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68
제67화 이제부터 어떡할 참이오?
내가 독촉하는 이유를 들은 괴선과 광객은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 달렸다.
포운산에서 진소월의 장원까지 삼천리 장도를 열세 시진 남짓 만에 주파한 두 노인은 장원에 이르렀을 때 탈진지경에 이르렀다.
우리가 장원에 당도했을 때는 만물이 잠들어 있을 새벽녘이었으나 진소월은 여느 때처럼 깨어있었다. 오는 동안 꽤 많이 부상 부위가 아물었음에도 그녀는 내 꼴을 접하고는 도깨비를 본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시간낭비하지 않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삼절문에 칠사 중 다섯 명이나 들어있었소. 나를 기다리고 있었음에 틀림없소. 그들과 싸우다 겨우 달아났소.”
진소월의 봉목이 눈동자를 쏟아낼 듯 한껏 커졌다. 내가 그녀를 본 이래로 가장 놀란 표정이었다.
추가 설명 없이도 내 말귀를 알아들은 진소월이 서둘러 와옥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그녀와 함께 삼남 일녀가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검황자와 한우경, 그리고 이광과 강태수였다. 모두들 자다가 깬 듯 어리둥절한 기색이었다. 그러다 나를 보고는 방금 전 진소월과 같은 표정을 지었다.
검황자가 대표로 물었다.
“어찌 된 일이오, 형?”
“뭐, 어제 센 놈 여럿하고 치고받았어.”
내 시큰둥한 대답에 검미를 찌푸린 검황자가 질문을 이을 찰나 진소월이 끼어들었다.
“부탁이 있어요, 송 공자.”
검황자가 반색했다.
“무슨 일이오, 진 소저? 무엇이든 들어주겠소.”
“전원에 가서 내 아버지를 이리로 데려와 줘요.”
검황자가 이유를 물을 기색인지라 진소월이 재촉했다.
“어서 출발해요. 최대한 빨리 해주면 좋겠어요.”
검황자는 잘 훈련된 사냥개처럼 진소월의 명에 순종했다.
“다녀오겠소.”
허공으로 치솟아 오르는 검황자의 신형에 일별도 주지 않고 진소월이 강태수에게 첩지를 건넸다.
“아버지에게 보내요, 언니. 지금 당장.”
첩지를 받아든 강태수가 허둥지둥 전서구를 둔 곳으로 달려갔다.
급한 일을 처리한 진소월이 나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녀의 뺨에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안해요, 전 공자. 나 때문에…….”
나는 진소월을 안고서 그녀의 등을 토닥이고 싶은 욕망을 간신히 제어했다.
진소월과 나는 와옥으로 들어갔다.
강태수, 이광은 마당에 남았고 괴선과 광객은 후원에서 운공에 들었다. 한우경이 그들을 보위했다.
다실에 들어가자마자 진소월이 다시 사과했다.
“미안해요.”
“당신이 사과할 일이 아니오.”
“하지만 내 불찰이에요. 그들이 삼절문에 덫을 놓으리라는 걸 예측해야 했어요.”
“당신은 신이 아니잖소? 어찌 모든 걸 다 알 수 있겠소?”
“…….”
“어쨌거나 이번엔 정말 염왕의 낯짝을 보게 되겠구나 싶었소. 어떻게 용궁을 탈출했는지 지금도 신기할 지경이오.”
나는 간략하게 긴박했던 도주 과정을 진소월에게 들려주었다. 그러고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자들이 어떻게 내가 상야평이 아니라 삼절문으로 가리라는 걸 알았을까?”
진소월이 분홍빛 입술을 자국이 남을 만큼 세게 깨물었다.
“처음부터 계획된 일이었어요. 아버지를 납치했던 자들은 전 공자를 그리로 유인하기 위한 미끼였음에 틀림없어요. 보둔산의 산장에서 그들을 문초했을 때 배후에 삼절문이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아냈을 테죠?”
“아!”
나는 짝눈이 제 눈앞에서 머리통이 박살난 동료를 보고는 공포에 질려 이실직고했으리라 여겼는데 착각이었나 보다.
“그자들은 물론 자기들의 진짜 역할이 뭔지 몰랐을 거예요.”
“그렇더라도 이상하구려. 설사 그자들의 입을 통해 진 루주님의 납치를 사주한 곳이 삼절문임을 알게 되더라도 내가 곧바로 거기로 쳐들어갈 거라는 보장은 없잖소? 그것도 단독으로.”
