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45
제44화 내게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소대성의 으깨진 두부(頭部)를 망연히 내려다보던 소웅성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이 사건의 개요를 보고했던 중년의 집법관이 선 곳으로 향했다.
“제대로 조사했을 테지?”
집법관의 안색이 사색이 되었다. 그가 우물쭈물하자 소웅성이 그의 옆에 섰던 원숭이 사내에게 물었다.
“마웅이 신 봉공을 시해할 때 그 자리에 있었더냐?”
거리가 상당했지만 소웅성이 발하는 무시무시한 기운에 겁을 먹은 원숭이 사내가 바닥에 오체투지 했다. 그러나 정신을 수습한 판관 하나가 그의 대답을 가로막았다.
“이미 진술이 끝났지 않소? 구태여 다시 확인할 필요가…….”
소웅성이 판관의 말을 무시하고 원숭이 사내를 다그쳤다.
“어서 답하라!”
“저, 저, 저는 대흥관을 찾았던 저이를 숭인전에 계시던 노야께 데려다주었습니다.”
“그런 연후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보았더냐?”
“저, 저, 저는…….”
판관들이 아우성을 쳤다. 소대성의 시체를 내려놓은 소웅성이 원숭이 사내에게 걸어갔다.
“만약 나중에 거짓을 고했음이 드러나면 너는 나를 기만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저, 저, 저이가 노야를 시해한 것은 틀림없는…….”
“닥쳐라. 묻는 말에나 답해라.”
“그, 그, 그것이 그러니까……, 헉!”
소웅성이 원숭이 사내의 머리칼을 붙잡고 들어올렸다. 그러나 그는 심문을 잇지 못했다. 극심한 공포로 인해 원숭이 사내가 돌연 입에 거품을 물더니 혼절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사내를 내팽개치며 소웅성이 집법관에게 명했다.
“이자를 뇌옥에 가두어라. 신변에 이상이 생기지 않도록 책임지고 관리하라.”
집법관이 쭈뼛거리며 응답했다.
“알겠습니다, 전주.”
소웅성 주위에 몰려와있던 판관들이 항의를 쏟아냈다. 그들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소웅성은 소대성의 시신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재판은 끝났소. 판결을 내리시오들.”
판관 중 하나가 심중의 불안을 밖으로 꺼냈다.
“어쩔 참이오, 소 전주? 설마 재조사령을 발동하려는 건 아닐 테지?”
소대성을 안아들며 소웅성이 질문을 던진 판관을 노려보았다.
“당신들은 당신들의 일을 하시오. 나는 내 일을 할 터이니.”
그 말을 남기고는 소웅성이 별전을 나가버리자 장내엔 무거운 정적이 깔렸다. 판관들의 면상마다 난감함이 그득했다.
절대불리의 판세를 극적으로 뒤집었으나 나는 싱글벙글하지 못했다. 표정관리를 한 것이 아니었다. 소대성의 자결은 나로서도 몹시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소웅성이 나와 광객에 관해 따로 지시를 내리지 않았기에 우왕좌왕하는 별전의 집법관들을 대신해 백운영이 우리를 옥형전으로 데려갔다. 이름과 달리 뇌옥 같은 느낌을 전혀 주지 않는 번듯한 삼층 전각이었다.
전각 입구에서 나는 광객과 헤어져야 했다. 광객은 나와 떨어지기를 거부했다. 나는 감히 그에게 축객령을 따를 것을 종용하지 못하는 백운영을 위해 그를 구슬렸다. 내 안전을 재삼재사 확인한 광객이 마지못해 백운영의 수하들을 따라 괴선이 든 귀빈전으로 떠났다. 백운영을 비롯한 집법전의 인사들은 학창의에 문사건을 쓴 중년인이 정말 그 광객이 맞는지 의심스러운 모양이었다. 나를 ‘은공’이라 호칭하며 광객이 내게 보이는 고분고분한 태도는 세상에 알려진 흉포한 광인의 언행과는 거리가 멀었다.
광객을 떨쳐낸 백운영은 나를 전각 일층의 다실로 안내했다. 뭉근한 김이 올라오는 찻잔들이 놓인 고급탁자를 사이에 두고 나와 마주앉은 백운영이 뜻밖의 얘기를 꺼냈다.
