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8
제07화 내 아버지에게 왜 그랬나?
삼경이 지났지만 옥청관은 처처에 걸린 등불로 대낮처럼 밝았다.
백도방의 처소를 찾는 건 쉬웠다. 야심한 시각이라 거리를 오가는 이들이 드물었으나 탐문에는 지장이 없었다. 두 번째로 마주친 행인에게서 옥청관이라는 이름과 가는 길을 알아낸 나는 곧장 이리로 왔다.
노인, 괴선(怪仙)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정공법을 택한 것은 아버지의 원수에게 힘을 과시하기 위함이었다. 백도방이 나를 저지하려 들 시엔 정면 돌파할 작정이었다.
대문에는 경비무사들은 보이지 않고 초로의 문사가 홀로 서있었다. 낙낙한 소매 속에 손을 집어넣은 채 문사가 내게 목례를 했다.
“귀하가 전 공자시오?”
내 답변이 불필요한지 문사가 바로 말을 이었다.
“태사께서 기다리고 계시오. 안내해 드리리다.”
꺼림칙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대응이었다. 괴선도 암수를 조심하라고 거듭 주의를 주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제 와서 몸을 돌릴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나는 문사를 따라 옥청관 경내로 들어섰다.
고풍스러운 전각들이 그윽한 기품을 뽐내며 늘어선 마당을 지나고도 한참을 가서야 죽림 한 가운데 자리한 별채가 나왔다. 소담한 단층 와옥이었다.
문사가 큰 목소리로 보고했다.
“전 공자를 모시고 왔습니다, 태사.”
“수고했다. 안으로 들이고 너는 그만 물러가거라.”
문사가 내게로 돌아섰다.
“들어가시지요.”
나는 와옥에 발을 들여놓았다. 오른편에 방들을 거느린 복도 맨 끝에서 불빛이 새어나왔다. 나는 그리로 갔다. 주렴을 걷자 두 평 남짓한 좁은 공간이 나를 맞이했다.
내부는 썰렁했다. 가구는 하나도 없고 백염백발의 노인 한 명이 창가에 서있을 뿐이었다. 귀 밑에서 목 아래까지 길게 난 흉측한 상처가 노인의 청수한 인상을 망가뜨리고 있었다. 방에 들어서는 나를 뚫어져라 응시하던 노인이 탄성을 내질렀다.
“아아! 나는 기골이 장대한 거한이라기에 자네가 아우님의 의자(義子)일 거라 생각했다네. 그런데 친자였구먼. 두께는 다르나 입술 씰그러진 모양이 아우님과 판박이일세 그려.”
나는 얼굴이 굳었다. 노인에게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눈빛이었다.
어머니의 눈빛. 먼저 떠난 지아비에 대한 가없는 애정과 사무치는 그리움을 담았던 눈빛. 그 익숙한 눈빛이 웃는 낯으로 눈물을 글썽이는 노인의 눈동자에 고여 있었다.
“아우님은 잘 계신가? 어째서 직접 오지 않았는가? 아우님이 오기만을, 와서 이 죄인의 목을 가져가 주기만을 목 놓아 기다렸는데.”
나는 묵묵부답했다. 노인의 눈동자에 바람 앞의 촛불 같은 불안감이 서렸다. 그러더니 느닷없이 굵은 눈물을 떨구었다.
“역시 그렇구먼. 아우님은 언제 떠났는가?”
노인의 질문을 묵살하려다 답을 주었다.
“십삼 년 됐소.”
노인은 망연자실했다.
“아아, 그렇다면 어째서 나를 찾아오지 않았는가?”
“…….”
“십삼 년 전이라면 ‘그 일’이 있고서 이십사 년이나 생존해 있었다는 뜻이 아닌가? 그 동안 아우님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들려주겠는가?”
나는 문득 아버지의 반생을 돌이켰다.
안평 무림대회에서 당한 치명적인 내-외상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무인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수련에 매진했다. 뼈를 깎는 노력을 거듭했지만 신체적 문제로 인해 고수로 성장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절망의 늪에 잠기는 대신 과감하게 전장(戰場)에 뛰어들어 자신만의 실전무학을 갈고 닦았다. 십 수 년 간 전쟁터를 누빈 아버지는 공력을 운용하지 못하는 하급무사임에도 불사귀(不死鬼)라는 별명을 얻으며 용병들 사이에서 신화적 존재가 되었다. 그러다 골수에 스민 독기로 인해 운신불능에 처하자 어쩔 수 없이 전장을 떠났다. 그리고 그로부터 사 년 후 당신을 죽도록 사랑했던 아내의 품 안에서 숨을 거두었다.
