 내 청에 응했다.
“규칙에 따라 이번 비무는…….”
뒤늦게 상황파악을 한 조우성이 부르짖었다.
“안 됩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승부를 이어가도록 해주십시오, 대인.”
“불가하다.”
판정관이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복룡무관의 장선이라고 했던가. 마음에 들었다. 나는 느긋하게 둘의 대치를 감상했다.
“하지만 대인, 저자는 정정당당한 무공이 아니라 교활한 수법으로 저와 이 대회를 욕보였습니다. 이런 비열한 수작을 방치하면 안평 무림대회의 평판은 바닥을 칠 것입니다.”
“네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규칙은 규칙이다. 너는 두 번 비무대를 이탈했으니 더 이상…….”
“제발 제게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주십시오, 대인. 십 초, 아니 오 초면 충분합니다.”
“하지만 규칙 상…….”
“너무 빡빡하게 굴지 마십시오. 대인께 그 정도의 재량권은 있잖습니까?”
“정녕 네가 나를 무시할 참이더냐?”
조우성이 계속해서 말을 끊고 들어오자 장선의 음성에 노기가 실렸다. 그럼에도 조우성이 반발할 태세이자 누군가 비무대 위로 날아올랐다. 눈두덩에 엄지손톱만한 사마귀를 얹은 노인이었다.
“결례를 범했구려, 장 교두. 이 아이를 대신해 내가 사과하리다.”
장선이 허리를 반으로 접었다.
“저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결정입니다, 노야. 양해 부탁드립니다.”
“알고 있소. 서로 마음에 담아두지 맙시다.”
조우성에게 고개를 돌린 사마귀 노인이 말했다.
“그만 내려가자.”
조우성이 머뭇거렸다.
“하지만 사백님, 소질은…….”
“닥쳐라! 여기서 더 추태를 부릴 양이면…….”
사마귀 노인은 협박을 덧붙이지 않고 말끝을 흐렸다. 그러고는 돌연 강 건너 불구경을 하고 있던 나를 쏘아보았다. 노인의 안광을 접한 순간 나는 전신의 솜털이 곤두섰다. 마치 뾰족한 송곳이 내 안구를 쑤시고 들어온 듯한 느낌이었다.
내 속에서 욕망이 솟구쳤다. 싸우고 싶다. 저이의 검을 받아보고 싶다.
나는 사마귀 노인이 문하제자의 복수전에 나서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노인은 내 기대를 저버렸다.
내게서 시선을 거둔 사마귀 노인이 조우성에게 말했다.
“가자.”
조우성은 감히 사마귀 노인의 명을 거역하지 못하고 살기등등한 눈으로 나를 일별한 후 비무대를 내려갔다.
그들이 떠나자 나는 반대편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 계단을 내려가는 나에게 장선이 공식적인 판정과 일정을 전했다.
“네 승리다. 알고 있겠지만 십육강전은 이틀 후 오시에 속개될 것이다. 늦지 말고 오도록.”
나는 장선에게 포권을 취했다.
“알겠습니다, 대인. 공정한 판정, 감사드립니다.”
장선은 응답을 주지 않고 나를 외면했다. 나는 그의 처지를 이해했다.
규칙을 어길 수 없어서가 아니라 보는 눈들이 많아 하는 수 없이 나의 승리를 선언했을 터이지만 심사가 편할 턱이 없었다. 복룡무관이 어느 정도의 세력을 지녔는지는 모르나 백도방과 더불어 성주 무림 최강을 다툰다고 알려진 태극검문에 비할 바는 아닐 터였다. 오늘의 판정으로 그들과 척을 질 수도 있으니 그로서는 못내 불안할 것이었다.
똥 씹은 표정을 공유하고 있던 군중은 내가 내려가자 길을 터주었다.
나에게 쏟아진 시선들에서 호의는 한줌도 묻어나지 않았다. 나를 ‘대이변의 주인공’이 아니라 조우성의 말마따나 ‘비열한 수법으로 승리를 거머쥔 놈팡이’로 간주한다는 뜻이었다.
아무려나 상관없었다.
