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70
제69화 최고다, 이모!
눈을 뜨니 다들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운공을 마치기를 기다린 모양이었다. 나는 그들의 배려가 고마웠다.
“좀 어떠냐?”
괴선이 모두들 대표해 물었다.
“끄떡없소.”
“큰소리는, 이놈이. 그 고약한 물건들을 수습할 힘은 있느냐?”
나는 비로소 아직도 내가 비로에 들어서며 빼들었던 철봉과 옥소를 양손에 쥐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왠지 뿌듯했다. 팔이 떨어졌대도 무기들을 손에서 놓지 않았을 터였다.
“얼마나 지났소?”
괴선을 무시하고 진소월에게 물었다.
“딱 일곱 시진 지났어요.”
진소월의 대답에 나는 깜짝 놀랐다. 이런 곳에서 그렇게 정확하게 시간의 경과를 확인할 수 있단 말인가. 진소월이 빙긋 웃었다. 그제야 나는 비결을 알아차렸다. 필히 누군가, 아마도 한우경이 밖에 나갔다 왔을 터였다.
“실은 방금 전에 한 노야께서 외부 상황을 살피고 오셨어요. 막 해가 졌다니 어제 우리가 들어온 시각부터 계산하면 일곱 시진이 지난 셈이지요.”
나는 한우경을 보았다.
“사왕은 사라졌는지요, 어르신?”
“그래. 보이지 않더구나.”
다시 진소월에게 눈을 돌렸다.
“언제 출발할 참이오?”
진소월이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전 공자에게 달려있어요.”
나는 몸을 일으켰다. 종아리와 복부에서 극통이 올라왔으나 일절 내색하지 않고 진소월에게 말했다.
“갑시다.”
광객이 나를 받쳐 들려고 했다. 나는 그의 손길을 마다했다.
“스스로 갈 수 있습니다, 어르신.”
“아직 덜 회복된 것 같은데 무리하지 말게나. 내게 맡겨주게. 나는 전혀 힘들지 않네.”
“고맙습니다, 어르신. 하지만 정말 괜찮습니다.”
광객이 마지못해 손을 거두었다. 괴선이 잔소리를 늘어놓기 전에 나는 진소월을 재촉했다.
“어서 갑시다. 저리로 나가면 되오?”
아무렇지도 않다는 걸 보여주려고 나는 앞장을 섰다. 천장이 낮아 거의 무릎걸음으로 가야 했기에 부상이 덜 아문 종아리가 터질 것 같았으나 나는 씩씩하게 나아갔다. 이 정도의 고난은 그제의 흉험했던 싸움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진로는 서북 방면이었다.
진소월은 목적지까지의 거리가 삼백 리라고 했다. 내가 혼자 힘으로 가겠다고 오기를 부리지 않으면 한 시진 이내에 당도할 수 있는 거리였다.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기 싫어 나는 어쩔 수 없이 다시 광객에게 몸을 의탁했다.
두 사람이 한 덩어리가 된 다섯 개의 그림자가 어둠이 내려앉은 산하를 가로질렀다. 진소월은 인적이 없는 곳만 골라 일행을 이끌었다. 그녀는 탁월한 길잡이였다. 그녀 역시 초행길임을 감안하면 탁월하다 못해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대체 저 작은 머리에 얼마나 많은 정보가 들어있을까.
중간에 죽산에서 휴식을 취할 때 나는 진소월에게 물었다.
“비처가 안평 근처에 있소?”
이제 와서는 굳이 비처의 위치를 함구할 까닭이 없었기에 진소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안평 남쪽의 연산(燕山) 부근이에요.”
괴선과 나는 서로를 마주보았다. 연산이라면 우리가 넉 달 전 처음 만났던 곳이었다. 그날 태극검문의 조우성 패거리와 그들에 이어 나타난 백도방의 다섯 칼잡이를 쫓아버린 후 나는 나무 뒤에 숨어있던 그를 불러냈었다.
예상대로 괴선이 즉시 감상을 쏟아냈다.
“허어, 참, 신기한 노릇이군. 연산은 작년 가을 안평 무림대회에 나왔던 이놈을 따라갔다가 인연을 맺은 곳인데. 그런데 이상하구나. 내가 아는 연산은 별 볼 일 없는 야산에 불과한데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듯한 비처가 있을 성싶지가 않구나. 있더라도 썩 좋은 조건은 아닐 듯하구나.”
동감이었다. 연산 주위는 너른 초지인데다 풀뿌리라도 캐어먹으려는 천민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기에 은신처로는 최악이었다. 진소월이 그런 사실을 모를 리가 없을 터이기에 나는 그녀가 어떤 답을 내놓을지 자못 궁금했다. 그러나 그녀는 내 궁금증을 해소시켜주지 않았다.
