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39
제38화 생명의 은인으로 받들겠소
“여기서 뭐하는 게냐, 이놈?”
맥이 탁 풀렸다.
하마터면 주화입마에 들 뻔한 나는 간신히 끌어 모은 코딱지만 한 원력을 혀를 놀리는 데 썼다.
“어쩐 일이오, 노인장?”
내 반문에 괴선이 신경질을 냈다.
“내가 먼저 물었잖으냐, 이놈. 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 그 안에 용의 똥이라도 묻혀 있더냐? 냉큼 안 일어나?”
그래도 내가 꿈쩍도 않자 씩씩거리던 괴선이 욕설을 퍼부으리라는 내 예상과는 달리 털썩 주저앉는 기척이 느껴졌다.
“보아하니 네놈도 탈진지경에 이르러 그렇게 자빠져있는 게로구나. 나도 네놈 때문에 죽을 지경이다. 꼬박 하루를 쉼 없이 날았단 말이다. 물경 사천 리를, 이놈아. 내 허파가 찢어졌으면 전부 네놈 탓이다.”
나는 전후과정을 짐작했다. 괴선을 이리로 보낸 이는 진소월일 터였다. 앓는 소리를 하면서도 괴선은 장광설을 쏟아냈다.
“그 아이가 하도 노심초사하기에 혹시나 싶어 나섰더니만 정말로 예까지 왔다니. 제정신이냐, 이놈아. 철마류가 인우당과 같은 줄 아느냐? 내가 딱 맞춰 당도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어쩔 뻔했냐? 필히 네놈은 사람 몸뚱이가 쇳덩이인 줄 아는 그 무식한 작자들에게 걸려 묵사발이 되었을 게다.
설령 어찌어찌 목숨을 부지했다손 쳐도 정맹의 소환령은 어쩌려던 게냐? 내일 미시까지 집법전에 출두하지 않으면 공적으로 몰린다는 거 몰라? 그 고지식한 자들이 네놈 사정을 봐 줄 것 같으냐? 어째 그리 생각이 없어? 주린 멧돼지 마냥 설치다 네놈 뒈지는 거야 내 알 바 아니다만, 왜 아무 잘못도 없는 나를 이리도 생고생을 시킨단 말이냐. 어서 대답 안 해?”
정확히 어떤 질문에 답하라는 건지 되묻고 싶었지만 입을 벌릴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기에 나는 침묵했다.
“그나저나 퍼질러 있으려면 산에서 그러거나 최소한 풀밭에 들어가 있어야 할 게 아니냐? 다리를 다 내놓은 건 뭐하자는 수작이냐? 철마류의 쇳덩이들이 지나가다 보면 어쩌려고? 설마 일부러 그런 게냐? 미친놈인 척 하고 방심을 유도한 후…….”
아직 마비가 풀리기 전이었지만 혀의 감각이 돌아온 나는 목구멍에 걸려있던 말을 입술 밖으로 토해냈다.
“어서 갑시다, 노인장. 마인들이 몰려올 지도 모르오.”
탓. 이상한 소리가 났다. 괴선이 펄쩍 뛰어오른 모양이었다.
“뭐라? 그게 무슨 말이냐, 이놈?”
“쇳덩이들하고 벌써 한바탕 했소. 쫓는 자들은 대충 쫓아냈지만…….”
“그걸 왜 이제야 말해, 이놈아. 어서 가자.”
쉬이익. 괴선이 멀어지는 소리였다. 다시 쉬이익. 괴선이 내게로 돌아오는 소리였다.
“뭐하는 게냐, 이놈. 퍼뜩 안 일어나?”
“왜 그러쇼? 다 알면서.”
“뭘 알아?”
“움직일 수 있으면 내가 이러고 있겠소?”
“그럼 어쩌자는 게냐?”
“신세 좀 집시다.”
“이 썩을 놈이…….”
빠드득. 괴선이 이를 가는 소리였다.
연신 욕설을 퍼부으면서도 괴선은 풀밭에서 나를 끌어냈다. 그러고는 나를 그의 왜소한 어깨에 들춰 메고 고륜산맥을 향해 경신을 전개했다. 내가 그보다 월등히 컸기에 그가 착지할 때마다 내 이마와 발끝이 땅에 부딪쳤다. 나는 소리를 질렀다.
“아 좀! 안아들고 달려주쇼.”
“시끄럽다, 이놈. 싫으면 네놈 발로 뛰던가.”
“제길, 두고 봅시다.”
“뭘 두고 봐, 이놈아. 자꾸 투덜대면 버리고 가는 수가 있어.”
나는 입을 다물었다. 철마가 수하들을 이끌고 돌아올 것을 염려해서가 아니었다. 그럴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많아야 일 푼 정도일 터였다.
내가 수그러든 건 괴선의 비위를 맞출 필요성 때문이었다.
