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46
제45화 왼손입니다
어김없이 행인들의 시선이 내 면상에 달라붙었다.
나를 보는 사내들과 여인들의 눈빛은 확연히 달랐다. 약간의 두려움은 공통적이었으나 전자는 강자에 대한 존중심과 질투가 강한 반면 후자는 호기심과 혐오감이 보다 뚜렷했다. 나는 원중의 저자를 지나올 때 그랬던 것처럼 나에게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내는 남녀들에게 눈을 부라려 겁을 줄까하다가 참았다. 이곳이 정맹임을 의식해서가 아니라 대사를 앞두고 경건한 마음가짐을 견지하기 위해서였다.
끈적끈적하게 달라붙던 시선들이 어느 순간 사라졌다. 고색창연한 단층와옥이 늘어선 거리로 접어들면서부터였다. 길을 지나는 이들도 적었지만 있다손 쳐도 내 쪽으로 눈길을 보내지 않았다. 다만 그들도 은연중에 나를 힐끔거리기는 했다.
와옥마을 끝에 숲이 나왔다. 두 사람이 겨우 어깨를 나란히 하고 지나갈만한 좁은 길을 가리키며 나를 안내해왔던 문사가 말했다.
“저리로 뚝 들어가면 맹주님을 뵐 수 있을 거외다.”
그의 역할을 여기까지라는 뜻이었다. 나는 집법전의 무사들처럼 거만함이 몸에 밴 문사에게 감사의 예를 차리지 않고 오솔길로 향했다.
길은 의외로 짧았다.
반각도 지나지 않아 오백 평가량의 타원형 공터가 나왔다. 연무장이라고 보기엔 애매한 공간이었다. 바닥은 돌이 아니라 흙이었고 주위는 벽 대신 죽림으로 둘러쳐져있었다.
촌로들이나 걸칠 허름한 마의를 입은 노인 한 명이 달걀모양의 공터 저편에 서서 나를 보고 있었다. 거리가 십여 장에 달했지만 안력을 돋운 나는 노인의 외양을 코앞에서 보듯 살필 수 있었다.
평범했다. 너무나 평범했다. 눈, 코, 귀, 입, 어느 하나 특징적인 구석이라곤 찾아보기 어려웠다.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육십 대 중반 노인의 얼굴이었다. 주름살도 딱 그 연령대에 어울리게 나있었다. 유심히 보았더라도 뒤돌아서면 금방 잊어버릴 인상이었다.
그러나 그 노인은 천하에서 가장 비범한 무인이었다. 그는 수십 종의 병기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방면의 무학에서 전부 극상의 경지에 이른 천재였다. 또한 그는 강호의 맨 밑바닥에서 시작해 무림의 정점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노인, 무왕을 본 순간 나는 충격을 받았다. 검왕과는 정반대의 의미였다.
태산 같은 무게감을 과시했던 검왕과 달리 무왕에게선 위압감이라곤 먼지 한 톨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검왕의 기운이 해일처럼 밀어닥쳤던 반면 무왕의 풍기는 분위기는 산들바람 같았다. 아니, 텅 비어있다는 표현이 보다 적절할 터였다. 존재하되 인지할 수 없는 공기와 비슷했다.
그가 무왕인지 몰랐다면, 저자에서 지나치며 보았다면, 나는 절대로 그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을 것이었다. 무시한다는 의식도 없이 그냥 지나쳤을 것이었다. 나를 손가락 하나로 짓눌러 죽일 수 있는 절대강자를!
꿀꺽.
침 넘어가는 소리에 정신을 차린 나는 일부러 씩씩한 걸음걸이로 무왕에게 다가갔다. 그의 오륙 보 앞에 이른 나는 걸음을 멈추고 포권했다. 물론 머리는 깊숙이 숙였다.
“전충이 무왕 어르신을 뵙습니다.”
엎드려 예를 차리지 않은 내 불경을 문제 삼지 않고 무왕이 무덤덤하게 내 인사를 받았다.
“어서 오너라.”
높낮이가 없는 음성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무왕을 직시했다. 거리가 가까운데다 내가 그보다 일 척 이상 컸기에 그를 내려다보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무왕의 동공엔 한 점의 불쾌감도 깃들어있지 않았다. 나는 마치 감정이 없는 목석과 마주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무왕이 단도직입했다.
“무력이 대단하다고 들었다. 네 성취를 보여주겠느냐?”
나는 약간 실망했다. 무왕이 내 무력을 알아보기에 앞서 내 내력부터 물어주길 내심 바랐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아버지 얘기와 내 이름에 얽힌 사연을 꺼낼 수 있었을 터였다.
나는 다시 포권했다.
“보잘것없는 솜씨이오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철마와의 격전에서 입은 내-외상이 완쾌되지 않아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으나 나는 굳이 그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생사투를 벌인다면 원래 무력의 절반밖에 발휘하지 못하겠지만 단순히 초식의 공부를 드러내는 것이라면 별 차이가 없을 터였다.
