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63
제62화 네 머리통이 얼마나 단단한지 시험해 볼래?
신통방통했다.
내 앞에는 흑미광(黑尾㹰)이 달리고 있었다. 숯처럼 까만 꼬리를 가진 이 족제비는 만수문(萬獸門)에서 거금을 들여 구입한 영물이었다. 흑미광은 냄새 쫓기가 주특기였다. 진소월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일단 특정한 냄새를 주지시키면 수천 리까지 추적이 가능하다고 했다.
달포 전부터 진청운은 열흘 간격으로 백일취를 몸에 바르고 있었다. 납치를 대비한 조치였다. 흑미광을 구해 둔 것도 같은 맥락의 준비였다.
진소월은 삼절문이나 일월검문이 직접 나를 치지 않고 사파의 방식으로 일을 도모할 거라 예상했다. 여러 수단이 있으나 사파 무림의 거두들은 뒷골목의 흑도들이나 즐길 납치를 택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위험부담은 적은 반면 효과는 상당할 터이기 때문이었다. 진청운-진소월 부녀가 내게 유효한 미끼임은 이미 작년 시월 신필주가 증명한 바가 있었다.
진소월은 그녀가 아니라 진청운이 표적이 될 거라 단언했다. 삼절문과 일월검문이 그녀의 소재를 파악하기 어려워서가 아니라 진청운을 잡는 게 훨씬 수월하기 때문이었다. 진청운 주변에는 그들에게 위협이 될 만한 고수가 없었다.
진청운을 장원으로 불러 원천적으로 납치를 차단할 방안도 검토했으나 당사자가 반대했다. 전원에서 할 일이 많은 데다 어차피 언젠가는 겪어야 할 일이니 액땜하는 셈치고 당해주겠다는 것이었다. 그에게 불상사가 생기지 않을 거라 판단한 진소월은 그럼에도 철저한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신속한 연락망, 그리고 나와 흑미광이 안배의 핵심이었다.
전원 저자에 대소동이 벌어졌다.
시커먼 꼬리의 족제비 탓이 아니라 그 짐승을 바로 뒤에서 쫓는 거한, 즉 나 때문이었다. 나를 보고 어리둥절해 하던 행인들은 너나없이 비명을 지르며 얼어버리거나 도망쳤다. 마웅이라는 별호가 거리를 뒤덮었다.
사람들의 반응에 놀랐는지 잠시 주춤하던 족제비가 내가 조봉에게 받은 방울을 흔들자 임무를 상기하고는 다시 거침없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본의는 아니었으나 나는 족제비를 쫓아가며 저자를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전원을 나오고서야 소란이 가라앉았다. 족제비는 마차들이 다니는 대로가 아니라 산악지대로 향했다. 이 또한 진소월이 예측한 대로였다. 진소월은 납치범들이 멀리 가지 않고 전원 인근에 대기하고 있을 거라고 했다. 그들의 역할은 진청운을 모처에 억류해 두고 그들에게 납치를 사주한 본당에 전서구를 날려 성공을 알리는 정도에 불과할 터였다. 인질의 가치를 확인한 연후 일의 경과에 따라 재활용 여부를 결정해야하기에 진청운에게 당장 위해를 가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래도 진청운이 안전하리라 완벽하게 장담할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나는 긴장을 유지한 채 족제비를 쫓았다. 이 신통방통한 짐승이 나를 어서 진청운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 주기를 바라면서.
산을 넘고 또 넘었다.
강이 나왔을 때 고비인가 싶었지만 족제비를 들고 도강한 후 건너편에 내려놓자 족제비는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바로 추적을 재개했다.
강변의 발자국을 살핀 나는 납치범들이 두 명임을 알았다. 발자국의 깊이와 간격을 보아 상당한 수준의 고수들이었다. 둘 모두 절정의 중(中)은 될 것 같았다.
전원에서 여기까지의 경로와 족제비가 나아가는 방향을 가늠해보니 보둔산이라는 지명이 떠올랐다. 보둔산은 진소월이 진청운의 억류 장소로 점찍은 세 군데 후보지 중 하나였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나는 도박을 했다. 족제비를 손에 쥐고서 경신을 전개한 것이었다. 일다경가량 전속력으로 비행한 나는 보둔산이 시야에 들어오자 족제비를 풀어주었다.
흑미광은 내 기대에 부응했다. 코를 킁킁거리며 이리저리 달리다 반경 일백 장 이내에서는 따라가야 할 냄새를 놓치는 법이 없다는 절대후각의 소유자답게 직선주행을 시작했다. 이윽고 보둔산 자락에 들자 족제비가 찍찍거리며 쥐 소리를 냈다. 목표물이 가까이 있다는 신호였다.
멀리서 비둘기 한 마리가 숲 위로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납치범들이 날린 전서구임을 직감한 나는 족제비를 들고는 곧장 그곳으로 날아갔다.
