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40
제39화 내가 누군지 알아?
괴선은 복날 자기를 잡으려드는 손길을 피해 동구 밖까지 달아난 개처럼 할딱거렸다.
미안한 마음이 없지 않았으나 나는 그의 고통을 외면하고 회복에 전념했다. 경신을 해도 몸에 이상이 생기지 않을 정도가 되려면 두어 시진은 더 참아야 했다.
그나마 골절이 완치되는 데 수 개월은 걸리는 범인들과 달리 나는 반나절이면 뼈가 붙고 아물었다. 강골로 태어난 덕분이 아니라 원력의 공능이었다.
준마보다 빠르게 벌판을 질주하고 새처럼 산하를 건너는 괴선과 역방향으로 해는 굼벵이와 경쟁이라도 하는 양 느릿느릿 천공을 기어갔다. 그럼에도 어느새 서산에 이르더니 장엄한 노을을 하늘에 남기고는 그날의 종주를 마쳤다.
대지에 어둠이 깔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덩치가 세 배는 더 큰 나를 들춰 멘 괴선은 번화한 시진에 이르렀다. 전각들을 징검다리 삼아 껑충껑충 건너뛰던 괴선이 편평한 목조건물의 지붕으로 낙하했다. 착지하기도 전에 나를 던져버린 괴선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더는 때려죽어도 못 간다, 이놈아. 무조건 한식경은 쉬어야겠다.”
“고생하셨소, 노인장. 이제부터는 내 발로 가리다.”
“뭐? 벌써 다 나았더냐?”
“그렇진 않소만 그럭저럭 달릴 수는 있을 것 같소.”
“너 혹시 진즉 괜찮아지고도 나를 부려먹은 거 아니냐?”
“그럴 리가 있겠소?”
괴선이 못 믿겠다는 듯 나를 쏘아보았다. 나는 그가 더 따지지 못하도록 선수를 쳤다.
“그걸 따질 여력이 있거든 바로 출발합시다.”
“싫다, 이놈아. 한식경은 쉬어야한다지 않았더냐? 아니, 이왕 멈춘 김에 충분히 운기조식 해야겠다.”
“그러시구려.”
나는 반대하지 않았다. 시간은 넉넉했다. 행여나 도중에 불의의 사고라도 날까봐 조바심이 난 괴선이 좌고우면하지 않고 전속력을 다해 날아와 준 덕분에 상당한 여유가 생겼다. 자정에 출발한다고 해도 내일 오전 중에는 정맹에 당도할 수 있을 터였다. 집법전 출두 전에 천하제일도(天下第一都)라는 원중 유람을 해도 될 듯했다.
그래도 혹시 몰라 나는 우리가 있는 곳을 확인했다.
“여기가 고연(高淵)이 맞소?”
“그래, 이놈아. 내 허파를 달래야 하니까 이제부터 말 시키지 마라.”
보통의 무인과 달리 괴선은 운공에 들기 위해 좌정하지 않고 누운 채로 팔다리를 한껏 벌려 몸을 대자로 만들었다. 일견 우스꽝스러웠으나 그의 주장에 따르면 천지간의 기운을 빨아들여 상한 육신을 치유하는 최적의 자세라고 했다.
나는 차근차근 전신의 뼈마디를 풀었다. 욕심 같아선 당장 철마와의 격전에서 얻은 깨달음을 구현해보고 싶었으나 자중했다. 궁구를 통한 정리가 먼저였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소음이 집중을 방해했다.
기루와 주루, 객잔과 노점의 객들이 내는 취성과 고함과 수다소리였다. 거리의 행인들도 만만치 않았다. 도처에서 벌떼가 윙윙거리는 듯한 기성이 올라왔다.
귀를 닫아버리려는 찰나 소음 속에 섞인 무언가가 내 주의를 끌었다. 내 별호였다. 소리를 차단하려던 나는 반대로 청력을 돋우었다. 그러고는 소리가 날아온 쪽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보다 분명한 소리가 잡혔다.
서너 채의 전각 너머에서 누군가 내 얘기를 하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두 달 전에 있었던 나와 단천검의 대결을 묘사하고 있었다. 마치 제 눈으로 본 것처럼 떠들었지만 실제로 있었던 내용과는 거리가 멀었다.
탁한 음성의 주인공이 흥분조로 목청을 높였다.