“이번 일은 삼절문이 아니라 사벌 차원에서 짠 함정이에요.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사벌에 나보다 몇 수 위의 책사가 있는 모양이에요. 그자는 지난번 정맹에서의 재판 등을 검토하고는 이쪽에 어설프게 머리를 굴릴 줄 아는 이가 있음을 간파했어요. 즉, 내가 상야평에 마련의 마두들이 나와 있을 거라 예단할 것임을 내다본 거죠.
그자는 전 공자의 성향도 파악했을 거예요. 홀로 철마류를 공격할 만큼 대담무쌍한 성정인데다 어차피 인우당 건으로 사파 무림과도 척을 졌으니 아버지 납치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삼절문을 칠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을 테죠. 물론 그자도 설마 전 공자가 단독으로 삼절문에 쳐들어갈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거예요. 칠사 중 다섯이나 동원한 것은 괴선과 광객, 두 어르신들을 대비한 조치였겠죠.”
나는 진소월의 분석을 수긍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얼굴로 뭉개지고 비틀린 내 팔을 쓰다듬는 진소월의 손길을 허용하며 나는 궁금한 점을 물었다.
“정말로 사왕(邪王)이 나를 잡으러 친히 나설 것 같소?”
포운산에서 괴선과 광객을 기다린 이유이긴 했으나 나는 아직도 내 예상이 들어맞을 거라 확신하지 못했다.
진소월이 다시 분홍빛 입술을 깨물었다.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모습이었다.
“한 시진 후에 해가 어느 쪽에서 뜰 건지 묻는 것과 비슷해요. 답은 당연히 동쪽이에요. 사벌은 이번 일에 총력을 쏟았어요. 그들이 손해를 우려해 전 공자의 처리를 마련에 떠넘길 거라는 내 판단은 완전한 오판이었어요.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그리고 누구의 결정인지 알 수 없으나 그들은 전 공자 제거를 최우선적 과제로 설정했음에 틀림없어요. 공들여 마련한 함정이 무위로 돌아갔으니 사왕이 나설 것은 필연지사예요.”
“제길.”
“나는 그가 아직 전원에 당도하지 않은 게 납득하기 어려울 지경이에요. 전 공자가 덫을 빠져나갔다는 보고를 받은 즉시 움직였어야 정상인데. 그랬다면 진즉 이곳을 찾아냈겠죠.”
“그가 왜 꾸물거리는 것 같소?”
“몰라요. 운공 중이라 보고할 수 없는 상황이거나, 그를 설득하는데 이번 일을 꾸민 자가 애를 먹고 있거나, 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겠죠. 하지만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그러면 이제부터 어떡할 참이오?”
모처럼 진소월의 옥용에 미소가 떠올랐다.
“알면서 왜 묻나요?”
진소월의 반문에 나는 떨떠름한 입맛을 다셨다.
* * *
비처(秘處)로의 이전은 몇 달 전부터 계획된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석 달 전 신필주가 진청운-진소월 부녀를 납치한 직후였다. 그러다 그로부터 한 달 후 내가 인우당과 철마류를 연속적으로 쳤을 때 진소월은 이 사안을 본격적으로 진행시켰다. 장원은 노출되지 않았지만 독왕의 경우에서 보듯 적들이 원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었다.
진소월은 이미 보름 전에 이 과제를 완벽하게 마무리 지었음을 알렸다. 나의 이번 삼절문 행은 말하자면 비처로 옮기기 전의 기념행사였다. 나는 잠적하기 전에 진청운 건을 구실삼아 사파 무림에 한 방 먹일 작정이었다. 그러다 뜻밖에도 사벌에게 역으로 당한 것이었다.
* * *
검황자는 한 식경도 지나지 않아 진청운을 안고 장원으로 돌아왔다. 진소월의 명을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 전날 나를 놀라게 했던 순간 가속을 포함해 가진 바 재주를 총동원했음에 틀림없었다.
나를 본 진청운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여러 사람에게 깨진 모습을 보여주다니, 이래저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어쩌다가…….”
진청운이 말을 이을 겨를을 주지 않고 진소월이 물었다.
“조치는 취해두셨지요, 아버지?”
내게서 시선을 뗀 진청운이 진소월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지만 사왕이 올 거라니, 나는 도무지 믿기지가 않는구나.”
“벌써 잊으셨어요? 독왕도 왔는데 사왕이 오지 말란 법이 없잖아요?”
“그건 그렇다만. 그럼 언제 출발하려느냐?”
“후원에 계신 두 어르신이 운공을 마치시는 대로 가려고요. 혹시라도 그 전에 신호가 오면…….”
