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58
제57화 당분간은 올 일이 없을 거요
뱀눈이 쏘아낸 탄강은 빗나갔다.
그가 겨냥을 잘못했거나 내가 이(移)로써 흘려내서가 아니었다. 내 목숨을 살린 것은 검황자의 손이었다. 몸을 날린 그가 뱀눈의 팔을 건드려 방향을 비튼 덕분에 나는 탄강이 내 복부에 적중되는 참사를 모면했다.
기사회생한 나는 분기탱천했다. 그리고 세 가지 상황이 동시에 발생했다.
첫째, 한우경이 뱀눈에게 소리를 질렀다.
“무슨 짓인가, 추!”
나로서는 별 도움이 안 되는 호통이었다.
둘째, 뱀눈이 별안간 등을 돌려 달아났다. 실로 눈치가 빠른 작자였다.
셋째, 뱀눈의 신속한 대응 탓에 내가 날린 뇌전은 헛발질이 되었고 나는 분통이 터졌다.
튕기듯 일어선 나는 뱀눈을 쫓으려는 시늉을 했다. 고맙게도 한우경이 나를 만류했다.
“참아라, 아이야. 나중에 내가 그에게 책임을 물으마.”
나는 못이긴 척 도약을 위해 웅크렸던 자세를 풀었다. 검황자가 내게 사과했다.
“미안하오, 형.”
기혈이 끓어올라 나는 바로 대꾸를 주지 못했다. 기실 내 내부는 엉망진창이었다. 철마와의 격전에서 당한 내상이 한우경의 몰이에 전력으로 대처하느라 도진 탓이었다. 내 무응답을 분노 때문이라 오해한 검황자가 변명하려 들었다.
“나는 그이가 형을 암습하리라고는 전혀…….”
간신히 혀를 놀릴 수 있게 된 나는 검황자의 말을 막았다.
“네 잘못은 하나도 없어. 나를 살려줘서 고맙다, 지광.”
검황자가 그 잘 생긴 낯짝으로 뒤통수에 철퇴를 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내 감사인사가 그렇게 충격적이었나?
괜히 심술이 났다. 어이! 기생오라비. 나는 은혜를 모르는 위인이 아니라고.
“그거 아오? 형이 나를 이름으로 부른 건 처음이오.”
잘못 짚었음을 깨달은 나는 민망함을 감추고 히죽 웃었다. 그러고는 너스레를 떨려는데 한우경이 방해했다.
“내 불찰이다. 진상을 파악한답시고 너를 너무 몰아붙였구나. 그가 너를 해하려 들 수 있음을 알면서도 미리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도 경솔한 처사였다.”
나는 한우경을 원망하지 않았다. 방금 전 내가 처했던 위기는 전적으로 내 능력부족에 기인했다. 뱀눈까지 살필 여력이 없긴 했으나 어쨌든 대비를 했어야 했다.
“아닙니다, 어르신. 그자가 나쁜 놈이지요. 그런데 저를 마구 굴리셔서 진상은 파악하셨는지요?”
내 짓궂은 질문에 한우경이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네 특기는 검공이나 도법이 아니라 신법이더구나. 참으로 놀라운 신기였다.”
완벽한 답이었다.
나는 뱃속에 묵직하게 들어선 궁금증을 토해내었다.
“외람된 질문이오나 어르신의 무력은 검왕 어르신과 비교하면 어느 정도인지요?”
뜸을 들이지 않고 한우경이 즉답했다.
“나는 그의 발바닥에도 미치지 못한다.”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나라면 모를까 한우경이 그 수준일리 만무했다. 나는 불만스러운 심사를 그대로 표출했다.
“죄송하오나 겸양지덕이 너무 지나치십니다.”
어이가 없는지 한우경이 실소를 머금었다. 그러나 추가적인 언사는 내뱉지 않았다. 나는 좀 더 물고 늘어졌다.
“두 분이 동문이시지요?”
그냥 찔러본 말이 아니었다. 한우경은 검황자의 ‘뇌풍우’를 능숙하게 구현했다. 검황자는 검왕이 자신의 사부라 했으니 한우경과 검왕은 사형제지간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 우리 둘 다 무현의 검맥을 이었다.”
“어느 분의 연배가 높으신지요?”
“내가 그보다 아홉 살 연상이구나. 그가 어릴 때는 내가 얼마간 지도하기도 했더랬지. 하지만 그가 약관을 지날 무렵부터 한 번도 그의 검을 넘지 못했다. 그는 나 같은 범부와는 차원이 다른 천재구나.”
