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72
제71화 기억하긴 합니다만
봄이 코앞이건만 구름바다 위로 섬처럼 둥둥 뜬 산봉우리들은 저마다 백설의 모자를 쓰고 있었다.
푸른 하늘에서 쏟아진 햇살이 하얀 세상을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실로 장관이었으나 나는 시금털털했다. 원래 그런 방면에는 무감하거니와 한가롭게 경치를 감상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선 곳은 천주봉(天柱峰)이었다. 진소월에 따르면 장장 육백 리에 걸친 우장산맥의 칠천칠백 봉 중 최고봉이라 했다. 높이가 일천이백 장에 이르는 이 산꼭대기에 올라온 건 천하를 굽어보며 호연지기를 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곳이 감시의 요처이기 때문이었다.
무엇을 감시하느냐고?
나는 천주봉에 이웃한 호천봉(昊天峰)으로 올 그림자가 내가 원하는 이인지 아니면 피해야 할 자인지를 살펴볼 참이었다. 아직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가? 그렇다면 처음부터 차근차근 설명해주겠다.
나흘 전 나는 진소월에게 무왕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밑도 끝도 없는 요청이었으나 진소월은 일고의 고민도 없이 수락했다. 놀랍게도, 아니 당연하게도 그녀는 이미 내가 그런 요구를 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 요구를 이행하기 위한 준비까지 마친 상태였다.
무왕에게 직접 내 의사를 전달할 방도는 없었다. 하여 경유는 필수였다. 진소월이 택한 이는 금풍검 백운영이었다. 집법전 서열 이 위의 거물인데다 장차 정파제일검이 될 것이 유력시되는 특급 명사인지라 그는 무왕에게 친견을 청할 자격이 있었다. 진소월은 무왕에게 내 뜻을 전할 사자로 그를 이용할 작심이었다.
다만 진소월은 백운영을 완전히 신뢰하지는 못했다. 전날 그가 내게 호감을 표명했지만 그녀가 행적을 분석한 바에 따르면 그는 철저하게 계산적인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백운영이 사벌이나 마련에 그녀가 지정한 장소와 시간을 알린다면 내가 위급지경에 처할 터이기에 안전장치를 마련해야 했다. 그 경우 마왕은 몰라도 사왕이 출동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었다. 한 번 나왔는데 두 번이라고 못 나오겠는가.
그래서 천주봉에 온 것이었다. 여기서는 팔십여 장 떨어진 호천봉이 훤히 보였다. 만약 호천봉으로 날아오는 인영이 무왕이 아니라면 나는 즉시 천주봉 정상 아래의 비처로 달아날 터였다. 그 비처의 존재는 진소월의 안배 중 하나였다. 그녀는 모르는 게 없었다.
천주봉을, 아니 우장산맥을 무왕과의 면담 장소로 택한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일단 나는 이곳 지리에 익숙했다. 다섯 달 전 괴선과 광객이 생사투에 준하는 혈전을 치렀던 불귀곡이 바로 이 산맥의 북단에 위치했다.
안평에서 우장산맥까지는 산악지대로 이어져 있었기에 우연한 목격자들이 나올 가능성이 적다는 것도 장점이었다. 기실 공중을 비행하지 않고 숲으로만 이동하면 사람들의 눈에 띌 일이 없었다. 나는 그들을 수백 장 떨어진 곳에서도 감지할 수 있지만 그들은 내가 일부러 나를 노출하지 않는 한 바로 곁을 지나가도 알 수 없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백운영에게 서찰을 전해준 경로는 다음과 같았다.
진소월은 지난번처럼 광객에게 수염을 붙인 후 비처 밖으로 내보냈다. 다만 역추적을 염려해 안평이 아니라 안평에서 남으로 칠백 리가량 떨어진 산동으로 가라고 일렀다.
광객은 산동의 상운에 서찰을 맡겼다. 상운의 문통은 전서응을 이용해 그 서찰을 급전으로 정맹 집법전의 백운영에게 보냈다. 광객이 두둑한 비용을 지불해서가 아니라 그가 주천 백가의 신표를 제시했기 때문이었다. 위조품이 아니었기에 상운의 문통으로서는 최우선적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변방 무림의 일개 문통이 오대 세가의 행사를 소홀히 취급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진소월은 서찰이 하루도 지나지 않아 백운영의 손에 들어가리라고 단언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백운영이 서찰에 적힌 대로 행동해준다면 다행이지만 그러지 않고 내 적들에게 정보를 유출한다면 곤란했다. 진소월이 안전장치를 마련한 이유였다.
다소 과도한 바가 없지 않았으나 나는 그녀의 조치를 받아들였다. 실제로 무왕 대신 사왕이나 마왕이 나타난다면, 그리고 그들의 기감에 걸린다면 나로서는 대책이 없었다.
