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30
제29화 무슨 수작이지
저녁손님들로 붐벼야 할 술시(戌時)였지만 백 명도 넘게 수용할 법한 너른 객잔엔 우리 일행밖에 없었다. 나와 괴선, 그리고 광객이었다.
객잔이 이렇게 텅 빈 건 일차적으로는 나 때문이었다. 일다경 전 노인들과 내가 객잔에 들어서자 내 덩치를 보고 나를 힐끗거리던 이들 중 몇몇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나를 알아보았다는 방증이었다.
은밀한 소요가 본격적인 소란으로 전환된 건 누군가 괴선의 검지를 보고는 부주의하게 소리를 지른 탓이었다.
“괴, 괴, 괴선이다!”
또 다른 얼뜨기가 그의 말을 받았다.
“그렇다면 저이는 과, 과, 광객…….”
순식간에 객잔은 공포의 도가니로 화했다. 광객은 일반 민중에겐 재해와 같은 존재로 인식되어 있었다. 그에 관해 강호에 퍼진 소문 중에 실제와 다른 내용이 많아서였다. 단순히 부풀린 정도를 넘어 악의적으로 왜곡되거나 아예 조작된 수준의 괴담도 적지 않았다. 그러므로 객잔 안의 손님들이 무림의 특급명사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영광을 마다하고 도망치듯 객잔을 빠져나간 것은 당연지사였다.
자기 터전이기에 손님들이나 점소이들, 그리고 숙수들처럼 달아날 수 없었던 객잔 주인은 사색이 되었다. 나는 내 딴에는 부드러운 말로 그를 달랬다.
“우리 때문에 그냥 나간 손님들의 식대는 내가 보상해주겠소.”
괴선이 당장 토를 달았다.
“왜 나까지 끌어들여, 이놈아? 너하고 저치가 쫓아낸 걸 두고.”
나는 괴선을 상대하지 않고 주인을 보며 말을 이었다.
“술을 내주시오. 종류는 상관없소. 안주도 필요 없고. 여러 걸음 할 것 없이 동이 째 내오시구려.”
내 정중한 언사에 안심이 되었는지 경직이 풀린 주인이 허리를 접은 자세 그대로 뒷걸음질 치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내 주문이 마음에 든 괴선은 방금 전 그를 무시한 내 처사를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
“잘했다, 이놈아. 오늘은 정말로 코가 삐뚤어질 때까지 마셔보자꾸나. 술 맛 떨어지게 저번처럼 빼지 말거라.”
광객도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덕분에 잘 마시겠네, 은공.”
아무튼 이런 전개를 거쳐 우리는 대형객잔을 독점하고서 술판을 벌이게 된 것이었다.
나로 하여금 두 노인을 꼬드겨 전원으로 향하게 한 이는 진소월이었다.
그녀는 괴선의 가세로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진단했다. 보성 현가가 나를 직접적으로 압박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괴선의 비중은 어지간한 거대문파 전체와 맞먹었다. 거기에 광객이 더해지면 아무리 현가라도 대응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요컨대 그들은 이십이 년 전 광양 성가의 도호(刀豪)들이 고양호변에서 맞닥뜨렸던 것과 똑같은 난제에 직면한 것이었다.
거기에 두 기인과 비등한 내 무력을 더하면 현가가 정면 대결을 택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고 진소월은 단언했다. 다만 그녀는 나의 진정한 무위에 관한 정보는 비장의 패로 아껴두자고 제안했다. 너무 일찍 공개하면 현가와 무관하게 내 행보에 지장을 초래할 공산이 크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녀는 덩어리가 커지면 먹이로 노리는 무리와 꼬이는 파리 떼도 많아지는 법이라고 했다. 근사한 비유였지만 ‘덩어리’란 표현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화기애애하게 음주를 즐기던 괴선과 광객은 내가 예상했던 시점에서 어김없이 싸우기 시작했다.
발단은 역시 거나하게 취한 광객의 연시(戀詩) 낭송이었다. 전날 불귀곡에서 내려오다 들렀던 산자락 주막에서 읊었던 것과 동일한 시였다. 역시나 그때처럼 괴선이 추태 운운하며 면박을 주었다.
그에 그치지 않고 괴선은 광객의 조문을 건드렸다.
“글자라고는 일(一), 이(二), 삼(三)밖에 못 읽는 자네가 학자연하는 게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줄 아는가, 태산? 그렇게 충고를 해도 쇠귀에 경 읽기니 이거야 원…….”
쾅!
