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5
제04화 나는 미치지 않았소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어이가 없어 입을 다물자 제 엄포에 주눅이 들어서 그런 거라 해석했는지 노인이 짐짓 부드러운 음성을 흘렸다.
“평생 다시없을 복운을 만난 줄이나 알아라, 이놈아. 내가 그냥 지나쳤으면 네놈은 내일의 해를 보기도 전에 불귀의 객이 되어버렸을 게다.”
나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를 조소로 받아들인 노인이 다시 으르렁거렸다.
“이놈이, 내 말을 개뼈다귀로 여기는 게지!”
꼭 그런 건 아니었지만 나는 변명하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그러자 노인이 벌떡 일어섰다.
내가 워낙 크고 노인은 오 척이 될까 말까한 단구인지라 그가 기립했음에도 눈높이가 엇비슷했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노인이 허리를 한껏 펴서 시선의 우위를 점했다. 그러더니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네놈은 강기(剛氣)가 뭔지 아느냐?”
“나를 바보로 아시오? 세상에 강기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소?”
“허면 강기를 일으킬 재간이 있느냐?”
내가 즉답을 못하고 우물거리자 노인이 승자의 미소를 날렸다.
“그럴 줄 알았다. 네놈에게 그럴 능력이 있으면 검황자(劍皇子)와 맞먹는 괴물이게. 제법 알량한 재주를 지녔다만 강기라니, 어림도 없지.”
“뜬금없이 강기 얘기는 왜…….”
“보채지 않아도 말해주려고 했다, 이놈아.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금언이니 귀를 씻고 잘 들어라. 그 전에 하나 물어보자. 당금 무림에 강기를 구사할 수 있는 무인이 몇 명이나 될 것 같으냐?”
“…….”
“어째서 대답이 없어?”
“그걸 내가 어떻게 아오?”
“모르면 주둥이 다물고 초야를 맞는 새색시처럼 얌전히 앉아있을 것이지 뭐가 잘났다고 입을 째는 게냐? 그나저나 네 입술은 원래 그런 거냐 아니면 얻어맞아 퉁퉁 부은 게냐? 그도 아니면 벌에 쏘였냐?”
“…….”
내 두툼한 입술에서 욕설이 터져 나올 기색이자 노인이 잽싸게 산으로 보냈던 배를 강으로 끌어내렸다.
“무림사에 전례가 없는 융성기를 맞았다고는 하나 초절정고수의 상징이라 할 강기를 병기에 두를 수 있는 자들은 중원을 통틀어도 일백 명 남짓에 불과하다. 새외까지 범위를 확산하면 그보단 많겠지만 아무튼 개나 소나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제대로 된 강기를 뽑을 수 있으면 대충 중원 백대고수(百大高手)에 들 자격이 생긴다는 말이다.”
“그래서요? 대체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오?”
“허어, 이런 아둔한 놈을 봤나. 이 정도로 세세히 알려주었으면 짝짝 알아들어야지.”
잠시 노인과 눈싸움을 벌인 나는 엉덩이에 묻은 흙을 털고 일어섰다. 그러고는 반 각 전 노인이 나왔던 송림으로 몸을 날렸다.
나를 뒤쫓으며 노인이 소리쳤다.
“뭐하는 게냐, 이놈?”
나는 말없이 달리기만 했다. 경신을 펼쳐 나를 추월한 노인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어딜 내빼려고 이놈! 아직 얘기 덜 끝났…….”
말을 하다말고 노인이 팔을 들어 올려 방어 자세를 취했다. 내가 바지주머니에서 조약돌을 꺼내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돌멩이를 던졌다.
쐐액.
노인의 머리 위로 날아간 까만 돌은 십여 장 떨어진 풀밭을 달리고 있던 흰 토끼를 맞췄다. 사냥에 성공한 나는 배를 쓸었다.
“일단 배부터 채워야겠소. 어젯밤부터 아무 것도 먹지 못했소.”
노인이 성을 냈다.
“이놈아, 고작 토끼 새끼 하나 잡으려고……, 아니지, 그러고 보니 네놈을 따라다니느라 나도 진종일 쫄쫄 굶었구나. 그래, 일단 요기부터 하자.”
“나 혼자 먹기에도 부족하오.”
“이런 인정머리 없는 놈을 봤나. 양이 모자라면 한 마리 더 잡아오면 될 거 아니냐? 후딱 다녀오너라.”
“싫소.”
“그럼 나눠먹던가.”
“그것도 싫소.”
“생명의 은인에게 이렇게 야박하게 굴어야겠느냐? 아무리 못 배워먹었어도…….”
“노인장이 언제 내 생명을 구해줬소?”
