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77
제76화 오지 마!
나는 망연자실했다.
그러나 아직 숨이 끊어진 건 아니었기에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고자 했다. 한우경과 이모의 죽음을 헛되이 할 수는 없었다.
마왕의 쇠사슬에 배를 뚫린 순간 나는 다시 한 번 마왕의 눈을 겨냥해 뇌전중중을 날렸다. 마비를 걱정할 계제가 아니었기에 최대치의 원력을 철봉에 실었다.
현재 내 원력은 괴선의 선력을 크게 웃돌았다. 압도하는 수준은 아니었으나 단순한 물리력의 대결에서는 뚜렷한 우세를 점할 정도의 차이였다. 그러므로 최대치의 원력을 담은 뇌전중중을 마왕의 안면에 적중시킨다면 그의 명줄을 끊어놓지는 못하더라도 눈알을 터뜨릴 수는 있을 터였다.
그러나 뇌전중중을 쏘아내자마자 나는 내 의도대로 되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마왕의 신형이 흐릿해졌기 때문이었다. 이는 그가 이형환위로써 내 뇌전중중을 빗겨냈다는 의미였다.
나는 마왕의 회피가 한우경과 이모의 공격이 낳은 후과임을 깨달았다. 마왕은 그들을 무시했다가 상당한 타격을 받았음에 틀림없었다. 나는 씁쓸했다. 역설적으로 내 친인들이 마왕을 실명의 위기로부터 구한 셈이었다.
돌풍이 불어와 안개를 걷어내고 풍광을 드러내듯 짧았던 공방이 끝나자 결과가 확연히 보였다. 마치 정지한 장면처럼!
먼저 마왕.
우리 셋 중 둘을 저승으로 보내고 하나에게 치명상을 입혔으나 그는 낭패한 기색이었다. 그의 왼 어깻죽지부터 배꼽까지 기다란 혈흔이 나있었다. 한우경의 천추일섬(天樞一閃)이 남긴 흔적이었다. 조금만 더 깊었더라면 마왕은 중상을 입었을 터였다.
마왕의 하반신도 정상이 아니었다. 아랫도리를 가렸던 천 조각이 이모의 독무에 녹아내린 탓에 사타구니에 덜렁거리는 흉물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그 밑으로 마치 화상을 입은 것처럼 울긋불긋해진 다리가 앙상한 가지처럼 뻗어있었다. 유감스럽게도 뼈에는 이상이 없는 듯했다.
다음으로 한우경.
내가 쓰러진 곳에서는 그의 동체만 보였다. 마왕의 쇠사슬에 날아간 두부는 뒤편의 꽃밭에 떨어진 모양이었다.
눈물이 났다. 나는 아버지가 말한 ‘진정한 전우를 잃은 슬픔’을 완벽히 이해했다. 가슴이 찢어진다는 말 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으나 그 말로는 오롯이 담아낼 수 없는 슬픔.
우리는 정식으로 사제지연을 맺지는 않았지만, 그리고 둘 다 시치미를 뗐지만, 서로를 스승과 제자로 여겼다. 그는 내게 정성을 쏟음으로써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마무리할 불꽃을 피우고자 했고 나는 그가 이승을 떠나기 전에 그를 능가함으로써 그의 애정과 은혜에 보답하고자 했다.
‘미안해요, 사부.’
머리를 잃고 나뒹구는 한우경의 몸뚱이를 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사과했다. 그는 내 호칭은 허용하되 사과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었다. 그래서 더욱 죄송스러웠다.
끝으로, 이모.
한우경과는 다른 의미로 가슴이 저몄다. 그녀가 나에게만 웃음을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싹 텄던 혈육지정이 비수가 되어 내 심장을 난도질했다.
나는 그저 그녀가 삶의 마지막 순간에 공포를 느끼지 않았기를 바랐다. 그리고 기원했다. 아무 것도 모른 채 떠났기를. 저 세상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기를.
이모에 관해서는 몇 마디를 덧붙여야겠다.
우선 그녀는 내 시야에 들어온 정지 장면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는 인물이었다. 허리가 두 동강난 후 달려오던 속도에 의해 상체가 마왕에게 날아간 탓이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살아있었다. 고양이가 할퀴는 듯한 특유의 동작으로 팔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그녀를 마왕은 쇠사슬을 부려 가차 없이 쪼개버렸다. 세 조각의 육편으로 화하고도 이모는 마왕을 향해 계속 기어갔다. 일견 소름끼치는 모습이었으나 나는 가슴이 아팠을 뿐이었다. 마왕의 쇠사슬이 그녀를 무자비하게 으깨버리고서야 이모는 움직임을 멈췄다.
