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54
제53화 칭찬은 나중에 하고 일단 갑시다
등줄기가 서늘했다.
독왕은 마흔 어림에 독문의 일인자이자 독곡의 주인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로부터 물경 일 갑자 성상을 남방 무림의 절대자로 군림해온 것이었다. 반백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자신의 뜻을 거역하는 자를 경험해보지 못했을 그에겐 건건이 토를 다는 내 태도가 낯설면서도 신경에 거슬렸을 터였다. 기실 지금까지 참은 것도 그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리라.
생존본능의 강력한 경고에 따라 나는 원래 하려고 했던 말을 혀끝에서 바꾸었다.
“……자신이 있사오나 솔직히 말씀드려 십 할의 안전을 장담하지는 못합니다. 사조님의 조치로 인해 저는 완벽하게 안전해질 것입니다. 실로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입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독왕의 표정이 풀렸다. 어떤 면에서는 떼쟁이 아이나 옹고집 노인처럼 비위만 맞춰주면 되기에 다루기 쉬운 부류였다.
나는 눈치를 보며 주의사항을 당부했다.
“그런데 제게 보내주신다는 이들에게 가급적 은밀하게 저를 찾도록 일러주시길 바랍니다. 제 적들이 그들의 존재를 알지 못해야 위급한 상황이 발생할 시 보다 큰 효과를 볼 수 있을 테니까요.”
내 주위에 독인들이 얼쩡거린다는 소문이 나면 나와 척을 진 현가나 삼절문 등이 이용해먹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들은 필히 독왕의 방문을 거론하며 나와 독문을 엮으려 들 터였다. 독인들은 내가 독곡의 하수인이라는 그들의 주장에 강력한 근거를 제공해 줄 것이었다.
독왕의 안면을 가득 메운 주름들이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입에서는 ‘칼칼칼’ 괴성이 터져 나왔다. 지금 이 늙은이가 파안대소한 건가?
“걱정 말거라. 아무려면 내가 그 정도도 고려하지 않았겠느냐? 그 아이들은 아무도 모르게 너를 찾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나에게 오는 날까지 한시도 네게서 떨어지지 않고 그림자처럼 너를 보위할 것이다.”
나는 불현듯 깨달았다. 나에게 독인들을 붙여놓으려는 독왕의 진짜 의도를.
독인들은 나를 지키고 감시하되 최악의 경우 내가 사망하면 내 시체를 독왕에게 가져가는 임무를 맡게 될 것이었다. 정확히 얼마나 내 골수의 원력이 보존되는지는 몰랐으나 최소한 며칠은 소실되지 않을 터였다. 독물(毒物)은 쉬이 썩지 않는 법이었다.
나는 위험을 무릅쓰고 문제점을 지적했다.
“죄송하오나 때로는 그들과 떨어져야 할 것입니다. 가령 제가 그들과 함께 저자에 나가면 사람들은 금방 그들이 사조님께서 보내신…….”
독왕이 내 말을 끊었다.
“그 점에 관해서는 염려할 것 없다. 한 명만 빼고 아무도 그 아이들이 독인임을 알아보지 못할 터이니. 그 하나는 어디 심처에 꽁꽁 숨겨두면 되지 않겠느냐?”
이쯤 되자 나는 독왕이 내게 보낸다는 독인들이 어떤 자들인지 궁금해졌다.
“알겠습니다, 사조님. 다시 한 번 하해와 같은 은혜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나는 머리를 조아렸다. 내 뒤통수에 흡족함을 담은 독왕의 광소가 떨어졌다.
나는 장원을 향해 걸었다. 다소 조마조마했던 심정은 오솔길 너머에 일렁이는 세 개의 기운을 감지한 순간 편안해졌다. 진소월은 살아있었다!
나는 기운이 둘이 아니라 셋인 까닭을 짐작했다. 짐작대로였다.
마당에 들어서니 와옥 앞에 모여 있던 이들이 경주하듯 내게로 달려왔다. 다리를 절면서도 진청운이 제일 먼저 내 목전에 이르렀다.
“아아, 무사했구먼. 다행일세. 정말 다행일세.”
진소월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이는 갔나요?”
“그렇소.”
내 대답을 들은 진청운-진소월 부녀가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토해냈다. 나는 진청운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어떻게 그를 여기에 데려오신 겁니까?”
내 질문을 힐난이나 비난으로 곡해했는지 진청운의 안색에 그늘이 드리웠다.
“나로서는 어쩔 수 없었네. 자네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지 않으면 전원의 모든 생명체를 몰살시킨다고 협박하는 통에. 그렇더라도 독왕이 자네와 몇 마디 나누기만 할 거라고 하지 않았더라면 고민을 했을 걸세.”
“잘 하셨습니다.”
나는 진청운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그는 내 원력의 유래에 관해 알지 못했다. 그러니 독왕의 목적이 내 원력을 취하는 데 있음도 몰랐을 터였다.
