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66
제65화 잘해야 한다!
파산권귀와의 거리는 오륙 장에 불과했다. 자전검귀와도 고작 칠팔 장 떨어졌을 뿐이었다.
둘의 사정권에 든 나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날아가는 도중 회(回)로 몸을 돌린 후 파산권귀에게 최대치에 육박하는 원력을 동원해 뇌전중중을 날린 것이었다. 이 반격은 반드시 통해야 했다. 실패할 시엔 후속수단이 전무하기 때문이었다.
일차적인 목표는 당연히 파산권귀를 추격자 대열에서 탈락시키는 것이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내게 유리한 파급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터였다. 나에게 너무 가까이 붙었다가 탈이 나게 될 것을 알게 되면 적들의 추격의지가 크게 감소할 것이었다. 나는 이미 이 수법의 효과를 한 달 반 전 철마류 본단에서의 탈주 과정에서 경험한 바 있었다. 지금의 추격자들은 공히 당시의 마두들보다 몇 수 위의 강자들이었으나 사람의 심리는 무공의 고하와 무관하게 대동소이한 법이었다.
자전검군의 검기에는 이(移)나 절(折)로 대처할 작심이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만만치 않은 상대인 파산권귀를 일수에 무력화시키려면 전력을 다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찰나지간이라도 움직임이 둔화될 수밖에 없었다. 자줏빛 검기가 그 약점을 제대로 공략해 온다면 대응난망이었다. 하여 타격점을 예측하고 미리 몸을 옮길 참이었다. 머리카락 한 올의 차이가 생사를 가늠할 수도 있기에 반쯤은 운에 운명을 맡겨야 했다.
이 모든 것은 심사숙고의 결과물이 아니라 본능에 의해 전광석화처럼 터져 나온 승부수였다.
파앙!
우우웅.
파산권귀의 권풍이 일으킨 파공성과 내 뇌전중중이 발한 기음이 공간을 울렸다. 정면에서 충돌했으나 두 기운은 상쇄되지 않았다. 앞선 뇌전들은 권기의 폭풍을 갈랐고 뒤를 쫓은 뇌전은 파산권귀의 동체에 작렬했다. 뇌전들의 관통을 허용한 대신 권풍도 나를 덮쳤다. 자전검군이 쏘아낸 서너 줄기의 검기가 태풍에 휩싸인 나를 찔러왔다.
이 공방전은 다음과 같은 결과를 낳았다.
첫째, 내 뇌전에 적중된 파산권귀는 내 간절한 바람대로 충격을 받고 추락했다. 권풍이 뇌전의 위력을 약화시킨 덕분에, 그리고 호신강기를 둘렀기에 파산권귀는 치명상을 모면했다. 하지만 곧장 동료들에게 합류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둘째, 나는 전투불능의 중상을 입었다. 자전검군이 날린 검기는 정확히 네 줄기였다. 나는 그 중 두 개의 경로만 파악했다. 나머지 둘은 겨냥점이 어딘지 알 수 없었기에 감각에 의지해 대처해야 했다.
선천적인 탁월함에 더해 강호에 나온 이후 치렀던 수차례의 생사투를 통해 보다 예리해진 내 감각은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나는 목을 뒤로 꺾어 내 미간에 날아든 검기를 흘려냈다. 초극상의 절(折)! 이마를 스치고 지나가며 검기는 기다란 상흔을 남겼다. 검기에 실린 경력으로 인해 머리가 울렸지만 두부에 둘렀던 방어막 덕분에 두개골이 쪼개지지는 않았다.
심장으로 날아온 검기가 문제였다. 내 신법 중 최상의 신기라 할 초절의 이(移)를 발했으나 좌견에 걸리고 말았다. 검기는 내 왼 어깨를 뚫었다. 그 여파로 견갑이 뭉개졌으나 천만다행히도 팔은 붙어있었다. 다만 더 이상 철봉은 부릴 수 없게 되었다.
양 팔을 다 쓸 수 없게 되었으나 나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파산권귀가 떨어지자 적들은 눈에 띄게 주춤했다. 추격대의 선봉이 어떤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하는 자리인지 확인하고는 뜨끔했을 것이었다.
내게 공격을 성공시키고도 자전검군이 은근슬쩍 속도를 늦추어 생사대적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곧이어 탈혼창군이 그들과 같은 선에 이르렀다. 일직선이었던 추격대의 진열은 일렬횡대로 바뀌었다.
세 명 남은 적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선두를 양보한 덕택에 나는 순식간에 육칠 장의 거리를 벌었다. 하지만 아직 안심할 상황은 아니었다. 적들의 경신을 감안하면 십이삼 장은 한 순간만 지체해도 단숨에 따라잡힐 거리였다.