마왕은 이모를 처치하기 위해 내 배를 뚫었던 철삭을 회수했다. 그러나 이미 마비상태에 들었던 나는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마왕의 쇠사슬이 빠져나간 자리에서 피가 솟구쳐 나왔다. 마비로 인해 지혈이 불가능했기에 나는 출혈로 사망할 위급지경에 처했다.
그때 기사가 일어났다. 내 왼편 뒤로 굴러왔던 이모의 하반신에서 흘러나온 피가 내 등의 관통부위로 지남철에 붙는 쇳가루처럼 빨려든 것이었다. 나의 내부로 들어온 이모의 피는 내 피와 섞여 혈맥을 휘돌았다. 이것이 지니는 의미를 나는 아직 알지 못했다.
원력을 일으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소용없는 짓임을 알았지만 최후의 최후까지 꿈틀거릴 참이었다. 그러나 한줌의 원력이 골수에 고이기도 전에 무상심공의 운용을 중단해야 했다. 마왕이 날린 쇠사슬이 내 몸을 찍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다섯 가닥으로 갈라진 철삭들이 내 사지와 복부를 뚫고 들어왔다. 나를 꼬챙이에 꽂힌 개구리 꼴로 만든 마왕이 내게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발로 내 면상을 짓이겼다. 꽈드득. 광대가 함몰되고 코뼈가 부러지며 기음을 낳았다. 그러나 나는 신음성을 흘리지 않았다.
“용모화에서 보았던 것보다 더 흉측하게 생긴 낯짝이구나.”
나는 내 얼굴에 대한 감상을 밝히는 마왕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마왕의 누런 동공에 시퍼런 살기가 번들거렸다.
“듣던 대로 겁 대가리를 삶아먹은 종자로구나. 전신의 근골을 자근자근 다져준대도 눈도 깜박하지 않을 테지?”
나는 침묵했다. 그러고 싶어서가 아니라 혀가 굳어 응답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왕이 발을 치우려다 말고 다시 내 입술을 찍었다. 그렇게 내 하악(下顎)을 뭉개더니 이상한 소리를 내뱉었다.
“너 같은 독종에게 고문은 괜한 수고만 될 터이니 공유의 말만 전해주마. 직접 되갚아주지 못해 유감이란다. 그러나 네 호의는 갚은 것으로 치자더구나.”
나는 말귀를 알아들었다. 공유는 철마의 이름일 터였다. ‘호의’란 전날 사당의 결투에서 내가 그의 숨통을 끊지 않고 돌려보낸 처사를 일컬을 것이었다. 그 말의 의미를 헤아린 나는 숨을 죽였다.
호의를 갚겠다는 철마의 말은 마왕을 설득해 내 명줄을 붙여주겠다는 의사표명이었다.
나는 비로소 마왕이 나를 즉살하지 않고 쓸데없는 짓거리를 한 까닭을 알았다. 그는 개구리를 갖고 노는 못된 악동처럼 나를 실컷 괴롭히다 죽일 심산이 아니었다. 나를 살려주되 회복이 불가능하도록 철저히 망가뜨릴 작정임에 분명했다.
상황을 파악한 나는 흥분을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나 마왕에게 들킨 모양이었다.
“호오, 설마 지금 명줄을 보존했다고 기뻐하는 게냐? 의외군. 내가 너라면 차라리 죽여 달라고 애걸했을 텐데. 이런 꼴로 사느니 말이다.”
내 몸에 들어와 있던 쇠사슬에 경력이 일었다. 이미 파괴되었던 단전에 더해 내장도 파열되었다. 팔다리는 절단의 참사를 모면했지만 팔꿈치와 무릎의 뼈, 그리고 주변 근육이 완전히 박살나고 터지는 바람에 영구적 손상을 입었다. 대라신선이 온대도 나를 정상으로 돌이키지는 못할 것이었다.
퓻!
꼼꼼하게 추가 조치를 한 마왕이 사슬을 뽑았다. 사슬을 복대처럼 허리에 감으며 마왕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이 모옥 쪽으로 향하자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나 마왕은 모옥에 일렁이는 미약한 기운들에는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다행이었다.
마왕의 눈길이 한우경의 목 없는 시신 쪽으로 향했다.
“저 노인은 검총의 인물일 테지? 이인자라고 하더니, 과연 대단한 솜씨였다. 헌데 저 계집은 누구더냐? 전날 독왕이 너를 찾아왔다던데, 그 노물이 남긴 흉물이렷다? 대체 독곡과는 무슨 관계더냐?”
나는 마왕의 어설픈 일처리에 욕지기가 일었다. 그게 궁금했으면 내 입과 턱을 부수지 말았어야 할 게 아닌가.
“뭐, 장(張) 총사가 알아낼 테지.”
