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65
제64화 고맙소
실은 단순히 전의를 다지거나 과시하려고 소리를 지른 게 아니었다. 내 고함은 내가 꺼내들 승부수의 약점을 감추기 위한 일종의 위장술이었다.
창문으로 튀어나온 후 사방에 포진한 자들의 기운을 가늠한 나는 전투가 자살행위임을 직감했다. 설마 그들 전원이 칠사에 속하는 강자들임은 몰랐으나 본능적으로 감당불가의 전력임을 인지한 것이었다.
하여 도주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문제는 적들이 호락호락 내 탈출을 허락하지 않을 거라는데 있었다. 그래서 나는 면밀한 수순을 정했다.
첫째, 일단 달아나려는 시늉을 할 것. 그러면 적들은 내 퇴로를 차단하며 합공해 올 터였다.
둘째, 오절신공으로 적들의 일차 공세를 견디며 약한 고리를 찾을 것. 약한 고리라 함은 무력이 가장 처지거나 나를 저지할 의지가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자를 의미했다.
셋째, 그 약한 고리에게 내 최강의 수법이라 할 뇌전중중을 날려 돌파구를 마련할 것. 적들이 발산하는 강대한 기운을 감안하면 반드시 후속공격이 쏟아지기 전에 빠져나가야 했다.
제일감으로 떠올린 타개책치고는 꽤 괜찮았으나 두 번째 수순에서 두 가지 변수가 생겼다. 하나는 적들의 공격으로 인해 내 내기가 심하게 격탕되고 옆구리에 가볍지 않은 부상을 입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약한 고리를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둘 다 곤란했다. 심히 곤란했다. 전자는 승부수에 지장을 초래했고 후자는 나아가야 할 길을 잃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세 번째 수순을 강행했다. 달리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아서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대안을 궁리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 전면의 경천도군을 목표로 삼았다. 그보다는 생사대작이 좀 더 가까웠지만 상성 상 그가 좀 덜 부담스러운 상대라 판단하고는 즉흥적으로 내린 결정이었다.
내상을 입지는 않았으나 생사대작의 장공에 실린 경력으로 인해 기혈이 요동친 탓에 침소를 나오며 끌어올렸던 원력도 흐트러졌다. 나는 억지스럽게 응집한 원력을 철봉에 실어 뇌전중중을 날렸다.
우우웅.
공간이 울었다. 하지만 내가 뇌전중중을 발함과 동시에 터뜨린 사자후가 그 소리를 삼켰다.
“우우우!”
나는 이 승부수가 통하기를 간절히 빌었다. 실패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절반의 성공이었다.
내 승부수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터임에도 경천도군은 내 사자후가 터진 순간 방어막을 두텁게 했다. 도강으로 방패를 만든 것이었다. 단지 그것뿐이라면 공간을 격하고 날아간 무형의 뇌전을 방비하지 못했을 터이지만 그는 호신강기를 강화시킴으로써 보이지 않는 암수에도 대비했다. 실로 탁월한 대처였다. 무력과 무관하게 실전경험이 상당하다는 반증이었다.
그러나 경천도군은 완벽하게 내 뇌전중중을 막아내지는 못했다. 도막을 뚫느라 위력이 반감되기는 했으나 내 뇌전은 그의 왼 어깨를 강타했다. 호신강기 덕분에 좌견과 심장이 뭉개지는 참사를 모면한 경천도군이 지상으로 추락했다.
헌데 경천도군은 그 와중에도 그가 비켜선 공간을 탈출로로 삼으려던 나에게 칼을 휘두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아, 젠장. 그의 방해는 내 발목을 잡았다. 직진하다간 칼바람에 걸려 동체가 갈기갈기 찢길 터였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생사대작이 버티고 있는 쪽으로 이동했다.
어김없이 괴선의 화염장을 능가하는 강맹한 장공이 나를 덮쳤다. 나는 맞대응을 삼가고 경천도군을 따라 지상으로 수직 하강했다. 그러나 땅에 발을 딛지는 않고 도중에 수평 비행으로 바꾸었다.
방금 발한 극상의 이(移)는 신기를 자랑하기 위한 용도가 아니었다.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자전검군과 탈혼창군의 탄강들 때문에 할 수 없이 방향을 튼 것이었다. 하지만 그 곳도 안전지대와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파산권귀의 무지막지한 권풍을 정면에서 맞이해야 했다. 위에서는 생사대적이 폭포수 같은 장공을 퍼부어댔다.