기실 사지를 벗어났으나 형세는 아직도 절망적이었다.
적들은 금세 내 상태를 파악했다. 무한정 비행할 수는 없기에 나는 착지와 도약을 거듭해야 했다. 땅에 발을 디딘 후 다시 뛰어오를 때 복부와 종아리의 부상이 말썽을 일으켰다. 이를 악물고 참았으나 도약의 강도를 떨어뜨려 속도에 지장을 주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미세한 차이였지만 지금 상황에선 생사를 결정할 지체가 될 수도 있었다. 만약 적들이 추격전의 초반처럼 악착같이 따라붙었다면 나는 반각도 지나지 않아 덜미를 잡혔을 터였다.
배와 다리보다 심각한 문제는 팔이었다. 단순히 전투불능에 처해서가 아니라 신경이 끊어진 탓에 제멋대로 덜렁거렸기 때문이었다. 내 팔들은 나아가는 방향 반대편으로 늘어진 채 깃발처럼 나부꼈다. 그 꼴을 보고도 내가 싸울 수 없는 상태임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바보임에 분명했다. 그리고 나의 적들은 바보들이 아니었다.
적들이 서서히 속도를 올렸다. 아마 곧 전속력을 발할 것이었다. 그리 되면 나는 반의반 호흡 만에 적들의 사정권에 놓일 터였다.
암담했다. 빛줄기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조금 있으면 무너질 하늘엔 솟아날 구멍이 없었다. 이렇게 몸뚱이가 엉망이 돼서야 무슨 수를 써 볼 수…….
가만! 혹시?
불현듯 ‘이모’가 떠오른 나는 심중을 잠식해오는 절망감을 날려버리고 정신을 바짝 차렸다. 만약 상대적으로 덜한 오른팔의 부상을 급속히 다스려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게 된다면 반전의 기틀을 마련하는 게 꿈만은 아니었다.
방법을 몰랐지만 뭐라도 해보아야 했다. 나는 경공에 투여한 원력의 일부를 오른팔로 돌렸다. 그러고는 상처부위에 집중적으로 주입했다. 근골이 찢기고 빠개지는 극심한 통증만 올라왔을 뿐 변화는 없었다. 조바심을 누르며 나는 다시 시도했다. 역시 별무소용이었다.
나는 원력 전체를 우수(右手)에 쏟아 붓기로 했다. 순수한 내공만으로는 경신의 속도가 떨어질 터이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어차피 이대로는 얼마 가지 않아 적들에게 따라잡힐 터이니 도박은 불가피했다. 의식적으로 치유의 원을 원력에 담은 나는 기적을 기다렸다.
이모처럼 부상이 한 순간에 치유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전율했다. 일순지간 원력이 손아귀에 전달되었기 때문이었다. 팔을 들 수는 없었으나 옥소에 원력을 실을 수는 있었다. 이는 내가 적들을 현혹시킬 꼼수를 쓸 수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기적은 아니나 기적적으로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잠시 간의 지체로 칠팔 장 뒤까지 따라붙은 삼인 중 중앙을 차지한 탈혼창군에게 벽력붕산을 날린 것이었다. 구환도법 최강의 공격초식이었으나 실제적인 타격을 노렸다기보다는 다분히 엄포용이었다. 고맙게도 탈혼창군은 나로서는 최상의 대응을 해주었다. 다급한 경악성을 토해낸 그가 창을 회전시켜 만든 방어막에 도강이 부딪치자 귀청을 터뜨릴 굉음이 울려 퍼졌다. 그의 양옆에서 달리던 생사대작과 자전검군이 좌우로 멀리 벌어졌다.
이 한 수의 효과는 컸다. 내 경신속도의 일시적인 경감이 부상 악화로 인한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라 그들을 유인하기 위한 술책이었다고 오해한 적들은 섣불리 내게 붙지 못했다. 벽력붕산을 맞았던 탈혼창군은 유의미한 내-외상을 입지 않았을 터임에도 다시 내 목표물이 되기 싫은 듯 멀찌감치 뒤처졌다. 그의 창이 쏘아내는 탄강은 사정거리가 가장 길었고 그래서 매우 위협적이었기에 나로서는 기특하기 이를 데 없는 처신이었다.
추격자들은 사실상 둘로 줄었다.
생사대작과 자전검군. 칠사 중 최강을 다툰다는 사파의 두 거두는 십오륙 장의 거리를 유지하고 나를 쫓았다. 탈혼창군은 어느새 까마득히 멀어져있었다.
