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41
제40화 말을 말아야지
칼귀 검사는 내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 대신 진무관의 무인들 중 한 명이 신음성처럼 내 별호를 흘렸다.
“마웅.”
큰 목소리가 아니었으나 대번에 군중 속에서 소란이 일었다. 엎드려 있던 노인과 소년도 고개를 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나를 보고는 다시 자라목이 되었다. 다만 소년의 눈동자엔 기대감이 별빛처럼 반짝거렸다.
나를 마주보지 않고 칼귀 검사가 괴선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주천 백가의 중호(重鎬)가 괴선을 뵙소.”
괴선의 정체를 두고 긴가민가하던 군중이 일제히 탄성을 내질렀다. 대륙을 누비며 온갖 일에 참견하지만 괴선은 아무 때고 볼 수 있는 인사가 아니었다.
“이제 보니 화영검(花影劍)이었구먼. 백 가주의 칠순 잔치에서 본 게 마지막이었으니 벌써 십 년이나 지났군. 아니, 구 년인가? 여하간 자넨 하나도 늙지 않았네 그려. 비결이 있으면 이 늙은이에게도 알려주게나.”
괴선이 알은 체를 하자 칼귀는 안도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기억하시는구려. 영광이오, 괴선.”
“그나저나 자네가 이곳엔 어쩐 일인가? 나야 온 세상을 쏘다니니 어디에 나타나도 다들 그러려니 하지만 자넨 여간해선 주천을 벗어나지 않는 걸로 아네만.”
“여기 진무관의 벗들과 본가의 일로 상의할 게 있어서 왔소.”
“흠, 야외에서 상의해야 할 일인가?”
내 눈치를 보며 칼귀가 우물거렸다.
“아니외다. 근처 수오각에서 회합을 갖던 중 잠시 바람을 쐬러 나왔을 뿐이오. 그렇지 않아도 막 다시 들어갈 참이었소.”
괴선을 혀를 찼다.
“쯧쯧, 서방에 산다는 당나귀만한 거조는 대가리를 모래에 처박으면 적이 안 보이니 적도 자기를 보지 못할 줄 안다던데 자네가 딱 그 짝이군. 이보게, 화영검. 내가 그냥 지나가다 자네를 보고 이리로 달려온 것 같은가?”
칼귀의 눈가에 경련이 일었다. 하지만 그는 괴선의 모욕적인 비유에 반발하지 못했다.
“말조심 좀 하지, 이 사람아.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곰이 듣는다고 하지 않던가. 이제 이 곰탱이가 자네 말을 엿들었으니…….”
나는 괴선의 말을 잘랐다.
“내가 왜 곰탱이오? 그리고 엿듣긴 누가…….”
“그럼 네놈이 곰탱이지 쥐새끼냐?”
괴선과 입씨름을 해봐야 득 될 게 없었기에 나는 그를 노려본 후 칼귀를 상대했다.
“어이, 하나 물어보자. 정말로 태극검문의 사마귀가 너한테 그딴 소리를 했어? 이 노인장의 압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갑자기 괴선이 흥분했다.
“맞다! 까맣게 잊고 있었네. 어서 이놈 질문에 답하게, 화영검. 정말로 단천검이 내가 양보를 강요하는 바람에 이놈한테 팔을 내주었다고 했어?”
“그, 그게, 그러니까…….”
“더듬거리지 말고 어서 답이나 하게. 나는 그날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단 말이지. 그런데 그런 황당한 소리가 나오다니. 자네나 단천검 둘 중 하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건데, 자네가 아니라면 지금 당장 태극검문으로 날아가 그 거짓말쟁이를 혼쭐 내줄 참이네. 주둥이를 뭉개고 다리몽둥이도 부러뜨려야지.”
“지, 진정하시오, 괴선. 송 형에게 직접 듣지는 않았소. 다만 성주 무림에 다녀온 여러 지인들이 내게 전하길…….”
칼귀가 너저분한 변명을 늘어놓도록 기다려주지 않고 내가 윽박질렀다.
“닥쳐! 직접 들은 것도 아니면서 그런 척하며 여기 있는 이들을 기만했을 뿐만 아니라 거짓된 정보를 퍼뜨려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세상을 어지럽혔으니 그 죄가 실로 중하다. 목을 쳐도 무방한 죄라고 네 입으로 떠들었으니…….”
그의 말을 인용한 내 협박이 끝나기도 전에 칼귀가 애원했다. 내가 아니라 괴선에게.
“도와주시오, 괴선. 내가 큰 실수를 했소. 본가와의 정리를 봐서라도 중재해 주오. 은혜는 잊지 않겠소.”
괴선이 싱글벙글했다. 그가 가장 즐기는 상황이었다. 그 모습이 얄미워 나는 철봉을 빼들었다. 칼귀가 사색이 되었다. 그러더니 별안간 무릎을 꿇었다. 숨을 죽인 채 지켜보던 일백 군중이 크게 웅성거렸다.
나는 실망했다. 명색이 오대세가의 명숙인데 이리도 대가 약하다니.