장 총사가 마뇌 장삼을 지칭함은 불문가지였다. 혼잣말을 중얼거린 마왕이 나를 일별하더니 몸을 돌렸다. 그러나 비처의 출입구에 들어서기 전에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너는 강호에 너무 일찍 나왔고 너무 설쳤다. 그러지 않았으면 수십 년 후 우리가 떠난 무림을 평정하고도 남았을 터인데. 네 날개를 꺾어버렸다고 나를 원망하지 마라. 너를 망친 건 내가 아니라 너 자신의 경솔함과 욕심과 어리석음이니.”
마왕의 말은 잔인하게 내 가슴을 후벼 팠다. 그가 옳았다. 오늘의 참사는 모두 내 책임이었다.
나는 슬픔과 아픔이 내 심혼을 휘젓도록 허용했다. 밀어낼 수도 없을뿐더러 그런다 한들 부질없는 짓이었다. 어차피 금방 다시 잠식될 터이니.
내가 체념에 무너져 스스로를 방치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기는커녕 마왕이 나를 질책하는 언사를 쏟아내기 전에 이미 기를 쓰고 원력을 끌어 모으는 중이었다.
마왕이 출입구 통로로 사라지고 나서 반의반 각도 지나지 않아 나는 누군가 내가 쓰러진 곳으로 달려오고 있음을 감지했다. 이광임에 틀림없었다. 때맞춰 뭉개진 혀를 부릴 정도의 원력이 골수에 고였다. 나는 마왕이 듣고서 되돌아올 위험을 무릅쓰고 목청껏 외쳤다.
“오지 마!”
땅으로 전해지던 잔망스러운 진동이 멎었다. 그러나 잠시 후 조심스러운 발걸음이 재개되었다.
하늘이 노래졌다. 다시 말을 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그 동안 이광은 내게, 보다 정확하게는 이모의 사체에 접근할 터였다. 그가 바닥에 흥건히 고였을 그녀의 피를 밟기라도 하면 불상사가 일어날 게 뻔했다. 운이 좋아 독혈에 발이 닿지는 않더라도 그녀가 발산하는 독기에 침습당할 우려가 상당했다. 그리 되면 이광의 목숨은 끝장이었다.
조바심이 생긴 나는 무리에 무리를 거듭했지만 전신의 혈맥이 가닥가닥 끊어지는 극통만 몰아쳤을 뿐 원력은 갓난아이 눈곱만큼도 일지 않았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광마저 잃으면……, 상상조차하기 싫었다.
나 자신의 무기력함을 저주하며 나는 말을 듣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었다. 그러나 마왕의 발길질에 아마도 원래의 형태를 상실했을 내 입술에서는 아무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다급한 음성이 이광을 구했다.
“기다려라, 아이야. 지금 거기 가면 큰일 난다.”
발걸음 소리가 멎었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광을 멈춰 세운 점박이 노인이 다시 고함을 내질렀다.
“이리로 오거라. 안전해진 다음에 가도록 하자꾸나.”
“하지만 막내 할아버지, 큰 형님은 살아있어요. 빨리 큰 형님을…….”
“글쎄, 안 된다. 어서 이리…….”
“싫어요. 나는 큰 형님을 보살필 거예요. 그리고 그 괴물은 떠났어요. 설령 괴물이 돌아온대도…….”
벼락같은 호통이 점박이 노인과 입씨름을 벌이는 이광의 치기를 제압했다. 진청운의 목소리였다.
“당장 돌아오지 못할까!”
점박이 노인에게 거역하던 이광은 진청운의 명에는 고분고분 응했다. 내게로 오던 발걸음소리가 반대방향으로 멀어졌다.
두 사람의 도움으로 급한 불을 끈 나는 감각을 차단하고 운공에 집중했다. 무상심공의 구결에 따라 역혈의 기공을 구사하자 화염이 내 내부를 불태웠다. 상상 초월의 고통 속에서 기이한 느낌이 올라왔다. 그것은 이질감이었다.
나는 비로소 이모의 피가 내게로 들어왔음을 지각했다. 두 피가 꽈배기처럼 꼬이며 내 혈류를 거슬러 질주하고 있었다. 내기를 일주천할 때마다 내 몸은 점점 불덩이가 되어갔다. 익숙한 현상이었으나 뭔가 달랐다. 마왕의 쇠사슬에 실린 경력에 의해 무참히 파괴되었던 복부와 사지가 빠른 속도로 복구되고 있었다. 나는 전율했다. 설마 이모의 경이로운 치유력을 획득했단 말인가.
뜻밖의 행운에 기뻐하는 스스로가 부끄러웠지만 나는 서둘러 이모의 남은 피들이 땅 속으로 스며들기 전에 흡수하려고 노력했다. 그녀를 두 동강 낸, 아니 여러 조각으로 찢어 죽인 마왕을 똑같은 방식으로 처단해 빚을 갚아주겠노라고 그녀의 영혼에 맹세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