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7
제06화 노인장이 천하십왕의 일인이란 말이오?
예선전 첫날 전광에게 접근해 온 이가 있었다.
삼십대 후반의 문사(文士)였다.
청인무관의 인사들이 든 객잔을 찾은 문사는 전광과의 면담을 청했다. 위협이 될 만한 요소가 전혀 없는데다 워낙 인상이 좋은지라 관주는 흔쾌히 그를 전광의 방에 데려다 주었다.
전광을 만난 문사는 방문 목적을 밝혔다. 한마디로 남다른 덕성을 갖춘 잠룡과 친교를 맺고 싶다는 것이었다.
전광의 첫판 상대였던 상천(常川) 수룡보(水龍堡)의 후기지수가 자신의 지인의 숙질이라며 문사는 죽자 사자 달려드는 그에게 부상을 입히지 않고 승부를 마무리 지은 전광의 관대함을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했다.
우쭐해하기보다는 수줍어하는 전광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문사는 동석했던 관주에게 무림대회가 끝날 때까지 잠룡의 승천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는 영광을 누리고 싶다며 같은 객잔에 묵는 것을 허락해달라고 청했다. 해가 될 일이 아니었기에 관주는 별 고민 없이 그의 요청을 수락했다.
그날부터 문사는 전광이 예선전을 치르는 내내 청인무관의 일원처럼 지내며 그와 어울렸다. 전광은 문사와 급속도로 친해졌다. 며칠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관주가 시샘할 정도로 가까워졌다.
전광이 문사에게 흠뻑 빠진 연유는 그에게 큰 도움을 받아서였다.
무공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전광은 상승무학을 익히기 위해서는 문리가 수반되어야 함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청인무관에도 학사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구결의 해석력에 있어 한계가 자명했다.
그들의 난잡한 설명에 만족하지 못했던 전광은 혹시나 싶어 문사에게 그간 그를 괴롭히던 의문점들을 물어보았다. 놀랍게도 문사는 반나절 만에 난제에 대한 답을 찾아냈다. 얽히고설킨 실타래가 풀리고 자욱했던 안개가 걷히자 전광은 꿈에 그리던 심법비급을 받았던 날만큼이나 기뻐했다.
전광은 예선전을 치르러 상설비무대를 오가는 시간을 제외하면 늘 객잔의 객실에 틀어박혀 문사와의 문답으로 하루를 채웠다. 무학 궁구에 너무 심취한 탓에 식사를 거르고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전광의 열정에 탄복한 문사는 조금도 귀찮아하지 않고 그와의 무론(武論)에 열성을 다해 임했다.
스무 살의 나이 차이를 넘어 두 사람은 서로에게 지음(知音)이 되었다.
* * *
컹컹컹.
개 짖는 소리가 야밤의 정적을 깨뜨렸다. 노인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이건 또 뭔 개소리야. 막 흥미진진해지려는 찰나인데.”
나는 소리가 날아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들개들은 아닌 것 같소만.”
“당연하지 않으냐, 이놈아. 태극검문이나 백도방에서 너를 찾으려고 개새끼들을 풀었을 테지. 빌어먹을, 개소리가 이렇게 시끄러운 지는 미처 몰랐다. 확 주둥이를 뭉개버릴까 보다.”
노인의 겁박에 반발하기라도 하듯 개들이 훨씬 크게 짖어댔다.
“저놈의 개새끼들이! 복날이 지났다고 배짱인 모양인데, 어! 왜 일어서는 게냐, 이놈아?”
“가 봐야겠소.”
“어째서? 너를 잡으러 온 놈들일 텐데.”
“그러니 가 보겠다는 거요. 매듭을 풀어야 할 것 아니오?”
“한 판 붙게?”
나는 대꾸 없이 바위 아래로 뛰어내렸다. 나를 쫓으며 노인이 투덜거렸다.
“에잉, 그냥 지나가는 개가 짖나보다 무시하고 싸던 똥이나 마저 쌀 것이지.”
소나무 숲을 나오자 갈대밭에서 이는 소음이 보다 선명해지고 커졌다. 나는 갈대를 헤치고 나아갔다.
나의 도래를 인지한 개들이 난리를 쳤다. 그러다 내가 장내에 모습을 드러내자 일제히 나에게 달려들었다. 덩치가 송아지만한 맹견들이었다.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왁!”
깨갱.
내 고함에 놀란 개들이 달려오다 말고 엎어지더니 얼른 제 편의 인간들에게로 달아났다.
나는 그들을 둘러보았다.
모두 일곱이었는데 셋은 낯이 익었다. 낮에 비무대 위로 올라왔던 태극검문의 사마귀 노인, 그리고 반 시진 전 조우성과 함께 왔다가 백도방의 도객들에게 쫓겨난 꺽다리와 땅딸보였다.
