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56
제55화 살살 다루라고, 인마!
육중한 철마가 깃털처럼 사뿐히 마당으로 내려앉았다.
그에 이어서 우람한 체구의 구레나룻사내가 쿵 소리를 내며 땅에 착지했다. 나는 구레나룻이 전날 나를 추격했던 자들 중 하나가 아님을 알아차렸다. 초절정의 고수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구릿빛으로 그을린 터질 듯한 근육을 자랑하면서도 구레나룻은 고양이들이 노는 풀밭에 잘못 들어온 생쥐처럼 겁을 먹은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그의 역할을 짐작했다. 철마는 그를 길잡이로 데려왔을 터였다.
다시 한 번 철마의 용기, 혹은 무모함에 감탄했다. 내 주위에 괴선과 광객, 그리고 검황자가 있다는 사실을 그가 몰랐을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철마는 사실상 단독으로 용담호혈이나 다름없는 적지에 쳐들어 온 것이었다.
철마를 직시하며 내가 정식으로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오, 쇳덩이. 한 달 만인가?”
정확히는 한 달하고 사흘 만의 재회였다. 그러나 철마는 시시콜콜히 따지지 않고 반문으로 응수했다.
“네 패거리는 어디에 있느냐?”
“이게 전부요.”
철마의 동공에 광채가 일렁거렸다. 놀람과 불신이 반쯤 섞인 눈빛이었다. 나는 한 발 더 나아갔다.
“그리고 싸우는 건 당신과 나, 둘 뿐이오.”
“무슨 소리냐?”
“여기 광객 어르신은 우리 일전에 일절 관여하지 않으실 거라는 말이오. 물론 거기 덩치가 주제넘게 끼어들면 손을 쓰시겠지만.”
구레나룻 마인이 별안간 부르짖었다.
“저는 가만히 있겠습니다. 절대로 끼어들지 않겠습니다.”
나는 구레나룻을 비웃지 않았다. 마인도 똑같은 사람임을 또 한 번 확인했을 따름이었다.
내 눈짓을 받은 광객이 선선히 물러섰다. 철마를 힐끗 쳐다본 후 그가 마당 가장자리로 걸어가자 구레나룻 마인도 반대편 끝으로 달려갔다.
혼란한 심경을 고스란히 내비치는 철마의 눈을 응시하며 내가 말했다.
“어떤 음모도 함정도 없소. 나는 무인 대 무인으로 당신을 상대할 참이오. 물론 이 싸움은 한 쪽이 죽어야 끝날 것이오.”
내 진심이 전해졌는지 불안하게 흔들리던 철마의 안광이 안정되었다. 그러고는 짤막한 선전포고를 내놓았다.
“죽여주지.”
내가 일대일로 철마와 대결하기로 한 건 자신감의 발로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에 대한 존중의 의사표시였다. 그에겐 복수의 명분이 있었다. 그에게 나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져 제 수하들을 도륙한 철천지원수였다. 설령 자중하라는 주군의 명이 떨어졌대도 수하들의 원한을 갚지 않으면 장수의 자격이 없었다.
한편 철마는 전날 격전의 막판 등을 돌려 달아난 자신의 처신을 두고두고 후회하고 자책했을 터였다. 그 회한과 자책감이 옥쇄를 택한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었다. 아무 짝에도 도움이 안 될 떨거지 하나만 대동하고 원전으로 향하며 철마는 죽음을 각오했음에 틀림없었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자기의 적진이 감당불가의 전력을 갖추고 있음을 모를 리 만무했다. 목숨을 잃더라도 나 하나만은 저승길의 동반자로 삼을 작심이었으리라.
나는 그에게 원 없이 전력을 쏟아내고 이승을 하직할 기회를 주고 싶었다. 합공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와의 일대일 승부에서 패사(敗死)한다면 덜 억울할 것이었다.
“잠깐! 싸우기 전에 할 얘기가 있소.”
나는 당장이라도 내게 달려들 태세인 철마의 김을 뺐다. 잠시 후면 그든 나든 이 세상 사람이 아닐 터이니 궁금증을 해소하려면 지금 물어봐야 했다.
“당신은 마련 팔마 중 약한 편에 속한다고 알려졌는데, 정말 그렇소?”
철마의 시커먼 면상이 붉어졌다. 어떤 감정의 발현인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나를 뚫어져라 노려보더니 철마가 동문서답처럼 들리는 말을 쏟아냈다.
“그날 나는 천갑신공(天甲神功)의 완성을 알리며 제일마(第一魔) 도전을 선언하던 중이었다. 네가 대사를 그르치지 않았더라면 나는 본류의 사백 년 숙원을 이루었을 것이었다. 나는 내 사사로운 목표는 물론이고 본류 수백 동도의 염원을 망치고 깨뜨린 너를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말을 하면서 분기가 치솟았는지 철마가 돌연 가공스러운 기세를 피어 올렸다. 그러고는 내가 대꾸할 겨를을 주지 않고 내게로 돌진해왔다.