안평 무림대회 참가 목표는 명예나 인기의 획득이 아니었다. 사강(四强)에 들면 특별한 하자가 없는 한 정맹 현무단(玄武團)에 특채된다는 전리품에도 관심이 없었다. 나는 단지 아버지의 원을 들어주러 온 김에 내게 절실했던 실전경험을 쌓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것이 십삼 년을 홀로 수련한 절곡을 나온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러나 결과는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조우성을 포함해 내가 손을 섞었던 여섯 무인은 심하게 말하자면 한 주먹은커녕 한 손가락 거리도 되지 않았다. 조우성이 개중 나았으나 군계일학과는 거리가 멀었다. 내 눈에는 그 또한 닭, 아니 병아리에 불과했다.
나는 고민했다. 결승까지 간다고 한들 철봉이나 옥소(玉簫)를 꺼낼 의욕을 일으킬 강자를 만날 성싶지 않았다. 백도방의 차무진이란 자가 조우성보다 일찍 유명세를 떨쳤다고는 하나 도토리 키 재기 수준일 게 뻔했다.
하지만 좀 더 두고 보기로 했다. 혹시 아는가. 나 같은 초천재가 등장할지.
밤이 깊었다.
그러나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 휘영청 밝은 달 덕분에 사물의 식별이 어렵지 않을 정도로 사위가 환했다. 더위도 한 풀 꺾이고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고 있었기에 산보하기에 딱 좋은 날씨였다.
조우성과의 비무를 마치고 신시(申時)까지 이어진 삼십이강전의 다른 시합들을 관전하며 시간을 때우던 나는 해가 진 후 이곳저곳 배회하다가 야음이 내리자 안평 외곽으로 나갔다. 종일 굶은 탓에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을 지경이었다. 저잣거리의 온갖 냄새가 나를 유혹했으나 수중에 땡전 한 푼 없는지라 객잔에서의 요기는 불가능했다. 허기를 면하려면 토끼라도 잡아야 했다.
배를 채운 연후엔 안평으로 돌아가지 않고 요 며칠 그랬던 것처럼 야산의 동굴에서 눈을 붙일 심산이었다.
인파로 북적거리는 저자를 벗어나 인적 없는 길에 접어든 나는 익숙한 야산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갈대숲을 막 지났을 때 뒤를 돌아보았다.
높낮이가 다른 세 개의 그림자가 빠른 속도로 나에게 접근해왔다. 삼인은 내 십여 보 앞에 멈춰 섰다. 셋 중 하나는 낯이 익었다. 다름 아닌 조우성이었다. 숨을 고른 조우성이 재회 인사를 했다.
“또 보는구나.”
조우성의 좌우에 선 꺽다리와 땅딸보를 힐끔 쳐다본 나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렇군. 근데 이 야밤에 여긴 웬일인가? 사냥이라도 나온 건가? 나처럼 무일푼도 아닐 텐데.”
“몰라서 묻는 거냐?”
“그럴 리가. 그 정도의 눈치는 있다고. 보아하니 아까의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고 설욕전을 하겠답시고 달려온 모양인데, 아닌가?”
조우성이 발끈했다.
“닥쳐! 누가 패배했단 말이냐? 나는 다만 깜박 규칙을 잊고 잠시 비무대를 이탈했을 뿐이다. 비열하게 애초부터 그 점을 노리고…….”
“어허,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르게 해야지.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거지 처음부터 그럴 의도는 눈곱만큼도 없었다고.”
“그런 놈이 내가 비무대로 돌아오자마자 장 교두에게 판정을 요청했더냐?”
“그러지 않을 이유가 있냐?”
내 반문에 말문이 막힌 조우성이 다짜고짜 검을 뽑았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정말 규칙에 대해 무지하군. 무림 대회의 승패를 둘러 싼 사적 보복은 금지되어 있다는 걸 모르냐?”
그냥 공격을 개시할지 아니면 내 지적에 응수해야 할지를 두고 갈등하는 기색이던 조우성은 후자를 택했다. 정파를 표방하는 태극검문의 후예로서 최소한의 명분은 마련하려는 모양이었다.
“보복이라니? 나는 낮에 못 다한 승부를 마무리 짓자는 네 요구에 따라 재대결에 나섰을 뿐이다. 여기 안성의 두 호걸께서 증인이 되어 줄 것이다.”
조우성의 양쪽에 선 대조적인 신장의 두 사내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비웃음을 흘렸다.
“내 요구? 그런 적 없는데?”
