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6
제05화 끝을 봅시다
우리는 송림 뒤편의 널찍한 공터로 자리를 옮겼다.
노인과 칠팔 장의 거리를 격하고 서서 그에게 포권하며 예를 갖췄다.
“가르침을 받겠소.”
노인이 손사래를 쳤다.
“시끄럽다. 어서 덤비기나 해라, 이놈아.”
나는 기꺼이 선공의 이(利)를 취했다. 주머니에 남아있던 조약돌 아홉 개를 한꺼번에 날리며 섬(閃)을 발한 나는 돌들과 거의 동시에 노인의 면전에 이르렀다. 노인은 조약돌들을 쳐내지 않고 좌측으로 이동했다. 그의 회피 방향을 예측했던 나는 선풍각(旋風脚)으로 노인의 머리를 노렸다. 노인은 팔을 들어 방어했다.
빡!
내 정강이와 노인의 팔뚝이 부딪치며 기음을 일으켰다. 덩치가 세 배는 큰 데다 공격의 이점까지 안고 있었지만 나는 그 격돌에서 손해를 보았다. 노인은 제자리를 고수한 반면 나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노인이 중심을 잃은 내 아랫배에 일권을 내질렀다. 나는 팔꿈치로 노인의 정수리를 찍으며 맞불을 놓았다. 노인은 일격을 포기하고 꺼지듯 주저앉았다. 하지만 아래쪽엔 내 무릎이 기다리고 있었다.
노인은 내 슬격(膝擊)을 양손바닥으로 받아냈다. 노인의 신형이 육칠 장이나 튕겨져 나갔다. 하지만 면상을 구긴 이는 나였다. 노인의 장심(掌心)에 서린 암기(暗氣)에 전신의 뼈가 울렸기 때문이었다.
이십 보 너머에 사뿐히 착지한 노인이 뒷짐을 지며 여유를 부렸다. 그를 응시하며 나는 옥소(玉簫)를 꺼내들었다. 비취빛 옥소가 월광을 받아 파랗게 번들거렸다.
나는 이번엔 섬을 발하지 않고 속보로 노인을 압박해 들어갔다. 내 삼엄한 기세에 노인도 여유를 접고 등 뒤에 두었던 양손을 가슴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오륙 보 앞에서 도약한 나는 옥소를 칼 삼아 수직으로 내리그었다. 그러나 내 옥소는 노인의 몸뚱이를 반으로 쪼개는 대신 허공만 갈랐을 뿐이었다.
시공의 제한을 무시하는 이형환위의 묘를 선보인 노인이 팔을 수평으로 휘둘러 반격에 나섰다. 하지만 그의 수도(手刀)도 내 허리를 베지 못했다. 퇴(退)로써 피해냈기 때문이었다.
삼사 초의 공방전에서 평수를 이룬 우리는 지체 없이 재격돌했다. 내 속도에 맞춰 노인의 움직임이 갈수록 빨라졌다. 그와 내가 발산하는 기운 또한 초수가 늘 때마다 증대되었다.
순식간에 일백 초가 지났다. 나는 전율했다. 짐작했던 대로 노인은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전력을 다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초(超)강자였다.
어느새 손바닥에서 화염을 뿜어내기 시작한 노인에 맞서 나도 철봉을 꺼냈다. 옥소와 철봉을 양손에 쥔 나는 진신절기를 아낌없이 쏟아냈다. 우리가 본격적으로 어우러지자 소나무 숲에 면한 공터에 때 아닌 폭풍이 휘몰아쳤다.
팽팽한 승부였다.
우리는 진퇴를 거듭하며 격렬하게 부딪쳤지만 어느 쪽도 확실한 주도권을 틀어쥐지 못했다. 나와 노인 모두 조금이라도 밀리는 느낌이면 즉각 강력한 반격을 쏟아냄으로써 균형을 맞췄다.
노인은 열양장(熱陽掌)의 대가였다. 그의 손바닥에서 분출되는 장공은 워낙 범위가 넓은데다 위력이 강대해 나는 그에게 접근하는 데 애를 먹었다.
하지만 노인 역시 나를 손쉽게 요리하지 못했다. 내 좌수에 든 철봉은 번개를 뿜어냈고 오른손의 옥소는 회오리바람을 일으켰다. 뇌전과 선풍은 노인이 펼친 장막을 뚫거나 우회하며 끊임없이 그를 두드렸다.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박빙의 형세에 변화가 생긴 것은 삼백 초가 경과했을 무렵이었다. 내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하자 노인은 때를 놓치지 않고 맹공을 퍼부었다. 공력이 소진된 나는 어쩔 수 없이 퇴보를 밟아야 했다. 노인은 나에게 숨 돌릴 여유를 허락하지 않고 거세게 몰아붙였다.
송림까지 밀린 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항복을 선언하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이기고 싶었다. 무림에 나온 이상 무적행보를 이어가고 싶었다.
