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57
제56화 됐어, 그쯤 해
장원이 든 숲을 지나고 있는데 머리 위로 비둘기가 날아갔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또 무슨 일이지?
와옥 후면으로 들어가 마당으로 나가니 강태수가 전서구 다리에 묶인 첩지를 풀고 있었다. 그러더니 내용을 보지도 않고 내게 내밀었다. 일순 의아했지만 두 겹으로 접힌 첩지 표면의 을 보고는 납득했다.
첩지를 펴보니 달랑 두 문장이 나왔다.
나는 첩지를 검황자에게 건네주었다. 그의 안색이 변했다. 나는 황당했다. 설마 검총에서 사람을 보낼 것을 예측하지 못했단 말인가.
기실 진소월과 나는 철마와 검총의 검호, 그리고 독곡의 인사 중 누가 먼저 올 것인지를 두고 내기를 했었다. 그녀는 상기한 순서대로 짚었고 나는 첫 번째와 두 번째를 바꾸었다. 결국 그녀가 맞춘 셈이었다. 실로 간발의 차이였기에 억울한 바가 없지 않았으나 어쨌든 진 건 진 거였다.
무덤에서 검만 갈고 닦는 바보들을 일깨운 것은 마련, 정확하게는 마련의 마뇌임에 틀림없었다.
천하제일금역이라는 별칭답게 검총은 입총의 의사를 가지고 온 이가 아니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상백산에 든 자를 살려 보내지 않는 철칙으로 유명했다. 입총전 선언이 아니면 아예 말조차 꺼내지 못했다. 검총의 의사를 타진하기 위해 마련이 사자를 보내기 어렵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이 문제를 해결할 간단한 방법이 있었다. 입총의 자격을 갖춘 검마류의 마두를 파견해 마련 출신인 반검 조추에게 도전하게 한 연후 승부 전후에 넌지시 사정을 알리는 것이었다.
마뇌의 목표는 뻔했다. 검총으로 하여금 검황자를 소환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검황자가 내게서 떨어지면 마련은 마음 놓고 나를 칠 수 있었다.
검총에서 두 명의 검호를 내보냈다는 것은 마뇌의 노림수가 통했다는 반증이었다. 그들의 임무가 검황자를 데려가는 것임은 불문가지였다.
나는 이 대목에서 진소월이 따로 대비책을 세워두었다고 했기에 당연히 검황자를 미리 꼬드긴 줄 알았다. 그가 버티면 설마 강제로 끌고 가기야 하겠는가. 그런데 당사자가 자기를 잡으러 검총에서 노인들이 오리라는 것 자체를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당황하고 있으니 나로서는 황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 * *
광객에게 철마와의 일전에 대한 설명을 맡기고 나와 검황자는 장원을 나섰다.
처음에 따라오겠다고 설치던 괴선은 내가 방문자들 중 반검이 포함되어 있을지 모른다고 하자 바로 꼬리를 내렸다. 그런데 반쯤 농담으로 한 말이 그대로 들어맞았다.
주황색 노을이 서천을 물들이는 가운데 사당에 이르니 마당가에 낯익은 두 노인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있었다. 하나는 뱀눈 조추였고 다른 하나는 선풍도골의 노인, 한우경이었다.
그들을 본 검황자가 한우경에게 달려가 마치 어미에게 안기는 아이처럼 그에게 달라붙었다.
“노야!”
한우경이 그를 껴안은 검황자의 등을 토닥거렸다.
“허허, 그래. 잘 지냈느냐?”
“네, 노야. 노야가 오실 줄은 정말 몰랐어요.”
“허허, 너도 보고 모처럼 세상구경도 할 겸 나왔구나.”
한우경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나는 그에게 포권하며 고개를 숙였다.
“전충이 한 어르신을 뵙습니다.”
나는 뱀눈에겐 알은체를 하지 않았다. 원체도 곱지 않던 그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검황자를 떼어놓은 한우경이 내 인사에 답례했다.
“두 달 남짓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네 눈빛이 한층 깊어졌구나. 허어, 어쩌면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구나.”
나는 한우경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그는 검황자가 고의적으로 내게 패했거나 승부의 결과를 반대로 알렸다고 생각했음에 틀림없었다.
한우경이 검황자를 살피는 틈을 타 눈치를 보던 뱀눈이 내게 독설을 쏟아냈다.