내 신법은 내공의 소모가 적지만 나는 원력이 회복되더라도 경공을 전개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철마와의 짧은 격전은 내상 말고도 예기치 않았던 부상을 남겼다. 양팔만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왼다리의 뼈에도 문제가 생겼다. 골절은 아니었지만 조금만 충격을 가해도 부러질 게 틀림없었다.
정맹이 있는 원중까지는 삼천리 장도였다. 무리하면 시간 안에 못 갈 것도 없지만 그랬다가 탈이라도 나면 곤란했다. 심할 경우엔 무릎에 영구적인 손상을 입을 지도 몰랐다.
그러니 현재로선 괴선의 도움에 기댈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가 심술을 부리면 난감해질 터였다.
내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신없이 내달리던 괴선이 산에 들고 중턱에 오르기도 전에 나를 쓸모없는 짐짝인 양 거칠게 내팽개쳤다.
“뭐하는 짓이오?”
“몰라서 물어, 이놈아? 저길 봐라. 쇳덩이들은 고사하고 쇳가루도 없지 않으냐?”
나는 누운 채 고개를 돌려 들판을 내려다보았다. 늦가을의 햇빛을 받은 벌판이 거대한 소가죽을 펴놓은 듯 누런 자태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자들하고 한바탕 했다는 거, 새빨간 거짓말이지, 이놈?”
“빌어먹을, 나를 뭐로 보고. 노인장이 오기 일각 전까지 철마와 생사투를 치르고 있었소. 혹시 산에서 다 보고 있다가 상황이 마무리 된 다음 내려온 거 아뇨?”
“이놈 보게. 어디서 되도 않는 흰 소리야. 근데 정말 철마하고 싸웠더냐?”
“아, 그렇다니까요. 그래서 내 몸이 마비된 거 아뇨.”
“당연히 이겼겠지? 하긴 그러니 그 작자가 네놈을 내버려두고 제 소굴로 돌아갔겠지. 헌데 어째서 혼자 쫓아왔다더냐? 소굴에 나름 쓸 만한 놈들이 여럿 있었을 텐데.”
나는 괴선이 진소월과 마찬가지로 철마의 진신무력을 제대로 알지 못함을 알았다. 철마에 관해 설명하려던 나는 심중에 있던 의문점을 먼저 꺼내놓았다.
“대체 왜 그들을 무서워하는 거요?”
괴선이 움찔했다. 정곡을 찔렀다는 뜻이었다. 마인들이 쫓아온다는 말에 황급히 달아난 괴선의 행태는 이해난망이었다. 그의 무력이면 그렇게 두려워 할 까닭이 없었다.
“뭔 개소리냐, 이놈. 누가 누굴 무서워해?”
“시치미 떼지 말고 솔직히 말해보쇼, 노인장. 혹시 전에 철마하고 붙었다가 깨진 적이 있소?”
당연히 부인할 거라고 예상했던 괴선이 우물쭈물했다. “노인장을 이해하오. 나도 죽다 살아났소. 정말 괴물입디다.”
“넘겨짚지 마라, 이놈아. 그런 적 없다. 근데 그자가 너보다 강했단 말이더냐? 그럴 리가 없는데.”
“근데 왜 꼬랑지에 불이 붙은 쥐 마냥 정신없이 도망친 거요?”
“철마의 무위는 팔마 중 최하위로 알려져 있다. 혈마나 도마라면 모를까 그 쇳덩이는 네 상대가 아닐 텐데?”
각자 자기 얘기만 하고 있던 우리는 입을 다물고 서로를 노려보았다. 괴선보다 너그럽고 예의도 바른 내가 양보했다.
“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소. 하지만 전혀 아니었소. 그 괴물이 초장에 방심하지 않았다면 나는 살아남지 못했을 거요. 확언컨대 철마는 노인장이나 나보다 한 수는 위였소. 정식으로 대결했다면 필패를 면치 못했을 차이였소. 내가 목숨을 부지한 건 실전에서 강미를 발하는 내 천부적인 자질과 얼마간의 행운 덕분이었소.”
괴선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제 그가 내 질문에 대답할 차례였지만 나는 그를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괴선이 전에 없이 진중한 기색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인내심이 바닥나려는 찰나 괴선이 입을 열었다.
“나는 마인들과 싸울 수 없다.”
“어째서요?”
“그들이 내게 천적이기 때문이다.”
“……?”
“이건 비밀이니 너만 알아두고 다른 이들에겐 말하지 말거라. 원래는 정반대였다. 무림사의 초창기에 무선(武仙)들은 마인들에게 저승사자로 통했다. 걸리는 족족 염왕전에 처넣었으니까.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팔백오십 년 전 초마지경(超魔之境)에 이른 마존(魔尊)이 등장한 다음부터였다. 현재의 기준으로 보면 기껏해야 초절정의 중(中) 정도에 불과하나 당시로선 천외천의 절대고수로 통했더랬다. 무선들은 강기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마존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무선들은 결국 마존을 극복하지 못했다. 마존은 물론이고 그자의 졸개들도 피해 다니기 시작했지. 그리고 수백 년이 흐르는 동안 그것은 일종의 전통이 되었다. 그러더니 어느 날부터인가 무선들은 마존 급에 한참 못 미치는 마인들에게도 맥을 추지 못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일정 수준 이상의 마기를 접하면 선력이 오그라든 게다.
