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49
제48화 나를 이기면 네 부탁을 들어주마
첩지를 펼치자마자 진소월의 안색이 변했다.
나도 덩달아 긴장했다. 설마 마련의 마인들이 쳐들어온 건가.
그러나 진소월이 내민 첩지의 내용을 확인한 순간 맥이 풀렸다. 한편으론 의아했다. 대체 이 녀석이 나를 왜 찾아온 거지?
미리 밝히거니와 나는 첩지에 적힌 불청객을 시작으로 세 명의 방문객을 맞이하게 될 터였다. 셋 다 나를 보러 올 거라고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이들이었다. 모두가 내 인생에서 중요한 의미를 차지하게 될 이들이기도 했다.
진소월에게 첩지를 돌려주며 내가 물었다.
“이 자식이 왜 왔을 것 같소?”
웬일인지 진소월의 복숭아 빛 뺨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천하제일미남자를 보게 된다는 기대감에 설렌 건가. 그렇게 생각해선지 진소월의 목소리도 들뜬 것처럼 들렸다.
“모르겠어요. 어서 가 봐요. 그리고 가능하면 그를 장원에 초대해줘요.”
괜히 기분이 나빠졌다. 그래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말은 해 보겠소.”
진소월이 같이 가자고 할까 봐 나는 바로 출발을 고했다.
“다녀오겠소.”
몸을 날리는 내 등 뒤로 진소월의 음성이 쫓아왔다.
“꼭 데려와요.”
나는 응답하지 않았다.
야심한 시각이었으나 쾌락의 도시이기도 한 전원은 불야성을 이루었다.
소월루는 여전히 시끌벅적했다. 그러나 평소와는 뭔가 달랐다. 취객들의 주정과 창기들의 교성과 벌써부터 합일에 들어간 남녀가 흘리는 열락의 신음성 대신에 흥분에 겨운 목소리들이 연못 맹꽁이들의 합창처럼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쉴 새 없이 고막을 두드리는 ‘검황자’라는 별호에 인상을 쓰며 나는 진청운의 거처로 향했다.
아버지를 닮은 진청운이 삼층 목조건물의 입구에서 서성이다 나를 보고는 달려왔다.
“어서 오게. 그분은 일층 별실에서 기다리고 계시네.”
나는 진청운의 경어가 언짢았다. 하지만 그에게 시정을 요구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이고는 전각 안으로 들어섰다. 복도를 지나며 마주친 시비들은 예외 없이 미약에 취한 듯 해롱해롱했다. 그것도 꼴 보기 싫었다.
다실의 문 앞에도 서열이 높은 시비 네 명이 기웃거리고 있었다. 그러더니 내가 다가가자 포악한 고양이를 본 생쥐들처럼 달아났다. 제길.
나는 문을 거칠게 열었다. 그러자 아름답다는 표현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옥면을 지닌 청년이 시야에 들어왔다.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미청년이 반반한 면상에 걸맞은 옥음을 토해냈다.
“어서 오오. 이렇게 만나다니 정말 기쁘오.”
누더기나 다름없는 백의도 청년, 검황자의 신비로운 용모를 손상시키지 못했다. 그의 맞은편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며 내가 야박하게 쏘아붙였다.
“왜 왔냐?”
무례하다고? 나는 다섯 살 연상인데다 승자였다. 그러니 반말할 자격이 있었다. 만약 검황자가 따지면 그렇게 일러 줄 참이었다. 하지만 검황자는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는 대신 미소를 지었다. 사내인 나도 순간적으로 숨을 멈추었을 만큼 뇌쇄적인 미소였다. 빌어먹을.
“당신을 보러 왔소.”
들으나마나한 대답이었다.
“그러니까 왜 나를 보러왔냐고? 설마 설욕전을 하려고 온 거냐?”
“궁극적으로는 그렇소.”
“뭔 소리야? 어째서 나중으로 미뤄? 지금 당장 하면 될 것을.”
“나는 아직 당신을 이길 수 없소.”
절로 콧방귀가 나왔다. 검황자는 거짓말에 서툴렀다.
“입에 침이나 바르고 그런 소릴 하시지. 진짜 이유가 뭐야? 혹시 나한테 졌다고 검총에서 쫓겨난 거야?”
“그렇지 않소. 실은 내가 사부께 청했소. 나가서 당신을…….”
“잠깐, 네 사부가 검왕이야?”
“세상에서는 그분을 그렇게 칭한다고 들었소.”