“이제 곧 그렇게 될 게다, 이놈아. 그건 그렇고 이런 쓸데없는 입씨름 할 시간에 저놈이나 굽는 게 어떠냐? 배고프다며?”
꼬르르 꼬르르륵.
기다렸다는 듯 내 뱃속에서 아귀들이 아우성을 쳤다. 나는 일단 노인의 제안에 응하기로 했다. 토끼를 가리키며 내가 물었다.
“껍질 벗기기와 불 지피기 중 뭘 할 거요?”
“나더러 일을 하란 말이냐?”
“거지요? 거저 얻어먹으려고 하게.”
“이놈이 갈수록 태산일세. 아무래도 먼저 버르장머리부터 고쳐야겠구나. 아니지, 내가 뒷골목의 건달도 아니고 주먹보다는 우선 말로써 도리를 가르치는 게 순리일 터. 귓구멍 빡빡 후비고 잘 듣거라, 이놈아. 노인공경은 고대왕국 시절부터 수천 년이나 면면히 내려온 이 땅의 갸륵한 전통…….”
“아, 됐소.”
노인이 튀기는 침을 피하며 나는 품에서 부싯돌을 꺼냈다. 그러고는 주위의 잔가지를 긁어모았다.
“뭐하는 게냐, 이놈?”
“보면 모르오? 토끼를 익히려면 불을 붙여야 할 것 아니오? 가서 토끼나 가져 오쇼.”
“이런 덜 떨어진 놈. 그래 갖고 어느 세월에 먹어. 비켜라, 이놈아. 내가 할 테니.”
잔가지 더미 옆에 쪼그려 앉은 노인이 검지를 내밀었다. 희한하게도 중지보다 길었다. 중지가 짧아서가 아니라 검지가 기형적으로 긴 것이었다.
노인을 지켜보던 나는 눈을 부릅떴다. 노인의 검지 끝에 붉은 기가 돌더니 잔가지에 불길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어, 어떻게 한 거요?”
말을 더듬는 내 반응에 만족한 노인이 으스댔다.
“이 정도에 호들갑이라니, 한심한 놈. 내 진짜 실력을 보면 졸도하겠구나. 여하간 날로 먹을 생각하지 말고 그놈 껍질이나 벗겨라. 나뭇가지도 더 모아오고.”
나는 침을 삼켰다. 노인을 처음 보았을 때 내부에서 일었던 긴장감은 오류가 아니었다. 노인은 엄청난 고수임에 틀림없었다.
소중한 소금을 제 것인 양 마구 뿌려댔지만 나는 노인에게 눈치를 주지 않았다. 토실토실 살이 오른 토끼 뒷다리 두 짝도 싹싹하게 양보했다. 걸신들린 듯 눈 깜짝할 사이에 대부분의 고기를 혼자서 먹어치운 노인이 더러운 소매로 입을 닦았다.
“간에 기별도 안 가지만 그럭저럭 허기는 면했구나. 근데 아까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강기를 일으킬 수 있으면 백대고수에 드니 마니 하는 데까지 했소.”
“흠, 그래도 나름 귀를 기울이고 있었구나. 하면 내가 왜 그 얘기를 꺼냈는지 알겠느냐?”
“백도방에 강기를 구사하는 자가 있음을 말하려던 거 아니오?”
“호오, 아주 맹탕은 아니구나. 그래, 맞다, 이놈아. 다만 절반만 맞았다. 나머지 절반은 무엇, 아니 누구이겠느냐?”
“그야 뻔한 것 아니오? 태극검문에도 그런 강자가 있다는 뜻일 테지.”
“뜻일 테지? 테지? 가뜩이나 말이 짧은데 숫제 반말이구나?”
“하다 보니 그렇게 됐소. 그런데 이 변방에 중원 백대고수에 드는 자들이 둘이나 있단 말이오?”
“말 돌리긴 이놈이. 뭐, 백대고수 끄트머리에 걸릴까 말까 하겠지만 태극검문의 사마귀와 백도방의 대머리는 공히 강기를 두를 수 있는 자들이긴 하다. 그들은 강할뿐더러 성질머리도 더럽기 그지없다. 특히 사마귀는 네가 그 철부지 녀석의 대가리를 깨뜨린 일을 묵과하지 않을 게다. 만약 그 아이에게 후유증이라도 있으면 네놈에게 대가를 받아내겠다며 길길이 날뛸 게 불 보듯 뻔하다. 체면을 상하게 한 정도를 넘어 문파의 미래를 망가뜨린 셈이니까.
