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74
제73화 제가 훗날 사상 초유의 무황이 될지라도
무왕의 시현은 무려 반 시진이나 이어졌다.
그가 펼치는 절학들의 향연을 지켜보는 동안 나는 경건해졌다. 그것은 내 무공의 뿌리이자 열매였다. 그것은 나의 시작점이자 종착지였다. 그것은 내가 선 봉우리에서만 보이는 천공의 구름이었다. 언제든지 폭우나 태풍으로 변할 수 있는 구름!
나는 이해하려 애쓰지 않았다. 불가능할뿐더러 그럴 여유도 없었다. 나는 그저 단 한 동작도 놓치지 않으려 집중하고 또 집중했을 뿐이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나는 보고 듣는 모든 것을 기억한다는 진소월이 되어야 했다.
이윽고 무왕이 손을 멈추었다. 마혈이 찍힌 사람처럼 굳어있던 나는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리에 힘이 풀리는 바람에 주저앉을 뻔했지만 가까스로 몸을 추슬렀다. 그러고는 무언가 감상을 내뱉으려 했다. 그러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치는 수십 개의 감상들 중 어느 것을 내보내야 할지 나는 몰랐다.
팔을 거두고 자세를 바로 한 무왕이 내게 시선을 주었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의 눈엔 내가 얼마나 멍청해 보였을까.
포권을 취하며 일단 감사인사부터 하려는데 무왕이 돌연 오른발로 땅을 굴렀다. 그러고는 공중으로 도약해 허공에서 새로운 춤사위를 펼치기 시작했다. 아니, 새로운 게 아니었다. 무왕은 좀 전에 마친 초식들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초식이라고 했지만 특정한 형(形)이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무왕이 동일한 무공을 현시하고 있음을 알아보았다.
이번 춤사위는 먼젓번보다 훨씬 일찍 끝났다. 채 일다경도 걸리지 않았을 터였다. 시간이 단축된 건 무왕이 몇몇 식들을 건너뛰어서가 아니라 한 데 묶어서 구현했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그의 왼팔은 검공을, 우수는 도법을, 그리고 몸통과 다리는 신법을 구사하는 식이었다. 서로 별개의 절기들이면서도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무왕이 알고 그랬는지, 아니면 나와 상관없이 원래부터 그럴 작정이었는지는 불분명하나 그가 행한 방식은 내가 스스로에게 부과했던 과제에 해답이 있음을 알려주는 시혜였다.
무학 자체의 한계라는 벽에 부닥쳤을 때 나는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숱한 불면의 밤을 지새웠다. 내가 도달한 결론은 내가 지닌 무공들의 해체와 융합, 그리고 그를 통한 신학의 창조였다.
그러려면 내 무공의 근원이라 할 오절신공에 구환도법과 뇌전십이검을 녹여 하나의 무학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 전에도 셋이 아주 따로 노는 건 아니었으나 온전한 일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하수들이나 평수들과의 대결에서는 문제가 노정되지 않았지만 한우경 같은 상수와의 대결에서는 분리의 약점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나는 내가 올바른 해결책을 찾아냈다고 확신했다. 어느새 누구보다 내 무공에 대해 잘 알게 된 한우경도 전폭적인 지지를 표명했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내가 설정한 방향성과 목표점이 옳더라도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내 직감으로는 ‘무려’ 십 년이었다. 한우경은 그 기간이 ‘터무니없는’ 욕심이라고 했다. 괴선은 아예 헛소리로 치부했다.
그들이 틀렸음을 증명할 자신이 있었으나 그렇더라도 ‘십 년’은 내게 너무 긴 시간이었다. ‘오 년’만 같았어도, 혹은 검황자의 존재만 없었어도, 그렇게 안달복달하지는 않았을 터이지만 기실 무의미한 전제였다. 그것들과 무관하게 나는 나를 단숨에 더 높은 곳으로 끌어올려 줄 동아줄을 잡으려 했을 것이었다.
설령 무왕이 내 원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해도 남는 장사였다.
나는 극점에 이른 내 오절신공을 확인한 연후 나를 거꾸러뜨릴 무왕의 수법을 체험하는 것만으로도 비약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전날 내가 검황자와의 비무에서 초현했던 신수도 실은 나를 쓰러뜨렸던 무왕의 일수에 대한 대응책에서 비롯되지 않았던가.
