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59
제58화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강태수가 급보를 갖고 왔을 때 나는 한우경을 상대로 여섯 시진 째 땀을 쏟는 중이었다.
언제 그가 검총으로 귀환할지 몰랐기에 나는 그를 독점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다행히 한우경은 내 청을 거부하지 않고 나와 어울려주었다. 내 욕심을 잘 아는 괴선과 광객도 선선히 그를 나에게 양보했다.
손을 섞으면 섞을수록 나는 한우경과의 격차를 절감했다. 동일한 수준의 내공을 사용함에도 일방적으로 몰렸기 때문이었다. 무학의 깊이가 달랐다. 내심 구환도법과 뇌전십이검이 강호의 어떤 무공에도 뒤지지 않는 절학이라 자부하고 있던 나는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내 성취가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절곡을 나오기 전 나는 초식의 이해와 운용 면에서 이미 완성지경에 이르러있었다. 따라서 한우경의 검공에 밀리는 것은 전적으로 구환도법과 뇌전십이검 자체의 한계였다. 여기서 나아가려면 뇌전중중처럼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보다 몇 단계 윗길의 강자인 한우경과의 비무수련은 그런 의미에서 크나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내 머리가 떠올릴 수 있는 모든 수들을 시도했다. 변초와 신수들을 허공에 부리는 것과 받아줄 능력이 있는 상대에게 쏟아내는 것은 천양지차였다. 이런 기회가 흔치는 않을 터이기에 나는 최선의 최선을 다했다.
내 열정에 감복했는지 한우경은 점점 진지하게 나와의 비무에 임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광객과 괴선, 그리고 검황자 모두가 각자의 수련을 멈추고 나와 한우경의 비무를 관전했다. 그들이 그러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비무에 몰입해 있던 나는 강태수가 늪지로 달려와 나를 불렀을 때 나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무슨 일이오?”
내 음성에 담긴 노기에 놀란 강태수가 목을 움츠렸다. 그러더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용건을 밝혔다.
“그들이 왔어요, 전 공자.”
아침햇살을 받으며 장원 마당에 들어서니 느티나무 밑에서 발을 끌고 양팔을 휘두르며 보법과 권공을 수련하고 있던 이광이 내게로 달려왔다. 요즘 그는 강태수로부터 기본 무공을 배우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큰 형님.”
이광은 나를 큰 형님으로, 검황자를 작은 형님이라고 불렀다. 내가 그러라고 시켰다.
아버지를 연상시키는 소년이 너무도 귀여웠지만 나는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게으름 피우지 마라, 꼬마야.”
내 잔소리와 호칭이 불만스러운 듯 이광의 앙증맞은 입술이 튀어나왔다. 옆에서 강태수가 그를 변호하고 나섰다.
“얼마나 열심히 한다고요. 한시도 쉬지 않으려는 탓에 나와 소주가 말려야 할 정도에요. 재능도 아주 뛰어나요. 벌써 구궁신보와 봉황권의 요체를 터득했어요. 나보다 백배는 나아요. 광이는 천재예요.”
지나친 칭찬은 독이라고 면박을 주려다 나는 자제했다. 아까 아무 잘못도 없는 그녀에게 짜증을 낸 게 미안했거니와 그녀의 평가가 과장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었다. 내가 봐도 이광의 무재는 상당했다. 특출하다고 해도 무방했다.
“자만하지 말고 늘 정진해야 한다.”
“네, 큰 형님.”
나는 씩씩하게 대답하는 이광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와옥으로 발길을 옮겼다. 독왕이 보낸 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일층의 다실에 들어선 나는 강태수가 방문객들을 두고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했던 까닭을 이해했다.
다실엔 일남일녀가 있었다. 둘 모두 평범한 신색이 아니었다.
먼저 여자는 실성한 사람처럼 보였다. 동공엔 초점이 없었고 삐뚤어진 입가엔 침이 질질 흘렀다. 나이는 마흔 전후일까. 땅딸막한 체구에 피부는 까무잡잡했다. 여자는 나를 보고는 뭐가 좋은지 헤죽헤죽 웃었다. 나는 미소로 답례하지 않고 그녀를 외면했다.
남자는 이제 일흔 줄에 들어섰을 법한 노인이었다. 행색은 남루했고 몰골은 초라했다. 두상은 크고 면상은 넓은데 이목구비가 다 옹졸해 기괴한 느낌을 주었다. 웃고 있는 여자와 달리 노인은 완연한 울상이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단춧구멍만큼 작은 눈에서 떨어질 것 같았다.