“그 순간 마웅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회심의 미소였지. 단천검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으나 검을 회수하지 않고 내쳐 찔러갔다. 태극의 기운을 머금은 보검 끝이 마웅의 가슴에……, 콜록콜록.”
기침소리가 난 후 잠시 정적이 흘렀다. 소년인지 소녀인지 분간하기 힘든 앳된 목소리가 이야기의 뒤를 재촉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요, 할아버지?”
“오랫동안 떠들었더니 목이 말라버렸구나. 나중에 마저 들려주마.”
노인을 성토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노인이 매화자(賣話者)임을 알았다. 결정적인 대목에서 이야기를 끊은 후 청중에게서 목을 축일 술값을 받아내겠다는 수작이었다. 듣고 있던 이들이 인색하지 않았던 듯 잠시 후 노인이 말을 이었다.
“검첨에 심장이 뚫릴 찰나 마웅은 육중한 상체를 번개처럼 비틀어 단천검의 검을 겨드랑이에 끼우더구나. 전날 안평의 무림대회에서 태극검문의 신성을 상대로 선보였던 것과 동일한 수법이었지. 물론 그때보다 훨씬 신묘한 움직임이었다. 마치 신기루 같더구나. 얼핏 보기엔 단천검의 검이 그의 가슴을 관통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아무튼 단천검이 날린 승부수를 무력화시킨 마웅은 오른팔을 뻗어…….”
노인이 다시 말을 도중에 멈췄다. 그러나 이야기 값을 추가적으로 받아내려는 속셈은 아니었다. 그의 말을 자른 건 느닷없이 날아든 호통이었다.
“닥쳐라, 삿된 것. 네가 정말로 단천검과 그자의 일전을 보았더냐?”
“아, 아, 아닙니다요. 소인은 그저 여기저기서 주워듣고…….”
“그럴 줄 알았다. 보지도 않았으면서 그런 척하여 여기 모인 자들을 기만했을 뿐만 아니라 그릇된 정보를 퍼뜨려 이들을 현혹시키고 세상을 어지럽혔으니 네 죄는 결코 가볍지 않다.”
“주, 주, 죽을죄를 졌습니다요. 제발 한 번만…….”
“그 주둥이 다물지 못하겠느냐? 네가 스스로 인정했듯 목을 쳐도 무방한 죄를 저질렀으나 특별히 사지를 자르고 혀를 뽑는 선에서 선처를 베풀어주마.”
“제, 제, 제발, 대인. 소인은…….”
“닥쳐라. 한 번만 더 주둥이를 놀리면 너는 물론이고 네 손자까지 목을 날릴 것이다. 너희도 듣거라. 마웅이란 자는 비열한 술책으로 단천검을 욕보인 쓰레기다. 그날 단천검은 그자를 비호하며 노골적으로 양보를 강요하는 괴선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검을 내리고 팔을 내주고 말았다. 이것이 진상이다. 내가 단천검으로부터 직접 들은 얘기니 틀림없는 사실이다.”
기가 막혀서 콧방귀를 뀌고 있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툭 쳤다.
“뭐하는 게냐, 이놈아. 어서 가보자.”
어느 새 일어선 괴선은 언제 죽네, 사네, 했냐는 듯 신이 난 얼굴이었다. 내 응답을 기다리지 않고 괴선이 몸을 날렸다. 나는 그를 따랐다.
우리가 현장에 가는 동안에도 소리가 계속 날아왔다.
“너희도 곧 알게 되겠지만 그자는 이미 죽은 목숨이나 진배없다. 단천검이 복수할 거라서가 아니라 정맹에서 현가의 신 봉공을 시해한 죄를 물을 터이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그 비열하고 흉악한 살인자를 뭐라도 되는 양 추켜세우고 다니다가 횡액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모두들…….”
연설이 뚝 끊겼다. 나와 괴선이 장내에 떨어져 내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한 눈에 상황을 파악했다.
너른 공터에 일백 명 남짓한 군중이 반원의 형태로 모여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공히 초로의 검사에게 박혀있었다. 나처럼 귀 양끝이 다 뾰족했다. 칼귀 검사의 앞에는 노소가 엎드려있었고 그의 좌우엔 각각 세 명의 무인이 서있었다. 동일한 복장을 갖춘 무인들의 면면마다 난처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칼귀 검사 양옆에 늘어선 이들은 고연의 지배방파인 진무관(眞武官) 소속의 무인들일 터였다. 진무관은 지역무관치고는 꽤 강성한 방파였다. 나와 약간의 인연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전날 내 무력을 정확히 알지 못했을 때 진소월은 태극검문의 보복을 우려해 충주나 고연으로 피신할 것을 권고했었다. 충주의 자운궁이나 고연의 진무관과 껄끄러운 관계이기에 태극검문의 검사들이 거기까지 와서 나를 잡겠다고 설치기는 어려울 거라는 이유에서였다.
