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60
제59화 대단하군요!
나는 단도직입했다.
“이번에 독왕이 은인께 어떤 임무를 내렸는지요?”
별로 어려운 질문이 아니었던 듯 노인이 즉답했다.
“이곳으로 와서 삼호를 부려 소주를 보호하라고 하셨습니다.”
땅딸보 여자를 흘긋 바라본 나는 좀 더 밀고 들어갔다.
“그게 전부였습니까?”
예상대로 노인이 우물쭈물했다. 나는 답변을 재촉하지 않고 그에게 충분히 저울질할 기회를 주었다. 잠시 후 결정을 내렸는지 노인이 결연한 음성을 토해냈다.
“이건 밀명입니다만, 만에 하나 소주께서 변을 당할 경우에는 시신을 곡으로 갖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제 장례를 치러주기 위해 독왕이 그런 명령을 내린 건 아닐 테지요?”
이미 진실을 토로할 작심이 선 노인의 입에서 답이 술술 나왔다.
“아닙니다. 소주의 사체에서 원력을 추출할 목적으로 그러셨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죽은 자의 몸에서도 그게 가능한가요?”
“원론적으로는 가능합니다. 다만 아주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고 실패 확률도 높기에 주군의 입장에서 바람직한 선택은 아니지요. 설사 흡수에 성공한다고 해도 무상심공을 운용할 줄 아는 생자의 자발적 협조 하에 대법을 시행했을 시보다 현저히 떨어지는 원력을 취할 우려가 상당하고요.”
“…….”
나는 독왕의 처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 그는 그날 나를 먹어치우지 않은 걸까.
이 의문점을 떠올린 순간 엉뚱하게도 진소월이 생각났다. 그녀라면 어떻게 추론할까. 그러자 하나의 가설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독왕은 이미 배가 부른 상태군요? 굳이 내 원력을 뽑아가지 않아도 될 만큼.”
노인이 탄복했다.
“그렇습니다, 소주. 여기에는 내막이 있습니다. 곡 내에서 주군과 저를 포함해 네 명만이 아는 비밀이지요. 아까 말씀드린 대로 사관이 종료되었을 때 생존한 아이들은 열네 명이었습니다. 그중 최종 관문까지 살아남은 아이는 삼호와 팔호, 둘 뿐이었지만 나머지도 꽤 오랫동안 버텼지요. 구관까지 올라온 아이도 셋이나 됩니다. 그 아이들 역시 주군에게는 귀중한 보물들이었지요.”
나는 전후사정을 짐작했다.
“제 어머니가 탈출한 이후 독왕은 그들의 시신에서 독정을 취했군요?”
“맞습니다. 오관과 육관에서 탈락해 죽은 지 사 년이 경과한 아이들을 빼도 여덟 명이 남았습니다. 그 아이들의 체내에 든 독정을 합치면 양적으로는 삼호와 팔호, 그러니까 소주의 자당보다 월등히 많았습니다. 다만 불순도가 높은 데다 질을 보장할 수 없어 주군으로서는 탐탁지 않은 보약이었지요.”
궁금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나는 차근차근 풀어나갔다.
“그 아이들 말인데, 그토록 오래 시신이 썩지 않았단 말입니까?”
“그 정도의 독물을 소화한 시신들이라면 특수처리를 할 시 수십 년까지 원상태로 보존할 수 있습니다.”
소름이 돋았다. 내 몸도 그럴 게 아닌가? 자세히 묻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기에 나는 다음으로 넘어갔다.
“제 어머니가 탈출한 날 새벽 정맹의 주력군이 독곡을 침공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 아이들의 시신을 빼돌릴 수 있었는지요? 도주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그날 밀림을 벗어난 독인들의 수는 많이 잡아도 오십이 넘지 않은 것으로 들었습니다. 사망자는 그 열 배가 넘고요.”
“저희는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소주. 곡의 심처에 숨어있었지요. 물론 저를 비롯한 극소수의 인물들에게만 허락된 은신이었습니다. 모두 여섯이었는데 전원이 주군의 심복들이었지요.”
그제야 나는 점박이 노인의 생존과 관련된 의혹이 해소되었다.
나는 결론으로 향했다.
“여하간 독왕은 그 아이들의 사체에서 독정들을 빼내 배를 채우는 데 성공했군요?”