한 달 전 나는 철마에게 고전했다. 그가 제 몸뚱이의 단단함을 과신해 내 뇌전들의 직격을 허용하지 않았더라면 생사의 경계를 넘었을 공산이 컸다.
지금도 정면으로 치고받는 방식으로는 그에게 우위를 점하기 어려웠다. 파괴력만 따지면 철마는 여전히 나보다 윗길의 강자였다.
그럼에도 나는 신법으로 그의 권풍을 흘리며 원거리 공방전을 벌이는 대신 육박전을 받아들였다. 승산은 떨어지겠지만 승리할 시 소득은 훨씬 다대할 터이기 때문이었다.
원력이 증가했음에도, 그리고 최소한의 호신강기만 두르고 원력의 대부분을 철봉과 옥소에 주입했음에도, 나는 철마의 주먹에 밀렸다. 그의 팔에 부딪친 내 무기들이 전하는 충격이 뼈를 울렸다.
그러나 나는 지난번처럼 골절을 당하지 않고 버텨냈다. 회(回)와 절(折), 그리고 이(移) 등을 적시적소에 구사하며 충격을 완화시키고 분산시킨 덕분이었다. 내 오절신공은 철마와의 일차전 때보다 한 단계는 상승한 상태였다.
철마는 공세를 이어가면서도 저번처럼 내 반격을 동체로 받아내지 않고 권공으로 차단했다. 내상을 신경 쓴다는 반증이었다.
차분하게 설명했지만 우리의 대결은 사뭇 살벌하고 흉험했다. 둘 다 서로에게 치명상을 입히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쌍방 한 수만 급소에 제대로 찍히면 급격히 비세에 처할 터였고 그 직후엔 사선(死線)을 건너게 될 터였다. 문자 그대로 생사투였다.
사신의 그림자가 눈앞에 아른거렸지만 나는 몰아지경에 빠졌다. 황홀경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숨 돌릴 틈 없는 격전의 와중에도 나는 끊임없이 새로운 수법을 시도했다. 궁리와 실행의 의식적인 연환은 아니었다. 요리 재고 저리 따져 볼 여유 따윈 없었다. 싸우는 건 머리가 아니라 몸이었고 신수의 구사는 본능의 소관이었다.
어느 순간 나는 한계에 봉착했다. 더 이상은 철마의 무지막지한 공격을 정면에서 되받아칠 여력이 없었다. 그는 금강불괴에 준하는 갑피를 두른 괴물이었고 두드리고 두드려도 깨지지 않는 철옹성이었다.
아쉬움을 달래며 나는 철마와의 거리를 벌렸다. 촌각만 버티면 내 신법과 근접전에서의 도법, 검공에 상당한 성취가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지만 욕심을 부리다 탈이 나면 천추의 한을 남길 터였기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기세를 탄 철마가 끝장을 보려는 듯 맹렬하게 나를 몰아붙였다. 선천지기까지 쥐어짜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이미 전술을 수정했기에 나는 맞불을 놓지 않고 회피에 주력했다. 철마의 권풍과 내 극상의 이(移)가 남긴 잔영이 초겨울 햇빛 아래에서 기묘한 환상을 일으켰다. 나는 마치 구경꾼처럼 내가 창작의 일부를 담당한 환상의 광경을 감상했다.
좀 더 현실적으로 표현하자면 악착같은 살초와 필사적인 피하기의 줄다리기였다. 어느 쪽으로든 조금만 넘어가면 생사가 결정될 터였다.
명줄을 잘릴 뻔했던 아슬아슬한 순간이 네 차례나 있었으나 나는 끝끝내 철마의 파상공세를 빗겨냈다. 그리고 죽을힘까지 쏟아낸 그가 일시적으로 호흡을 고를 찰나 그의 무릎에 뇌전중중을 적중시켰다. 이 일격이 분수령이 되었다.
공수가 전환되었다.
나는 미세하나마 움직임이 둔해진 철마에게 맹폭을 가했다. 철마는 변함없는 위력의 권풍으로 반격했지만 내 뇌전들을 잇달아 전신 곳곳에 허용했다. 나는 집요하게 그의 부상당한 무릎과 목을 공략했다. 예상대로 철마는 목의 보호에 주력했다. 나는 야금야금 왼 다리를 운신불능으로 만들어나갔다.
패색이 짙어지자 철마는 물귀신작전으로 나왔다. 동귀어진은 물론이고 양패구상도 허용할 생각이 없었기에 나는 철저히 거리를 유지하며 차근차근 그를 두드렸다.