아버지의 임종 순간이 떠오르자 절로 눈시울이 붉어졌다. 심중의 동요를 감추기 위해 나는 거친 말을 쏟아냈다.
“알 것 없다, 늙은이.”
상심한 표정을 만면에 드리우며 노인이 자조했다.
“허허, 그러세. 내가 무슨 자격으로 아우님의 일을 묻겠는가. 어서 내 목을 비틀게. 그 정도로 성이 차지 않으면 전신의 근골을 찢고 으깬 연후 죽여도 좋네. 어떤 고문이라도 달게 받음세.”
나는 노인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러고는 노인의 앙상한 목을 움켜쥐었다. 조금도 겁먹은 기색 없이 노인이 말했다.
“나를 염왕에게 보내기 전에 몇 마디만 남길 기회를 주겠는가? 우선 자네를 보내 준 아우님의 은덕에 감사를 표하고 싶네. 진심일세. 자네가 오지 않았다면 나는 죽어도 눈을 감지 못했을 걸세.
그리고 기쁘기 한량없다네. 자네 같은 훌륭한 아들을 낳아 기른 걸 보니 아우님의 삶이 나쁘지만은 않았을……, 참! 주제넘지만 충고를 해도 되겠는가. 나를 처단한 후 즉시 안평을 떠나게나. 태극검문은 야산에서 그 아이가 당한 일을 묵과하지 않을 걸세. 필히 자네에게 보복을 하려 들 걸세.
본방의 수하들과 충돌했던 일은 염려하지 않아도 되네. 불문에 붙이겠다는 방주의 약조를 받았으니까. 자네가 나가는 길도 안전을 보장했네. 자, 이제 내 목을 꺾게나. 한시라도 빨리 아우님 곁으로 가고 싶네.”
처형을 촉구하는 노인을 노려보며 나는 아버지에게 들었던 삼십칠 년 전의 ‘그 사건’을 떠올렸다.
* * *
전광은 본선에서도 매판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며 준결승에 진출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사강에 오른 후기지수들은 하나같이 출중한 기재들이었지만 절대다수의 관중은 청인무관 출신의 신성이 우승을 거머쥐리라 확신했다. 그만큼 전광이 예선과 본선을 거치며 현시한 무력은 압도적이었다. 그는 가히 군계일학이었다.
그러나 전광은 이변의 희생양이 되었다. 그의 사강전 상대였던 창궁창파(蒼穹槍派)의 신예 고상돈(高上暾)은 그간 진신무력을 감추어두었다는 듯 초반부터 강력한 공격을 퍼부으며 절대우세를 과시했다. 고상돈의 파상공세에 밀린 전광은 방어에 급급했다.
수세에 몰렸으면서도 결정타를 허용하지 않고 버티던 전광은 승부수를 띄웠다. 그러나 그 반격은 화를 초래했다. 전광의 봉에 무릎을 허용한 고상돈은 참관인이 제지하기도 전에 그에게 살초를 퍼부었다. 몸을 비틀어 간신히 목과 심장을 보호했지만 전광은 세 군데의 급소를 내주고 말았다. 그리고 비무는 끝났다.
전광의 부상은 치명적이었다.
그의 왼 어깨를 가르고 오른 발목의 힘줄을 자른 고상의 단창은 최종적으로 복부를 찍었다. 왼손잡이였던 전광은 다시는 좌수를 쓰지 못했다. 다리도 불구가 되었다. 그러나 단전의 손상이 안긴 상실감에 비하면 수족의 장애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공을 쌓을 수 없으면 절정 무위로의 상승은 불가능했다.
몸에 일어난 참극보다 전광을 더 고통스럽게 만든 건 심상(心傷)이었다.
비무대 위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진 전광은 이틀 전 그와 형제결의를 했던 홍영준(洪英駿)이 망연자실해 있던 청인무관 인사들을 떠나 창궁창파 진영으로 옮겨가는 것을 보았다. 고상돈의 부친이자 창궁창파의 수장인 흑백창(黑白槍) 고진명(高眞命)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는 모습도.
홍영준이 고개를 돌려 비무대 위의 그를 보았을 때 전광은 모든 것을 깨달았다. 그가 의형으로 삼았던 이가 그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를. 어째서 내력을 운용할 수 없었는지를.
어쩐 일인지 홍영준이 비무대 밑으로 다가왔을 때 전광은 필사적으로 몸을 굴려 그에게로 떨어져 내렸다. 그러고는 비상용으로 지니고 있던 비수로 홍영준의 면상을 그었다. 손바닥에 전해지는 살이 갈리는 느낌을 마지막으로 전광은 정신을 잃었다.