“그렇습니다. 참으로 지난한 과정이었지요. 사체에서 독정을 뽑는 데만 이 년 팔 개월이 소요되었고 그 이후로도 주군께서 이질적인 독정을 융합하고 체화하는 데는 그 열 배 가까운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사실 저희 모두 회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주군께선 보란 듯 해내셨지요. 무려 이십사 년에 걸쳐서 말입니다. 오로지 영세제일독존이라 할 주군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소주의 소문과 용모화가 곡에 들어온 날 저희는 주군께서 이루신 대업의 완성을 경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소주의 얼굴을 담은 용모화를 보신 주군께서 경악하시더니 제게 건네주시더군요. 저는 까무러칠 뻔했습니다. 이유는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실 테지요?”
나는 고소를 지었다. 독왕과 점박이 노인이 본 것은 오래 전 귀신이 되었을 이의 얼굴이었을 터이니 그들이 놀란 건 당연지사였다.
나는 한편으로는 안도했다. 만약 독왕에게 대안이 없었더라면 그는 내 어머니와 같은 ‘보물’을 만들기 위해 새로이 혈사를 일으켰을 공산이 컸다. 그랬으면 다시 수만 명의 생목숨이 희생되었을 터였다. 그런 의미 말고도 내 생명을 연장시켜주었다는 점에서 독왕의 성공은 축하해야 마땅한 경사였다. 배가 덜 불렀다면 독왕은 필히 나를 만난 자리에서 먹어치우려 들었을 것이었다.
점박이 노인과 얼마간 이런저런 대화를 이어가던 나는 땅딸보 여인에게 고개를 돌리며 초미의 관심사를 거론했다.
“아까 이분이 굉장한 몸을 얻었다고 하셨는데, 정사마의 강호들로부터 저를 지킬 수 있을 만큼 강한지요?”
내 시선이 닿자 한동안 멍하니 있던 여자가 배시시 웃었다. 어머니와 닮은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었지만 나는 그녀가 남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친근하게 느껴졌다는 말은 아니었다. 나는 그저 그녀가 가여웠고 그래서 울적했다.
점박이 노인도 땅딸보 여자에게 눈길을 주었다.
“주군께선 원래 저와 삼호 말고도 세 명의 독영(毒影)을 이곳에 파견하실 생각이셨습니다. 그들은 독공을 발할 시 녹안이 되지 않아 독인임을 들키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지요. 하지만 초절정 급의 무인을 감당하기엔 역부족인지라 고심 끝에 저희 둘만 보내기로 하셨습니다. 사실 삼호 혼자 전력의 구 할 이상을 차지할 터이니 소주를 지키는 데는 굳이 그들이 필요 없지요. 여기 이 삼호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한참 변죽을 울리더니 점박이 노인이 까닭모를 미소를 머금었다.
“제가 말로 설명 드리는 것보다 소주께서 직접 확인하시는 게 어떠실는지요?”
바라는 바였다.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내가 말했다.
“밖으로 나가시지요. 적당한 곳이 있습니다.”
나는 점박이 노인을 데리고 다실을 나왔다. 멀뚱히 서있던 땅딸보 여자가 따라오라는 노인의 말에 허둥지둥 우리를 쫓았다. 그녀는 행동이 굼떴고 걸음걸이도 불안정했다. 뒤뚱거리는 양이 마치 오리 같았다. 그 탓에 호기심이 더욱 커졌다. 저런 몸으로 보여줄 ‘굉장한’ 능력은 어떤 것일까.
와옥을 나서며 나는 노인에게 물었다.
“경공을 전개하실 수 있는지요?”
간단한 질문이었으나 답은 길었다.
“저는 하급의 독인입니다. 기실 독인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이지요. 기본적인 독공조차 구사하지 못하니 말입니다. 그러니 경공은 꿈도 꾸지 못합지요. 하지만 소주를 따라가는 데는 별 지장이 없을 겁니다. 삼호가 저를 안고 갈 테니까요.”
나는 땅딸보 여자를 시험해보기로 했다. 그래서 그녀가 노인의 명을 받아 그를 안아들었을 때 따라오라고 이른 후 극상의 섬을 운용해 최고속도로 날았다. 놀랍게도 여자는 조금도 뒤처지지 않고 나를 쫓아왔다.
나는 난이도를 높였다. 공중에서 절(折)과 회(回)를 가미해 수시로 방향을 튼 것이었다. 속도도 조절했다. 여자는 불규칙한 진로와 속력의 변화에 당황한 기색이었으나 금세 적응했다. 나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투력은 어떨지 모르지만 방금 현시한 경신만으로도 여자의 능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대단하군요!”
땅에 내려앉으며 내가 감상을 밝혔다. 뒤죽박죽이었던 속도 변화를 감당하지 못해 속을 게워낸 점박이 노인이 땅딸보 여자의 뺨을 두드리며 칭찬했다.