한결 표정이 밝아진 진청운이 뒷말을 이었다.
“여기에 거의 이르렀을 때 독왕이 갑자기 날아오르더구먼. 딸아이에게서 자네가 이리로 오기로 했다는 말을 듣고서야 그가 자네의 기를 포착하고는 곧장 그리로 갔음을 알았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었기에 간만 졸이고 있었는데 이리 무사한 모습을 보니 감사하기 이를 데 없구먼.”
묵묵히 나와 진청운의 대화를 듣고 있던 진소월이 분홍빛 입술을 열었다.
“정말 심장이 녹아내리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가 전 공자에 대해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냥 중원 무림의 초신성을 보겠다고 수천 리를 달려오지는 않았을 텐데.”
“나는 내 모친을 빼닮았소.”
“아!”
예상대로 진소월은 내 대답을 듣자마자 바로 전후사정을 파악했다.
나는 진소월과 후속조치를 짧게 의논한 후 바로 늪지로 돌아갔다.
독왕의 방문에 대해 알려주자 괴선과 광객은 소스라칠 정도로 놀랐다. 반면 검황자는 무덤덤했다. 그가 무림의 사정을 잘 몰라서 나온 차이가 아니었다. 두 기인은 내 원력에 관해 알고 있기에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이었다.
괴선이 나를 위아래로 살폈다.
“허면 네놈은 이제 쭉정이가 되었더냐?”
“보면 모르오? 나는 멀쩡하오, 노인장.”
“어째서 그 노물이 네 등골을 뽑아먹지 않았다더냐?”
나는 반 각 전 진소월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괴선과 광객은 내 탁월한 임기응변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아, 참으로 잔머리 하나는…….”
나는 찬사를 늘어놓으려는 괴선을 막았다.
“칭찬은 나중에 하고 일단 갑시다. 내일이면 독왕이 전원에 출현했다는 소식이 온 천하에 퍼질 거요. 그 전에…….”
괴선은 말귀를 알아들었다.
“옳거니! 네놈이 그 노물과 만나지 않았다고 사기를 치자는 말이렷다. 현가에 트집을 잡힐 수도 있으니.”
“제길, 사기라니! 묘안…….”
“됐다, 이놈아. 지금 쓸데없는 소리나 지껄이며 꾸물거릴 때냐? 어서 출발하자. 내가 앞장 설 터이니 다들 나를 따르라.”
괴선이 야천으로 비상했다. 내가 그를 따라 몸을 날리자 이야기를 해석하느라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던 광객과 검황자도 얼떨결에 경신을 전개해 우리를 쫓았다.
우리의 목적지는 우장산맥의 불귀곡이었다. 원래는 검황자를 보러 전원으로 몰려온 수십 만 호사가들을 몰아내기 위한 방안이었으나 나는 이 여정을 독왕과 조우하지 않았음을 알리는 증거로 삼고자 했다. 그래서 가는 길 곳곳에 우리의 흔적을 남겨두었다.
우리가 들렀던 시진들마다 난리가 난 것은 당연지사였다. 어디를 가도 검황자는 여인들을 홀렸고 나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사람들은 강호 최고의 기피인물로 악명을 떨치는 광객보다 나를 더 꺼리는 기색이었다. 인기나 인정 따윈 강아지 코털만큼도 바라지 않았으나 괜히 부아가 치밀었다.
마음만 먹으면 다음 날의 해가 떨어지기 전에 우장산맥에 당도할 수 있었으나 다섯 도시를 경유하며 경로를 노출한 탓에 우리는 늪지를 떠난 지 엿새 후에야 목적지에 이르렀다. 불귀곡에서는 열흘을 머물렀다.
나는 열흘 내내 상대를 바꿔가며 비무를 벌였다. 삼인과 손을 섞는 동안에는 오롯이 무공에만 매진할 수 있었다. 나는 독왕을 잊고 진소월도 잊고 세상도 잊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늘 머릿속에 담고 있었다. 나를 쓰러뜨렸던 무왕의 일수였다. 전혀 지각하지 못했던 그 일수를 염두에 두며 나는 그와 재회했을 시 대응책을 마련했음을 자랑하리라 다짐했다.
허황된 욕심이 아니었다. 나는 이미 첫발을 내딛은 상태였다. 전날 검황자의 소낙비를 피해내며 얻은 성취 덕분이었다.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려면 아직 상당한 수련이 필요하지만 길을 알기에 헤매지는 않을 터였다.
어느 하나 무광(武狂)이 아닌 이가 없었으나 모두들 내 열정에 혀를 내둘렀다. 나는 도약을 위해 웅크리는 개구리의 지혜를 배우라는 괴선의 잔소리를 흘려들으며 한 순간의 휴식도 없이 무공수련에 몰두했다. 지금은 온 힘을 다해 노를 저어야 할 때였다.