“어젯밤 고연에서 내 오숙(五叔)께서 자네에게 큰 실수를 했다고 들었네. 그 어른은 내게 전서구를 보내 자네를 보면 자네가 당신께 보인 관용에 다시금 감사를 표하라고 이르셨네.”
나는 백운영이 칼귀가 망신을 당했음을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아닐 것 같았다. 그러나 틀린 짐작이었다.
“오숙의 분부를 따르고 싶네만 솔직히 그러기 힘드네. 자네의 선처에 감사하기보단 오숙께 행한 자네 처사에 분기가 이는구먼. 내 입장에서는 너무 지나쳤네.”
나는 백운영이 마음에 들었다.
“내가 좀 심하긴 했습니다.”
나를 지그시 바라보던 백운영이 찻잔을 집어 들었다.
“마시게나. 장산의 명품 백엽차일세.”
안 그래도 목이 말랐기에 나는 찻잔에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여름날 냉수 마시듯 한 번에 찻물을 입 속에 쏟아 부었다. 그러자마자 인상을 썼다. 목젖에 불이 붙은 것 같았다.
백운영이 실소했다.
“자넨 특이한 사람이구먼.”
“…….”
가벼운 담소를 이을 것 같더니 백운영이 별안간 정색했다.
“어떤 판결이 나오건 전주는 현가 신 봉공 시해 건을 재조사할 방침인 모양이네. 아마도 내가 그 임무를 맡게 될 걸세. 원칙적으로는 자네에게 알려주면 안 되지만 굳이 얘기하는 까닭은 엄정하고 불편부당한 조사를 할 것임을 천명하기 위함일세.”
“믿겠습니다.”
백운영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그러더니 장광설을 쏟아냈다.
“인우당의 악적들을 처단했다고 들었네. 철마류도 급습해 수십의 마인들을 척살했다면서? 실로 엄청난 쾌거일세. 그러나 자넨 정사마(正邪魔) 모두를 적으로 삼고 말았네. 설사 신 봉공 시해 건에서 정당방위가 인정되어 처벌을 면하더라도 정맹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정맹의 중추라 할 오대세가는 여전히 자네를 눈엣가시로 여길 걸세. 현가는 물론이고 광객과 구원(舊怨)이 있는 성가도 자네에게 감정이 좋을 리 없을뿐더러 이번 오숙의 일로 해서 본가의 어른들도 자네를 곱게 보지 않을 터일세. 그들 가문의 치부인 도치를 끌어들인 일로 소가 역시 그럴 테고. 심지어 자네와 아무 관련이 없는 황가(黃家)도 자네에게 우호적이진 않을 걸세. 다른 세가들의 눈치를 봐서가 아닐세. 설령 자네가 신 봉공을 살해하지 않았더라도 자네는 오대세가 전체의 암묵적인 공적이 되었을 걸세. 이유를 알겠는가?”
어찌 모르겠는가. 그 정도는 진소월의 머리를 빌릴 것도 없었다.
오대세가는 내 발전가능성을 경계하는 것이었다. 일천년 무림사 최강의 무존들이라는 십왕조차도 내 나이 때 초절정의 검호를 꺾는 건 불가능했다. 나는 방치하면, 그리고 정상적으로 성장하면 장차 십왕을 능가할 절대무존이 될 잠재력을 지닌 천룡이었다. 오대세가로서는 내가 더 크기 전에 싹을 밟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으리라.
나는 백운영을 응시했다.
그의 질문에 대한 답을 알았지만 그 질문에 담긴 의도에 대해서는 감도 잡히지 않았다. 나는 문득 진소월을 떠올렸다. 그녀라면 백운영의 속을 읽어냈을까.
내가 침묵하자 백운영이 자답했다.
“오대세가는 무림에 자신들이 길들이기 힘든 야생마가 등장하는 걸 극도로 꺼린다네. 중원육기처럼 말일세. 그런데 자넨 야생마 수준이 아니라 맹수일세. 아니, 괴물이라고 부르는 게 맞겠구먼. 그러니 진짜 괴물이 되기 전에 어떻게든 손을 쓰려들 걸세. 인우당과 철마류를 건드렸으니 사파와 마도 역시 자네를 두고만 보지는 않을 테지. 괴선과 광객이 자네 편이라 해도 보호막이 될 수는 없다는 뜻일세.”