“마련을 건드리다니, 간덩이가 붓다 못해 배 밖으로 터져 나왔구나. 그래도 구면이니 충고하나 해주마. 혀를 놀릴 수 있을 때 네놈의 친인들에게 작별을 고하는 게 좋을 게다. 며칠만 지나면 천참만륙된 시체로 화해 들개들과 까마귀들의 먹이 노릇을 하게 될 터이니. 이제 우리가 광이를 데려가면…….”
검황자가 뱀눈의 말을 잘랐다.
“무슨 말씀이세요? 저를 데려가다니?”
뱀눈이 답을 한우경에게 미루었다. 한우경은 용건을 밝히는 대신 맥락 없는 질문을 했다.
“왜 이렇게 야위었느냐?”
검황자의 답이 늦어지자 뱀눈이 또 참견했다.
“그야 마음고생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노야. 저놈에게 일부러 줘주었을 터이니 얼마나 속이 상했겠습니까? 아무리 순후한 광이라지만…….”
검황자가 미간을 모았다.
“그런 적 없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럴 리 없다. 총을 나가기 전 우리에게 네 성취를 보여주지 않았더냐? 설마 저놈이 그 검공을…….”
한우경이 손을 들어 뱀눈의 말을 막았다. 그러고는 엄숙하고 진지한 표정을 안면에 담고서 검황자를 주시했다.
“너를 의심하는 건 아니다만, 실로 믿기 어렵구나. 뇌풍우를 쓰고도 이 아이에게 패했단 말이더냐?”
“……네, 노야.”
한우경이 눈길을 내게로 옮겼다. 잔잔한 호수 같았던 그의 동공에 불꽃이 일렁였다. 나는 기대감에 설레었다.
내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좀 이른듯하나 전날의 약속을 오늘 지켜달라고 청해도 되겠느냐?”
“물론입니다, 어르신.”
두 달여 전 입총 거부 의사를 밝히면서 나는 검공만이 아니라 도법도 수련해야 한다는 이유를 댔다. 그날 한우경은 검과 도를 아우르는 내 무학이 완성되면 견식할 기회를 달라고 했고 나는 그러마고 약속했다. 결국 지금 한우경은 친히 나를 시험하겠다는 것이었다.
나로서는 불감청이언정고소원인데 뜻밖에도 검황자가 훼방을 놓았다.
“형은 노야의 검을 받을 수 없는 상태입니다. 한 식경 전 바로 이 자리에서 마련의 마인과 사투를 벌였기에 몸이 정상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뱀눈이 검황자의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마련의 마인이라니? 누구를 말하는 게냐?”
“철마라고 들었습니다.”
“뭐라? 그래서 어떻게 됐느냐?”
“형이 이겼습니다.”
“뭣이? 그럴 리가. 괴선과 광객이 저놈을 비호한다고 들었다. 필히 그들이…….”
“아닙니다. 괴선 어르신은 오지도 않았고 광객 어르신은 지켜만 보았습니다. 정정당당한 승부였고 굉장한 일전이었습니다. 평생 그토록 격렬한 싸움은 본 적이 없습니다. 보는 내내 제 심장이…….”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열변을 쏟아내던 검황자가 돌연 말을 멈췄다. 내가 엄지로 그의 옆구리를 찔렀기 때문이었다.
“됐어, 그쯤 해. 그리고 나는 멀쩡하니까 괜히 생각해주는 척 하고 나서지마.”
한우경이 백미를 찡그렸다. 검황자를 대하는 내 태도가 언짢은 모양이었다.
“네 솜씨를 보자꾸나.”
기분 탓인지 음성도 냉랭하게 느껴졌다. 나는 다시 포권하며 예를 차렸다.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멀쩡하다는 말은 허세였다.
일차전 때처럼 운신불능의 중상을 입은 것은 아니었으나 철마와의 이차전도 상당한 부상을 남겼다. 근골도 상했고 내상도 있었다. 아마도 평상시 전력의 절반 정도밖에 발휘하지 못할 것이었다. 무리하면 충격에서 회복이 덜 된 뼈가 부러지고 군데군데 찢긴 혈맥도 완전히 파열될 터였다.
그럼에도 나는 한우경과 손을 섞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정확한 무위를 가늠할 순 없었지만 나는 그가 괴선이나 광객보다 상위의 고수이리라 확신했다. 십왕을 제외하면 천하에서 가장 강한 무인이라는 의미였다. 그런 이와 수백 초를 주고받으면 배우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었다.
내가 수백 초라 말할 까닭은 광객과의 비무방식을 염두에 두어서였다. 나는 원력을 아낀 채 본연의 내공만으로 한우경을 상대할 참이었다. 나는 그가 무학의 공방에 무게를 두려는 내 의도에 조응해주리라 믿었다.