그러나 실제로 내가 오늘 얻은 소득은 기대 이상이었다. 이상의 이상이었다.
무왕의 기존 성취를 보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일 터인데 그의 평생의 심득을 견식하다니. 엄청난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더욱이 무왕은 나를 배려해 요체를 낱낱이 드러내고 있었다. 구결을 일러주는 것이나 진배없는 행위였다. 이 위대한 무인은 사실상 나를 그의 후계자로 삼은 것이었다.
나는 감격했다. 그리고 다짐했다. 아버지가 지어준 내 이름의 뜻에 걸맞게 무왕에게 충성을 다하기로.
두 번째가 끝이 아니었다.
무왕의 춤사위는 그 이후로도 여덟 번이나 반복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나를 의식하지 않고 무아지경에 빠져 신공과 절학들을 허공에 수놓고 있었다. 전부 이전에 구현한 식들이었으나 발현 양태는 매번 달랐다.
네 번째부터 무왕의 춤사위는 독무가 아니라 가상의 적수를 염두에 둔 전투전술로 바뀌었다. 놀랍게도 그의 상대 중에는 나도 들어있었다. 이렇게 영광스러울 데가!
어느 새 해가 졌고 어둠이 내려왔다. 무왕은 끊임없이 움직였고 나는 시종여일 목석처럼 미동도 없이 서있었다.
마침내 무왕이 손을 내리고 발을 멈췄을 때 나는 허물어지듯 그를 향해 절을 올렸다. 어느새 야천에 돋아난 새벽별들이 무왕에게 극상의 예를 취하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내기를 일으켜 땀으로 흥건히 젖은 마의를 말린 무왕이 내게로 걸어왔다. 그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나는 고개를 들었다.
“다시 한 번 경고하거니와, 이것은 네게 복운이 되기보다는 재앙이 될 공산이 크다. 나를 쫓으려 하지 말고 네 길을 가거라. 참고하되 무조건 흉내 내려 덤비지는 말란 말이다. 알겠느냐?”
나는 동문서답했다.
“반드시 청출어람 하여 오늘의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어르신.”
무왕이 어이가 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정색했다.
“포부는 가상하다만 쉽진 않을 게다. 전날 오 년이라고 했더냐? 기다리마. 다음에 만나면 너를 맞수로 간주하고 전력을 다할 참이다. 인정사정 봐주지 않을 거란 말이다. 단단히 각오하고 오는 게 좋을 게다.”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인간의 감정을 담고서 나를 주시하던 무왕의 눈에 평소의 무심함이 깃들었다. 나는 그가 작별 인사를 생략하고 떠날 생각임을 알았다. 그래서 급히 말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어르신.”
“뭐냐?”
“제 이름 충(忠)을 지은 이는 제 선친입니다. 저더러 생명의 은인이자 당신이 숭배하는 영웅께 충성을 바치라는 의미에서 붙여준 이름이지요. 저는 이제부터 선친의 유지를 받들어 어르신께 충성을 다할 생각입니다.”
무왕은 아무 대꾸를 주지 않고 예의 무심한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설령 제가 훗날 사상 초유의 무황이 될지라도 어르신을…….”
무왕이 내 말을 잘랐다.
“거기까지만 해라. 허언이 될 수도 있음이니. 그리고 너는 당돌할 때가 낫다.”
내 응답을 기다리지 않고 무왕이 천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나는 순식간에 점으로 화해 멀어져가는 그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 * *
나는 바로 떠나지 않고 그 자리에 좌정하고는 묵상에 들었다.
무왕의 심득을 마음에 아로새기노라니 새삼스레 감동이 밀려들었다. 그러면서 당장 그의 춤사위를 모방하고픈 충동에 시달렸다.
나는 참았다. 황새를 쫓다가 가랑이가 찢어지는 뱁새의 우를 범할 수는 없었다. 무왕이 충고한 대로 나 자신의 보폭에 맞춰 걷다가 때때로 그의 춤사위를 소환해 내가 바르게 가고 있는지 알아보는 이정표로 활용하는 게 현명한 처사였다. 당분간은!