암담했다. 빠져나갈 데가 없었다. 문자 그대로 외통수였다.
오해는 마시라들.
절망적인 국면임을 설명하기 위한 말이지 내가 포기했다는 뜻은 아니니까. 나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믿는 위인이었다.
설령 이 난국을 헤쳐 나가지 못하더라고 고기값은 할 참이었다. 적들 중 적어도 두 명은 나와 더불어 염왕을 알현하러 가야할 것이었다. 그래야 수지타산이 맞았다. 저들은 죄다 칠팔십 대의 늙은이지만 나는 한창 때의 젊은이가 아닌가. 그렇게 따지고 보니 둘도 부족했다. 다섯 노물 모두를 저승길의 동반자로 만든들 무조건 내 손해였다.
빌어먹을.
그러니 나는 살아야 했다. 살아서 다시 거래를 해야 했다. 내게 이로운 방향으로.
하지만 어떻게?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갖고 있지 않았다.
답이 없다고 넋 놓고 있을 내가 아니었다.
나는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수를 찾았다. 아니, 찾았다는 말에는 어폐가 있었다. 사고 과정을 거치지 않고 순수하게 본능이 시키는 대로 행동했으니까.
내 선택은 또 한 번 경천도군이었다. 그가 제일 만만한 상대라거나 부상을 입어서가 아니라 가장 나를 경계하고 있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뇌전중중이 그에게 타격 이상의 충격을 안겼으리라 보았다. 추정이라기보다는 바람에 가까웠으나 어쨌든 뇌전중중의 효과로 그가 방어적으로, 즉 소극적으로 대응하리라 예상했다.
나는 섬(閃)을 가미한 퇴(退)를 발했다. 내 동체가 번개의 속도로 뒤로 튕겨나갔다. 남들이 볼 때는 기괴한 장면이었으리라. 아마도 뒷걸음질의 속도로는 사상 최고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토록 빠르게 대처했음에도 나는 무사하지 못했다. 이번에도 탈혼창군이었다. 생사대적의 장공세례와 파산권귀의 주먹바람은 어찌어찌 빗겨냈으나, 그리고 자전검군의 무시무시한 탄검들도 간신히 흘려냈으나 나는 탈혼창군이 쏘아낸 송곳 같은 강선들은 피해내지 못했다.
기실 그의 강선에 적중되기 직전 불현듯 오절신공의 신수(新手)를 시도해볼까 하는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나는 충동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탈혼창군의 강선만이 아니라 다른 적들의 공격도 고스란히 동체에 허용할 것 같은 예감 때문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부지불식간에 샘솟았던 깨달음은 지금 이 순간에는 찾아오지 않았다.
나는 세 군데 타격을 허용했다.
오른팔과 복부, 그리고 왼쪽 종아리였다. 셋 다 중상이었다.
원력으로 보호막을 두른 덕분에 팔이 잘리는 참사는 모면했으나 뼈가 아슬아슬하게 붙어있었다. 이제 옥소를 부리는 건 불가능했다.
아랫배는 하마터면 구멍이 뚫릴 뻔했다. 마지막에 상체를 틀어 빗겨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관통상을 입었을 것이었다.
다리는 부상정도가 상대적으로 덜했으나 가장 치명적이었다. 만약 포위망에서 벗어난다면 추격전이 시작될 텐데 경신속도를 둔화시킬 터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후사를 걱정하고 있을 여유조차 없었다. 우선 목전의 과제부터 해결해야 했다.
나는 경천도군에게 짓쳐들었다.
그를 등진 상태에서 달려들었기에 그의 낯짝을 볼 수는 없었으나 필히 아연실색했으리라. 그와의 거리가 사오 장 남았을 때 회(回)를 발한 나는 철봉에 최대치에 준하는 원력을 담았다.
우우웅.
공간이 울자 경천도군의 안색이 변했다. 내 기대대로 그는 칼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방어적 성격을 띤 공격이었다.
나는 어지러운 도강(刀剛) 사이로 파고들었다. 내가 도막(刀幕)을 찢으며 뇌전참참을 날리자 대경실색한 경천도군이 정면충돌을 마다하고 몸을 사렸다. 나는 방어에 치중하느라 퇴로를 열어준 그에게 감사인사를 날렸다. 물론 속으로.
‘고맙소.’