나는 한우경과의 거리를 벌렸다. 검황자와 뱀눈은 마당 가장자리로 물러났다.
이십여 보를 걸어간 후 몸을 돌린 나는 옥소와 철봉을 꺼내들었다. 한우경도 검을 뽑았다. 단천검이나 금풍검 등이 차고 다니는 보검이 아니라 검황자의 것과 비슷한 철검이었다.
한우경이 비무 개시를 알렸다.
“시작하려무나.”
나는 즉시 한우경에게 쇄도했다. 철봉과 옥소가 각각 뇌전십이검과 구환도법의 절초들을 그에게 쏟아냈다. 지켜보던 뱀눈이 탄성을 내질렀다.
한우경은 내 현란한 공격을 단순한 동작으로 막아냈다. 나는 그의 검로가 훤히 보였으나 빈 틈을 파고들 수가 없었다. 그의 방어막이 완벽해서가 아니라 허점을 찔러 가면 그것으로 비무가 종결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 때문이었다.
내가 모험을 자중하고 안전일변도로 나간 탓에 박진감이라고는 한 줌도 찾아볼 수 없는 공방전이 이어졌다. 그러나 나는 어찌어찌 이백 초가 넘게 내 진신절학들을 한우경에게 풀어놓았다. 그는 최소한의 신법만 현시하며 직경 일 장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고 내 모든 공격들을 받아냈다. 마지막으로 뇌전중중과 벽력붕산을 발한 나는 한우경에게서 떨어졌다. 기대에 미치지 못한 비무에 실망하면서.
섣부른 실망감이었다.
내 밑천의 바닥까지 확인한 한우경이 처음으로 공세를 취했다. 비무를 끝내려던 나는 허둥지둥 대응했다. 강기가 아닌 검기만 둘렀음에도 한우경의 검은 흉험하기 그지없었다. 매서운 정도를 넘어 괴랄하고 독랄했다. 유하고 인자한 그의 인상과는 정반대의 검공이었다.
나는 나를 몰아붙이는 한우경의 눈을 보고는 소름이 돋았다. 언뜻 살의가 번득였기 때문이었다. 내 본능이 최고 등급의 경고신호를 발했다. 그 신호와 무관하게 내 몸은 이미 필사적으로 한우경의 검을 피하고 있었다.
나는 기시감이 들었다. 지금의 상황은 한 달여 전 무왕에게 몰이를 당하며 내 오절신공이 도달한 극점을 드러낼 것을 강요받았던 날과 흡사했다. 그때와 다른 점은 위협감이었다. 순수하게 시험의 의사를 담은 무왕의 손속과 달리 한우경의 철검엔 나를 베겠다는 의지가 확연했다. 그의 선의를 믿고 있다간 팔이 잘릴 수도 있었다. 내가 극상의 오절신공을 펼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나는 또 다른 기시감에 휩싸였다.
이번엔 검황자였다. 한우경의 철검 끝에서 아지랑이가 솟아난 순간 나는 이 노인이 검황자가 전날 초장에 선보였던 최종비기를 구사했음을 알아차렸다. 정확한 예측이었다. 아지랑이는 회오리바람으로 화하더니 벽력을 머금은 폭풍우가 되어 나를 덮쳤다.
부지불식간에 피해낸 전날과 달리 나는 의식적으로 강기의 소낙비를 빗겨냈다. 내기가 격탕되긴 했으나 그날처럼 목과 겨드랑이와 옆구리와 허벅지에 검상을 입지는 않았다. 만 한 달간의 극한수련의 성과였다.
그러나 나는 중심을 잃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한우경이 가일수를 하려들 시 막을 방도가 없었다. 비무가 아니라 생사투였다면 목숨이 달아났을 장면이었다. 다행히 한우경은 검을 거두었다.
그렇다고 위험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하필이면 내가 떨어진 곳은 뱀눈의 지척이었다. 그가 시야의 사각지대에 든 탓에 발검하는 모습을 보지는 않았으나 송곳 같은 살기를 느낀 나는 머리를 모로 꺾었다. 초절의 절(折)! 그 순간 칼날 같은 검기가 내 귓불을 스치고 지나갔다. 조금만 대응이 늦었다면 내 인중에 꽂혔을 것이었다.
그러나 안심하기엔 일렀다. 기습이 실패할 것을 예상했던지 뱀눈이 시차를 두지 않고 후속공격을 가해왔다. 신형을 추스를 겨를이 없었기에 이번에야말로 나는 외통수에 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