다른 넷 중 한 명은 개를 부리는 자였고 나머지는 허리에 검을 차고 있는 것으로 보아 태극검문의 검사들일 터였다.
검지로 나를 가리키며 땅딸보가 소리쳤다.
“저놈입니다, 노야!”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중인의 시선은 이미 내게 꽂혀있었다. 나는 사마귀 노인과 눈을 맞췄다.
그의 안광을 접한 순간 나도 모르게 머리를 모로 기울였다. 낮에 비무대에서 그랬던 것처럼 마치 송곳에 눈을 찔린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호승심이 발동한 나는 눈에 힘을 주었다.
사마귀 노인과 눈싸움을 벌이는 내 호기가 못마땅했던지 태극검문의 세 검사가 분기를 분출했다. 그들이 발산하는 기운에 놀란 개들이 호랑이 굴에 들어온 것처럼 오줌을 지리며 끙끙거렸다.
사마귀 노인의 입술에서 들릴락 말락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본문의 제자를 불러내 암습했다고 들었다.”
“둘 다 틀렸소. 그를 불러낸 적도 없고 암습은 더더욱…….”
내 해명이 끝나기도 전에 생선가시처럼 삐쩍 마른 검사가 호통 쳤다.
“무엄하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사마귀 노인이 손을 들어 해골 검사를 제지했다. 그러고는 내가 예상치 못한 질문을 던졌다.
“백도방과는 무슨 관계더냐?”
“아무 관계도 없소.”
해골 검사가 다시 소리를 질렀다.
“거짓말 마라! 그렇다면 어째서 그 칼잡이들이 네놈을 비호하려고…….”
해골 검사는 이번에도 말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사마귀 노인의 엄한 눈길이 그의 면상에 꽂혔기 때문이었다. 눈빛만으로 해골 검사에게 재갈을 물린 사마귀 노인이 때 이르게 나에 대한 처분을 내렸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아는 법. 무림의 존장을 대하는 네 언행을 보아하니 사마(邪魔)의 종자임에 분명할 터. 본문의 제자를 암해한 죄에 더해 불경의 죄를 물어 팔들을 거두어가겠다.”
“내 팔을 자르겠단 소리요? 두 짝 다?”
사마귀 노인이 발검으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나도 그에 맞서 옥소를 빼들었다. 내 대응에 검사들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마귀 노인도 황당한 모양이었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
대답은 내 입술이 아니라 뒤편의 수풀에서 나왔다.
“그야 성주 무림이 낳은 불세출의 검호(劍豪)로 온 대륙에 위명이 자자한 단천검(斷天劍)이지.”
갈대밭에서 튀어나온 단구 노인을 본 사마귀 노인의 낯짝에 경련이 일었다.
사마귀 노인이 은빛 광휘를 뿜어내는 보검을 검갑으로 돌려보냈다.
“그 아이가 당신의 전인이었소?”
“아닐세. 생판 남이라네. 반 시진 전에야 안면을 텄을 뿐일세.”
“…….”
“정말일세.”
“…….”
“허어, 못 믿는 모양이군. 좋아, 다 설명해줌세. 물론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게 우연만은 아닐세. 실은 낮부터 이놈을 따라다녔다네. 백화루(白華樓) 꼭대기에서, 아! 거기가 최고의 명당자리라는 거 아는가? 그 위에 올라있으면 사방의 비무대가 다 보인다네.
아무튼 거기서 네 곳의 비무대를 훑어보고 있는데……, 아니지 솔직히 말해 처음부터 동쪽의 비무대를 주목했다네. 이놈 때문이 아니라 자네 사질이란 아이를 보기 위해서 말일세. 근간에 태극검문에서 자네를 능가하는 특출한 기재가 나왔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지 않았던가. 안평 근처를 지나는 김에 소문의 진위를 확인하고 싶었더랬지. 그래서 백화루 지붕에 올라갔던 걸세.
그런데 전혀 뜻밖의 광경을 보았지 뭔가. 소문의 아이가 웬 곰탱이 같은 놈에게 농락당하는 모습을 본 나는 호기심이 생겼다네. 그래서 몰래 그놈 뒤를 따랐지. 뭔가 재밌는 일이 생길 것 같아서 말일세.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재밌는 일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족속이잖은가?”
한달음에 폭포수를 쏟아낸 노인이 표정 변화가 없는 사마귀 노인을 흘긋 쳐다본 후 말을 이었다.