철봉과 옥소를 꺼내며 나는 과감하게 요구했다.
“저는 도법과 검공을 익혔습니다. 외람되오나 어르신께서 친히 제 수들을 받아주시길 바랍니다.”
가면 같았던 무왕의 얼굴에 변화가 생겼다. 입술 끝을 살짝 씰룩인 것이었다. 순간 나는 기묘한 위화감에 휩싸였다. 그것은 아버지 특유의 고소이자 내가 자연스럽게 물려받은 표정이기도 했다. 설마 그것이 무왕을 흉내 낸 것이었단 말인가.
입술을 원상태로 돌린 무왕이 손을 들었다. 다음 순간 나는 눈알이 튀어나올 뻔했다. 무왕의 뒤편에 있던 두 마디 길이의 대나무 두 개가 그의 양손으로 빨려들어서였다. 무왕은 무형지기로 청죽을 베고 허공섭물로 잘린 대나무들을 가져온 것이었다. 나로서는 꿈도 못 꿀 신기였다.
“어느 쪽이 검공이더냐?”
“왼손입니다.”
얼떨결에 대답했지만 나는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 설마 이이는 나만의 비기라 확신했던 좌검우도(左劍右刀)마저 실현했단 말인가.
내가 충격을 추스를 겨를을 주지 않고 무왕이 개시를 촉구했다.
“시작하라.”
비무를 벌이기엔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그러나 나는 뒤로 물러서서 공간을 확보하는 대신 무왕에게 돌진했다. 그의 허를 찌르기 위해서였다.
끽!
내 철봉과 무왕의 대나무가 부딪치며 괴상한 소리를 냈다. 그 기음을 시발로 네 개의 무기가 어우러진 격렬한 충돌이 이어졌다.
격렬하다고 말했지만 창피한 초반전이었다.
나도 모르게 긴장했던 탓인지 내 손놀림엔 불필요한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고 몸놀림은 한심할 정도로 엉성했다. 나는 무왕이 시험을 중단할까봐 불안했다.
다행히 그가 내 빈틈을 공략하지 않고 삼십여 초를 받아준 덕분에 서서히 몸이 풀린 나는 본격적으로 내 절학들을 펼쳐보였다. 무왕의 눈빛에 보일 듯 말 듯 한 이채가 서렸다. 바람직한 징조였다.
아직 덜 아문 뼈가 시큰거렸지만 신이 난 나는 마음껏 구환도법과 뇌전십이검의 절초들을 쏟아 부었다. 자연스레 육박전은 원거리 공방전으로 바뀌었다.
방어일변도로 대응하던 무왕이 내가 뇌전참참을 쏘아낸 것을 기점으로 반격을 가미했다. 비로소 비무다운 비무를 이끌어낸 나는 고무되었다. 그러고는 결정적인 순간 나로서는 최강의 수법인 뇌전중중을 날렸다. 눈에 보이는 뇌전과 보이지 않는 뇌전을 다 쳐내고 피해냈지만 무왕이 돌연 거리를 훌쩍 벌리더니 대나무 봉들을 내렸다. 무심하던 그의 눈에 인간의 감정이 일렁거렸다. 놀랍게도 놀라움이었다.
나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는 뇌전중중의 현묘함에 놀란 게 아니었다. 그가 놀란 까닭은 그의 반격을 흘려낸 내 움직임에 있었다.
말없이 나를 응시하던 무왕이 느닷없이 나에게 쇄도해왔다. 그러고는 파상공세를 퍼부었다.
맞불을 놓지 못하고 나는 회피에 급급했다. 조기에 나를 끝장낼 수 있었음에도 무왕은 심술궂은 고양이가 생쥐를 가지고 놀 듯 번번이 결정타를 보류하고는 집요하게 나를 몰아붙였다.
나는 악착같이 버티며 인우당과 철마류에서 얻은 깨달음을 구현해 냈다. 내가 구사하는 신기에 도취된 나는 황홀경에 젖었다. 어느새 무왕은 사라지고 그가 휘두르는 대나무들만 시야에 들어왔다. 빛의 속도였지만 대나무들이 그리는 선들이 명확하게 보였다. 나는 내 커다란 몸뚱이가 마치 연기처럼 그 촘촘한 선들 사이를 빠져나가는 기변을 체험했다.
전율의 극치에 오른 순간 갑자기 절벽에서 추락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다음 순간 정신이 돌아왔다. 어리둥절했다. 나는 땅바닥에 쓰러져있었고 무왕은 내 바로 앞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중얼거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나는 무왕이 낯설었다. 흔들리는 눈빛. 떨리는 음성. 내가 공터에 들어왔을 때 보았던 이와는 너무 달랐다. 어느 쪽이 본 모습일까.
내가 몸을 일으키자 무왕이 말했다.
“너는 그 아이의 후인이로구나.”