그 동안에도 내 후방과 양 측면, 그리고 상공에서는 나를 겨냥한 폭풍과 탄강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자전검군의 자줏빛 검기가 내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두 치만 옆으로 지나갔다면 나는 절명했을 것이었다.
기사회생이라 부르기엔 일렀지만 어쨌거나 사지를 탈출한 셈이었기에 나는 쾌재를 불렀다.
덜미를 잡히지 않는 한 합공에 시달릴 일은 없을 터였다. 그것만 해도 굉장한 성과였다.
비로소 머리를 굴릴 수 있게 된 나는 상황을 따져보았다. 급한 불은 껐으나 아직 불씨는 여전했다. 적들은 추격의 의지와 능력을 겸비한 자들이었다. 그리고 내겐 종아리의 부상이라는 악재가 있었다. 복부의 출혈도 신경이 쓰였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리면 어느 순간 기절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아까처럼 절망적인 국면은 아니었다. 내게 유리한 점도 여럿이었다. 일단 팔다리와 복부, 그리고 옆구리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나는 전속력을 낼 수 있었다. 마비를 염려하여 원력도 최대한 아껴두었기에 필요할 시 강력한 반격을 가할 수 있다는 것도 크나큰 이점이었다. 지금도 일대일로 붙는다면 나는 적들 중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적들의 경신이 균등하지 않다는 점도 내게 호재였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으나 나는 사파칠문의 수장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를 쫓는 게 아니라 일직선으로 따라오고 있음을 알았다. 보나마나 경천도군이 끝에 붙어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는 조만간 은근슬쩍 추격대열에서 이탈할 것이었다.
삼절문의 담장을 넘은 후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나는 추격자들의 순서를 확인했다. 의외로 선두에 선 자는, 그러니까 내게 가장 가까이 붙은 자는 파산권귀였다. 자전검군, 생사대작, 탈혼창군이 이삼 장의 간격을 두고 그 뒤를 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경천도군은 이미 많이 뒤쳐진 상태였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바람직한 배열이었다. 예컨대 자전검군이나 탈혼창군이 맨 앞에 있었다면 위험했을 수도 있었다. 그들은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자들이기 때문이었다. 거리가 팔구 장에 달하니 일수에 내게 치명상을 입히기는 어려울 테지만 나를 지체시키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위협이 될 것이었다. 찰나지간만 머뭇거려도 나는 집단공세에 노출될 터였다. 그러므로 파산권귀가 적들의 선두라는 것은 나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것이 일방적인 수읽기였음은 봉평을 벗어나기도 전에 판명되었다.
펑!
고막을 때리는 기이한 파공성에 나는 반사적으로 이(移)를 발했다. 파산권귀가 날린 권풍이 내 머리카락을 훑고 지나갔다. 모골이 송연해졌다. 대응이 조금만 늦었다면, 그리고 아래쪽으로 떨어지지 않고 위로 상승했더라면 머리통, 혹은 등짝이 박살났을 터였다.
파산권귀를 경시하는 우를 범하는 바람에 나는 위급지경에 처했다. 그에게 삼사 장의 거리 단축을 허용한 것이었다. 이는 그의 뒤에 붙었던 자전검군에게 자줏빛 검기를 쏘아낼 기회를 주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 경우 회피를 위한 지체가 불가피했고 그리되면 순식간에 포위를 당하게 될 것이었다. 아니, 그 전에 적들의 집중포화에 걸려 이승에 종말을 고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러한 상황이 일어나기 전에 선제조치를 취해야 했다. 즉각적으로 떠오른 예방책은 주머니의 쇠구슬들을 파산권귀에게 던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바로 그 방안을 머리에서 지워버렸다. 철마에게 그랬던 것처럼 파산권귀에게도 통할 가능성이 높았으나 그를 일시적으로 주춤하게 만든다고 해도 다른 적들의 전진을 저지할 수는 없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자전검군과의 거리만 더 좁혀질 우려가 컸다.
보다 확실하면서도 이후의 결과까지 내게 이득이 될 비책이 필요했다. 그것은 양날의 검이었다. 성공하면 생존할 확률이 급격이 높아질 테지만 의도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저승으로 직행할 게 불 보듯 뻔했다.
갈등의 시간은 짧았다. 아니, 아예 없었다. 상황이 너무 급박한데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나는 저울질을 생략하고 바로 내 뇌리에 번득인 ‘모 아니면 도’ 식의 수법을 실행에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