진소월은 말을 잇지 못하고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나는 그 이유를 알았다. 멀리 전원 방면에서 아지랑이 같은 빛줄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폭죽을 쏘아올린 것이었다. 정월 초이니 야밤에 폭죽놀이를 한다고 해도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었으나 새벽에 그러는 건 아무래도 정상은 아니었다.
“뒤뜰에 가서 어르신들을 불러오렴, 광아. 한 노야께 다른 두 분을 깨우시라고 해.”
“네, 누나.”
진소월의 지시를 받은 이광이 후원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세 노인이 이광과 함께 마당으로 나왔다. 진소월이 와옥으로 모두를 이끌며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곧 사왕이 이리로 올 거예요.”
웅성웅성.
“그래서 즉시 대피해야 해요. 바깥으로 이동하는 건 사왕에게 포착될 우려가 있으니 비로로 이동할 거예요. 제가 말씀드린 대로 짝을 지어 따라오세요.”
와옥에 들기도 전에 진소월의 뜻대로 각각 이인으로 이루어진 다섯 개의 조가 짜여졌다.
선두는 진소월을 업은 한우경이었다. 나를 받쳐 든 광객이 그 뒤를 이었고 점박이 노인을 안은 ‘이모’가 우리 뒤에 붙었다. 점박이 노인은 사왕이 온다는 말에 사색이 되어 있었다.
네 번째는 이광의 허리를 팔로 두른 검황자였고 행렬의 마지막은 강태수를 들춰 맨 괴선이 차지했다. 자기 짝과 순서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괴선이 구시렁거렸다. 진소월은 그의 불만을 무시했다.
“비로에 들어서면 다들 전속력으로 달려야 해요. 다소 좁고 어둡지만 바닥은 평탄하니 큰 어려움은 없을 거예요.”
진소월의 안내에 따라 우리는 그녀의 지하석실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오륙십 개에 이르는 계단이 끝나자 직선통로가 나왔다. 왼편에 위치한 진소월의 거처에서 향기로운 내음이 흘러나왔다. 진소월은 침소에 들르지 않고 직진했다.
통로가 꺾이는 곳에서 진소월이 소리쳤다.
“뛰세요!”
경신을 전개하기엔 너무 높이가 낮았기에 모두들 원초적인 동작으로 달렸다. 그럼에도 전원이 초절정 극상의 고수들인지라 어지간한 준마만큼 빨랐다. 달리는 도중 진소월의 요청에 따라 한우경이 때때로 천장의 돌출된 돌을 건드렸다. 그때마다 뒤에서 쿠르릉거리는 굉음이 들렸다. 추격을 저지하기 위한 차단막이 내려오는 소리일 터였다.
사왕에겐 한 자 두께의 철문이라도 종잇장이나 마찬가지일 터이기에 불필요한 짓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그 점을 지적하지 않고 침묵했다. 전진 속도에 지장을 초래하는 건 아니니 굳이 반대할 까닭이 없었다. 나는 진소월의 조치에 다른 의도가 있음을 알지 못했다.
한참을 달리는데 한우경이 불쑥 말했다.
“누군가 와옥을 부수고 있구나.”
굉장한 기감이었다. 이미 장원과는 상당한 거리가 떨어져있었다. 못해도 십리는 될 듯싶었다. 와옥을 부순다면 꽤 큰 소리가 날 터이지만 귀에 들어오기엔 너무 먼 거리였다. 괴선이나 광객이 듣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자신보다 하수들에게 맞춰 속도를 조절하느라 호흡에 여유가 있는 한우경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얼마나 더 가야 하느냐?”
“거의 다 왔어요, 노야. 반의반 각만 더 가시면 돼요.”
짧은 문답 후 한우경은 묵묵히 달리기만 했다. 그의 바로 뒤에 있던 내가 불쑥 물었다.
“외람된 질문이오나, 만약 어르신 같은 분이 둘이라면 사왕과 대적할 수 있을는지요? 사왕이 검왕 어르신과 대등한 무위라고 가정했을 때 말입니다.”
민감한 질문일 수도 있으나 한우경은 일고의 망설임도 없이 즉답했다.
“어림도 없다.”
만족스러운 답변이 아니었다. 나는 그렇다면 몇 명이면 사왕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은지 후속질문을 던지려고 했다. 그러나 이어진 한우경의 말이 내 질문을 막았다.
“누군가 석벽을 깨뜨리며 우리를 쫓고 있구나.”
대번에 십 인이 발산하는 긴장감이 통로 안을 가득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