“반 시진 후면 비처에 당도할 테니 직접 확인하시는 게 어떨까요, 어르신.”
진소월이 처연한 표정으로 괴선의 불평을 사전 봉쇄했다.
“준비 기간이 넉넉지 않았던 탓에 별로 자신이 없네요. 다들 큰 기대는 하지 말아 주세요. 실망하실까봐 걱정이 태산이에요.”
검황자를 필두로 너도 나도 그녀를 위로했다. 그녀의 수작이 빤히 보였기에 나는 더욱 궁금해졌다. 대체 어떤 비처를 준비해 두었기에 저리도 거창하게 밑밥을 까는 걸까.
우리는 찬탄을 금치 못했다.
산자락 끝의 황량한 골짜기 아래는 별천지였다. 연신 탄성을 쏟아내던 괴선은 이 비처가 전설의 무릉도원임에 틀림없다고 흥분했다.
지하 깊숙이 들어왔음에도 사위가 대낮처럼 환했다. 천장에 고드름처럼 매달린 종유석들 중 일부가 야명주처럼 빛을 발했기 때문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처처에 기화요초가 만발했다. 한 겨울인데다 햇빛이 들 일이 없는 심처임을 감안하면 황당하기까지 한 기사였다.
화원 너머로는 투명한 시냇물이 흘렀고 작은 폭포도 보였다. 우측의 둔덕엔 소담한 모옥 세 채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늘어서있었다.
일행의 반응을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진소월이 자랑스레 말했다.
“식량은 일단 열 명의 식구를 기준으로 일 년 치를 비축해두었어요. 원주 만곡당에서 제조한 최고급 벽곡단이니 맛도 영양도 보장할 수 있어요. 저기 왼편의 바위 뒤에는 이 밑의 광장으로 향하는 통로가 있어요.”
잠시 말을 멈춘 진소월이 나를 흘긋 바라보았다.
“광장은 여기와 달리 삭막한 곳이지만 여러분들의 연무장으로는 부족함이 없을 거예요. 넓이가 사천여 평에 달하는 데다 사방이 석벽으로 되어있어 진동이 지상으로 전해지지 않을 테니까요.”
비무 수련을 할 장소가 보이지 않아 불만스러웠던 나는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나에겐 그야말로 최적의 장소였다.
괴선도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기대하지 말라고 해서 오히려 내심 기대했는데 이건 기대 이상이구나. 땅 속에서 이런 비경을 보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아이야. 도대체 무슨 재주로 이런 비처를 찾아냈느냐?”
“어제 들었던 도피처처럼 여기도 고서에서 실마리를 찾았어요. 같은 책은 아니지만요. 시기를 특정하기 어렵지만 대략 천이삼백 년 전쯤 어떤 고인이 대홍수에 떠내려가다 아까 우리가 들어왔던 수풀의 틈에 빠진 후 우연히 이곳을 발견했나 봐요. 그는 이 비처를 자신만의 비밀로 간직하며 틈틈이 와서 즐기다 죽기 전에 고대 문자를 이용해 이곳의 위치와 들어오는 방법을 기록했는데 제가 운 좋게 암호를 풀고 찾아냈어요.
사실 저는 머리만 좀 쓰고 실질적인 일은 강 호위가 다 했어요. 네 수레 분의 벽곡단을 옮긴 것도 그녀이고 저 위의 모옥들도 그녀의 솜씨예요. 그 밖에도 제 서류며 서적, 모두의 의복 과 비상약 등을…….”
진소월은 말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자기 얘기를 하는 게 부끄러웠는지 강태수가 그녀의 소매를 잡아당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진소월이 원한 대로 앞 다투어 강태수의 노고를 치하했다. 강태수의 얽은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졌다.
* * *
나에겐 황홀한 시공간이었다.
그러나 모두가 비처 생활에 만족한 것은 아니었다. 그 중에서도 진청운의 불만이 가장 컸다. 그는 비처에서 할 일이 없었다. 흑문의 수첩(首諜)이자 소월루를 포함한 여러 사업체를 거느린 알짜 부자로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던 그로서는 빈둥거리는 시간이 심히 아까웠을 터였다.
진청운이 낙담한 이유는 또 있었다. 그는 해원사(解寃社)라는 비밀결사의 창립자이자 수장이었다. 신필주의 명에 따라 본의 아니게 온갖 지저분한 일에 가담해야 했던 진청운은 죄책감을 덜기 위해 남몰래 선업을 쌓고 있었다.