진소월이 정리해준 인명록에 따르면 화영검 백중호는 주천 백가 무력 서열 칠 위의 강호였다. 그의 무위는 초절정 초입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보다 강한 단천검을 이긴 나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는 건 알겠으나 그래도 너무 굴욕적인 처신이었다. 대항하는 시늉은 못하더라도 중인환시리에 무릎을 꿇는 건 정도가 심했다.
칼귀의 행동에 화들짝 놀란 괴선이 얼른 그에게로 가서 팔을 붙들었다.
“이게 무슨 짓인가? 보는 눈이 이렇게 많은데. 저놈은 내가 잘 달랠 테니 어서 일어나게.”
칼귀가 못 이긴 척 기립했다. 나는 괜히 부아가 치밀었다.
“비키쇼, 노인장. 목을 칠 게 아니라 머리통을 부숴버려야겠소.”
풍을 맞은 듯 칼귀가 전신을 후들거렸다. 괴선이 그의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아서라, 이놈아. 중대사를 앞두고…….”
“중대사고 나발이고 나는 저자의 죄를 물어야겠소.”
“글쎄, 참으래도, 이놈아.”
“노인장 같으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노인장더러 비열한 쓰레기니 흉악한 살인자니 하며 험담을 퍼붓는 자에게 아량을 베풀겠소?”
괴선이 칼귀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서 저놈에게 빌게나. 저놈이 진짜로 열을 받으면 나도 말릴 수가 없네.”
칼귀가 이번엔 아예 오체투지 했다. 이마를 땅바닥에 박은 칼귀가 간청했다.
“제발 나를 용서해주오, 전 공자. 내가 잘못했소. 진심을 다해 사과하오. 다시는 입을 경망스럽게 놀리지 않겠소. 맹세하오.”
괴선이 칼귀를 거들었다.
“그래, 이쯤에서 마무리 짓자꾸나. 누구나 실수를 하는 법이다. 화영검의 언사에 과한 바가 없지는 않았으나 머리통을 깨니 마니 할 정도는 아니잖으냐? 그러니 그 흉측한 물건은 그만 집어넣고…….”
“됐소.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노인장은 빠지쇼.”
“이놈아, 좀 참으라니까. 참을 인이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지 않더냐? 너는 오늘만 해도 벌써 수십 명이나 죽이지 않았더냐? 그 살업을 어찌 감당하려느냐?”
“고루색귀나 맹아도 같은 놈들은 죽어도 싸오. 철마류의 마귀들은 말할 것도 없고.”
괴선과 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진무관의 무인들은 안구를 쏟아낼 듯 놀란 표정을 공유했다. 엎드려 있던 칼귀는 보는 이가 민망할 정도로 달달 떨었다. 내 뒤쪽의 군중도 경악성들을 내질렀다.
괴선이 칼귀를 변호했다.
“그 악종들과 화영검은 비교불가니라. 정인군자라고 보장은 못하겠다만 이이는 나름 적지 않은 덕행을 쌓은 선인이다. 오륙 년 전엔가 서주 일대에 심한 기근이 들어 수많은 빈민들이 굶어죽고 있을 때 구휼을 주창했었고 작년 초에는…….”
“그런 자가 단지 자기 귀에 거슬리는 얘기를 했다는 이유로 이 어르신의 사지를 자르고 혀를 뽑으려고 했소? 그게 선처라는 개소리를 늘어놓으며. 좋소. 정 그렇다면 나도 저치에게 선처를 내리지. 머리통은 봐 주겠소. 대신 팔다리와 혀를 뜯어버리겠소.”
내가 기세를 일으키며 성큼 다가서자 칼귀가 비명을 질렀다.
괴선이 나와 칼귀에게 퇴로를 열어주었다.
“이 순진한 놈. 설마 화영검이 정말로 저 노인에게 그런 벌을 주었을 거라고 생각했더냐?”
“뭔 소리요?”
“뭔 소리는, 이놈아. 이이는 단지 저 노인에게 입을 함부로 놀리다가 비명횡사할 수도 있다는 교훈을 주려고 했던 것뿐이다. 과거 무림 영웅들의 무용담을 늘어놓는 거야 아무 상관없지만 현세의 인물들을 소재로 설을 풀 때는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하는 법이다. 막말로 태극검문과 관계된 자가 저 노인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에게 전하면 나중에 어떤 해코지를 당할지 누가 알겠느냐? 실제로 이 강호에는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저 노인은 여기가 진무관의 땅이라는 걸 믿고 마음껏 떠든 모양이지만 경솔한 처사였다. 화영검은 그걸 일깨워주려 했던 게다, 이놈아.”
칼귀가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로 부르르 떨었다. 그를 구하려고 정성을 다하는 괴선에게 감명을 받았음에 틀림없었다. 그래서 나는 약간 심술이 났다.
“웃기는 소리. 그렇다면 나를 두고 쓰레기니 살인자니 떠벌인 건 뭐요?”