* * *
중천에 있던 해가 어느새 서천으로 기울었다.
간밤에 천주봉에 올라 이곳에서 일출을 맞은 이후 네 시진이 넘도록 안력을 돋우고 있노라니 눈알이 터질 지경이었다. 무왕이든 사왕이든 아니면 마왕이든 아무나 빨리 오라고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는데 까마득한 천공에 까만 점이 보였다. 바짝 긴장한 나는 호흡을 닫고 전방을 주시했다.
개미보다 작았던 점이 눈 깜짝할 사이에 풍뎅이만큼 커졌다. 어마어마한 속력이었다. 일순 소름이 돋았다. 저런 경신을 펼치는 이에겐 도주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수백 장의 거리도 무용지물일 터였다. 눈에 띄면 무조건 끝장이라고 보아야 했다.
인영이 호천봉에 접근했을 때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 무왕이었다. 얼굴을 식별하기엔 먼 거리였으나 나는 그라고 확신했다. 사왕이나 마왕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사마의 제왕들을 본 적은 없으나 그들의 외관은 알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외관이 아니라 의복이었다.
사왕은 화려한 곤룡포를 입고 다니는 것으로 유명했다. 전날 전원에 출현했을 때도 그 모습이었다고 했다. 마왕은 반대로 남방의 미개한 이족들처럼 아랫도리를 가리는 천 조각만 걸치고 다닌다고 알려져 있었다.
나를 잡기 위해 평소와 다른 차림새를 하고 나왔을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으나 그들이 그렇게까지 할 성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호천봉에 내려앉는 이의 동작엔 익숙한 바가 있었다. 나는 몸을 감추고 있던 바위 뒤에서 나와 호천봉으로 날아갔다.
뾰족하게 솟은 천주봉과 달리 호천봉의 정상은 평평했다.
무왕은 뒷짐을 진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칠팔 보 앞에 착지한 나는 포권하며 허리를 접었다.
“전충이 무왕 어르신을 뵙습니다.”
무왕의 대꾸가 없었기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촌로들이나 걸칠 허름한 마의에 특징이라고는 한 구석도 찾아볼 수 없는 이목구비, 허공처럼 텅 빈 기운에 무심한 눈길.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무왕이 입을 열었다. 예의 높낮이가 없는 음성이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찾아온다고 하더니, 설마 석 달 만에 보자고 할 줄은 몰랐다.”
정확히는 백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숫자를 정정하지 않고 넘어갔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르신.”
전날처럼 무왕은 쓸 데 없는 얘기로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본론으로 직행했다.
“봉우리에 도달했느냐?”
“그런 듯싶습니다.”
내 막연한 답변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무왕이 살짝 눈을 찌푸렸다.
“허면 그날의 내 일수를 받아낼 수 있겠느냐?”
나는 이번에도 모호하게 답했다.
“그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행히 무왕이 흥미를 보였다.
“증명해 보려무나.”
무왕과 공중전을 치를 능력은 없었기에 나는 이동을 제안했다.
“조금 내려가면 적당한 곳이 있습니다. 거기서 제 성취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앞장 서거라.”
나는 봉우리 아래로 몸을 날렸다. 무왕이 내 뒤를 따랐다.
진소월이 일러준 대로 운무가 깔린 산허리에 오륙백 평쯤 되는 공터가 나왔다. 무왕과 비무를 벌이기에 부족함이 없는 장소였다.
나는 무왕과 이삼 장의 거리를 격하고 섰다. 우리에겐 지척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에게 바짝 붙은 건 육박전을 펼치기 위해서였다.
내가 철봉과 옥소를 꺼내들자 무왕이 주변의 나뭇가지 두 개를 허공섭물로 끌어왔다. 나에게 예를 차릴 기회를 주지 않고 무왕이 개시를 명했다.
“시작해라.”
나는 지체 없이 그에게 돌진했다. 그러고는 맹폭을 퍼부었다. 전날의 대나무와 달리 무왕이 쥔 나뭇가지는 그의 강기로 보호되고 있음에도 내 철봉과 옥소에 실린 경력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나갔다. 무왕은 어쩔 수 없이 수강을 일으켜 나를 상대해야 했다.
나는 초장부터 전력을 쏟았다. 마비가 오지 않을 한계치의 원력을 끌어올려 아낌없이 내 병기들에 주입했다. 최대치 원력의 삼분지일 정도만 동원했던 전날하고는 비교도 안 될 위력을 뿜어내는 내 무기들을 무왕은 맨 손으로 받아쳤다. 그러나 그는 공세를 취하지 않고 방어에 주력했다. 그 덕분에 나는 구환도법과 뇌전십이검의 초식들을 모조리 구현할 수 있었다.