해원사의 주업은 억울한 일을 당한 이들의 원한을 풀어주는 것이었다. 밤거리를 장악한 흑도에게 피해를 본 저자의 소상인들과 기루의 창기들이 주된 청부자였다. 그들의 원을 들어주며 진청운은 지난 칠팔 년 간 흑도를 대상으로 그 나름의 치열한 전쟁을 수행해왔다. 그의 수완과 진소월의 지략에 힘입어 승승장구한 해원사는 근간에 활동무대를 전원 일대에서 성주 무림 전체로 확대했었다.
그런데 배전의 땀을 쏟아야 할 시기에 손을 놓게 되었으니 진청운으로서는 상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었다. 나는 그에 관해서는 진심으로 미안했다.
안평에도 해원사의 지부가 있었기에 진청운은 변복을 하고 활동을 재개할 의사를 피력했으나 진소월이 극력 반대했다. 아무리 정교한 인피면구로 얼굴을 바꾸더라도 신체적 특징을 가릴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왼팔이 불구이고 다리를 저는 인물이 천하에 그 하나만은 아니지만 그런 이가 해원사와 관련된 일을 한다면 금방 정체가 탄로 날 수밖에 없었다. 진소월의 너무나 지당한 논리와 간곡한 설득에 진청운도 결국은 뜻을 접어야 했다.
나는 비처에는 거의 올라가지 않고 광장에서만 지냈다. 진청운을 보는 게 괴로워서가 아니었다. 기실 나는 그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무공일도에 푹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의 경과를 잊고 극한의 수련을 이어가는 동안 나는 특히 세 사람과 특별한 관계를 맺었다. 한우경, 이모, 그리고 이광이었다.
먼저 한우경.
나는 늪지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를 독점하다시피 했다. 언제 그가 검왕에게 검황자의 근황과 소재를 알려주러 검총으로 떠날지 몰랐기에, 그리고 검왕을 데리고 비처로 돌아온 후 다시 검왕-검황자 사제와 함께 가버릴 터였기에, 나는 미친 듯이 그에게 매달렸다. 그가 곁에 있을 때 하나라도 더 배울 작심이었다.
이미 늪지 시절부터 내 열정에 감복한 바가 있었던 한우경은 나를 대함에 있어 정성을 다했다. 그는 나를 혹독하게 몰아붙였고 그 자신의 비기를 아낌없이 노출했다. 정식으로 예를 갖추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를 사부로 여겼고 그는 나를 자신의 제자인 양 아꼈다.
한우경은 감정을 감추는 이가 아니었기에 나는 나에게 품은 그의 애정을 확연히 감지할 수 있었다. 속단인지는 모르겠지만 검황자에게 보내는 눈빛보다 내게로 향한 눈빛이 더욱 그윽했다.
검황자는 나와 한우경 사이를 시샘했다. 그에겐 뜻밖에도 어린아이 같은 구석이 있었다. 구태여 달랠 까닭이 없었기에 나는 그의 심상을 무시하고 내 수련에만 전념했다.
나는 하루에 한 시진은 이모에게 할애했다.
참, 해도 달도 없는데 시간은 어떻게 알았느냐고? 진소월에겐 시간을 알려주는 기물이 세 개나 있었다. 그녀는 그 중 하나를 광장에 갖다놓았다.
각설하고 내가 이모와 비무 수련을 한 건 그녀를 위해서였다. 이모는 실전을 방불케 하는 비무를 통해 나날이 강해졌다. 물론 그녀와의 승부는 내게도 적잖은 도움이 되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한 시진이나 투자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이모는 나와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 점박이 노인의 말에 따르면 이지를 상실한 상태임에도 정해진 시간에 광장으로 향하면 나를 만나는 줄 알고 헤벌쭉 웃는다는 것이었다.
기실 나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녀는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늘 그러는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그녀는 오로지 나한테만 그랬다. 평소에는 목석처럼 무표정했고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그녀가 내게 호감을 드러내는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했지만 나와 점박이 노인은 우리가 ‘같은 피’를 가졌기 때문이리라 추측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내가 자기와 동류임을 알아 본 모양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이모를 정말로 이모처럼 느끼기 시작했다. 생김새는 전혀 달랐지만 그녀에게서는 엄마 냄새가 났다. 어떤 의미로 그녀는 진짜 우리 모자와 ‘한 핏줄’이었다.
비무 내내 격렬하게 치고받다가 그녀에게 몰려 막판에 처할 때면 나는 종종 엄지를 치켜들며 그녀를 칭찬했다.
“최고다, 이모!”
그러면 그녀는 손을 멈추고 수줍음을 타는 소녀처럼 배시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