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79
제78화 잠깐 멈춰주십시오
충격이 가신 괴선이 감상을 밝혔다.
“결과적으로는 네놈에게 대득이 된 셈이구나. 하아, 세상에 그렇게나 억센 운에 질긴 명줄이라니. 아무래도 네놈에겐 악취가 나는 모양이다. 사신이 네놈을 데려가려고 올 때마다 고약한 냄새 때문에 네놈 목덜미 대신 자기 코를 움켜쥐는 게 틀림없어.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운다고 네놈도 언젠가는…….”
“그 무슨 얼토당토않은 망언이오?”
괴선의 실없는 소리를 잘라버린 광객이 내 기연을 축하했다.
“가히 홍복이로세. 은공은 이제 날개를 단 것이나 마찬가지일세 그려.”
맞는 말이었지만 이모의 희생을 생각하면 마냥 즐거워 할 일은 아니었기에 나는 기분이 착잡했다.
말을 끊은 광객에게 신경질을 낸 괴선이 중요한 문제를 제기했다.
“그런데 마왕이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게냐?”
나도 그게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처음에는 검총으로 간 강태수로부터 비밀이 새어나갔으리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찬찬히 되짚어보니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강태수를 밖으로 내보낼 일이 생길 시 진소월이 안전조치를 취해두지 않았을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내가 답을 주지 않자 괴선이 자기 생각을 피력했다.
“이 비처는 특정하지 않으면 절대로 찾을 수 없는 곳이다. 그렇다면 누군가 누설했음에 틀림없어. 그 누군가는 그 곰보임에 틀림없고. 시기적으로 딱 맞아떨어지지 않으냐? 필히 그 어여쁜 아이의 명을 받고 이런저런 일을 처리하느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마련의 촉수에 걸렸을 테지. 그러다 고문에 못 이겨 여기 위치와 드는 방법을 털어놓았을 테고. 안 그러냐?”
나는 괴선이 내가 일감으로 떠올렸던 것과 동일한 추론을 펼쳐서 놀랐다. 내가 침묵하자 괴선이 동의를 재촉했다.
“안 그러냐니까, 이놈아? 아까부터 생각해봤는데 그것 말고는 답이 없어.”
“강 호위가 빌미가 된 것 같긴 하오만 그녀가 마련에 붙잡혀 비처의 위치를 고했을 성싶진 않소.”
“엥? 그건 또 무슨 궤변이냐?”
내 추론은 이러했다.
두 달여 전 우리가 잠적한 후 사벌과 마련은 정보망을 총 동원해 추적에 나섰을 터였다. 강태수는 강호에 알려진 인물이 아니었으나 진청운 주변의 인사들은 그녀의 존재에 관해 알고 있었다. 진소월이 마련한 여러 비처들에 벽곡단 등의 준비물을 구비해두기 위해 그녀는 수시로 장원을 나가야 했다. 아무리 은밀하게 움직였더라도 횟수가 잦고 활동범위가 넓어지면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흑문이나 상운 같은 정보조직들의 이목을 끌만한 이가 아니기에 그녀의 동향은 최하급으로 분류되거나 아예 기록조차 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사벌 혹은 마련이 대대적으로 내 친인들의 행적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녀에 관한 목격담들이 나왔을 가능성은 상당했다.
진소월은 여섯 군데의 비처들 중 현재 우리가 든 곳에 유독 공을 들였다. 강태수가 가장 많이 들락거렸다는 뜻이었다.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기에 비처를 출입하는 장면을 들키지는 않았더라도 안평 인근에 출몰하는 모습을 누군가 여러 차례 보았다면 사벌과 마련의 머리 좋은 자들은 그를 은신처와 연관 지어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그런 연후 집중적으로 이 부근을 탐색하지 않았을까.
세상에는 기이한 재주를 지닌 이인(異人)들이 많았다. 보고 듣는 모든 것을 기억하는 진소월도 그런 부류에 속했다. 전날 내가 삼절문의 사주를 받은 자들에게 납치된 진청운을 구하러 갈 때 부렸던 까만 꼬리 족제비처럼 냄새를 추적할 수 있는 영물들도 있었다. 그들이나 그것들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능력을 발해 우리의 흔적을 찾아내지 않았을까.