“네 의사는 중요치 않다.”
“내가 거부해도 기어이 싸우겠단 말이냐?”
“당연하지.”
“이거야 원, 완전히 생떼군. 좋아, 정 그렇게 혼쭐이 나고 싶다면 상대해주지. 그 전에 두 가지만 묻자.”
“뭐냐?”
“첫째, 네가 이러는 걸 네 사문의 어른들도 아냐?”
“이만한 일을 알릴 까닭이 무어냐. 이 대결은 순전히 내가 결정한 행사다.”
“그래? 그러면 내가 너를 패주더라도 나중에 딴 소리 안 하는 거지?”
조우성의 안색이 만추의 단풍처럼 빨개졌다.
“절대로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질문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이제…….”
“어이, 서두르지 마. 아직 질문이 하나 남았어.”
“방금 했잖으냐?”
“그건 첫 질문에 딸린 거지.”
의외로 조우성은 상당한 인내심의 소유자였다.
“빨리 해라.”
“거기 그치들 말이다. 정말 증인으로 데려온 거냐? 아무리 봐도 다시 나한테 깨질 경우에 대비해 네 방수 노릇을 하라고…….”
조우성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나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본의 아니게 그와 이차전을 치러야했다.
비록 내게 농락을 당했지만 조우성은 바보가 아니었다.
극도로 흥분한 상태이면서도 자세에 빈틈이 없었다. 나를 경시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하긴 한 번은 몰라도 두 번이나 비무대 밖으로 쫓겨난 걸 우연으로 치부하기는 어려웠을 터였다.
하지만 조우성의 눈빛은 자기가 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달팽이 뿔만큼도 없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방심만 하지 않으면 승리는 자기 몫이리라는 확신이 확연했다.
나는 어느 정도 선에서 교훈을 내릴지를 정해야했다. 기실 그건 내가 아니라 조우성에게 달려있었다. 만약 그가 나를 죽이려 들면 용서하기 어려웠다. 아버지는 정파의 인사들을 동지로 여기라고 당부했지만 다행스럽게도 ‘가급적’이라는 단서를 붙였다. 그런 융통성이 없었더라면 내 운신의 폭이 크게 제한되었을 것이었다.
나는 조우성이 지척에 이르도록 내버려두었다.
선연한 검기를 머금은 그의 검이 앞으로 내민 내 왼손에 떨어졌다. 손목을 베겠다는 수작이었다.
회(回)로써 검을 흘린 나는 엄지에 걸어두었던 중지를 튕겼다. 내 꿀밤에 이마를 강타당한 조우성이 외마디 비명과 함께 고꾸라졌다.
그의 손목을 비틀어 영구적인 불구로 만들지 않은 것은 자비심의 발로가 아니었다. 나는 솔직히 조우성이 밉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귀여운 구석이 있는 친구였다. 나는 이 귀여운 친구가 나중에라도 자신이 얼마나 운이 좋았는지를 깨닫고 내게 감사하기를 바랐다. 그러면 악연이 선연으로 변할 수도 있지 않을까. 뭐, 아님 말고.
조우성이 정신을 잃고 쓰러지자 그와 동행했던 땅딸보와 꺽다리가 후다닥 각자의 병장기를 꺼내들었다. 전자는 도끼였고 후자는 낫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를 공격하지 못했다. 조우성을 일격에 눕힌 내 무력을 경계해서가 아니라 후방에서 날아든 호통 때문이었다.
“멈춰라!”
갈대가 갈라지더니 몇 개의 인영이 튀어나왔다. 모두 다섯이었고 다들 허리춤에 칼을 차고 있었다. 그들의 면면을 살핀 땅딸보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귀하들이 여기엔 어인 일이오?”
도객들 중 하얀 두건을 쓴 자가 응답했다.
“알 것 없다. 썩 꺼져라.”
꺽다리와 땅딸보의 눈두덩에 경련이 일었다.
나는 흥미로운 눈으로 둘의 대응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어린 시절 전장에서 지긋지긋하게 보았던 해귀(海鬼)들과 흡사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독종이란 뜻이었다. 해귀들은 중과부적 따윈 전혀 개의치 않는 족속이었다.
과연 해귀들을 연상케 하는 조우성의 방수들은 그들 같은 광기와 기개를 보여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