“잘 했다, 삼호.”
여자가 큼직한 입술을 헤벌쭉 벌리며 기쁨을 드러냈다. 누런 이들과 뻘건 잇몸이 햇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실소를 지으며 나는 노인에게 물었다.
“그녀는 이보다 더 빨리 날 수도 있습니까?”
노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요, 이번처럼 움직인 건 처음인지라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검지를 들어 좌측의 봉우리를 가리켰다.
“그녀에게 저기 정상에 갔다 오라고 해주시겠습니까? 최대한 빠르게 말입니다.”
노인이 즉시 내 청을 이행했다. 노인의 지시를 받은 여자가 몸을 날린 순간 나도 출발했다.
봉우리까지의 거리는 육칠백 장 정도였다. 왕복으로 따지면 십 리에 달했다. 차이를 확인하기엔 충분한 거리였다.
땅딸보 여자와의 경주는 내 패배로 돌아갔다. 그녀가 일백 장 높이의 산꼭대기에 올랐을 때 나는 중턱에 이르러있었다. 나는 거기서 멈췄다가 그녀가 하산할 때 다시 선을 맞춘 후 점박이 노인이 있는 곳까지 달렸다. 전력으로 질주했으나 결과는 동일했다. 여자는 나보다 사오십 장 앞서 점박이 노인의 면전에 도달했다.
나는 산보를 다녀온 듯 숨도 고르지 않고 있는 여자를 바라보며 침을 삼켰다. 만약 그녀와 추격전을 벌인다면 반 각 이내에 따라잡힐 터였다. 경공에 크나큰 자부심을 갖고 있던 나는 지난번 검황자에 이어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 역시 세상은 넓고 괴물들도 많았다.
머릿속을 긁어내고 싶을 정도로 궁금해졌다.
여자의 무력은 어느 정도일까. 그것도 나를 능가할까. 장원을 나서기 전까지만 해도 그럴 리 없다고 확신했으나 지금은 자신하기 어려웠다.
“어서 가시지요. 그녀의 싸움실력을 보고 싶습니다.”
점박이 노인이 신형을 날리려는 나를 제지했다.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소주.”
나는 구부렸던 무릎을 펴고 노인을 보았다. 노인이 쭈뼛거렸다.
“죄송하오나 가기 전에 한 가지 여쭙고자 합니다. 실은 와옥을 나올 때 말씀드리려 했으나 기회를 놓쳐버렸습니다.”
“물어보시지요.”
“소주께선 강호의 기인이사들과 어울리신다고 들었습니다. 아까 와옥에선 보지 못했는데 혹시 지금 가시는 곳에 그들이 있는지요?”
“그렇습니다.”
“아!”
탄성을 터뜨린 노인이 말을 잇지 않고 우물쭈물했다.
“왜 그러시는지요?”
“실은 되도록 삼호를 다른 이들에게 노출시키지 않았으면 합니다. 삼호가 독장을 쓰면 다들 이 아이가 독인임을 알아볼 테니까요. 소주를 지켜야 할 상황이 아닌 한 삼호의 진력을 드러내는 건 피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노인이 난색을 표하는 이유를 이해했다. 정사마를 불문하고 독인은 모든 무림인의 공적이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은인. 제 친인들은 그녀가 독인임을 알더라도 개의치 않을 겁니다. 다른 곳에 가서 발설하지도 않을 테고요.’
이렇게 노인을 안심시키려 했던 나는 말을 꺼내기 전에 잠시 검토했다. 과연 그럴까.
괴선과 광객은 문제가 아니었다. 괴선은 독인에 대한 거부감이나 편견이 적었다. 광객은 본인의 취향과 무관하게 나와 관련해서는 무조건적으로 내편을 들었다.
하지만 한우경과 검황자도 그럴 지는 장담하기 어려웠다. 특히 한우경의 경우 만에 하나라도 땅딸보 여자에게 반감을 표출하고 중원 무인들의 핏속에 면면히 내려오는 독인박멸의 사명을 실행하려 들면 곤란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었다. 그가 작심하고 검을 부리면 저지할 방도가 없었다.
나는 내가 경솔했음을 깨달았다. 괴선과 광객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을 테지만 어쨌거나 노인이 옳았다. 땅딸보 여자를 소개하기 전에 한우경과 검황자의 독인에 대한 인식을 확인하는 게 우선이었다.
“알겠습니다. 다른 데로 가지요.”
이렇게 해서 나는 늪지로 향하지 않고 방금 땅딸보 여자와 경주를 벌였던 봉우리 쪽으로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