본연의 내공만으로 경신을 전개하는 한편 나는 계속 급속 치유를 시도했다. 절박함의 강도가 떨어져서 그런지 별 성과가 없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극통만이 발생했을 뿐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내 손으로 팔을 떼어내고 싶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남은 추격자들 중 하나를 떨궈내야 했다. 그래야 한숨 돌릴 여유가 생길 것이었다. 어쩌면 위기가 종결될 수도 있었다.
희망의 힘으로 고통을 견디며 나는 끊임없이 원력을 오른팔에 불어넣었다. 그러나 일이십 리를 주파하는 동안 치유는 물론이고 원력이 손에 전해지는 기미조차 없었다.
다행스러운 점은 도주 속도가 반감되었음에도 내 기습을 경계했는지 생사대작과 자혼검군이 좀처럼 내게 접근해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내심 그들이 아예 추격을 중지하기를 바랐지만 욕심이었다. 내가 그들이라도 나 같은 괴물을 살려 보내고 싶지 않을 것이었다.
지루한 추격전이 이어졌다.
끔찍한 극통에 시달리던 나는 결국 급속 치유를 포기하고 원력을 경공에 돌렸다. 내가 갑자기 속도를 올리자 적들은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들이 부랴부랴 내 속도에 맞춰 쫓아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아쉬웠다. 몸이 정상이었다면 단박에 전세를 역전시켰을 텐데. 섬을 가미한 퇴를 발하면 단숨에 적들과 붙게 될 터였다. 대경실색할 적들에게 결정타를 날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아쉬움을 달래며 나는 도주에 주력했다. 적들이 무리하게 나를 잡으려 들지만 않으면 반 시진 이내에 사벌의 영토를 벗어나 중립지대에 들 터였다. 중립지대 너머는 오대세가에 속하는 오중 황가의 관할권이었다. 경계선의 침범은 선전포고나 다름없었기에 적들은 거기까지 나를 쫓아오지는 못할 것이었다.
문제는 내가 반 시진 이상 버티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출혈은 막았지만 부상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한 번씩 착지하고 도약할 때마다 종아리와 아랫배, 그리고 옆구리가 터져나갈 것 같았다. 적들에게 약점을 노출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들은 눈속임이 통할 하수가 아니었다.
나는 다시 모험을 감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대로는 종말이 불 보듯 뻔했다. 종아리 근육이 완전히 파열되는 날엔 대책이 없었다. 그 전에 수단을 강구해야 했다.
경신에 투여한 원력을 회수한 나는 곤죽이 된 오른팔 대신 왼팔에 집어넣었다. 날카로운 칼로 힘줄과 뼈들을 발라내는 듯한 통증이 엄습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원력이 손끝으로 내려갔다.
허탈했다. 진즉 이렇게 할 걸. 좌견의 부상이 너무 중한 탓에 지레 안 될 거라 여기고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처사를 자책하며 나는 철봉에 원력을 불어넣었다.
미세한 진동을 일으키며 철봉이 울었다. 이번이 마지막 승부수가 될 것임을 예감한 나는 내 애병에게 당부했다.
‘잘 해야 한다!’
찬연한 월광 아래 그림 같은 장면이 펼쳐졌다.
엄청난 속도로 비행하던 내 신형이 거짓말처럼 뚝 멈췄다. 그와 동시에 내 왼손에 들린 철봉에서 발출된 뇌전이 배꼽까지 내려오는 탐스러운 백염을 휘날리며 나를 쫓던 노인, 생사대작에게 날아갔다. 그와 동시에 내 왼편에서 다가오던 검은 그림자에게서도 섬광이 일었다. 그 섬광은 세 줄기 자줏빛 검기로 화해 나를 휘감아왔다. 멀리서 보면 마치 청명한 야천에 번개가 친 것 같은 광경이었으리라.
내 기습을 전혀 예상치 못했을 터임에도 생사대작은 칠사의 좌장이라는 이름값에 걸맞은 응수를 선보였다. 한편으로는 나를 향해 강맹한 장공을 퍼붓고 다른 한편으로는 막강한 호신강기를 두른 것이었다. 전자는 나를 구하고 후자는 그를 살렸다. 미리 준비하고 있던 나는 이(移)로써 나를 덮친 강풍을 빗겨내며 빛살처럼 빠른 바람을 타고 자전검군으로부터 멀어졌다. 자전검군이 쏘아낸 검기들이 내가 찰나지간 머물렀던 자리를 가르고 지나갔다.
뇌전참참에 적중된 생사대작은 추격대에서 이탈했다.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면 충격을 추스르고 추격을 재개했을 테지만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바득바득 나를 쫓을 의지는 없는 모양이었다.
나는 자전검군과의 거리도 이십여 장으로 벌렸다. 계산했던 바를 완벽하게 실현했으나 나는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방금 전 일수에 최대치의 원력을 동원하지는 않았음에도 마비의 신호가 왔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