둘 간의 서열은 분명했다. 여자는 서 있었고 노인은 의자에 앉아있었다. 그러나 내가 입실하자 노인도 자리에서 튕기듯 일어났다. 그러고는 곧장 바닥에 엎드리려는 자세를 취했다. 나는 노인이 내게 절을 하도록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노인의 왼쪽 눈두덩 위에 엄지 크기의 점이 박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충이 은인을 뵙습니다.”
오체투지하려다 내게 붙들린 점박이 노인이 격동했다.
“제 얘기를 들으셨습니까, 소주?”
나는 점박이 노인의 호칭에 당황했다. 설마 독왕이 정말로 나를 후계자로 인정했단 말인가.
심히 미심쩍었으나 나는 일단 점박이 노인의 질문에 답했다.
“물론입니다, 은인. 제 어머니는 나중에 꼭 은인을 찾아뵙고 감사의 인사를 드리라고 일렀습니다.”
“아아, 그리도 고마울 데가.”
점박이 노인이 기어이 눈물을 쏟아냈다. 나는 그가 진정하기를 기다렸다.
노인이 오열하자 곁에 서 있던 땅딸보 여자는 처음엔 어리둥절해 하더니 안절부절 못했다. 그러더니 바닥에 퍼질러 앉아서는 노인을 따라 울기 시작했다.
나는 심한 위화감이 들었다. 이 여자는 대체 뭘까.
점박이 노인은 아무리 봐도 엄청난 고수와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그렇다면 땅딸보 여자가 내 호위 역할을 맡았다는 뜻인데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다지 강해보이지도 않거니와 설령 감춰진 힘이 있다고 해도 이렇게 덜 떨어져서야 어떻게 나를 지킬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독왕의 처사에 헛웃음이 나왔다. 자기 앞가림도 못할 여자를 두고 십왕을 제외하면 누구도 어쩔 수 없는 괴물인 양 호언하다니. 그는 당금 무림이 전례가 없는 융성기임을 모르는 걸까. 중원의 강호들에 대한 그의 이해는 삼십 년 전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걸까.
의구심을 해소하려면 점박이 노인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태로 돌아와야 했기에 나는 인내심을 접고 직설했다.
“은인께 여쭐 게 많습니다.”
노인이 아이처럼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죄송합니다, 소주. 이 늙은이가 추태를 부렸습니다.”
“아닙니다, 은인. 그리고 말씀을 놓으십시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러다 주군께서 아시면 저는 그 자리에서 즉참당할 것입니다.”
나는 노인을 따라 울음을 멈추고는 다시 헤실헤실 웃기 시작한 땅딸보 여자를 힐끗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는, 그러니까 독왕은 수천 리 너머에 있지 않습니까? 우리끼리 있을 때는 편하게 대해 주십시오.”
“황송하오나 명을 받들기 어렵습니다. 소주야말로 제게 하대를 해주십시오. 저는 그게 편합니다.”
나는 노인의 고집을 꺾지 않기로 했다.
“그러면 서로 편한 대로 하지요.”
노인이 이마저도 마다할 태세이자 나는 선수를 쳤다.
“이건 명입니다.”
노인이 마지못해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알겠습니다, 소주.”
내가 노인에게 어떤 궁금증부터 꺼내놓을지 궁리하는 틈에 그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 아이는, 아니 소주의 자당께선 살아 계신지요?”
나는 울컥했다.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한편으로는 어머니의 죽음을 노인에게 알려주지 않은 독왕의 처사에 의아했다.
“제 어머니는 십삼 년 전 작고하셨습니다.”
“아아…….”
노인이 다시 눈물을 쏟을 기미를 보이자 나는 얼른 질문으로 막았다.
“어머니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어떻게 제 어머니와 인연을 맺게 되셨는지요? 참! 앞으로는 제가 이해하기 쉽게 제 어머니를 방금 전처럼 ‘그 아이’라고 해주십시오. 명령입니다.”
염두에 두었던 질문의 순서를 바꾼 것이었으나 기대대로 노인을 낚는 데 성공했다. 노인들은자기와 관련된 옛날 얘기라면 사족을 못 쓰는 법이었다.
* * *
뜻밖에도 노인의 눈빛에 어린 것은 아련함이 아니라 고통이었다.
“모든 것은 주군께서 절대독정을 얻기 위해 벌인 대사업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일곱 살 이하의 소아들 중 독정을 체내에 형성할 가능성이 있는 아이들만 골라 독전(毒田)에 데려왔지요. 그 과정에서 물경 삼만이 넘는 아이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영구적으로 불구가 된 아이들과 후유증을 앓은 아이들은 그 열 배가 넘었지요.”