길쭉한 꼬챙이 같았던 노인이 떠오르자 나도 모르게 오금이 저렸다. 나는 목전의 청년을 함부로 다루지 않기로 했다. 너무나 막강한 배경을 가진 놈이기 때문이었다.
“그 어른이 나가서 나를 깨고 오래?”
“……그런 말씀은 아니었으나 결론적으로는 대충 비슷하오.”
“근데 왜 궁극이니 뭐니 떠들었어? 지금 붙어도 나를 꺾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볼따구에 처덕처덕 바르고서.”
검황자가 우물쭈물했다. 진소월로 빙의된 나는 그의 속을 헤아려보았다.
“너, 혹시, 나를 핑계 삼아 그 무덤에서 빠져나오려고 했던 거 아냐? 그리고 이왕 나온 김에 실컷 바깥세상을 즐길 심산인 거지. 그래서 나와의 승부를 최대한 늦추려는 거고.”
정곡을 찔렀다. 파랗게 질린 검황자의 낯짝이 그 증거였다.
“어이, 일어서.”
“왜 그러시오.”
“나는 네 놀음에 놀아날 만큼 한가로운 처지가 아냐. 당장 가서 결판을 내자고. 물론 너는 이번에도 나한테 깨질 거야. 뭐, 그렇게 되면 검총으로 돌아가지 않을 명분이 생기겠네. 하지만 일부러 져주거나 하면 가만 안 둘 거야. 검왕 어르신에게 달려가서 이를 거란 말이지.”
유치한 수작이었으나 제대로 먹혔다.
“그러지 마시오. 최선을 다하겠소.”
잠시 쭈뼛거리더니 검황자가 내 속을 뒤집는 발언을 했다.
“그런데 내가 당신을 이기더라도 얼마간 비밀로 해주겠소? 당신 말처럼 나는 세상구경을 좀 더 하고 싶구려.”
검황자의 소박한 소망에 장단을 맞춰줄 기분이 아니었다. 나는 남들이 무서워하는 내 고리눈을 한껏 부라렸다.
“그러니까 지난번엔 전력을 다하지 않았단 말이지? 나도 마찬가지야. 노인들한테서 들었겠지만 내 특기는 검공이 아니라 도법이니까. 내가 제대로 하면 넌 내 상대가 안 돼.”
검황자의 정심한 눈빛에 청광이 번득였다. 그러나 그는 반박하지 않고 침묵했다. 아직도 의자에 앉아있는 그를 내려다보며 내가 제안했다.
“이렇게 하자. 나를 이기면 네 부탁을 들어주마. 하지만 어설프게 패배하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검황자가 미끼를 덥석 물었다.
“그러겠소. 부디 약속을 지키길 바라오.”
기가 막혔다. 검황자의 자신감은 확신에 가까웠다. 그렇게나 내가 우습게 보인단 말인가.
“가자.”
우리는 전각을 나왔다. 밖에 모여 있던 수백의 군중이 일제히 탄성을 터뜨렸다. 검황자가 모두의 시선을 독차지한 것은 물론이었다. 나는 보는 눈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천공으로 비상했다. 나 못지않게 초절한 신법을 선보이며 검황자가 내 뒤를 이었다.
장원 근처를 지나다 잠시 검황자를 그곳에 데려와 달라던 진소월의 청이 떠올랐지만 나는 장원에 들르지 않고 내쳐 날았다. 도중에 일부러 속도를 올렸지만 검황자는 뒤쳐지지 않고 따라왔다.
때 이르게 호승심이 발동한 나는 최고속력을 냈다. 조금씩 검황자와의 거리가 벌어졌다. 그러면 그렇지! 내가 흡족한 미소를 머금은 순간 검황자의 신형이 번개로 화하더니 내 옆에 붙었다. 나는 아연했다. 이런 신법이 있다니.
우물 안 개구리였음을 깨달은 나는 일순지간 의기소침해졌다. 정말로 이 기생오라비 같은 놈은 나를 이길 패를 쥔 게 아닐까. 그래서 그토록 자신만만해 했던 걸까.
나는 심중에서 움트는 조바심을 눌렀다. 이제 곧 그 불편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얻을 터였다.
소개를 하지 않았음에도 괴선과 광객은 검황자를 보자마자 그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그와 이차전을 치를 거라는 내 말에 두 사람 모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에게 승패가 가려질 때까지 절대로 끼어들지 말라고 주의를 준 나는 철봉과 옥소를 빼들었다. 이곳은 검총이 아니니 그곳의 규칙을 따를 이유가 없었다. 나는 가진 패를 총동원해 검황자에게 본때를 보여줄 작심이었다.