노인의 파상공세를 오절신공(五絶神功)으로 버티던 나는 비상수단을 쓰기로 작심했다. 위험부담이 너무 크지만 전세를 뒤집으려면 그 방법 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골수에 봉인된 어머니의 원력을 풀어놓으려는 순간 소낙비 같은 장공을 퍼붓던 노인이 돌연 손을 거두고는 훌쩍 물러섰다.
“뭐하는 거요?”
“보면 모르냐? 이쯤 하자.”
“나는 아직 끝나지 않았소.”
“안다, 이놈아. 그래서 끝낸 거다.”
“무슨 소리요?”
“방금 전 네놈은 비장의 패를 꺼내들 심산이 아니었더냐?”
“……그래서요?”
“그래서긴, 이놈아. 보나마나 흉험한 수법일 테지. 그에 대응하려면 나도 밑천을 까야 할 터인데 그랬다간 네놈을 상하게 할 공산이 크니 아량을 베푼 게다. 고마운 줄 알아라.”
“그런 아량 필요 없소. 끝을 봅시다.”
“싫다, 이놈아. 벌써 땀이 식었다. 흥미도 잃었고.”
나는 부아가 치밀었다.
“나는 계속해야겠소.”
“이런 싸움닭 같은 놈. 나도 네놈의 패를 보고 싶지만 사정이 있단 말이다.”
“…….”
“눈알을 희번덕거리는 양이 못 믿겠다는 표정인데, 정말이다, 이놈아. 나는 열흘 후에 필생의 호적수하고 일생일대의 결전을 치를 예정이다. 네 패를 확인하려다 자칫 내가 부상이라도 입으면 곤란하지 않겠느냐?”
그래도 내가 수긍하는 기색이 아니자 노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로서는 절대로 질 수 없는 한판이다. 그러니 정 나하고 끝장을 보고 싶으면 기다려라. 호적수와의 승부를 마무리 지은 후에 상대해주마.”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나는 못을 박았다.
“나중에 딴 말하기 없기요.”
“이놈아, 너나 나중에 새삼스레 겁먹고 내빼지 마라. 뭔 패를 지니고 있든 박살을 내줄 참이니까.”
나는 히죽 웃었다. 그러고는 노인을 향해 포권했다.
“잘 배웠소.”
노인은 화답하지 않고 복잡한 감정이 담긴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노인과 나는 우리의 싸움판 노릇을 하느라 폐허가 된 공터를 떠나 숲으로 들어갔다.
너럭바위가 나오자 노인이 폴짝 뛰어올랐다. 나도 그를 따라 바위 위에 올라 좌정했다. 내가 엉덩이를 붙이기도 전에 노인이 말과 침을 쏟아냈다.
“궁금한 게 태산이다. 우선 네놈 무공 말인데, 왼손의 봉으로 부린 절기는 분명 검공이렷다? 반면 우수의 소(簫)로 펼친 건 도법이었고. 이미 망상으로 판명난지 오래인 좌검우도(左劍右刀)를 구현하다니, 그것도 병기의 특성을 넘어 완전히 상반된 특징을 가진 절기들을 동시에 구현하다니, 그것도 어설픈 수준이 아니라 상승의 경지에 이르렀다니, 대체 어느 고인한테 전수받았더냐? 강호가 넓다하나 모르는 이가 없다고 자부했는데 무림의 천년 묵은 공상(空想)을 실현한 이가 당대에 존재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는 갈등했다.
솔직히 말할까? 아니면 부친의 당부대로 가급적 말을 아낄까.
내 선택은 전자였다. 목전의 노인을 ‘등을 맡길 수 있는 이’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그런 이에겐 진심으로 대해야 한다고 일렀었다.
“검공과 도법은 각각 다른 이에게 따로 배웠소.”
노인이 가느다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라? 그럼 네놈 스스로 통합한 게냐?”
“선친과 함께 했소.”
“그래? 그렇다면 이상하구나. 너를 가르쳤다면 네 애비도 상당한 고수였을 텐데 어째서 복수를 너에게 떠넘겼느냐? 대머리도 아니고 한낱 그의 수족이라면 얼마든지 처치할 수 있었을 텐데.”
“뛰어난 무재를 지녔으나 선친은 고수가 아니었소. 고수로 성장할 기회를 박탈당했기 때문이오.”
“네 애비에게 그런 짓을 한 자가 홍 태사란 작자더냐?”
“그렇소.”
“사연을 들을 수 있겠느냐?”
나는 눈을 들어 천공의 만월을 바라보았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이가 달 속에서 입꼬리를 말아 올리는 특유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 * *
전광(全光)은 천애고아였다.
거지로 떠돌던 전광이 무공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아홉 살 때 산중에서 우연히 목격한 비무였다. 손바닥에서 기이한 바람을 일으키는 산발괴인을 시종여일 몰아붙이며 압승을 거둔 청년의 무용을 지켜보며 전광은 벼락으로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신세계였다.
