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50
제49화 너무한 거 아뇨?
검황자가 상상하지 못한 건 내가 그의 소낙비를 맞고도 멀쩡하다는 것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아주 온전하지는 않았다. 빗줄기가 스친 겨드랑이와 옆구리, 그리고 종아리엔 가볍지 않은 외상을 입었다. 목도 뻐근했다. 강선에 담긴 경력으로 내기도 격탕되었다. 그러나 운신불능의 중상은 아니었기에 나는 곧바로 반격을 할 수 있었다. 애초에 결정타로 삼으려 했던 뇌전중중과 벽력붕산이었다.
하지만 나는 내 최강의 수로 되갚아주지 못했다. 내-외상이 의외로 심해서가 아니었다. 내가 비장의 패를 꺼내지 못한 건 받을 대상에게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피를 토하고 엎어지는 자에게 손을 쓸 수는 없지 않은가. 검황자가 제 풀에 쓰러질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나는 어리둥절했다.
괴선과 광객은 원초적인 경악을 표정에 담고 있었다. 그들은 상상도 못했을 터였다. 검황자가 그토록 강할 줄은. 검황자가 선보인 검공은 공히 초절정 극상의 고수인 그들로서도 감당할 수 없는 절대무학이었다. 즉살 당하진 않을 테지만 둘 다 상당한 부상을 입었을 게 뻔했다.
두 기인은 또한 검황자의 신검을 무위로 돌린 내 신법에 기절초풍한 신색이었다. 나 자신도 내가 해낸 게 신기했기에 그들의 놀란 것도 당연했다.
휘이잉.
강풍이 불었다. 나는 바람에 떠밀려 검황자에게 다가갔다. 잘난 면상을 바닥에 처박은 검황자는 호흡이 막혀있었다. 나는 그를 뒤집어 반듯이 눕혔다. 별로 친절을 베풀고 싶진 않았으나 숨은 쉬게 해주어야 했다. 흙투성이에다 입가엔 선혈이 낭자했지만 그 와중에도 ‘미모’를 잃지 않은 검황자의 낯짝을 보니 괜히 부아가 치밀었다.
“장난 하냐? 어서 안 일어나, 인마!”
검황자는 내 욕설을 무시했다. 혼절한 자는 반응을 할 수 없는 법이었다. 나는 그를 걷어차려다 말았다.
충격을 수습한 괴선과 광객이 우리 쪽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나와 검황자를 번갈아 쳐다보며 괴선이 감상을 뱉어냈다.
“너희는 대체 뭐하는 괴물들이냐?”
“보면 모르오? 천룡과 이무기지.”
광객이 끼어들었다.
“어떻게 이 아이를 쓰러뜨렸는가, 은공? 아니, 그 전에 어떻게 그 빛살들을 흘려냈는가? 바로 앞에서 보고도 전혀 보지 못했네.”
나는 첫 번째 질문에 답했다.
“제가 한 게 아닙니다, 어르신. 이 자식이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다…….”
괴선이 내 말을 잘랐다.
“옳거니! 이 아이는 혼신의 힘을 다해 네 놈에게 지난번의 패배를 설욕하려던 게였어. 얼마나 간절했으면 정신을 잃을 정도로 모든 걸 쏟아냈을까 그래. 좀 봐 주지 그랬느냐, 이놈아. 그렇게 인정머리가 없어서 어디다 써먹겠느냐?”
나는 괴선에게 반박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와 입씨름을 시작하려는데 검황자가 신음성을 흘리며 눈을 떴기 때문이었다.
참으로 오묘한 눈빛이었다.
망연함, 부정, 고통, 분노, 체념, 수긍, 경탄이 무지개의 색처럼 층층이 깔려있었다.
“나는 나를 과신했소. 형과의 일전에서 얻은 깨달음 덕분에 오랫동안 갇혀있던 틀을 부수고 새로운 영역에 들어섰고, 이론으로만 이해했던 뇌풍우(雷風雨)를 초현했기 때문에 승리를 절대적으로 자신했소. 그런데 자만이었구려. 나는 착각했소. 형이 그날 나를 상대로 보인 무력이 전부일 거라고. 그런데 이제 보니 형은…….”
나는 검황자의 넋두리를 중단시켰다.
“형이라고 부르지 마. 너 같은 동생 둔 적 없어.”
괴선이 참견했다.