기감을 끌어올리자 두 개의 기운이 잡혔다.
사람의 음성도 들렸다. 납치범들임에 분명한 자들이 나누는 대화였다. 기척을 내지 않도록 주의하며 나는 그들에게로 접근했다. 울창한 수림을 지나자 대화의 내용이 뚜렷하게 잡혔다.
“…… 그래서 언제까지 이곳에 있어야 한다고 하던가, 춘(春)?”
“나도 몰라. 그냥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전서구를 보내 다음 지시를 내릴 거라고 했어. 우리는 느긋하게 고 야들야들한 계집들이나 즐기다가 그가 하라는 대로 하면 돼.”
“제길, 되도록 연산 너머로 가고 싶은데. 이곳에서 얼쩡거리다가 그 애송이가 찾아내기라도 하면 큰일 아닌가?”
“못 본 새 겁쟁이가 됐군. 그놈이 무슨 수로 찾아와?”
“하지만 여기는 전원에서 고작 일백사오십 리 거리이지 않은가? 만에 하나 애송이가 우리 자취를 쫓아…….”
“아, 닥쳐! 재수 없게. 말이 씨가 되면 어쩌려고. 걱정 붙들어 매라, 홍가(洪家)야. 그놈은 절대로 여길…….”
“왜 그러는가, 춘?”
담장을 넘은 나는 극상의 섬을 발해 ‘춘’이라 불린 대머리 사내가 짝짝이 눈을 가진 ‘홍가’에게 답을 주기 전에 둘을 단숨에 제압했다. 마혈이 찍혔음에도 두 사내 모두 경련을 일으켰다.
주위를 둘러본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산장 근처에 이르렀을 때 내 코를 후볐던 피 냄새의 진원지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마당 중앙에 이십여 구의 시체가 널브려져 있었다. 전부 머리가 깨지거나 박살난 참혹한 시신들이었다. 일부는 도끼에, 나머지는 주먹에 당한 듯했다.
나는 전후사정을 짐작했다.
대머리와 짝눈은 증인을 없애기 위해 산장의 거주자들을 살해한 것이었다. 그들이 언급했던 ‘계집들’은 네 채의 와옥들 중 한 곳에 있을 터였다. 이 악당들은 진청운도 그들과 함께 두었을 공산이 컸다.
흉한들을 쏘아본 나는 숨소리가 잡히는 두 번째 와옥으로 들어갔다. 예상대로 십대에서 삼십대에 걸친 여인 여섯 명과 진청운이 서로 면한 방에 들어있었다. 나는 여인들을 내버려두고 진청운에게 가서 혈도를 풀어주었다. 진청운이 별안간 눈물을 흘렸다. 구조의 기쁨을 표현한 것이 아니었다.
“아아, 조금만 일찍 왔더라면 참사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을.”
나를 비난하기 위해 내뱉은 넋두리가 아님을 알면서도 착잡했다. 어쨌거나 이 산장에 닥친 비극의 원인은 나였다. 나 때문에 아무 관계도 없는 이들이 횡액을 당한 것이었다.
심중에 고이는 죄책감에 당황한 나는 진청운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새해 첫날부터 고초를 겪으시게 해서.”
“자네가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하지만 이곳 사람들에게…….”
진청운은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그에게 손에 들고 있던 족제비를 건네주었다. 벌써부터 원 주인에게 가려고 안달하고 있던 족제비가 까만 꼬리를 흔들며 재롱을 부렸다.
“맞은편 방에 여자들이 있습니다. 바깥의 악적들을 처리할 동안 그녀들을 돌봐주십시오. 썩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닐 터이니 나와 보지는 마십시오.”
“알겠네.”
족제비와 여인들을 진청운에게 맡긴 나는 와옥을 나왔다. 어떻게든 해혈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던 대머리와 짝눈이 나를 보고는 절망의 눈빛을 발했다.
나는 뻣뻣하게 굳은 흉한들 앞에 섰다. 둘 다 감히 나와 시선을 맞추지 못했다. 나는 대머리의 아혈을 풀어주었다. 살려달라고 빌 거라는 내 예상과 달리 대머리는 입을 열지 않았다.
“지금부터 몇 가지 묻겠다. 정직하게 답하면 명줄을 붙여주겠다. 하지만 거짓을 고하면 머리통을 부숴버리겠다.”
대머리가 눈을 치뜨며 나를 직시했다.
“정말이오?”
“질문은 나만 한다. 쓸 데 없는 소리를 주절거리면 한 번에 팔다리를 하나씩 부러뜨리겠다.”
엄포가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 나는 대머리의 팔을 잡고 비틀었다. 빠각. 기음이 일며 어깨가 통째로 돌아갔다. 통증이 상당할 터임에도 대머리는 비명을 참았다. 독종이었다.
“누가 소월루주를 납치하도록 시켰나? 참, 그 전에 네 이름부터 말하라.”
