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42
제41화 내가 알아서 하겠소
“이해가 되지 않소.”
“뭐가 말이냐?”
“그자도 나름 검호 소리를 듣는 강호인데 수많은 눈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런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다니 말이오.”
“허어, 이놈 보게. 정말 몰라서 하는 소리냐?”
“…….”
“네놈은 네놈이 성질을 부릴 때 얼마나 살벌한지 모르지? 화영검 입장에서는 간이 졸아들다 못해 녹아버렸을 게다.”
“…….”
“더욱이 네놈은 그이의 막강한 배경도 통하지 않을 종자가 아니더냐? 광양 성가를 치받았던 그 무식쟁이와 한통속이라는 소문이 파다한데다 네놈 스스로도 대놓고 현가의 봉공을 죽였으니 말이다. 그러니 화영검은 암담했을 게다. 제 가문을 들먹여 네놈을 제지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네놈과 붙을 수도 없고.”
“그렇더라도 그자는 지나치게 비굴하게 굴었소.”
“나도 의외긴 하다만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그이의 별호가 왜 ‘꽃 그림자’인줄 아느냐? 검기를 뿌리면 허공에 매화송이들이 피어오르기 때문이다. 화영검은 실전적 기법보다는 멋을 추구하는 위인이다. 심성도 무인치고는 몹시 여린 편이지. 그걸 감추기 위해 평소엔 엄격한 척하곤 하지. 위선자란 소리가 아니다. 다만 오늘처럼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것 같은 위기상황은 살면서 한 번도 겪어보지 않았을 게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본성이 튀어나온 거지.”
“…….”
“왜 말이 없어? 오호라. 네놈에게 도법을 전수한 학림수호령을 생각하는 게로구나? 하지만 화영검은 그 정도로 심각한 겁쟁이는 아니다.”
“그이를 생각한 게 아니오.”
“아니긴 이놈아. 하여간 잘 처리했다. 그런데 진짜로 화영검을 손보려고 했던 건 아니지? 네놈이 하도 기세등등하게 굴어서 나도 헷갈리더라.”
“대들면 밟으려고 했소.”
“어디서 허세야, 이놈이. 싸울 수 있는 상태도 아니면서. 화영검이 이판사판으로 나왔다면 네놈도 적잖이 애를 먹었을 게다. 너, 혹시 그이가 실상은 심약한 성정임을 간파하고서 초장부터 세게 나갔던 게냐?”
“…….”
“허어, 이놈 보게. 덩치는 곰인데 속은 너구릴세 그려. 약은 놈 같으니.”
“머리를 쓰는 게 잘못이오?”
“누가 잘못이라더냐? 그냥 그렇단 말이지. 그나저나 화영검이 앙심을 품지 말아야 할 텐데. 아니, 그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일을 전해들은 백가의 늙은이들이 어찌 나올지 걱정이구나. 보나마나 노발대발할 텐데. 여러 사람의 눈앞에서 가문의 중견이 그런 망신을 당했으니.”
“그러든지 말든지.”
“이놈아. 독불장군은 무림에서 버틸 수 없다는 걸 모르느냐? 무식쟁이 때문에 광양 성가에서도 너를 고깝게 여길 테고, 보성 현가는 말 할 것도 없고, 이제 주천 백가까지 네놈에게 이를 갈게 생겼으니 보통 일이 아니구나.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담.”
“그만 갑시다. 충분히 쉬었소.”
“이놈아! 이제 겨우 숨을 골랐는데. 이제 사오백 리만 더 가면 된다. 그러니 좀 더……, 야! 거기 안 서, 이놈아!”
* * *
해가 떴다.
도중에 두 번만 휴식을 취하고 강행군을 한 덕분에 우리는 동이 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원중 외곽의 산에 당도했다. 미시까지는 한참 남았으니 여유가 넘쳤다.
산등성이에서 내려다 본 원중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만큼 광대하고 화려했다. 수십 장 높이의 고층전각들이 천상에서 강림한 맹장들처럼 늘어선 마천루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가히 천하제일도(天下第一都)다운 위용이었다.
진소월은 원중의 인구가 백만에 육박한다고 했다. 상상이 가지 않는 숫자였다. 원중 백성들은 거기서 백년을 살아도 이웃들을 다 만나지 못하고 죽을 터였다.
내 표정을 살핀 괴선이 마치 자기 땅인 양 원중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았다. 이미 진소월에게서 다 들은 내용이었으나 나는 그가 떠들게 내버려두었다. 지식을 뽐내다 제 풀에 지친 괴선은 벌러덩 드러누웠다. 나도 운공에 들었다.
반 시진 후 우리는 산을 내려갔다.