“그래, 아이야. 이깟 곰탱이를 형이라고 부를 게 무어야. 그러기엔 네 용모와 기품이 너무 아깝구나. 강호에 나오면 위 아래로 열 살까지는 맞먹는 법이다. 그러니 너도 이놈을 그냥 이름으로 부르려무나. 충아, 충아, 이렇게 말이다. 아니면 나처럼 이놈, 저놈해도…….”
순진한 검황자가 혹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었기에 나는 괴선의 괴변을 차단했다.
“아, 됐소. 말 같지도 않은 소릴.”
괴선이 반발하기 전에 나는 검황자를 노려보며 재빨리 말했다.
“그냥 형이라고 해. 그리고 엄살 부리지 말고 일어나. 너를 보고 싶다는 사람이 있다.”
“미안하지만 회복할 시간을 좀 주오. 내부가 상해서 당장은 몸을 움직이기 어렵구려.”
괴선이 소매를 걷어붙였다.
“걱정마라, 아이야. 내가 너를 안고 가마.”
검황자의 동의도 얻지 않고 그를 안아든 괴선이 나에게 눈을 부라렸다.
“어디냐, 이 아이를 보자는 자가 있는 곳이? 앞장서거라, 이놈.”
나는 괴선의 명에 따랐다. 그와 실랑이를 벌이기 싫어서가 아니라 진소월에게 지금의 검황자를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개미 코딱지만큼, 나는 그녀가 말끔한 검황자를 보고 설렐까봐 우려스러웠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거니와 ‘개미 코딱지만큼’이었다.
두 남녀의 대면은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딴판이었다.
오지랖 넓은 괴선이 장원으로 오다가 시내에서 검황자의 얼굴을 씻긴 탓에 그는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상태였다. 그를 본 진소월의 뺨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검황자는 더 가관이었다. 분을 쳐 바른 듯 허여멀건 한 그의 안면 피부는 벌겋다 못해 숫제 화롯불 속의 인두처럼 시뻘게졌다. 그는 심지어 말까지 더듬었다.
“나, 나, 나는 송지광이라고 하오.”
“진소월이에요.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해요, 송 공자. 꼭 뵙고 싶었어요.”
나는 심통이 났다. 진소월의 목소리는 평소와 사뭇 달랐다. 더욱 조신했고 그러면서도 흥분기가 확연했다. 입을 열면 불퉁한 말이 튀어나올 게 빤하기에 나는 일부러 침묵했다. 나를 신경 쓰지 않고 진소월이 검황자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분홍빛 입술을 열었다.
“전 공자를 찾아온 이유를 알아도 될까요?”
검황자가 꾸물거리기에 내가 대신 답했다.
“나하고 한 판 하려고 왔답디다. 그리고 여기 오기 전에 다시 나한테 깨졌소.”
진소월의 봉목에 기광이 번득였다. 나는 뜨끔했다. 너무 노골적이었나?
뜻밖에도 검황자의 기분을 배려하지 않고 진소월이 직설적으로 물었다.
“전 공자에게 재차 패배했으니 이제 검총으로 돌아갈 건가요?”
나도 궁금했기에 검황자의 답변을 기다렸다. 그는 한참 뜸을 들인 후에야 입을 열었다.
“허락한다면 형을 이길 수 있을 때까지 이곳에 머무르고 싶소.”
“아!”
진소월이 탄성을 내질렀다. 표정엔 기쁨이 완연했다.
이런 제길, 저렇게 대놓고 좋아하다니. 너무 한 거 아뇨?
내 무언의 항의를 묵살한 진소월이 이상한 질문을 토해냈다.
“혹시 이번 비무 결과와 방금 전 송 공자가 말한 내용을 강호에 공표해도 될까요? 결례인 줄 알지만 긴급한 사정이 있어 바로 답을 듣고 싶어요.”
나는 비로소 진소월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 * *
교통의 요지이자 쾌락의 도시로 유명한 전원에서 발원된 풍문이 온 대륙을 휩쓸었다.
장차 무림사 최강의 지존이 될 거라고 평가받던 검황자가 최근 강호를 떠들썩하게 만든 마웅을 찾아 일합을 겨루었다는 것이었다.
기실 둘의 무위를 두고 그간 말들이 많았다. 두 달여 전 마웅이 태극검문의 단천검을 꺾음으로써 만천하에 무명(武名)을 알렸을 즈음에는 검황자를 상수로 보는 견해가 절대다수였다. 이는 순전히 단천검이 검황자에게 패했던 사일검보다 이름값이 떨어진다는 데 기인했다.