나는 놀랐다. 삼십삼 년 전 검총을 찾아가 망발을 떤 수라검군의 팔을 잘랐을 때 검왕은 이미 초로의 나이였다. 지금은 못해도 아흔은 넘겼을 터였다. 그렇다면 목전의 노인은 일백 세 이상이라는 의미였다. 나는 비로소 전날 한우경이 ‘이승에 머물 날이 길지 않다.’고 했던 게 노인들이 흔히 내뱉는 상투적인 표현이 아니었음을 알았다.
검왕에 관한 얘기를 나누는 게 부담스러운 듯 한우경이 검황자에게 눈을 돌리며 화제를 바꾸었다.
“그나저나 어찌 하려느냐? 네 사부는 너를 찾아 총에 데려오라고 했는데.”
샘이 날 만큼 매력적인 곡선을 자랑하는 검황자의 입술이 일그러지더니 결연한 음성을 흘려냈다.
“총을 나오며 사부께 드렸던 말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노야. 여기 이이를 이기기 전엔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죄송하지만 사부께 제 뜻을 전해주세요.”
한우경이 한참동안 검황자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나에겐 엄청나게 중요한 사안이었으나 내가 참견할 문제가 아니었기에 나는 잠자코 있었다. 이윽고 한우경이 입을 열었다.
“허허, 그러려무나. 하지만 네 사부에게 전하는 건 다음으로 미루어야겠구나. 길을 아는 추가 가버렸으니 귀총할 방도가 없구나. 네 사부가 추의 보고를 받고 다른 사람을 보낼 때까지 너하고 함께 지내야겠다. 괜찮겠느냐?”
마지막에 덧붙인 질문은 나에게 던진 것이었다.
“물론입니다, 어르신. 그런데 제가 보기엔 뱀눈, 아니, 그 조추란 자는 검총으로 돌아가지 않을 듯싶습니다. 십중팔구 이참에 마련으로 귀환하려 들 것입니다.”
한우경은 내 추측에 반박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지도 모르겠구나. 지난 팔 년간 우리와 섞이지 못하고 내내 겉돌기만 했으니. 성취도 미미하고. 오래 된 습성을 버리지 못해 본인도 몹시 답답했을 게야. 본향으로 돌아가는 게 그에게나 총에게나 바람직한 결정일 수도 있겠다.”
검황자를 돌아보며 한우경이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어쩐다? 뭐, 답답하면 네 사부가 나올 터. 그때 가서 직접 얘기해 보려무나.”
한우경의 합류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던 나는 뜨끔했다. 천군만마를 얻은 게 아니라 사신을 불러들이는 격이 될지도 몰랐다. 검왕은 독왕만큼이나 위험천만한 존재였다. 나는 한우경과 검황자를 검총으로 보내야하는지를 두고 고민해야 했다.
* * *
괴선과 광객은 한우경에게 깍듯이 대했다. 그가 그들보다 연배가 높아서가 아니라 내가 측량불가의 고수라고 귀띔했기 때문이었다. 괴선은 처음엔 반신반의하는 기색이었으나 드물게 진지한 내 표정을 보고는 사실로 받아들였다. 나는 무력에 관한 한 농담을 지껄이는 성품이 아니었다.
한우경은 진소월에게서 시선이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노소를 불문하고 사내라면 누구라도 혹할 우물이었으나 한우경이 그녀의 미모에 반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그녀에게 관심을 보인 건 검황자 때문이었다. 남녀관계에 문외한인 사람이 보더라도 검황자가 진소월에게 빠져있음은 명약관화했다.
한우경을 의식한 듯 진소월은 평소처럼 검황자에게 쌀쌀맞게 굴지 않고 온화한 태도를 보였다. 그럼에도 한우경은 두 사람의 역학 관계는 물론이고 나와의 연관성도 눈치 챈 모양이었다. 나를 주시하는 그의 눈에 복잡한 빛이 떠올랐다.
나는 염려스러웠다. 검황자에 대한 한우경의 애정은 진소월에 대한 검황자의 애정만큼이나 확연했다. 한우경의 경우 그 애정은 나에 대한 적의로 전환될 소지가 있었다. 실은 검황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진소월이 검황자에게 비밀을 고백하기를 바랐다. 그녀가 합일이 불가능한 여자임을 알면 그도 그녀와의 연분을 단념하지 않을까. 그러면 만사가 풀리지 않을까.
진소월에게 맡겨두어야 할 문제임을 알면서도 나는 그녀에게 조속한 해결을 채근하기로 했다.
괴선과 광객이 검황자와 한우경을 데리고 늪지로 떠나자 향후 대책을 논의한다는 핑계를 대고 장원에 남은 나는 진소월의 지하석실로 내려갔다.
내 전용자리가 된 침상에 걸터앉으며 나는 단도직입했다.
“어떻게 할 거요?”