* * *
나는 노인을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노인에게 아버지가 그토록 알고 싶어 했던 바를 물었다.
“내 아버지에게 왜 그랬나?”
별안간 노인이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목덜미를 틀어쥐고 들어 올리려던 나는 생각을 바꿔 그냥 내버려두었다.
내 눈을 피해 바닥으로 시선을 내린 노인이 답변을 시작했다.
“조금 긴 이야기가 될 지도 모르니 미리 양해 부탁함세. 나는 농가 태생이라네. 하지만 농사를 지은 적은 없다네. 입 하나라도 덜기 위해 내가 코흘리개 시절에 부친께서 고향을 지나던 상단에 팔아버렸기 때문일세.
상단의 종으로 지내며 겪은 고생은 늘어놓지 않겠네. 내 인생의 전기를 맞았던 것은 스물한 살 때였네. 십오 년이나 노예나 다름없는 생활을 강요받았던 상단에서 도망쳐 나와 어찌어찌 작은 표국의 쟁자수가 되었는데 그 일을 시작하고 일 년 만에 횡액을 당했다네. 표행 중에 녹림도를 만난 걸세. 요새는 녹림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당시만 해도 산마다 도적들이 들끓었다네.
방금 횡액이라 했지만 기실 나 개인적으로는 복운이 열린 날이었네. 표사들이 몰살당하고 우리 짐꾼들도 목이 날아가던 참에 일군의 협객들이 나타나 우리를 구원해 준 걸세. 아니, 우리가 아니라 나라고 해야겠구먼. 그날의 참변에서 생존한 이는 나밖에 없었으니까.”
갑자기 용기가 생겼는지 노인이 고개를 들어 나를 직시했다.
“협객들을 이끈 이는 창궁창파의 고 대협이었네. 그분은 내 목숨을 구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내가 오랫동안 갈망했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준 은인일세.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상단의 종노릇을 할 때부터 학사가 되고 싶었다네. 나와 대화를 나누다 내 원을 들은 고 대협은 나를 장천(長川)의 청운서원(靑雲書院)에 넣어주었네. 신원 보장은 물론이고 비싼 학자금까지 대주면서 말일세.
늦은 나이에 학림에 발을 들여놓은 나는 불철주야 학문에 매진했다네. 부끄럽지만 십오륙 년쯤 지난 후엔 여러 스승들로부터 어느 정도 인정을 받을 수 있었네. 그러던 어느 날 한동안 연락이 없던 고 대협이 서원으로 나를 찾아왔다네. 얼마간 회포를 풀다 어렵게 얘기를 꺼내더구먼. 자기를 좀 도와달라고 말일세. 나는 그분의 청을 거절할 수 없었네. 어찌 그럴 수 있었겠는가.”
* * *
고진명은 사십 줄에 얻은 아들을 애지중지했다.
그의 아들 고상돈은 창궁창파의 제일창(第一槍)인 부친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문파의 제일기재로 성장했다. 흑백창이 그를 능가하는 후세를 두었다는 소문이 성주 무림에 파다하게 퍼졌다.
아들이 약관이 되었을 때 고진명은 성주 무림의 등용문이라 할 안평 무림대회의 출전을 결정했다. 아들의 우승은 따 놓은 당상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고상돈의 심중에 불안이 싹 튼 것은 성주의 서편에서 날아온 불길한 소식 때문이었다. 근래 ‘개천에서 난 용’이라는 평판이 나돌고 있던 청인무관의 잠룡이 무림대회에 나오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기실 고진명이 아들의 출전을 서둘러 결정한 까닭도 그 잠룡을 의식해서였다. 자칫 대회가 겹치면 그와의 대결을 불가피할 터이고 그리 되면 승리를 장담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잠룡의 무위를 직접 확인한 것은 아니었지만 들리는 소문만으로도 여간내기가 아님은 확실했다.
하여 고진명은 잠룡이 아직 덜 여물었을 때, 그래서 무림대회에 나오기 전에 아들을 내보내 우승시킬 작정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잠룡이 그의 아들이 나서기로 한 대회에 나온다는 것이었다.
고진명은 난감했다. 이미 참가신청을 했기에 이제 와서 철회하면 그 연유를 두고 호사가들이 입방아들을 찧어댈 게 뻔했다.
자신의 체면 때문이 아니라 아들이 구설수에 오르는 게 싫어 고진명은 출전을 강행했다. 하지만 운에 아들의 운명을 맡길 생각은 없었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제 목숨보다 소중한 아들을 우승자로 만들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