해가 뜨고 다시 졌다. 진종일 묵상에 잠겼던 나는 야음이 짙어지고서야 산을 내려갔다. 비처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한 없이 가벼웠다. 지난 두 달 간 심중을 짓눌렀던 묵직한 바위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백일 전 정맹에서 무왕과 헤어지며 남겼던 말을 되뇌었다.
“최대한 이른 시일 내에 찾아뵙겠습니다.”
들어줄 무왕은 이미 새벽에 떠나고 없었지만 나는 내가 스스로 정한 이 약속을 기필코 지킬 참이었다.
안평에 당도한 것은 이틀 후였다.
자시(子時)을 알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나는 안평 외곽의 연산으로 향했다. 야트막하게 이어진 산줄기 끝자락에 비처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었다. 수풀을 헤치고 내 체구에는 비좁기 이를 데 없는 틈에 몸을 구겨 넣으며 나는 희소식을 전할 생각에 들떴다. 다들 얼마나 기뻐할까.
그러나 나선형으로 돌아가는 통로의 끄트머리에 이르렀을 때 나는 무언가 심상치 않은 공기가 비처에서 흘러나오고 있음을 감지했다. 서둘러 비처에 들어선 나는 어리둥절했다. 마치 나를 마중 나온 듯 출입구 근처에 진청운-진소월 부녀와 강태수, 이광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다들 약간 상기되어 있었으나 그다지 심각해 보이는 얼굴이 아니었기에 나는 안도했다.
하지만 나를 본 진소월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러고는 내게로 달려오며 속삭이듯 낮게 말했다.
“그분이 오셨어요, 전 공자.”
나는 바로 말귀를 알아들었다. 비처에 들 외부인은 한 명 뿐이었다.
검왕!
내가 무왕을 보러 간 사이에 한우경이 검총에 다녀왔다는 뜻이었다. 검황자를 데려갈 검왕을 데리고.
이 중대사를 사전에 나와 의논하지 않은 한우경에게 서운함을 느끼며 나는 조용히 물었다.
“다들 연무장에 들었소?”
진소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검왕이 검황자의 성취를 확인하고 있으리라 추측했다.
나는 잠시 갈등했다. 검왕은 몹시 부담스러운 위인이었다. 그와 상대해서 이로울 게 없으니 나갔다가 나중에 들어올까. 설마 나를 기다린답시고 비처에 죽치고 있지는 않을 터이니 하루쯤 밖에서 보내다 돌아오면 그와 마주치는 일 없이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나는 바로 유혹을 뿌리쳤다. 한우경이 검왕-검황자 사제와 함께 검총으로 가 버리면 오래도록 그를 볼 수 없을 것이었다. 어쩌면 영영 재회하지 못할지도 몰랐다. 마음속으로 스승으로 삼은 이를 작별인사도 없이 떠나보낼 수는 없었다.
그리고 설마 검왕이 또 한 번 자기 제자를 꺾었다고 나를 죽이려 들기야 하겠는가. 나에게 호감을 품을 리는 만무하지만 대놓고 적의나 살의를 드러낼 성싶지는 않았다.
검왕과 대면하기로 방침을 정한 나는 진청운 등과 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 연무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화원을 지나갈 즈음 멈춰 섰다. 내 기감이 알린 대로 연무장으로 드는 통로인 바위 너머에서 다섯 개의 인영이 일렬종대로 나오고 있었다. 선두에 선 이는 팔 척 장신의 말라깽이 노인, 검왕이었다.
발걸음을 멈췄던 나는 검왕을 보자마자 신형을 날려 그의 앞에 가서 섰다.
“전충이 검왕 어르신을 뵙습니다.”
포권과 동시에 숙인 내 머리에 날카로운 시선이 날아와 꽂혔다. 안광에 내기를 실었는지 정수리가 쪼개지는 것 같았다. 반발심이 일었으나 표출을 자중했다. 아마도 천하에서 가장 길쭉할 해골은 사신과 동급의 위험인물이었다. 그의 심기를 건드리는 건 자살행위였다.
고개를 들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데 검왕의 서걱서걱한 음성이 내 뒤통수에 떨어졌다.
“따라와라.”
내 대응을 확인하지 않고 검왕이 몸을 돌려 방금 전에 나왔던 바위로 걸어갔다. 나는 그의 심산을 짐작하고도 남았다. 내키지는 않았으나 거부할 수는 없었다. 하여 나는 순순히 그를 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