저자에 들어서자 마침 사시(巳時)를 알리는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출두시각까지는 아직 두 시진의 여유가 있었지만 우리는 원중의 명소들을 들르지 않고 정맹으로 직행했다. 가는 동안 나는 우리에게 달라붙는 시선들을 인지했다.
괴선이 정맹의 동서남북에 네 개의 대문이 있으며 그 사이에 각각 여섯 개씩의 중문이 있어 도합 스물여덟 개의 문이 있다는 소리를 내뱉고 있는데 일군의 무인이 우리 쪽으로 달려왔다.
무인들은 우리의 십 보 전면에 멈추더니 일렬횡대로 섰다. 총 아홉 명이었다. 허리에 세 가닥 붉은 수실을 매단 검을 찬 중앙의 중년인이 괴선에게 포권을 취하며 자기소개를 했다.
“집법전의 백운영이 괴선 어르신을 뵙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모시겠습니다.”
“오! 금풍검(金風劍)이구먼. 청룡단(靑龍團)에 있다고 들었는데 언제 집법전으로 자리를 옮겼는가?”
“이제 막 한 달 되었습니다.”
“그랬는가. 지난번에 보았을 때보다 눈빛이 한층 정심해졌구먼. 성취가 상당한 게지. 자네 가문의 어른들이 얼마나 흐뭇해할까 그래.”
“아닙니다, 어르신. 재주가 부족한 탓에 몇 년 째 제자리걸음입니다.”
“터무니없는 소리. 내 장담하건대 자네는 이미 검강을 부릴 수 있는 경지에 들어섰을 걸세. 그렇지 않은가?”
“겨우 흉내만 내는 수준입니다.”
“또 겸손을. 내가 그런 허례를 싫어하는 걸 모르는가?”
나를 꿔다놓은 보릿자루로 만들어놓고 중년인과 사담을 나누던 괴선이 갑자기 내 옆구리를 툭 쳤다.
“멀뚱히 서있지 말고 인사해라, 이놈아. 장차 정파에서 으뜸가는 검호가 될 걸물이니라.”
나는 중년인에게 포권했다.
“전충입니다.”
중년인이 답례했다.
“백운영일세.”
나와 시선을 마주친 중년인의 눈에 묘한 빛이 감돌았다. 나는 그가 어젯밤 고연에서 있었던 일을 알고 있음을 알았다. 칼귀가 전말을 적은 전서구를 날렸다면 진즉 정맹에 도달했을 터였다.
헌데 중년인의 안광에 서린 감정은 적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호감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으나 부정적인 느낌은 전혀 아니었다.
칼귀가 나에 대해 좋게 말한 걸까. 아니면 인우당과 철마류에서의 행사가 영향을 끼친 걸까.
어쨌거나 나는 나를 대하는 중년인의 정중하고도 온화한 태도가 의아했다.
나는 중년인에 관해 알고 있었다.
훗날 정파제일검이 될 거라는 괴선의 소개는 아부가 아니었다. 절정에 들어서면서부터 황금빛 검기를 뿜어내기 시작해 금풍검이라는 별호를 얻은 백운영은 백가를 넘어 오대세가의 중견들을 통틀어도 선두주자로 꼽히는 강자였다. ‘부용아씨’의 부군인 진천수(震天手) 현상인과는 난형난제의 호적수였다. 참고로 전날 신필주는 두 사람을 두고 저울질을 한 끝에 최종적으로 현인수를 사윗감으로 낙점했었다. 전도가 보다 유망해서가 아니라 그가 상대적으로 요리하기 쉽다고 보아서였다.
진소월은 금풍검이 집법전 서열 이 위의 특급집법관이라 했다. 그러면서 판관은 아니기에 내 재판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는 않지만 반드시 알아두어야 하고 주의를 기울여야 할 인물이라고 강조했다.
괴선은 백운영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맨 앞에서 걸었다.
나는 그들의 이삼 보 뒤에서 따랐다. 다시 내 후방 좌우로 여덟 명의 집법전 무인들이 넷씩 짝을 이루어 나를 쫓아왔다. 호위를 하는 형국이라기보다는 감시와 도주방지를 위한 진용이었다.
번화한 거리를 지나는 동안 수많은 시선들이 우리에게 달라붙었다. 그 시선들의 절대다수는 나에게 집중되었다. 호기심과 반감이 섞인 눈빛들이었다. 원중의 민중에겐 아직 인우당과 철마류에서 내가 행한 쾌거가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눈엔 내가 그저 마도의 성향을 지닌 젊은 괴물쯤으로 비칠 터였다.