이윽고 난공불락의 철옹성이 허물어졌다. 무릎이 부러진 탓에 제대로 된 신법을 발하지 못하고 내가 날린 뇌전들을 몸으로 받아내야 했던 철마가 결국 땅바닥에 쓰러졌다. 완벽한 승세를 굳혔지만 나는 철마에게 접근해 마무리를 짓지 않고 원거리 공격을 고수했다. 내가 목을 치기 위해 붙으면 그는 필히 나를 잡으려 들 터이기 때문이었다. 철마의 마지막 노림수를 원천 차단한 나는 발버둥치는 그에게 가차 없는 살수를 퍼부었다.
저항불능의 상태에 처한 철마는 속수무책으로 뇌전의 소낙비를 뒤집어썼다. 어느새 그의 발광이 멎었다. 나는 철봉과 옥소를 내렸다. 그리고 기괴한 형체로 변한 철마를 바라보았다.
철마는 쇳덩이일지는 모르나 금강불괴지신은 아니었다. 그의 신체 곳곳이 패이고 으깨지고 꺾이고 비틀려있었다. 그럼에도 철마는 숨이 붙어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그의 숨통을 끊을 수 있었으나 나는 이것으로 승부를 종료하기로 했다.
“어이!”
내가 부르자 얼이 빠져있던 마인이 바닥에 대자로 엎어지더니 이마로 땅을 쳤다. 마도 특유의 항복 행위였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마웅. 충성을 맹세…….”
나는 얼뜨기 마인의 헛소리를 뭉갰다.
“시끄러. 저이를 데려가기나 해.”
마인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철갑공을 익혔다고 머릿속도 쇠가 됐냐? 네 대장을 너희 소굴로 데리고 가라고. 마음 바꾸기 전에 어서 꺼져.”
마인이 허둥지둥 철마에게 달려와 그를 들춰 멨다. 혼절하지는 않았기에 계속 나를 주시하고 있던 철마가 내게 시퍼런 안광을 날렸다. 나는 그의 심경을 헤아렸다. 모욕감을 느끼고 있으리라.
“잠깐 기다려.”
내 명에 마당을 떠나려던 마인이 철마를 내팽개치고 다시 바닥에 대자로 뻗었다. 기가 찼지만 나는 그를 꾸짖지 않고 철마와 시선을 맞추었다.
“당신을 동정하는 게 아니오. 내 성취의 가늠자로 쓰고자 하는 거요. 당신이 회복될는지는 모르겠으나 만약 그리되면 다시 붙어봅시다. 그때는 초반전의 전술만으로 당신을 압도해보이겠소.”
철마의 눈가에 경련이 일었다. 나는 그의 살이 떨릴 수 있음을 비로소 알았다. 나에게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으나 철마는 입을 열지 않았다. 어쩌면 혀를 놀리기 어려운 상태일지도 몰랐다.
나는 사지를 활짝 벌린 채 달달 떨고 있는 마인에게 출발을 명하며 주의를 주었다.
“어이, 이제 가 봐. 참! 네 대장 함부로 내던지지 말고. 살살 다루라고, 인마!”
“복명!”
벌떡 일어서며 우렁차게 소리치더니 마인이 조심스럽게 철마를 안아들었다. 그가 사당 저편으로 몸을 날리자 나도 뒤로 돌아섰다. 그러고는 퉁명스러운 질문을 토해냈다.
“여긴 왜 왔어? 둔덕에서 보기로 했잖아?”
검황자가 마당에 나타난 건 역전에 성공한 직후에야 인지했다.
원래 나는 격전 중에도 사방을 살피는 습관이 몸에 배어있었다. 그러나 철마와 싸우면서는 그에게만 집중했다. 광객을 절대적으로 신뢰했거니와 외부 변수가 발생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을 때 내 후방에 광객 외에 다른 이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때 하마터면 철마의 권풍에 어깨를 내줄 뻔했다. 그랬다면 승부의 양상이 달라졌을 터였다. 점진적 잠식의 전술을 버리고 속전속결을 택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랬더라도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는 데는 지장이 없었을 테지만 위험부담은 후자 쪽이 월등히 컸다. 급전 중에는 통제력이 약화되기 마련이었다.
나는 검황자의 돌발행동이 결과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을까봐 열을 받은 게 아니었다. 그가 사전에 합의한 바를 어겨 화가 난 것이었다.
내 심사를 아랑곳하지 않고 검황자가 엉뚱한 답을 내놓았다. 답이라기보다는 관전평, 혹은 감상이었다.
“대단하오. 형은 정말 대단하오.”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뭐, 내가 대단하긴 하지.”
싱겁게 노기를 가라앉힌 나는 검황자의 어깨를 툭 쳤다.
“가자.”
우리는 수련장인 늪지 대신 괴선이 대기하고 있을 장원으로 향했다. 반 시진만 있으면 해가 지고 진소월도 깰 터였다. 그러나 장원에 발을 들이자마자 나와 검황자는 다시 사당으로 되돌아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