마련이든 사벌이든 비처의 위치를 알아낸 후의 수순은 뻔했다. 우리를 압도할 전력을 파견하는 것. 혹시 검황자가 우리 무리에 속해있다면 그를 제압한 후 나머지만 몰살시킬 것. 그 조건을 완벽하게 충족시키려면 팔마나 칠사 전원이 나서야 할 터이지만 훨씬 간단한 방법이 있었다. 다름 아닌 마왕, 혹은 사왕이 직접 나서는 것이었다.
괴선이 탄복했다.
“하아,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그 영특한 아이 곁에 얼쩡거리더니만 제법 흉내를 내는구나. 그럴싸하다. 정말 그럴싸해.”
나는 우쭐하지 않았다. 자랑을 하려고 추론을 늘어놓은 게 아니었다. 거기엔 보다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만약 내 추론이 옳다면 내가 후보지로 떠올린 두 곳의 은신처도 안전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마뇌는 목숨을 부지한 내가 다른 곳으로 피신했으리라 보고 강태수의 발길이 닿았던 장소들을 샅샅이 뒤질 것이었다. 지금의 비처를 찾은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그 은신처를 알아낸다면 곤란지경에 처할 터였다. 왜냐하면 적들은 괴선과 광객을 염두에 두고 최소한 세 명 이상의 마도팔류나 사파칠문의 수장들을 보낼 것이기 때문이었다.
설혹 며칠 내에 내 몸이 정상으로 돌아오더라도 철마 급의 마두 셋을 감당하는 건 불가능했다. 셋은 고사하고 둘도 크게 버거웠다. 이모의 치유력을 지녔다고 해도 동귀어진조차 이끌어내기 어려웠다. 결국 괴선과 광객이 회복될 때까지는 충돌은 무조건 피해야했다. 그러려면 적들이 찾아내지 못할 곳에 숨어있는 게 최선의 방책이었다.
진청운도 내 판단에 동의했기에 우리는 도피처의 선정을 두고 논의에 들어갔다.
갑론을박 끝에 최종적으로 내가 제시한 장소가 낙점되었다. 나는 처음에는 내 오랜 터전이었던 절곡으로 향하고자 했다. 그곳은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십삼 년을 머무는 동안 단 한 번도 외인을 본 적이 없는 오지였다. 그러니 일단 들어가기만 하면 최상의 은신처가 될 수 있었다.
문제는 ‘일단 들어가기만 하면.’이라는 전제조건이었다. 절곡까지는 천리가 넘었다. 거기에 가는 동안 세인들의 이목에 걸리지 않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여 나는 절곡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으로 생각한 곳은 구륜산맥의 불귀곡이었다. 야음을 틈타 산악지대로 이동하면 어찌어찌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갈 수도 있을 것 같았으나 그 다음이 문제였다. 절곡과 달리 구륜산맥은 사냥꾼들이나 약초꾼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었다. 시독이 깔렸다는 괴담 때문에 불귀곡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먹을거리를 구하러 불귀곡 밖으로 나갔다가 산인들과 조우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려웠다.
기실 불귀곡은 탈락시킨 데는 더 중대한 사유가 있었다. 그곳은 절곡과 마찬가지로 너무 멀었다. 게다가 길도 험했다. 운신불능의 두 노인과 범인이나 다름없는 세 사람을 데리고 가기에는 부담스러운 경로였다.
결국 남은 건 한 군데뿐이었다. 비처에서 가깝고, 인적도 없는 곳. 그곳은 이른 바 ‘등잔 밑’이었다.
이광은 딴에는 훌륭하게 자기 임무를 완수했다.
나는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출입구에 들어서서는 마차를 산자락 모퉁이에 대기시켰음을 알리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후 괴선과 광객부터 그리로 옮겼다. 그러고도 두 번 더 비처를 드나들었다. 보름치의 벽곡단을 챙기고 진소월의 비서(祕書)들을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삐쩍 골은 두 필의 말이 이끄는 낡은 마차는 나와 점박이 노인, 그리고 괴선과 광객이 타자 문을 닫기 어려울 정도로 비좁았다. 나는 다리를 바깥으로 빼고 비스듬히 누운 채 내 배 위에 운신불능의 두 노인을 얹어야 했다. 점박이 노인은 창문을 잡고 위태롭게 매달렸다. 나는 불편한 것보다 우리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바닥이 꺼질까봐 염려스러웠다.
이광은 진청운과 함께 마부석에 올랐다. 일인석인지라 그는 진청운의 무릎에 앉아야 했다. 이광이 마차를 몰게 해달라고 떼를 썼지만 진청운은 묵살했다.