나는 더 참지 못하고 직설적으로 물었다.
“내게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충고하기 위함일세.”
“…….”
“인우당과 철마류에서 보인 행적은 자네가 정파의 인사임을 증명하고도 남네.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내 오숙께 과한 망신을 주긴 했으나 실제로 위해를 가한 건 아니니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네. 적어도 나는 그러하네. 본가의 어른들은 달리 생각하겠지만.
아무튼 나는 자네가 나나 소 전주와 동류라고 보네. 말하자면 자넨 정파의 든든한 자산일세. 나는 그 자산이 대의를 추구하기보단 사사로운 이익에 매달리는 이들에게 훼손되는 걸 보고 싶지 않네.
그러니 충고컨대 강호를 떠나게. 가서 자네 가치를 키워 아무도 자네를 건드리지 못할 만큼 강해지면 돌아오게나. 이를테면 본맹의 맹주만큼 말일세. 어느 고인들이 자네를 길러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만한 역량이면 충분히 그 목표를 이룰 수 있을 터이지. 자넨 너무 일찍 세상에 나왔네. 혹은 너무 일찍 자네를 드러냈네.”
기왕에도 백운영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으나 나는 그가 더욱 좋아졌다. 그러면서 그가 지금 보이는 모습 그대로의 사람이길 바랐다. 그렇지 않다면 참으로 실망스러울 것이었다.
“말씀은 고맙습니다. 다만 충고에 따를지 여부는 생각해보겠습니다.”
백운영은 말없이 나를 주시했다. 그러고는 반쯤 남은 차를 마저 마시고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알겠네. 부디 현명한 결정을 내리길 빌겠네. 그리고 허락한다면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네만.”
“그러시지요.”
“전날 안평 무림대회에서 사문이 따로 없다고 했다고 들었네만,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부모님과 몇몇 친인들로부터 이것저것 배웠을 뿐 따로 사승을 두지는 않았습니다.”
“자네 부모님이나 무공을 전수해주었다는 이들에 대해 말해줄 수 있겠는가?”
나는 백운영에게 기꺼이 내 과거사를 들려주려고 했다. 그러나 다음으로 미루어야했다.
기척도 없이 다실에 들어선 이는 초로의 문사였다.
그를 본 순간 미남자를 본 소녀처럼 내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의 가슴에 ‘주(主)’라는 글자가 수놓아져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맹의 인사들은 의복에 소속을 표시했다. 직급은 소매의 띠로 구분했다. 문사의 옷에 박힌 ‘주’는 그가 맹주인 무왕의 심부름꾼이라는 의미였다.
정맹 행을 결심했을 때 나는 내심 무왕과의 조우를 기대했다. 기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동기였다. 나는 아버지의 우상이자 내 이름자의 근원이 된 이를 친견하고 싶었다.
그러나 무왕은 내가 원한다고 만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내 속마음을 읽은 진소월은 무왕이 나를 부를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초를 쳤다. 무왕은 정맹의 대소사에 관여하지 않기로 유명했다. 마음만 먹으면 절대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음에도 그는 맹주 위에 추대된 후 철저하게 스스로를 고립시킨 채 은둔자의 삶을 고수해왔다. 정맹 내에서도 그의 얼굴을 보기란 하늘의 별따기로 알려져 있었다.
족집게 점쟁이인 양 앞일을 잘 맞추는 진소월의 예상에 낙심하면서도 나는 반론을 제기했다. 자신의 처소에서 두문불출한다지만 무왕은 외부의 정보까지 차단하지는 않을 터였다. 그렇다면 자신의 젊은 시절을 능가하는 무력을 현시했다는 기린아에 대해 호기심이 생기지 않았을까. 그 기린아가 정맹에 들었다는 보고를 받으면 얼굴을 보고 싶어 하지 않을까.
나는 삼천리 너머에 있을 진소월에게 승리의 미소를 날려 보냈다. 다행히 김칫국을 마신게 아니었다.
“맹주께서 보자고 하시오.”
백운영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문사가 내게 용건을 밝혔다. 뱃속에서 솟구치는 환호성을 억제하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혹감을 만면에 드리운 백운영도 몸을 일으켰다.
“다녀오게.”
그에게 양해를 구할 필요가 없어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다실을 나가는 문사를 따라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