벌떡 일어선 광객이 식탁을 내리쳤다. 식탁이 박살나며 술들도 떨어지는 바람에 바닥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주둥이를 뭉개버릴 테다, 늙은이.”
광객의 목소리에서 취기가 사라졌다. 내공으로 주독을 날려버렸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의 면상은 여전히 시뻘겠다. 술기운이 아니라 분노 때문이었다.
취선도 열이 받았다.
“왜 술상을 깨고 지랄이야. 그리고 누구더러 늙은이래, 이 무식쟁이가.”
더 참지 못하고 광객이 주먹을 날리려는 찰나 내가 가까스로 그의 팔을 잡았다.
“이거 놓게나, 은공.”
나는 안도했다. 분기탱천한 상태에서도 광객이 분별력을 유지할 수 있음을 확인해서였다.
“참으십시오, 어르신. 그냥 개가 짖는다고…….”
고백컨대 일부러 괴선을 자극하는 언사를 뱉은 게 아니었다. 그건 일종의 습관이었다.
어젯밤 장원 마당에서 나와 괴선의 입씨름을 지켜보았던 진소월은 뜻밖에도 마치 의좋은 형제가 투닥거리는 것 같았다는 감상을 밝혔다. 이상하게도 그 말에 공감이 갔다.
나는 괴선이 편했다. 그렇기에 ‘예의’라는 체에 거르지 않고 아무 말이나 내키는 대로 쏟아낸 것이었다. 한편 괴선이 나에게 ‘이놈, 저놈’하며 막말을 퍼부어도 거슬리지 않았다. 말하자면 우리의 설공(舌攻)은 물에 던지는 돌멩이와 같았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나는 괴선도 나와 대동소이한 심정이리라 확신했다. 그러나 어쨌든 ‘개’ 운운한 건 내가 봐도 좀 심했다.
괴선이 폭발하기 전에 나는 얼른 사과했다.
“미안하오, 노인장. 말이 헛나왔소.”
내 재빠른 대처는 별 효과가 없었다.
“닥쳐라, 이놈! 개라니? 당장 나가자, 이놈. 오늘은 기필코 네놈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고 말겠다.”
퍼뜩 진소월의 얼굴이 떠올랐다. 고운 눈썹을 한껏 찡그린 얼굴이었다. 두 기인과의 친분을 과시함으로써 현가에게 부담을 안겨주려던 계획이 무산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칫 그들이 오판할 빌미까지 주게 생겼으니 그녀가 그런 표정을 짓는 것도 당연했다.
절로 한숨이 나왔으나 나는 사태를 수습해보기로 했다.
“진정하시지요, 노인장. 순서가 틀리지 않습니까?”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괴선이 덥석 미끼를 물었다.
“무슨 소리냐, 이놈!”
“노인장하고는 어제 했잖소? 오늘은 광객 어르신의 가르침을 받을 차례 같소만.”
괴선과 광객의 표정이 동시에 변했다. 그러더니 잠깐의 침묵을 공유하고는 동시에 입을 열었다.
“이 싸움닭 같은 놈. 오냐, 그렇다면 네놈에게 교훈을 내리는 건 잠시 미뤄두마.”
“기꺼이 자네 봉과 소를 받겠네, 은공.”
이로써 합의가 이루어졌다.
우리는 어제 나와 괴선이 싸움터로 삼았던 늪지로 자리를 옮겼다.
광객과의 비무는 의외로 싱거웠다. 우리 둘 다 상대를 배려하면서 초식을 주고받았기에 좀처럼 뜨거워지지 않았다. 보다 못한 괴선이 소리쳤다.
“뭐하는 게냐, 이놈! 나한테 그랬던 것처럼 죽기 살기로 달려들지 않고. 자네도 그게 뭔가, 태산. 그런 식으로 하면 저놈은 틀림없이 자네를 우습게 여길 걸세.”
괴선의 부추김에도 불구하고 광객은 의욕이 일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와의 거리를 벌린 후 숫제 손을 내린 광객이 말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네, 은공. 자네는 어제 괴선과 치른 격전으로 온전한 상태가 아니지 않은가. 우리의 비무는 자네가 회복된 후에 다시 하는 게 낫겠네.”
다소 아쉬웠지만 나는 광객의 뜻을 수용했다. 나도 이상하게 투지가 올라오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어르신. 다음에 부탁드리겠습니다.”
예상대로 괴선이 심통을 부렸다.
“지금 장난하는 게냐? 술도 남겨두고 이 야밤에 수십 리를 달려왔는데 고작 소꿉놀이만 하다 끝낸다고? 어서 제대로 안 싸워들!”