“웬걸, 해가 지도록 아무 일도 없더군. 지루했지만 꾹 참고 기다렸다네. 원래 재밌는 일은 밤에 일어나는 법이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인내심이 바닥날 즈음 일이 터지더구먼. 이제 진상을 말해줌세. 자네 사질이 거기 두 쭉정이를 대동하고 와서는 이 아이를 친 걸세. 암습 따윈 없었다네. 자네 사질이 먼저 달려들다 이놈 꿀밤 한 방에 뻗었을 뿐일세. 저기 소나무 뒤에 숨어서 똑똑히 지켜보았다네. 야, 이놈들아! 내 말이 틀리느냐?”
별안간 노인의 질문이 떨어지자 꺽다리와 땅딸보가 전전긍긍했다. 정체불명의 단구 노인은 단천검이 자중해야 할 정도로 엄청난 거물임에 틀림없었다.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단천검이 원하는 대답을 내놓기는 부담스럽다는 뜻이었다. 그렇다고 노인의 주장을 인정하면 그건 그것대로 후환이 두려울 터였다.
노인이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쩔쩔 매는 이인조에게 퇴로를 열어주었다.
“됐다. 너희가 무슨 잘못이 있겠느냐? 그저 그 천둥벌거숭이가 가자니 따라왔을 테지. 그나저나 그 아이가 자네나 태극검문에 꽤 중요한 존재인 모양이구먼, 송 문주. 자네가 친히 나서서 이놈을 징치하려 들다니. 하지만 이제 전후사정을 들었으니 이놈을 처벌할 근거가 없음을 알았을 걸세. 참, 아까 자네가 언급한 불경의 죄 말인데, 이놈은 나한테도 똑같은 언사를 쓴다네. 못 배운 놈이라 그런 거니 무림의 존장답게 너그러이 넘어가 줌세. 뭐, 자네가 굳이 이놈에게 존장을 대하는 예를 가르치겠다면 말리지는 않겠네. 하지만 충고컨대 그러지 않는 편이 좋을 걸세.”
노인의 마지막 말을 협박으로 받아들였는지 사마귀 노인이 면상을 일그러뜨렸다. 그러나 노인에게 반발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가자.”
사마귀 노인이 떠나자 내가 노인에게 물었다.
“대체 노인장은 뉘시오?”
“왜? 사마귀가 꼬리를 말고 얌전히 물러가는 걸 보니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겠더냐?”
“똥이 무서워서 피하는 건 아니잖소?”
“이놈이! 정녕 대가리가 깨지고 싶은 게냐?”
“으스대지 말고 그냥 답을 줬으면 됐잖소?”
“불퉁스러운 꼴이, 내가 사마귀를 쫓아낸 게 불만인 게로구나, 이놈.”
“알면서 왜 묻소?”
“이 싸움닭 같은 놈. 제법 재주가 있다만 그렇게 설치다간 제 명에 못 산다, 이놈아. 사마귀를 우습게 보지마라. 오죽하면 하늘을 벤다는 별호가 붙었겠느냐?”
“우습게 본 적 없소. 그보다 어서 대답이나 해 주시오. 대체 노인장은 뉘시오?”
노인이 입술에 침을 발랐다.
“귀를 씻고 잘 듣거라, 이놈.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이름만 들어도 산천초목이 벌벌 떨고 보기만 하면 만인이 경배하는 위대한 어른이니라. 무림을 통틀어도 나하고 대등하게 겨룰 수 있는 자들은 열손가락을…….”
나는 눈알이 튀어나올 뻔했다.
“노인장이 천하십왕(天下十王)의 일인이란 말이오? 설마 노인장이 장왕(掌王)이오? 하지만 내가 듣기로 장왕은 여인처럼 곱상한 용모에…….”
“이놈아, 말을 끝까지 들어야지. 그 인간 같지도 않은 인간들은 빼고 말하는 게다. 에이, 김샜네. 내가 누군지는 알 것 없고 네놈 애비 얘기나 마저 풀어놓거라.”
노인의 요구를 묵살한 나는 불문곡직 걸음을 옮겼다.
“어라? 지금 뭐하는 게냐?”
내가 대답을 주지 않고 계속 걸어가자 노인이 공중제비를 돌아 내 앞에 뛰어내렸다.
“비키시오.”
“어딜 가려고?”
“알아서 뭐하시게?”
“이놈이! 오냐, 알았다. 내가 누군지 말해줄 터이니 네놈도 네 애비 사연을 마저 토해내거라. 그것 말고도 네놈에 관해 알고 싶은 게 수백 가지다.”
“나도 노인장에게 물을 게 많소. 내 걸 바라걸랑 노인장도 내놓으쇼.”
“이런 장사치 같은 놈.”
“싫으면 말고. 나는 그만 가리다.”
“야, 이놈아, 거기 안 서? 좋다, 하나씩 주고받자. 됐느냐?”
이로써 거래가 성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