그러나 마웅이 세연 인우당에서 고루색귀 윤승을 황천길로 보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여론이 변했다. 고루색귀는 강호십대악인 중에서도 무력 상으로는 일이 위를 다투는 강자였다. 그와 사일검이 붙는다면, 그리고 그 승패를 두고 내기를 한다면 열에 아홉은 그에게 돈을 걸 터였다.
다만 고루색귀를 처치함으로써 마웅이 검황자에게 우위를 차지한 것은 아니었다. 검황자가 자신을 단순히 이긴 정도가 아니라 시쳇말로 ‘갖고 놀았다’는 사일검의 증언 때문이었다. 두 기린아의 우열을 두고 온 천하에서 논쟁이 벌어졌지만 결론은 나지 않았다. 결국 둘이 직접 겨루어 승자와 패자를 가리기 전에는 답을 알 수 없는 문제였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그 결과는 세인들을 놀라게 했다.
마웅이 검황자를 이긴 자체가 충격적인 것은 아니었다. 마웅의 우위를 점친 이들도 꽤 많았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놀란 건 이번 일전이 검황자의 입장에서 설욕전이라는 데 있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둘의 대결은 처음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한 달 이십여 일 전 검총에서 일차전을 치렀다고 했다. 그날의 승부에서 마웅은 검황자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지만 검총에 들지 않고 강호로 돌아갔다. 경우가 좀 다르긴 하지만 십 수 년 전 무왕이 입총의 자격을 획득하고도 발길을 돌린 전례를 연상시키는 행동이었다.
두 달 가까이 절치부심한 검황자는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검총을 떠나 마웅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전원 외곽의 모처에서 마웅과 자웅을 겨루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마웅의 벽을 넘지 못하고 석패하고 말았다. 이에 검황자는 검총으로의 복귀를 보류하고 마웅을 꺾을 때까지 그의 곁에 머무르겠다고 선언했다.
당연히 마웅의 위상은 급등했다.
검황자가 지녔던 위명을 고스란히 흡수한 덕분이었다. 그가 장차 무림사 초유의 무황(武皇) 위(位)에 등극할 거라는 데엔 이견이 없었다. 그의 무위는 같은 나이 대의 십왕과 견주었을 때 최소한 두 단계는 위라는 게 중평이었다.
다만 실제로 마웅이 훗날 고금제일인의 권좌에 오를지를 두고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았다. 그 자리에 이르기 전에 도태되리라 보는 이들이 다수였다. 무림의 열 마리 맹호들이 그가 온전히 천룡으로 성장하도록 두고 볼 리 만무하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마웅은 몸을 사려도 모자랄 판에 정사마 무림 모두를 적으로 돌리는 중대한 실착을 범했다. 하루 빨리 명성을 떨치고픈 욕망에서 비롯된 행보였을 테지만 실로 경솔하고도 성급한 처사였다.
당장 마련에서 그를 응징하려 들 게 뻔했다. 괴선과 광객이라는 천하기인들을 방수로 두었다지만 마련의 마두들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어쩌면 마웅은 올해를 넘기지 못하고 이승을 하직할 지도 몰랐다. 무림사 귀퉁이에 한때 엄청난 평가를 받았던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로 기록되며.
* * *
나는 불만이었다.
어째서 별호가 그대로란 말인가. 검황자를 꺾었으니 최소한 무황자(武皇子)쯤은 되어야 하지 않은가. 하다못해 마련과 척을 졌으니 마(魔)는 떼 줘야 할 게 아닌가.
아무리 용을 써도 딱지가 떨어지지 않을 거라던 괴선의 말이 저주가 된 듯해 나는 그에게 신경질을 부렸다. 괴선은 사과하거나 유감을 표명하기는커녕 약을 올림으로써 내 화를 돋우었다. 그에게 화풀이를 할 수는 없었기에 나는 애꿎은 바위만 박살냈다.
진소월마저 별호에 집착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은근슬쩍 ‘무적천룡(無敵天龍)’이라는 자작 별호를 언급하며 세상에 퍼뜨려주기를 바랐으나 그녀는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나는 검황자를 이용해 나를 장원에 붙잡아놓은 그녀의 계획에 재를 뿌릴까 하다가 참았다. 그만한 일로 아녀자에게 앙갚음을 한대서야 대장부라 할 수 있겠는가.
실은 만사가 그녀가 예견한 대로 진행될지를 확인하고픈 마음에 장원을 떠나지 않은 것이었다. 맹세코 그녀와 검황자만 두고 가는 게 꺼림칙해서 남은 게 아니었다. 나를 그런 좀팽이로 여겼다면 당신들 완전 잘못 본 거다. 그랬던 이들은 각자 알아서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눈들을 도려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