자루에 든 이모를 포함하면 일곱 사람을 실은 마차가 삐걱거리는 기성을 토해내며 힘겹게 달리기 시작했다. 늙은 말들이 숨을 헐떡이는 소리가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목적지까지는 삼백여 리에 불과했지만, 그리고 길도 평탄했지만, 나는 거기에 무사히 당도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가다가 마차가 부서지거나 말들이 쓰러지면 대책이 없었다.
그런 연유로 출발한지 반각도 지나지 않아서 진청운에게 요청해야 했다.
“잠깐 멈춰주십시오.”
말들과 마차 바퀴를 다시 꼼꼼히 살핀 진청운은 출발 전과 마찬가지로 괜찮을 것 같다는 진단을 내렸지만 나는 안심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과감하게 벽곡단을 이틀 치가량만 남기고 다 버렸다. 그러고도 모자라 홀로 삼인분의 무게를 차지하는 나 자신을 빼기로 했다.
내가 빠지자 마차 내부에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다. 여전히 넉넉하지는 않았으나 세 노인을 담기엔 충분했다. 이광도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마차를 먼저 보냈다. 기분 탓인지 골골하기 짝이 없던 말들이 한결 기운차게 달리는 듯했다. 공히 교통의 요지인 안평에서 전원까지는 여러 줄기의 대로가 뚫려있으므로 늦어도 세 시진 이내에 목적지 부근에 도달할 터였다.
최종 행선지는 나와 괴선 등이 비처에 오기 전 몇 달 간 수련장으로 삼았던 ‘늪지’였다. 우리의 보금자리였던 진소월의 장원과 가까웠고 치열한 수련의 흔적이 남아있을 터이기에 마련과 사벌이 파악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으나 그렇기에 허를 찌를 수 있는 곳이었다. 두 달이 넘도록 그들이 계속 그곳을 감시할 인력을 배치해두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사방이 탁 트인 공간인데다 달리 은신할 곳이 없는 장소이기에 마뇌든 사벌의 책사든 우리가 설마 그리로 되돌아갈 거라고는 생각지 못할 터였다.
나는 그것이 내 일방적인 수읽기가 아니기를 바랐다.
고통을 견디며 얼마간 걷던 나는 도로가의 갈대숲에 들어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무작정 가는 것보단 몸을 조금이라도 회복한 후에 보행을 재개하는 게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어차피 지금 상태로는 쉬지 않고 나아가더라도 빨라야 내일의 해가 중천에 뜬 이후에나 늪지에 이를 수 있을 터였다. 백주에 이동할 수는 없으니 실제로는 모래 자정을 훌쩍 넘기고서야 친인들과 합류하게 될 공산이 컸다. 그러느니 운공을 통해 상태를 호전시킨 연후 움직이는 게 나을 터였다.
그러나 성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무상심공을 운용했음에도 이모의 치유력은 작동하지 않았다. 실망스러웠지만 예상했던 바였다. 이광이 비처로 돌아오기 전까지 여러 차례 시험해보았으나 최초의 기적은 재현되지 않았다. 나는 그 기적이 ‘일회적 우연’이 아니었을까 염려스러웠다.
그렇더라도 내 일부가 된 이모에게 무조건 감사했다. 그녀의 피가 일으킨 기적이 아니었더라면 이런 회복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었다. 몇 개월이 지나도 걷기는 고사하고 기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터였다. 그러니 감사와 만족은 지극히 당연한 심상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욕심을 버리지 않고 다시금 이모의 치유력을 체현하려 안간힘을 썼다. 자칫 영구적 회복불능이 될 우려를 감내하며 도전하고 또 도전했다. 매번 혈맥이 터지고 근골이 비틀리는 극통이 잇달았으나 끊임없는 시도는 마침내 보상을 받았다.
경공을 전개할 수준에 이르지는 않았으나 전력으로 질주해도 이상이 없을 정도로 회복된 나는 나를 기다리고 있을 친인들을 생각해 운공을 중단하고 늪지로 향했다. 밤새 달린 나는 새벽녘에 늪지에 도착했다. 그러고는 나를 보자마자 내지른 괴선의 고함에 깜짝 놀랐다.
“대체 어디서 뭔 짓을 하느라고 이레 만에 온 게냐, 이놈아. 네놈에게 변고가 생긴 줄 알고 애간장이 녹았잖으냐.”
기껏해야 서너 시진쯤 경과했으리라고 보았는데 나는 갈대숲에서 칠주야나 운공에 들었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