내 자랑은 아니다만 나는 지난 천 년 간 나온 무선들 중 최강으로 꼽힌다. 하지만 고작 절정 상(上) 정도의 무력을 가진 마인에게도 오금을 펴지 못한다. 강호에 나오기 전에 마련의 영토에 잠입해 철마류의 마인들에게 확인한 사실이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탐색만 했는데도 사지가 제멋대로 떨리고 오한이 일더구나. 그러다 들켜서 하마터면 골로 갈 뻔했다. 추격한 자들이 초절정의 마두 급이었다면 그날 나는 경을 치렀을 게다.”
“……!”
나는 비로소 괴선의 행적에서 납득이 가지 않았던 부분을 이해했다.
‘강호 최고의 오지랖장이’이자 ‘천하제일의 방랑객’이라는 별명답게 괴선은 중립지대와 정맹은 물론이고 사파의 영역에도 제 집 안방처럼 드나들며 별의별 일에 참견하고 갖가지 소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마련의 경계선 근처로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이를 두고 여러 말이 나왔지만 그가 금계(禁戒)를 어길까봐 저어해서 그런 거라는 추측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온갖 말썽에 휘말렸으나 괴선은 이십여 년에 걸친 강호 행에서 단 한 번도 살인을 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했다. 기본적으로 선한 성품을 지닌 그이지만 악을 본성으로 하는 마인들을 만나면 불살의 원칙을 깰 우려가 상당했다. 괴선으로서는 아예 그런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거리를 두는 게 상책이었으리라. 그것이 그 건에 관해 세인들이 일반적으로 가진 인식이었다.
나는 괴선을 ‘반쪽짜리’라고 놀리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마음에서 우러나는 감사인사를 했다.
“고맙소, 노인장. 사정이 그러한데도 나를 구하기 위해 여기까지 달려왔구려.”
별안간 괴선이 화를 냈다.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랬겠느냐, 이놈. 아까도 말했듯 그 어여쁜 아이가 하도 네놈 걱정을 하길래 어쩔 수 없이 나선 게다. 사천 리를 오는 동안 폐만 찢어진 게 아니라 간도 졸아들었다. 내가 겁쟁이라서가 아니다. 아무리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저절로 그리 되니 나로서도 미칠 지경이다.”
나는 궁금한 점을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어째서 광객 어르신에게 떠넘기지 않았소? 하다못해 그 어른과 함께 왔다면…….”
“시일이 너무 촉박해 나와 그치 중 한 명은 그 아이의 안배를 수행해야 했다. 내가 그 일을 맡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그 무식쟁이가 세연과 이곳까지의 지리를 모른다니 방법이 없지 않으냐? 쓸모없는 위인 같으니.”
솔직히 털어놓고 임무를 바꾸었으면 되지 않았느냐고 말하지 않기를 잘했다.
“어쨌든 용기를 내줘서 고맙소. 덕분에 살았소.”
상황이 종료된 뒤에 당도했으니 괴선에게 구명지은을 입은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렇게 간주하기로 했다. 중요한 건 결과가 아니라 동기였다. 괴선은 간이 졸아드는 본능적인 공포에도 불구하고 전력을 다해 고륜산맥까지 날아왔을 터였다. 그의 경신속도와 거리를 감안하면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려왔다는 말이 과장만은 아닐 것이었다.
“흥, 됐다, 이놈아.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해라.”
“거짓말이 아니오. 오늘 부로 노인장을 생명의 은인으로 받들겠소.”
“정말이냐?”
“물론이오.”
“뭐, 꼭 그렇다면 마다하지는 않으마.”
“그런데 좀 서둘러야 할 것 같소만.”
“뭐를? 저 벌판 끝까지 쇳덩이들은 그림자도 안 보이는데.”
“정맹 말이오. 출두 시한이 하루밖에 안 남았잖소? 노인장 말마따나 그 고지식한 이들이 사마의 악종들을 처단하느라 늦은 사정을 헤아려줄 성싶지 않소만.”
말귀를 알아들은 괴선이 백미를 일그러뜨렸다.
“그래서? 나더러 곰보다 무거운 네놈을 들춰 업고 사천 리를 가란 말이냐? 하루 만에?”
“삼천팔백 리요.”
“이놈이!”
“부탁하오, 노인장. 겉보기와는 달리 속은 엉망진창이오. 뼈도 상했고.”
“그러기에 왜 이런 무모한 짓거리를 했어? 손해를 보는 정도를 넘어 밑천이 탈탈 털릴 뻔했잖으냐? 네놈 목숨 말이다.”
틀린 비유였다.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담보로 걸긴 했으나 결과적으로 나로서는 엄청나게 남는 장사였다. 하지만 나는 괴선의 말에 토를 달지 않고 그저 히죽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