나는 허리춤에 집어넣었던 철봉과 옥소를 도로 꺼냈다.
“구경이나 할 생각하지 말고 이리 오시구려, 노인장. 어차피 노인장이 다음 순서였으니…….”
“됐다, 이놈아. 에잉, 아까운 술만 버렸네.”
이미 분기가 가라앉았던 괴선은 나와의 대결을 회피했다. 이 또한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바깥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으나 대체로 진소월이 예측한 대로 흘러가는 모양이었다.
진청운이 보낸 전서구에 따르면 내가 신창 대흥관에서 신필주의 목을 꺾어버린 사건이 이미 대륙 전역에 알려졌음에도 현가는 공식적인 반응을 내놓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그 이후 퍼졌던 소문을 의식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광객과 괴선이 마웅과 동패라는 소문 말이다.
진소월은 현가가 어떻게 나올지를 두고 여러 갈래의 수읽기를 보여주었다. 모두 그럴싸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녀의 예리한 분석력과 탁월한 판단력은 빛을 바랬다. 현가에서 상상도 못했던 수를 들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두 노인과 술판을 벌인 날로부터 엿새 후 소월루에서 급전이 날아왔다.
전서구의 다리에 매달린 노란색 첩지를 풀고서 내용을 들여다 본 진소월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곁에 있던 강태수가 휘청거리는 그녀를 붙잡았다.
마침 그녀들과 함께 마당에 나와 있던 내가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렇게 놀랐소, 진 소저? 현가에서 전면전을 선포하기라도 했답디까?”
그것은 현가가 신필주 시해 건을 없던 일로 하고 넘어가기로 결정하리라는 기대만큼이나 현실성이 결여된 추측이라고 진소월이 못 박았던 그림이었다. 나는 그녀의 긴장을 풀어준답시고 일부러 그런 표현을 쓴 것이었다.
진소월은 잠자코 나에게 첩지를 건네주었다. 종이를 펴고 안쪽을 살핀 나는 그녀가 놀란 까닭을 알았다.
“무슨 수작이지?”
질문이 아니라 중얼거림이었지만 진소월이 응답했다.
“나도 모르겠어요.”
혼란한 심경을 담은 그녀의 눈동자가 참으로 매력적이라는 뚱딴지같은 생각을 하며 내가 물었다.
“같이 가겠소?”
진소월이 고개를 저었다.
“전 공자와의 독대를 청한다잖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다녀오겠소.”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했지만 진소월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잠시 그녀를 지켜보던 나는 보름달이 뜬 밤하늘로 비상했다.
나는 둔덕을 올라갔다.
한 달여 전 단천검과 겨룬 후 진소월과 만났던 모옥 앞에는 진청운이 홀로 서있었다. 가뜩이나 창백한 그의 안색이 전에 없이 파리했다.
“어서 오게. 그녀는 안에 있다네.”
기감을 끌어올린 나는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했다. ‘그녀’는 호위무사도 데려오지 않았다는 건가. 아니면 다른 곳에 대기하고 있는 걸까.
진청운이 나를 재촉했다.
“어서 들어가 보게나.”
“같이 안 들어가십니까?”
아버지를 연상시키는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진청운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나는 여기 있겠네.”
그의 뜻이 아니라 ‘그녀’의 명일 터였다. 나는 와옥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귀가 맞지 않아 삐걱대는 문을 여니 호롱불 아래 사람의 형상이 보였다. 방 중앙에 좌정한 면사여인이었다. 그녀가 좁은 방의 한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문 바로 앞에 앉아야했다.
엉덩이를 바닥에 붙인 나는 화사한 금의를 걸친 면사여인을 직시했다. 여인이 섬섬옥수를 들어 이마부터 목덜미 아래까지 가렸던 면사를 벗었다. 그녀의 용모가 드러나자 나는 진소월을 처음 본 순간만큼이나 충격을 받았다.
여인, ‘부용 아씨’는 중년의 미부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딸보다도 어려 보였다. 그녀가 누군지 모르는 상태에서 만났다면 열여덟 살이라고 해도 무조건 믿었을 터였다.
하지만 내가 놀란 건 세월을 거스른 그녀의 절대동안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미모에 서열을 매길 수 없다지만 목전의 여인은 내가 세상에서 제일가는 미녀라고 생각하는 진소월보다 윗길의 미인이었다. 그녀와 나란히 있으면 진소월마저도 평범해 보일 것 같았다. 마치 아버지나 진청운, 혹은 벙어리 아저씨 같은 절세의 미남자들도 천상에서나 존재할 법한 검황자와 비견하면 초라해질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