진무관과 태극검문이 앙숙이 된 건 팔 년 전 군포에서 벌어진 사건 때문이었다.
당시 군포에는 성주 무림 오대부가인 하원 유가장(劉家莊)의 의뢰를 받아 상단의 보호를 맡았던 태극검문의 검사들과 역시 동무원(東務院)의 호상단(護商團)으로 나섰던 진무관 무인들이 머물러있었다. 군포가 경유지였는데 마침 지나가는 일정이 겹친 탓이었다.
원칙대로라면 상행 중엔 일절 주색잡기를 해서는 안 되지만 항상 예외는 있는 법이었다. 예쁜 동기(童妓)라면 사족을 못 쓰는 태극검문의 중견검사 장일태가 예전에 군포에 들렀을 때 점찍어두었던 자연루(紫燕樓)의 어린 미기를 찾았다가 그녀를 선점한 진무관의 교두 방우와 시비가 붙은 것이 발단이었다.
서로의 신분을 확인한 연후 한 발씩 물러서서 타협했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 장일태와 방우는 모두 자기가, 혹은 자기편이 우세하다고 자신했고 그래서 상대의 굴복을 강요했다. 하여 격돌은 필연적인 수순이었다.
둘 간의 싸움은 양패구상으로 끝났다. 하지만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상황을 전해 듣고 자연루로 달려온 태극검문과 진무관의 인사들은 두 멍청이와 똑같은 판단을 내렸다. 태극검문의 검사들은 일개 무관이 명문 방파인 자신들에게 각을 세우는 게 가소로우면서도 못마땅했고 진무관의 무인들은 변방 무림의 문파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중원의 명문 무관을 우습게 여기는 태도에 분개했다. 그러면서 싸우면 자기들이 이길 거라 확신했다.
사태를 수습하기는커녕 서로 언쟁을 벌이며 갈등을 키우던 양편의 멍청이들은 급기에 패싸움을 벌이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처음의 멍청이들과 동일한 결과를 낳았다. 그나마 쌍방 선을 넘지 않은 덕분에 사망자는 나오지 않았으나 태극검문에서 넷, 진무관에서는 여섯 명이나 회복불능의 중상을 당했다. 나머지도 작지 않은 내-외상을 입었다.
서로의 소재와 이름 정도만 알고 있던 태극검문과 진무관은 그 일로 원수지간이 되었다. 거리가 멀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전면전을 치렀을 것이었다.
매화자가 태극검문의 수장인 단천검의 치욕을 공공연하게 떠들어댈 수 있었던 것은 이곳이 진무관의 터전인 고연이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옷깃에 진무(眞武)를 새긴 무인들이 매화자를 보호하지 못하고 칼귀 검사의 행사를 방관하는 까닭은 그가 주천 백가의 인물이라서였다. 그가 왼 허리에 찬 검의 손잡이에 백가를 상징하는 세 가닥 붉은 수실이 매달려있었다.
주천 백가는 오대세가의 하나이자 정파제일검가로 자타가 공인하는 명가였다. 그곳의 후기지수만 와도 진무관으로서는 귀빈 대접을 해야 할 터인데 서열이 높은 거물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이러니 저리니 해도 무림은 강자존의 철칙이 절대적인 강제력을 발휘하는 세계였다.
괴선과 내가 공중에서 내려오자 군중이 술렁거렸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의 뒷모습만 보았다. 반면 칼귀 검사와 진무관의 무인들은 나와 괴선의 면상을 볼 수 있었다. 모두의 안색이 변했다.
나는 그들이 나를 알아보았음을 알았다. 몰라보기엔 나는 너무나 유명한 인사였고 너무나 뚜렷한 특징의 소유자였다. 나라도 고리눈에 주먹코, 칼귀에 퉁퉁 부은 입술을 큼직한 얼굴에 집어넣은 칠 척의 거한을 보면 단박에 최근 강호를 떠들썩하게 만든 소문의 주인공임을 알아볼 것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낯빛이 하얗게 질린 칼귀 검사에게 짓궂게 물었다.
“내가 누군지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