독왕의 잔인무도한 행사에 절로 욕지기가 치밀었으나 나는 노인의 회상을 방해하지 않고 묵묵히 귀를 기울였다.
“독전에 든 아이들은 도합 일천이백삼십 명이었습니다. 일 년 후 그 수는 아흔둘로 줄었습니다. 절대다수가 제이관(第二關)조차 통과하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되었지요. 그 아이는 생존자들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그 아이보다 자질이 낫다고 평가받은 아이들이 예순일곱 명에 달했으니까요.
그러나 다시 일 년이 지나고 열네 명이 남았을 때 그 아이는 단연 으뜸가는 재목으로 꼽혔습니다. 어떤 부작용도 없이 완벽하게 칠십팔 종의 독을 갈무리했을 뿐만 아니라 정신이 온전했으니까요. 그 아이는 심공 전수를 위한 사전 교육이 가능했습니다. 제오관(第五關)부터 그 아이를 특별 관리하게 된 이유였습니다.”
나는 노인이 이야기를 건너뛰기를 바랐다. 다 아는 내용이라서가 아니라 어머니가 독관(毒關)들을 통과하며 겪었던 고난을 되새기는 게 괴로웠기 때문이었다.
내 심정에 아랑곳없이 노인이 말을 이었다.
“저는 그 시점부터 그 아이와 인연을 맺었습니다. 그 전부터 그 아이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나 직접 담당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그 아이는 실로……, 경이로웠지요. 뼈가 녹고 살이 타는……,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이 일상이었음에도 이지를 상실하지 않고 온 정신을 유지했습니다. 무려 팔 년이나! 우리는 그 아이를…….”
나는 노인의 말을 끊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제 어머니가 독곡에 들어와 머물렀던 기간이 총 십 년이란 말입니까?”
간단한 계산이었음에도 뜸을 들이더니 노인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게 되는군요.”
나는 아득해졌다. 노인의 기억이 맞는다면 아버지를 만났을 때 어머니는 기껏해야 열네 살이었다는 뜻이었다. 어머니는 말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서너 살 무렵에 독전으로 끌려왔다고 했었다.
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히죽해죽 웃고 있는 땅딸보 여자를 바라보았다. 살아있다면 어머니는 그녀와 비슷한 나이일 터였다. 그렇다면 이 여자는 어머니와 더불어 사관(四關)을 통과했다는 열네 명의 아이 중 한 명이 아닐까.
내 눈길의 의미를 파악한 노인이 내 추측이 옳았음을 확인해 주었다.
“삼호(三號)는, 이 아이를 그렇게 부릅니다만, 그 아이를 제외하면 최종 관문을 지나고도 목숨을 부지한 유일한 아이입니다. 비록 강시나 다를 바 없는 신세가 되었지만 그 대신 굉장한 몸을 얻었지요.”
나는 굉장하다는 말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싶었다. 필히 무력에 관한 것이리라. 몹시 궁금했지만 우선은 어머니에 관한 대화를 마무리 짓기로 했다.
나는 땅딸보 여자에 관해 설명하려는 노인을 이야기의 원줄기로 되돌렸다.
“제 어머니에게 도주를 권했던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노인이 눈물을 흘렸다. 이런! 다행히 노인은 통곡하는 대신 답을 주었다.
“이런 표현을 허락하실지 모르오나 그 아이를 ‘돌보는’ 동안 저는 경외감을 품었습니다. 그 아이는 놀랍다는 말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한 경이로운 존재였습니다.”
나는 다른 관리자들이 없을 때 ‘점박이 중년인’이 당신을 ‘신의 선물’이라 불렀다는 어머니의 말을 떠올렸다.
“주군께서 그 아이의 골수에 내재된 절대독정을 취하시면 그 특별한 아이는 생을 마감해야 했습니다. 차마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었습니다. 그 아이는 너무나 소중한…….”
감정이 북받친 노인이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거렸다. 나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러면서 노인에게 비로소 진정한 감사의 마음을 품었다. 노인이 순수한 의도로 어머니를 도와주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로서는 목숨을 걸어야 했으리라. 아무런 보상이 없을 터임에도.
나는 노인의 손을 잡았다. 나무 등걸처럼 거친 손이었다.
“제 어머니를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은인.”
노인이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꼈다. 땅딸보 여자도 덩달아 울었다.
나는 억지로 눈물을 삼켰다. 과거사의 감상엔 충분히 젖었다. 이제는 냉엄한 현실을 직면해야 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