“그야 화영검도 저 노인과 똑같은 실수를 한 거지. 설마 곰탱이가 엿듣고 있을 거라고 짐작이나 했겠느냐? 그렇더라도 자기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했으니 이쯤에서 너그러이 넘어가자꾸나.”
나는 칼귀를 불렀다.
“어이, 노인장의 말이 사실이냐?”
염치가 있는지 칼귀가 즉답을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나는 으름장을 놓았다.
“흥, 사실이 아니었군. 그렇다면 정상을 참작할 필요가…….”
칼귀가 황급히 부르짖었다.
“아, 아니오. 아니, 내 말은, 괴선의 말씀이 반드시 사실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
“횡설수설하지 말고 딱 부러지게 말해. 정말 이 어르신에게 엄포만 주려던 거였어?”
칼귀가 눈물을 흘렸다.
“실은 나도 잘 모르겠소. 하지만 사지를 자르고 혀를 뽑지는 않았을 게요. 위엄을 보이고 싶었을 뿐, 저이를 죽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소.”
칼귀에 대한 인상이 확 바뀌었다. 어인 일인지 그가 측은해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철봉을 허리춤에 갈무리했다. 그리고 노인과 소년에게 다가갔다.
“일어나시지요, 어르신.”
내 말에 따르기는커녕 노인은 더욱 바짝 땅에 엎드렸다. 나는 그와 소년을 잡고 한꺼번에 일으켜 세웠다. 소년은 겁도 없이 턱을 한껏 치켜들고는 나를 직시한 반면 노인은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나는 허리를 접은 노인에게 칼귀의 처분을 맡겼다.
“저자를 어떻게 할까요, 어르신?”
노인은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말씀 낮추십시오, 공자님.”
“그럴 수는 없지요. 제 부모님께서 저에게 강호에 나가면 어르신들을 대함에 있어 예의를 다하라고 이르셨습니다. 저는 부모님의 가르침을 거역할…….”
예상대로 괴선이 끼어들었다.
“그런 놈이 나한테는 왜 그리 싸가지 없이 구는 게냐?”
“그새 또 까먹었소?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고운 법도 모르오? 노인장 같으면 말끝마다 놈, 놈 하는 이에게 예를 차리고 싶겠소?”
“아, 이놈아. 내가 이놈, 저놈 하는 건 단지 친밀감의 표현일 뿐…….”
“아, 됐소. 그리고 방해하지 마시오. 이만 정리하고 떠날 참이니까.”
불만으로 입이 툭 튀어나왔지만 괴선은 더 시비를 걸지 않고 물러섰다. 나는 다시 매화자 노인에게 물었다.
“저자를 어찌하길 바라십니까, 어르신?”
“제가 어찌 감히…….”
“어르신껜 권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냥 머리통을 부숴버릴까요?”
노인이 화들짝 놀랐다.
“아닙니다!”
“그러면요? 사지를 자를까요?”
“아닙니다, 공자님, 제발 그러지 마십시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감히 청컨대 저분을 용서해주십시오.”
“정말 그러길 바라십니까?”
“네, 공자님. 진심입니다.”
나는 칼귀에게 명했다.
“일어서.”
칼귀가 쭈뼛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가 봐.”
좌우로 길쭉한 칼귀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의 동공에 서린 당혹감은 곧 기쁨으로 대체되었다.
칼귀가 나에게 포권을 취했다.
“다시 한 번 내 실언을 사과드리오. 나에게 아량을 베풀어주어 감사하오.”
나는 칼귀에게 대꾸를 주지 않고 무시했다. 칼귀가 매화자 노인에게도 감사인사를 했다.
“고맙네. 그리고 미안하네. 내가 심했네.”
노인이 쩔쩔 맸다.
“아닙니다, 대인. 소인이야말로 정말 죄송합니다. 괜히 저 때문에…….”
“아닐세. 전적으로 내 불찰이니 그런 말 말게나.”
칼귀가 마지막으로 괴선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오늘의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소, 괴선.”
“은혜랄 게 뭐 있는가. 살다보면 이런 날 저런 날 있는 법일세. 그냥 똥 밟았다고 생각하고…….”
나는 괴선의 위로를 중단시켰다.
“내가 똥이오?”
“그럼 금이냐?”
“그런 말이 아니잖소?”
“아니긴 뭐가 아냐, 이놈아.”
“아, 제길. 말을 말아야지.”
“이놈이, 누가 할 소릴.”
티격태격하는 우리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칼귀와 진무관의 무인들이 나와 괴선에게 예를 표한 후 장내를 떠났다. 내가 뒤를 돌아보며 슬쩍 눈을 부라리자 구경꾼들도 허둥지둥 물러갔다. 매화자 노인과 소년도 작별을 고했다. 소년은 멀어지는 내내 몇 번이나 나를 돌아보았다.
그렇게 상황을 정리한 나는 괴선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고는 먼저 몸을 날렸다. 이날의 사소한 사건이 얼마나 중요한 인연을 잉태했는지 알지 못하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