뭘 묻는 건지 모를 리 없으면서도 진소월이 시치미를 뗐다.
“뭐를요?”
“기생오라비 말이오.”
“송 공자가 왜요?”
“시간낭비하지 맙시다. 저대로 내버려 둘 거요?”
“그럼 어떡하나요?”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소.”
“무슨 조치요?”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떡하오? 진 소저가 답을 갖고 있을 텐데.”
진소월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특유의 쓴웃음을 그 예쁜 입술에 매달았다.
“내가 그에게 사내를 받을 수 없는 몸이라고 실토하면 그가 나에게 품은 연정을 버릴 거라 생각하나요?”
“…….”
“전 공자가 그렇게 순진한 사람인 줄 미처 몰랐네요.”
“그 녀석이 안 그럴 거란 말이오?”
“나는 그가 아니니 십 할의 장담을 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내가 독물 덩어리임을 알게 되더라도 그는 나를 포기하지 않을 거라 구 할 구 푼의 확신을 가지고 단언할 수 있어요. 그는 오히려 더욱 나에게 집착하게 될 거예요. 그가 원하는 건 내 몸뚱어리가 아니니까. 내 신체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 결함을 포용함으로써 자신의 사랑의 순수함과 진정성을 입증하려 들 게 뻔해요. 역효과만 초래할 고백을 굳이 할 필요가 있을까요?”
나는 과신이라고 받아치고 싶었다. 하지만 진소월의 예측이 들어맞을 것 같아 자중했다.
“전에 검총에서 송 공자를 데려갈 이들을 보내오면 어떻게 대처할 건지 물었었지요? 내 대비책은 송 공자 자체였어요. 그렇다고 그에게 따로 언질을 준 건 아니었어요. 나는 누가 오더라도 송 공자가 검총으로의 귀환을 거부하리라 보았어요. 그를 강제로 끌고 가지 않는 한, 검왕의 사자들은 그를 데려가지 못했을 거예요.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날 확률은 극히 희박했고요.”
“…….”
상체를 앞으로 기울여 나와의 거리를 좁힌 진소월이 가늘고 흰 손가락으로 솥뚜껑 같은 내 손등을 쓸었다.
“무슨 짓이오?”
“살짝 만져보는 것도 안 돼요?”
“자꾸 약속을 어기면 나도 생각이 있소.”
풋! 진소월이 소리 내어 웃었다.
“전 공자는 당분간은 나를 떠나지 않을 거예요. 송 공자가 여기 있는 한. 그리고 그 어른이 송 공자 곁에 머무르는 한. 벌써부터 그 어른과 비무수련을 할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리고 설레죠? 상수와의 교합이 절실했는데 마침 최적의 조건을 갖춘 이가 나타났으니.”
“제길, 그렇게 남의 속을 읽으면 재밌소?”
“아무에게나 그러진 않아요. 내게 특별한 사람의 속만…….”
“됐소. 그쯤 하시오.”
위험수위임을 자각한 진소월이 봉목과 입술에 걸려있던 미소를 지웠다.
“전 공자가 무얼 걱정하는지 알겠어요. 나로서도 뾰족한 해법이 없어요. 이런 일은 극단적인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관리하면서 시간에 맡겨두는 수밖에 없어요. 마음은 영원불변하지 않아요.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몰라요. 누가 알겠어요? 일 년이나 이 년 후, 아니면 십 년, 이십 년 후 우리 둘이, 혹은 송 공자와 내가 지금과 정반대의 입장이 될지. 그러니 어찌 될지 두고 보자고요.” “…….”
“나는 전 공자에게 연심을 표현할 권리가 있고 전 공자는 내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권리가 있어요. 송 공자는 내게 연정을 품을 권리가 있고 나는 그를 마다할 권리가 있어요. 우리는 다만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성취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에요. 바람을 이루면 좋고 그러지 못해도 감내해야 할 테죠. 연분의 환희도 실연의 고통도 오롯이 자신의 몫이에요.”
“…….”
“하나만 물어볼 게요. 유치하고 어리석은 질문인 줄 알지만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어요. 만약 내가 송 공자와 연인이 된다면 전 공자는 어쩔 건가요? 흔쾌히 우리의 사랑을 인정하고 축복해 줄 건가요? 아니면…….”
말끝을 흐리는 진소월을 직시하며 나는 매몰차게 말했다.
“그런 일이 닥치면 그때 가서 생각해 보겠소. 다만 나를 떠보기 위해 그 녀석을 기만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오.”
진소월은 쓴웃음으로 응수했다.
나는 침상에서 엉덩이를 뗐다.
“그만 가보겠소. 당분간은 올 일이 없을 거요.”
지키지 못할 선언이었다. 나는 바로 다음날 다시 장원으로 돌아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