백도방의 대머리도 마찬가지다. 홍 태사란 작자가 백도방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까 그 송사리들을 부린 걸 보면 상당한 고위직일 테지. 그러니 네가 그 작자를 처치하도록 대머리가 수수방관할 리 만무하다. 이제 네가 얼마나 멍청한 짓을 저질렀는지 알겠느냐? 호랑이 코털을 건드린 정도를 넘어 아예 뽑아버린 것이나 진배없단 말이다. 그것도 동시에 두 마리를. 그런데도 알아서 할 테니 신경 끄라고? 그게 생명의 은인에게 할 소리냐, 이놈아?”
나는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했다.
하지만 불안하거나 두렵기는커녕 최초로 해귀의 목을 땄던 날만큼이나 들떴다. 세상에 나오자마자 중원백대고수에 드는 강자들을 상대할 기회가 생기다니.
“나는 비무에서 정당한 방식으로 승리했을 뿐이오. 아까도 그 멀건 자식이 덤벼서 응했을 뿐이고. 그러니 태극검문은 나에게 그 자식의 부상에 관한 책임을 물을 권리가 없소. 백도방의 경우도 마찬가지요. 나는 다만 원수에게 내 선친의 사사로운 빚을 받아내고자 할 뿐이오. 원수의 죄는 백도방과는 무관하니…….”
“어지간하면 끝까지 들어주려 했더니 도저히 안 되겠구나. 순진한 게냐 멍청한 게냐? 둘 다일 테지. 잘 들어라, 이놈아. 무림은 근본적으로 명분 따윈 개나 주는 짐승들의 세계다. 사마(死魔)의 악귀들만이 아니라 정파의 탈을 쓰고 있는 무리도 다를 바 없다. 그런 식의 시시비비는 먹혀들지도 않을뿐더러 명만 재촉할 따름이다. 힘이 뒷받침되지 않는 명분은 공염불에 지나지 않음이야. 장담컨대 태극검문의 사마귀에게 방금 그 잡설을 늘어놓으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네 모가지는 몸뚱이에서 분리될 것이고 못다 한 말은 염왕에게 가서 읊어야 할 게다.”
“꼭 그렇게 되리라 예단할 수는 없잖소? 내가 그 멀건 자식을 죽이거나 병신으로 만든 것도 아닌데 그만한 일로…….”
“하아, 네놈하고 말을 섞고 있노라니 복장이 터질 지경이구나. 이놈아, 길게 늘어놔봤자 내 입만 아플 테니 딱 잘라 말하마. 당장 달아나라. 네놈이 살 길은 그것뿐이다. 강호경험이 없는 네놈을 위해 피가 되고 살이 될 충고를 덧붙이자면 무작정 달아나다간 십중팔구 덜미를 잡힐 테니 인적 없는 곳을 골라가며…….”
“그럴 생각 없소.”
“이놈이, 그래도! 정녕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마실 셈이냐?”
“권주든 벌주든 술은 입에 대지도 않소.”
“이놈아, 그런 얘기가 아니잖으냐?”
“아무튼 내가 알아서 하겠소. 나를 염려하는 노인장의 마음은 고맙게 받겠소.”
“그러다 뒈진다니까!”
“대체 왜 생면부지인 나를 그렇게 걱정하는 거요?”
노인이 갑자기 중지보다 한 마디나 더 긴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댔다.
숲 너머에서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경악성들이 날아왔다.
백도방의 인사들이 나한테 당해 쓰러진 자들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잠시 후 소란이 멎고 발자국 소리들이 멀어지자 노인이 대화를 재개했다.
“아무래도 믿는 구석이 있는 게로구나? 필히 방수들이 있을 테지?”
“그런 거 없소.”
“그럼 뭐냐? 설마 초절정고수인 사마귀와 대머리를 상대하고도 목숨을 부지할 자신이 있다는 게냐?”
“…….”
“어럽쇼, 이놈 보게. 정말 그런 모양이네. 허어, 미친 게냐, 아니면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게냐? 아니, 그럴 리가 없지. 내가 누군데.”
“나는 미치지 않았소.”
“뭐라? 그렇다면 내 안목이 틀렸다는 소리냐?”
“그렇게 말한 적 없소.”
나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던 노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말로 해서는 들어먹을 종자가 아니로다. 귀찮은 건 질색이지만 이것도 인연이니 사람 하나 살리는 셈치고 가르침을 주마. 사마귀나 대머리가 지닌 무력의 삼분지일 정도만 쓸 테니까 어디 용을 써 봐라. 네가 얼마나 무모한 짓거리를 하려는 건지 알게 될 게다. 그러고도 깨닫지 못한다면 그냥 미친 것이니 나도 내 갈 길을 가마. 미친놈들을 일일이 구제하려다간 한도 끝도 없으니까.”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진즉부터 바라던 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