“나는 오연춘(吳宴春)이라 하오. 이번 건은 파월 백사당의 의뢰를 받아 수행했기에 그들 뒤에 누가 있는지는 나도 알지 못하오. 하지만 귀하가 원한다면…….”
“그만!”
대머리의 말을 중단시킨 나는 철봉을 꺼냈다. 그러고는 불문곡직 그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퍽. 수박 깨지는 소리와 함께 대머리의 머리통이 박살났다. 상대적으로 대가 약한 짝눈이 소스라쳤다. 공포에 질린 그에게 눈을 돌리며 내가 을렀다.
“거짓말하면 이렇게 돼. 이놈의 본명은 오연춘이 아니라 고춘(高春)이야. 별호는 파두권(破頭拳)이고. 내가 너희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었을 거라 여기고 제법 머리를 굴린 모양이지만 어림도 없지. 누굴 속이려고. 아! 백사당 운운도 개소리야. ‘그들’이 거추장스럽게 매개자를 두었을 턱이 없어. 자, 어떻게 할래? 진실을 고하고 목숨을 부지할래, 아니면 이놈처럼 네 머리통이 얼마나 단단한지 시험해볼래?”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짝눈이 부르짖었다.
“저는 홍전(洪佺)입니다, 마웅. 강호 동도들은 저를 견부(犬斧)라고 부릅니다. 저희에게 이 일을 사주한 자는 삼절문의 책사인 구양운(具養運)입니다. 저는 처음부터 내키지 않았으나……, 헙!”
말을 하다 말고 짝눈이 급히 입을 다물었다. 사족을 달다 사지가 부러질 수 있음을 상기한 것이었다.
나는 짝눈의 답변에 만족했다.
삼절문이 배후이리라 짐작하긴 했으나 그래도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다. 만약 일월검문의 행사였다면 엉뚱한 곳을 치는 우를 범했을 터였다.
짝눈이 기대감을 담은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그의 기대를 저버렸다. 그의 양 팔꿈치와 두 무릎을 꺾어버린 나는 혹시 몰라 배도 걷어찼다. 발끝에 단전이 터지는 느낌이 전해졌다. 내가 진청운을 위한 안전조치를 취하는 동안 짝눈이 깃털을 뽑히는 까마귀가 내지를 법한 괴성을 뿜어냈다. 그 와중에도 그는 항의를 잊지 않았다.
“약속이 틀리지 않느냐?”
“뭐가? 명줄은 붙여놓았잖아?”
내 반문에 말문이 막힌 짝눈이 악다구니를 썼다. 나는 그의 주둥이도 뭉개버렸다. 짝눈을 운신불능으로 만든 나는 와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진청운이 스스로 귀가할 수 있음을 확인한 후 그에게 삼절문으로의 출발을 알렸다.
* * *
나는 잠시 갈등했다.
삼절문이 아니라 그들이 나를 유인하려 했던 상야평으로 가 볼까. 거기에 가면 강적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덫은 삼절문이 놓았지만 나를 사냥하러 나선 자들은 마련의 마두들일 확률이 거의 십 할이었다. 삼절문은 나를 덫까지 끌어다주기만 하고 처치는 마두들에게 떠넘길 게 틀림없었다. 남의 손을 빌어 코를 풀려는 수작이었다.
마련의 행사를 사실상 주관하는 마뇌가 삼절문의 간계에 응한 것은 그들로서도 손해 볼 게 없는 거래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상야평에 와 주기만 한다면 앓던 이를 뽑을 수 있을 터이니 그로서는 마다할 까닭이 없었다.
진소월의 예측대로라면 마뇌는 팔마 중 최소한 절반을 동원했을 것이었다. 괴선과 광객을 염두에 둔 전력이었다. 어쩌면 아직 회복이 덜 되었을 철마를 제외한 칠마 전원이 출동했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상야평 행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는 늪지에 들러 괴선-광객을 대동하고 삼절문이 있는 봉평(鳳枰)으로 향해야 했다.
그러나 나는 곧장 삼절문으로 가기로 작심했다. 나 자신에게 선물을 주기 위해서였다. 나는 철마류 본단을 단독 침공했을 때의 긴장감과 급박함을 다시 체험하고 싶었다. 그럼으로써 현재 나를 가로막고 있는 벽을 돌파할 실마리를 구하고 싶었다.
침식마저 잊고서 무공일도에 매진해왔으나 나는 시시때때로 갈증에 시달렸다. 목마름을 해소하려면 목숨을 건 실전이 필요했다. 철마와의 격전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내가 그보다 상수였기 때문이었다. 한우경과의 비무수련도 한계가 자명했다. 아무리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 치열하게 싸우더라도 생사투와의 차이는 확연했다.
사선(死線)을 넘나들며 얻는 깨달음이 내겐 마른 논의 단비와 같았다. 나는 그 달콤한 유혹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이는 아버지가 내게 물려준 천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