삼백 초가 경과하고 내가 두 번째로 뇌전중중을 발출했을 때 내 밑천이 바닥났음을 확인한 무왕은 반격에 나섰다. 순식간에 공수가 전환되었다.
무왕의 양손에서 뻗어나간 일 자 가량의 강기가 칼과 검으로 화해 끊임없이 나를 가르고 찔렀다. 나는 극상의 오절신공으로 일백여 초를 버텼다. 그리고 드디어 전날 나를 쓰러뜨렸던 무왕의 일수가 나왔다.
대비를 하고 있었음에도 나는 속절없이 당할 뻔했다. 그러나 아슬아슬하게 내 발목을 낚아채는 무왕의 무형지기를 빗겨내는 데 성공했다. 그 순간 무왕이 손을 거두었다. 나를 보는 그의 동공에 이채가 서렸다. 찬탄의 기색임을 알아차린 나는 고무되었다.
하지만 무왕의 시험은 끝난 게 아니었다. 찰나지간의 정지는 파상공세로 이어졌다. 무왕은 내가 그의 허를 찔러 기습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도록 거세게 몰아붙였다. 의식적인 대응이 불가능했기에 나는 순전히 본능에 따른 움직임으로 그의 공격을 피해냈다.
어느새 나는 무아지경에 빠졌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땅바닥에 엎어져있었다. 무엇에 당했는지도 몰랐다. 한편으론 멍했고 다른 한편으론 분했다.
부상을 입은 건 아니었기에 나는 바로 기립했다. 그러고는 무왕에게 포권하며 내가 그를 만나고자 했던 진짜 이유를 꺼내놓았다.
“전충이 무왕 어르신께 가르침을 청합니다.”
무왕의 백미가 이마로 휙 올라갔다. 비무를 끝내면서가 아니라 시작할 때 했어야 할 소리이니 황당했으리라. 하지만 무왕은 금세 내 의도를 간파했다.
“욕심이 과하면 탈이 나는 법이다.”
나는 무왕에게 그가 전날 헤어지며 내뱉었던 언사를 상기시켰다.
“도약을 시도하기 전에 어르신을 찾으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도움이 되어 주신다고. 혹여 탈이 나더라도 제 책임이니 감당하겠습니다.”
무왕은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나는 그의 침묵이 긍정의 응답을 잉태하기를 갈망했다.
무왕을 설득할 말들이 두서없이 떠올랐지만 나는 입을 다물고 그의 결정을 기다리기로 했다.
구차스럽기도 했거니와 그런들 별 효과가 있을 것 같지도 않아서였다. 나는 다만 무왕이 좀 전의 비무를 통해 지난 일백일 간 내가 등정을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분투했는지를, 그리고 마침내 봉우리의 정상에 오르는 바람에 역설적으로 근본적인 한계를 확인한 내가 얼마나 막막한 상태인지를 알아주기를 바랐다.
그 지점에서 그는 선택할 것이었다. 나에게 봉우리 위의 무한한 천공으로 뛰어오를 길을 알려줄지, 아니면 외면할지를.
무왕이 나에게서 먼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더니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지난번에 내 처소를 떠나기 전 나와 나누었던 대화를 기억하느냐?”
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곧 생각이 났다. 나는 당시 무왕에게 ‘부용 아씨’를 거절한 이유를 물었었다. 무왕은 봉우리에 오르려는 자는 도중에 한 눈을 팔아서는 안 된다는 멋들어진 비유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꽃이든, 물이든, 경치든!
그 답은 진소월과의 관계에 대해 내가 이미 결심했던 바를 공고히 하는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나는 생생히 기억했다. 무왕의 답이 나오자마자 내가 반사적으로 피력했던 각오를.
ㅡ저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것은 그날의 대화를 종결지은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무왕은 왜 이 이야기를 꺼내는 걸까. 그의 의도를 몰라 곤혹스러웠지만 나는 일단 대답을 했다.
“기억하긴 합니다만.”
무왕의 눈길이 다시 내게로 떨어졌다. 무심한 눈. 나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지금 네가 다시 그 질문을 던진다면 나는 달리 대답할 것이다.”
아, 젠장!
무왕의 언사에 담긴 저의를 자의적으로 해석한 나는 패잔병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역시 안 되는 건가. 정공법을 택하고 장기전으로 갈 수밖에 없는 건가. 오 년이 아니라 오십 년 후를 도모해야 하는 건가.
그러나 내가 무왕의 시혜를 통한 비약을 기대하며 던진 승부수는 아직 결과를 내놓은 것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