나에게 자극받은 광객과 검황자는 덩달아 침식을 거부하고 수련에 땀을 쏟았다. 괴선만이 우리더러 ‘정신 나간 작자들’이라 욕하며 잠도 자고 자기가 잡아온 사냥감도 먹었다.
일부러 우리 앞에서 노릇노릇 익은 노루고기를 뜯어먹으며 약을 올렸지만 괴선은 꼭 필요한 인물이었다. 그의 말마따나 우리 중 유일하게 ‘제정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열흘이 지났음을 상기시키지 않았다면 우리는 시간의 경과를 망각한 채 불귀곡의 귀신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 * *
피골이 상접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검황자는 몰라보게 야위었다. 광객도 비슷했다. 그러나 나는 열흘간의 금식에도 불구하고 별 차이가 없었다. 특이체질이라서가 아니라 워낙 뼈대가 굵고 큰 탓이었다. 기실 내 골격은 기형적이라 할 만큼 거대했다. 아버지가 왜소하고 어머니도 평범한 체격이었음을 감안하면 나는 일종의 돌연변이였다.
여하간 괴선이 장원으로 돌아가야 할 때임을 알렸을 때 나는 지극히 만족한 상태였다. 실로 절묘한 시점이었다. 그가 말하기 직전 이제부터는 비무수련을 중단하고 당분간 궁구에 전념하기로 작심했기 때문이었다.
나와는 달리 광객과 검황자는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마도 둘 모두 극점에 이르기 전에 멈추어야 했기 때문일 터였다. 나는 그들에게 나와 괴선만 먼저 갈 테니 충분히 연소한 후 오라고 권했다. 뜻밖에도 둘 다 내 제안을 거절했다. 그리고 둘 모두 연유를 묻는 내게 답을 얼버무렸다. 자기들도 정확한 이유를 모르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들이 나와 헤어지기 싫어서 그런 거라고 내 좋을 대로 해석했다.
우장산맥에 올 때와 달리 장원으로의 귀환은 도둑고양이의 행보를 택했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은밀히 돌아갔다는 말이었다. 인적 없는 길을 택하느라 꽤 우회해야 했음에도 시간도 하루 반나절밖에 걸리지 않았다.
진소월이 깨어있을 시간에 맞춰 일정을 조절했기에 우리는 야심한 시각에서야 장원에 이르렀다. 그녀는 우리가 오기를 기다리며 마당에 나와 있었다. 검황자는 그녀를 보고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하루 종일 출타했던 주인의 귀가를 반기는 강아지 같았다. 그러나 진소월은 그에게 냉담했다. 보다 못한 내가 보다 살갑게 대해주라고 눈치를 주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진소월은 내게만 상냥하게 굴었다. 검황자에게 헛된 애정을 품지 말라는 경고이자 배려였을 테지만 정작 당사자는 고통스러워 할 뿐이었다. 나는 이러다 검황자가 심마에 들지는 않을지 염려스러웠다. 진소월의 비밀을 귀띔해줄까 하는 유혹마저 들었다. 그를 받아들일 수 없는 몸이기에 그녀가 일부러 냉정하게 선을 긋는 것임을 알면 검황자도 마음이 편해질 것이었다. 그러나 진소월의 동의 없이 입을 열 수는 없었다. 고백은 어디까지나 그녀의 몫이었다.
재회의 인사를 나누고는 진소월이 바로 우리가 떠난 후의 상황을 전해주었다.
예상대로 독왕의 출현이 알려지자 온 대륙이 떠들썩했다. 그의 방문목적을 두고 온갖 억측이 떠돌았다. 내용은 제각각이지만 나와의 연관성을 찾는다는 면에서는 동일했다.
보성 현가와 사파의 일각에서는 벌써부터 내가 독왕의 끄나풀이라며 턱도 없는 모함을 일삼는 모양이지만 별 효력은 거두지 못하는 형국이었다. 끄나풀이라고 폄훼하기엔 나는 이미 너무나 거물이었고 하필 독왕이 전원에 나타난 날 밤 내가 검황자 등과 함께 전원에서 오륙백 리나 떨어진 오산에서 목격되었기 때문이었다. 정황상 독왕과 내가 마주치지 않았을 터이기에 현가나 사파가 나를 그와 묶는 건 억지스러워 보였다.
애초에 내가 계산한 대로였다.
차후의 계획에 관해 언급하려던 진소월이 입을 다물었다. 나와 두 기인, 그리고 검황자가 차례로 고개를 돌렸기 때문이었다. 우리 네 사람은 수풀 너머 대로에서 날아온 마차소리를 들은 것이었다. 보다 정확히는 그 마차가 질주를 멈추고 정지한 소리였다.
잠시 후 나는 검황자와 독왕에 이은 세 번째 방문객을 맞았다. 보고 나니 나름 이해가 된 두 사람과는 달리 이번에 나를 찾은 이는 정말로 상상도 못했던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