산발괴인을 쓰러뜨린 청년은 나무 뒤에 숨어있던 전광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러고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동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지만 전광은 그 순간 청년과 같은 무인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무인지로는 평탄치 않았다. 전광 같은 거지 꼬마가 무공을 익히는 건 하늘의 별 따기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전광에게도 길이 열렸다. 삯을 받지 않고 저자의 심부름꾼 노릇을 충실히 해낸 덕분에 여러 상인들로부터 인정을 받은 전광은 포목점 공(孔)씨의 추천을 받아 인근 무관(武館)의 종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의 나이 열세 살 때였다.
무관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전광은 기회가 생길 때마다 연무장을 기웃거리며 무동(武童)들의 수련과 대련을 엿보았다. 모두가 잠든 밤이면 숙소를 빠져나와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창고 뒤뜰에서 눈에 담아둔 동작들을 몸으로 익히던 전광은 일 년도 지나지 않아 스스로 무관을 나왔다. 그곳에서는 더 이상 배울 게 없다고 판단해서였다.
그 후 이 년여 간 성주 일대의 무관들을 전전하며 무공을 훔쳐 배우던 전광은 막 열일곱 살이 되었을 무렵 결정적인 전기를 맞았다.
그날도 무관의 외진 곳에서 홀로 무공을 연마하고 있던 전광은 그를 주시하는 눈이 있음을 알지 못했다. 그 눈의 주인은 무관의 교두였다. 그가 그 자리에 나온 건 우연이 아니었다. 매일 밤 숙소를 몰래 나가서는 땀에 흠뻑 젖어 새벽녘에야 돌아오는 수상한 하인에 대한 수군거림을 듣고는 확인 차 나온 것이었다.
전광의 수련을 지켜보던 교두는 눈을 의심했다. 왜소한 체구의 소년은 그의 권법과 봉술을 그보다 능숙하게 구사하고 있었다. 아니, 능숙함의 차이를 넘어 수준 자체가 달랐다. 소년이 한 단계 발전시킨 것이었다. 심장이 터질 듯한 흥분을 누르며 교두는 그날 해가 뜨자마자 관주를 찾았다. 그러고는 그가 본 바를 상세히 고했다.
교두의 보고에 깜짝 놀란 관주는 그와 의논을 한 연후 전광을 불렀다. 그날부터 전광에겐 새로운 삶이 펼쳐졌다.
* * *
“알만 하구나. 제 집에 있는 줄도 몰랐던 하찮은 아이가 대종사의 잠재력을 가진 기재임을 알고는 횡재한 기분이었을 테지. 그래서 네 애비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했을 테고. 그렇지 않으냐?”
“그렇소. 오매불망하던 심법을 얻은 내 선친은 날듯이 기뻐했다고 하오. 비로소 진정한 무인지로의 첫 걸음을 내딛었기 때문이오. 청인무관의 관주는 심법만이 아니라 내공 축적에 도움이 되는 영약들도 아낌없이 내주었소. 무관의 다섯 교두 또한 자신들의 비기를 성심성의껏 전수했소. 불철주야 무공 수련에 매진한 선친은 일 년 후 그들 전부를 감당할 정도로 강해졌소.”
“허어, 굉장한 천재였구나.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
“낭중지추라고 선친에 대한 소문이 청인을 넘어 성주 무림 전역에 퍼졌던 모양이오. 다른 대형무관이나 명문방파가 선친을 빼갈까 봐 전전긍긍하던 관주는 서둘러 안평 무림대회의 출전을 결정했소. 선친이 청인무관 소속임을 분명히 해두기 위해서 말이오. 물론 우승에 대한 기대도 상당했소. 내 선친은 실전비무에서 빈약한 내공을 상쇄하고도 남는 강미를 보였다고 하오.”
“흠, 어떤 유형인지 알겠다. 네놈도 그런 구석이 있더구나. 기실 내가 너를 주목하게 된 계기도……, 아니다. 옆길로 새다간 날 밤 샐 테니 네 애비 이야기나 마저 듣자꾸나.”
“연령 하한선인 열여덟 살에 안평 무림대회에 참가한 부친은 예선전에서 파죽지세로 연승하며 본선에 진출했소. 다섯 판 모두 일방적인 승리였다고 하오.”
“그랬을 테지. 변방 무림대회에 나오는 놈들 중 팔구 할은 기본도 안 된 쭉정이들이니까. 그래서 네 애비는 본선에서도 승승장구하고 우승을 거머쥐었더냐?”
“그러지 못했소.”
“어째서? 예상치 못한 강적이라도 만난 게냐? 아! 그 원수란 작자가 등장할 대목이구나. 그렇지?”
“…….”
“왜 대답이 없어, 이놈아?”
“……그렇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