질문인지 혼잣말인지 헷갈렸으나 나는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무왕이 말하는 ‘그 아이’는 내 아버지임에 틀림없었다. 아버지는 무왕을 네 번 보았지만 무왕의 입장에선 두 번일 터였다. 그 중 한 번은 아버지가 아홉 살 때였고 두 번째는 열여덟 살 때였으니 고작 열 살의 나이차이임에도 무왕이 아버지를 ‘아이’로 기억할 만했다. 체구가 왜소하고 워낙 동안인지라 아버지는 열여덟에도 열서너 살 소년으로 보였을 터였다.
“몇 번 내 만류일합(萬流一合)을 견식한 정도로 이런 신법을 이루었단 말인가.”
나는 경탄과 경악의 심사를 여과 없이 담아낸 무왕의 음성에 울컥했다. 아버지가 들었으면 얼마나 기뻐했을까.
말을 잇지 못하는 무왕을 바라보며 나는 그와 아버지의 인연에 관해 떠올렸다.
* * *
전광이 견사휘를 처음 본 건 아홉 살 때였다. 우연히 산중에서 무인들의 비무를 관전하게 되었는데 그때 장공을 구사하는 산발괴인에게 쾌승을 거두었던 청년이 견사휘였다. 견사휘는 나무 뒤에 숨어있던 전광에게 눈길을 주고는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의 일은 전광이 무인지로에 들기로 결심한 계기가 되었다.
두 사람은 그로부터 구 년 후에 재회했다. 공교롭게도 그들이 처음 조우했던 백향산에서였다. 당시 안평 무림대회에서 입은 중상으로 전광은 마차에 실려 가던 중이었다. 그러다 참극이 벌어졌다. 녹림도가 낙향하던 청인무관 일행을 습격한 것이었다. 연이은 비명성에 전광은 관주와 교두들이 몰살당했음을 알았다.
전광은 산적 하나라도 저승길에 데리고 갈 각오로 비수를 움켜쥐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비명성이 그치지 않은 것이었다. 제삼자가 등장했음을, 그리고 그가 녹림의 패거리를 도륙하고 있음을 깨달은 전광은 흥분했다. 그리고 미지의 협객이 마차 문을 열었을 때 그 흥분은 극에 이르렀다. 그이가 구 년 전 그에게 신세계가 있음을 알려주고 그 세계로 발을 들이도록 이끌었던 신비청년이기 때문이었다.
* * *
무왕은 당연히 내 아버지를 만나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와 나 모두가 유감스럽게도 그럴 수가 없었다. 그 ‘불세출의 천재’는 더 이상 이 세상에 머물러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무왕의 요청으로 아버지의 파란만장했던 인생사를 풀어놓았다. 대체로 묵묵히 귀를 기울였지만 무왕은 이따금 적극적으로 질문을 던지거나 자신의 회상을 추가하기도 했다. 예컨대 백향산의 산적 떼를 소탕하고 아버지를 구해주었을 때의 일화를 그의 관점에서 들려주었다.
“나는 그 아이가 십 년 전 그 산에서 보았던 꼬마임을 알아보았다. 사내아이치고는 너무나 예쁜 얼굴인데다 나로서도 잊을 수 없는 일전의 목격자이기 때문이었을 게다. 강호초출 이후의 첫 번째 비무는 아니었으나 처음으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던 비무였다. 그날 내가 물리쳤던 폭뢰장은 당시 성주 무림의 십대고수 중 한 명으로 꼽히던 강호였으니까.
심하게 몸을 상한 그 아이를 친분이 있는 의원에게 데려다주었지만 왠지 그냥 두고 갈 수가 없더구나. 그래서 그 아이가 어느 정도 기동할 수 있을 때까지 얼마간 그 집에 머물렀더랬다. 그 아이는 내가 뒷마당에서 수련할 때마다 창문에 붙어서 구경하더구나. 나는 그 아이가 지켜보고 있음을 알았지만 내버려두었다. 차마 무인으로서의 생명이 끝장난 그 아이에게 모질게 굴 수가 없었다. 본들 이해하지 못할 거란 착각도 있었고.
그런데 기껏해야 열두어 번 정도 밖에 안 될 시현을 보고서, 그것도 아직 보완해야 할 점들이 적지 않았던 만류일합이었음에도, 그를 바탕으로 그렇게 초절한 신법을 창안하다니. 참으로 안타깝구나. 단전이 온전하고 불구의 몸이 되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무림사의 한 장을 장식할 일대종사가 되었을 것을.”
아버지의 불운을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질 것 같으면서도 뿌듯했다. 무왕의 한탄은 아버지에 대한 최상의 찬사였다.
나는 계속 아버지의 삶을 그의 우상이었던 이에게 전했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나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기실 내 이야기는 끄트머리에 짤막하게 덧붙였지만 무왕의 반응은 전에 없이 강렬했다. 그의 안광에 일렁이는 감정이 무엇인지 깨달은 나는 소스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