나와 팔구 장을 격하고 선 검황자가 느릿느릿 검을 뽑았다. 그의 여유가 고까웠다. 녹슨 철검을 축 늘어뜨린 채 나를 응시하는 검황자의 눈에 검왕을 닮은 깊고 고오한 빛이 일렁거렸다.
캉!
철봉과 옥소를 맞부딪쳐 개전을 알린 나는 초장부터 강수를 들고 나왔다. 옥소로 펼친 천라도망에 검황자를 가두고는 철봉으론 뇌전참참을 연달아 쏘아낸 것이었다. 괴선조차도 쉽게 받아내기 어려운 맹공이었다. 원력은 최대치의 칠 할 이상을 담았다.
나는 이 공격으로 검황자를 쓰러뜨리진 못하더라도 주도권을 틀어쥐리라 확신했다. 그런 연후 최대치에 준하는 원력과 일차전 때보다 진일보된 뇌전중중으로 단숨에 승부를 끝장낼 참이었다.
뇌전중중에 대비하고 있겠지만 검황자는 먼젓번과는 사뭇 다른 방식과 위력에 대처하지 못할 터였다. 설사 그럴 수 있더라도 뇌전중중과 동시에 날아갈 구환도법 최강의 공격초식 벽력붕산은 막아낼 수 없을 것이었다.
이것이 내 수읽기였다. 그러나 검황자는 내가 구상했던 수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내 첫수에 움츠러드는 대신 내가 전혀 예측하지 못한 반격을 해왔다.
연쇄적으로 날아간 네 발의 탄강이 그의 동체에 작렬하려는 찰나 미동도 없던 검황자가 철검을 부렸다. 그 순간 나는 직감했다. 그가 나보다 한발 앞서 승부수를 던졌음을.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을 순차적으로, 혹은 병렬적으로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녹슨 검의 검첨에서 솟아난 한줄기 아지랑이는 회오리바람으로 화하더니 내가 쏘아낸 뇌전들을 집어삼켰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를 가두었던 도강(刀剛)의 그물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그것만으로도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은 신기였는데 검황자가 발한 일수의 무서운 점은 그 다음에 드러났다. 단숨에 내 공격을 무력화시킨 선풍(旋風)은 소낙비가 되어 나를 덮쳤다.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완벽한 봉쇄였다. 호신강기를 두를 겨를이 없었기에 빗줄기 중 하나라도 걸리는 날엔 관통상을 면치 못할 터였다. 그리고 그것으로 승부는 종결될 것이었다. 생사투라면 사정이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중상을 입은 채 동귀어진하자고 발악할 수는 없었다.
이것이 검황자의 수읽기에 담긴 노림수일 터였다.
상대의 수에 고분고분 받아주는 순둥이들은 고수가 되기 어려웠다. 나는 고수 중에서도 초고수이니 당연히 검황자의 의도에 순응하지 않을 참이었다.
그러나 의지만으로는 위기를 벗어날 수 없었다. 타개책은 실질적인 실력에서 나와야 했다. 그 부분에서 나는 역부족이었다.
그야말로 외통수였다. 피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거니와 어디로 피하든 반드시 걸릴 것이었다.
패배가 목전에 닥친 절체절명의 순간 나는 한 가지 장면을 떠올렸다. 그럴 여유가 있었느냐고 따지지 마시라들. 처음에 말하지 않았던가. 모든 일이 눈 깜박할 사이에 일어났다고. 나는 다만 그 시점에서 시간이 멈추었다고 주장하고 싶다. 물론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힐난한다면 할 말은 없다.
아무튼 얘기를 계속하자면 강기의 소낙비를 맞으며 나는 불현듯 무왕과 비무할 시 마지막에 당했던 장면을 떠올렸다. 나는 나를 쓰러뜨린 무왕의 암수를 보지 못했다. 짐작컨대 설령 감지했더라도 회피하기는 어려웠을 것이었다.
지난 닷새 내내 잠을 자건 똥을 싸건 밥을 먹건, 대화를 하거나 수련을 하거나, 무엇을 하든 나는 문득문득 무왕의 일수를 생각했다. 그러면서 그에 대한 파훼법을 궁리하고 또 궁리했다.
전혀 다른 수법이었으나 나는 검황자의 신기에서 무왕의 그림자를 보았다. 그리고 형태는 고사하고 아직 윤곽조차 갖추지 못한 무왕 전용 대비책을 실행에 옮겼다. 정지했던 시간이 풀리고 장내엔 나도, 관전하던 괴선과 광객도, 경이로운 신공을 현시한 검황자도 상상치 않았을 광경이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