나는 이따금 노골적으로 혐오감이나 거부감을 드러내는 자들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러면 그들은 예외 없이 헛바람을 들이켜며 허둥지둥 시선을 피하곤 했다. 한심한 짓인 줄 알았으나 은근히 재미있어 나는 한동안 그 놀이를 즐겼다. 그러다 일순지간 긴장했다. 앞선 두 사람의 대화 때문이었다.
“그런데 무식쟁이는 왔는가?”
“누굴 말씀하시는 건지요?”
“광객 말일세.”
“제가 맹을 나올 때까지는 그 어른이 왔다는 보고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 이상하군. 벌써 도착하고도 남았을 텐데.”
괴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불안해졌다.
광객은 이번 일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아니, 중요한 정도를 넘어 내 명운을 가를 결정적인 패를 쥐고 있었다. 그가 제때 오지 않으면 계획이 송두리째 무너질 판이었다.
괴선이 나를 힐끔거리며 신경을 자극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능청스러운 미소로 응수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최악의 경우를 각오했다. 동시에 최악의 경우가 닥치더라도 어떻게든 살아남으리라 다짐했다.
스무 대의 마차가 한꺼번에 통과할 수 있을 만큼 크고 넓은 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정맹의 북문이었다. 문 양옆에 도열해있던 경비무사들이 백운영을 보고는 창으로 땅을 두드리며 허리를 꺾었다. 사방 수천 리 영토의 질서를 관장하는 정맹 집법전의 이인자에 대한 예우였다.
우리는 일백만 평의 대지에 일만 명의 무인과 일천 개의 전각을 품은 정파 무림의 본산으로 들어섰다. 어느 하나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은 건물이 없었다. 처음 방문하는 이라면 주눅이 들 수밖에 없는 위압적인 풍광이었다.
저자에서처럼 따가운 시선들이 나에게로 쏠렸다. 다만 대부분의 눈빛들에 거부감보다는 흥미로움이 보다 짙게 배어있었다. 내가 인우당에서 강호십대악인의 일인인 고루색귀와 그의 심복인 맹아도 등을 처단한 일이 전해졌음에 틀림없었다. 철마류에서 벌였던 판이 알려졌는지는 불분명했다.
괴선의 말마따나 진즉 와있어야 할 광객이 도착하지 않아 내심 초조했으나 나는 속을 내색하지 않고 당당하게 걸음을 옮겼다. 아직 한 시진 이상 남았거니와 설령 그가 시간에 맞춰 오지 않을지라도 헤쳐 나갈 자신이 있었다. 단 한 가지 경우를 제외하고는 살고자 하는 나를 어찌할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었다.
귀빈전이라는 현판을 단 칠층 전각 앞에서 걸음을 멈춘 백운영이 괴선을 보았다. 그의 입이 벌어지기 전에 괴선이 선수를 쳤다.
“나더러 이곳에 있으라고?”
“부탁드립니다, 어르신.”
“나도 가면 안 될까?”
“죄송합니다. 갑(甲) 일종(一種)으로 분류된 재판이기에 외부인은 일절 집법전에 들 수 없습니다. 양해해 주십시오.”
“나도 증인이 될 수 있는데. 전후사정을 안단 말이지.”
“공식적인 통보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딱딱하게 굴지 말고 편의를 좀 봐 주게, 금풍검. 자네 재량이면 참관인 한 명쯤 데리고 들어가는 건 일도 아니지 않은가?”
“죄송합니다, 어르신.”
“그러지 말고…….”
나는 계속 억지를 쓰려는 괴선을 만류했다.
“갔다 오겠소, 노인장.”
“이놈아, 가는 거야 그렇다 쳐도 재수 없으면 못 올 수도 있어.”
하마터면 ‘제길’이라고 받을 뻔한 나는 가까스로 말을 바꿨다.
“내가 알아서 하겠소.”
“알아서 하긴, 이놈아. 그나저나 이 무식쟁이는 왜 이렇게 늑장이야? 나보다 백배는 편한 일을 맡았으면서. 어디서 술 처먹고 뻗어있는 거 아냐?”
괴선의 말을 무시하고 나는 백운영에게 몸을 돌렸다.
“출두시각은 미시라고 들었습니다. 재판은 그 이후 진행되는 건지요?”
“자네가 일찍 왔으니 입전하면 바로 시작할 수 있을 걸세. 전주와 판관들은 이미 별전에 모여 있다네.”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원래 예정했던 시간에 했으면 합니다만. 광객 어르신을 기다리고 싶습니다.”
백운영이 나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광객이 와도 변수가 되지 못할 것임을 알려주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결국 이렇게만 말했다.
“뜻대로 하게. 하지만 여기가 아니라 집법전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하네.”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지만 별 실효는 없었다. 미시를 알리는 종이 울리도록 광객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혼자서 판관들을 상대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