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80
제79화 내 보금자리를 소개해주겠소
인고의 나날이었다.
늪지에 도착하고도 한 달이 지나도록 나는 온전히 회복되지 못했다. 통증이 말끔히 사라지고 팔다리도 원활히 움직일 수 있게 되었으나 뼈들이 박살나고 복원되는 과정에서 골수에 이상이 생겼는지 원력이 제대로 고이질 않았다. 아무리 쥐어짜도 마왕에게 당하기 전에 형성했던 최대치 원력의 일 할 이상을 끌어올릴 수가 없었다.
두려웠다. 설마 원력을 상실한 걸까. 영영 원래의 원력을 되찾지 못하는 건가.
이모의 치유력으로도 파괴된 단전을 복구할 수는 없었기에 네 살에 기본심공을 익힌 후 이십이 년 동안 공들여 쌓았던 공력은 물거품으로 화한 상태였다. 거기에 더해 원력마저 잃는다면 아무리 신공절학을 완성한대도 나는 평생 초절정의 벽조차 넘기 어려울 것이었다. 그토록 치열하게 분투했음에도 내공의 결핍으로 인해 아버지가 끝끝내 절정의 경지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듯이.
심히 절망적인 상황이었으나 나는 신세를 한탄하며 낙담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지는 않았다. 어떤 조건에서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준엄한 가르침을 되새기며 한시도 헛되이 보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해가 난 동안에는 수련에 매진했고 일몰 후에는 무학의 궁구에 전념했다. 잠은 두 시진의 운공으로 대체했다. 하루에 한 시진은 이광에게 구환도법을 전수했다. 반드시 필요한 시간이었다. 내 근본을 돌아보는 기회이기도 했거니와 일종의 휴식 같은 그 시간이 없었다면 나는 미쳐버렸을 지도 몰랐다.
다른 은신처로의 이전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상황이 발생한 것은 늪지에 든 지 사십여 일이 지난 사월 초순경이었다.
비처를 나오며 챙겼던 벽곡단을 마차 문제로 버리고 왔기에 우리는 먹을거리를 사냥으로 해결해왔다. 점박이 노인과 이광이 늪지 인근의 숲까지 가서 잡아 온 토끼나 노루가 우리의 식량이었다. 그러나 차츰 사냥감이 줄어든 탓에 두 노소는 더 멀리까지 나가야 했다. 그러다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까지 발을 들여놓고 말았다.
산중에서 우연히 마주친 산인들이 사납게 시비를 걸어온 탓에 점박이 노인은 술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이광도 무공을 써서 그를 거들었다. 초라한 노인의 사이한 술수와 앳된 소년의 강력한 권법에 놀란 산인 무리는 줄행랑을 놓았다.
이 사건이 파장을 일으킬지는 불분명했으나 늪지 주변에 정보조직의 끄나풀들을 꼬이게 할 위험성을 간과할 수 없었기에 우리는 논의 끝에 보다 안전한 곳으로의 이동을 결정했다.
나는 뗏목 같은 틀을 만들었다. 그러고는 양편 가장자리에 한 자 길이의 나뭇가지들을 촘촘히 박았다. 급정거나 급출발 시 뗏목에 든 이들이 튕겨나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친인들이 뗏목에 들어가 눕자 나는 그들의 몸을 칡넝쿨로 단단히 묶었다. 그런 후 뗏목을 들어 아낙네들이 항아리를 머리에 이듯이 정수리로 받쳤다.
준비를 마친 내가 경공을 펼치려는데 괴선이 발목을 잡았다.
“정말 할 수 있겠느냐?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조금씩 나아가는 게 나을 성싶은데.”
이미 끝난 얘기였기에 대꾸하지 않고 바로 출발하려다 생각을 바꿨다. 괴선의 질문이 모두의 불안감을 대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를 믿으쇼.”
“이놈아, 그러지 말고…….”
“아, 글쎄 믿으라니까요. 이 정도는 한 손으로도 들 수 있소.”
허풍이 아니었다. 나는 타고난 괴력의 소유자였다. 내공이 없더라도 다섯 사람, 아니 자루에 든 이모까지 포함해 여섯 사람 분의 무게쯤은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었다.
내 호언에도 괴선이 계속 어깃장을 놓았다.
“힘을 말하는 게 아니지 않으냐, 이놈아. 거기까지는 팔백 리가 넘는다며? 인적이 없는 곳으로 가야 할 터이니 실제 거리는 두 배에 달할 텐데 몸도 성치 않은 네놈이 무슨 재주로…….”
나는 다시 괴선의 말을 끊었다.
“그렇게 못 미더우면 내리시던가.”
내가 역정을 내자 광객이 중재에 나섰다.
“진정하게나, 은공. 괴선도 그만하시구려. 달리 대안이 없으니 은공을 믿어봅시다.”
“대안이 없긴 왜 없어? 밤마다 일이백 리씩만 나아가도 늦어도 열흘이면 당도할 터인데. 빨리 간다고……, 헉!”
괴선이 말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경악성을 내질렀다. 내가 냅다 뛰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사위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나쁜 조건이 아니었다. 기실 일부러 먹구름이 잔뜩 낀 날을 고른 것이었다. 이런 암흑 속에서는 누구도 우리를 보지 못할 터였다. 설혹 보더라도 기괴한 형체의 도깨비로 여길 것이었다. 하여 나는 약간의 위험을 무릅쓰고 촌락들을 끼고 달렸다. 때로는 과감하게 가로지르기도 했다.
비록 정상 상태였을 때의 일 할에 불과한 원력만 부릴 수 있었지만 내 경신 속도는 어지간한 준마를 능가했다. 한줌의 내공으로 절정고수급의 속력을 낼 수 있는 오절신공의 진(進) 덕분이었다.
나는 불가피한 우회를 감안해 총 일천이삼백 리쯤 될 절곡까지의 장도를 다섯 시진 이내에 주파할 작심이었다. 뜻대로만 된다면 내일 동이 트기 전에 절곡에 들 수 있을 터였다.
늪지와 절곡의 중간쯤에 위치한 험준한 산악을 지날 때 고비를 맞았다.
울퉁불퉁한 경사로를 뛰어오르느라 애를 먹다가 느닷없이 낭떠러지가 나타난 탓에 속절없이 추락한 것이었다. 뗏목 위에서 점박이 노인이 비명을 질렀다. 절벽의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알 길이 없었기에 나는 간이 철렁 내려앉았다.
원력을 모조리 끌어올려 안력을 최대한 돋운 나는 발아래를 주시했다. 하지만 바닥은 보이지 않고 시커먼 공간만이 끝없이 이어졌다.
괴선이 다급히 소리쳤다.
“뭐하는 게냐, 이놈아. 어서 부운공(浮雲功)을 시전하지 않고.”
나는 괴선의 지시에 응하지 않았다. 부운공을 구사할 여력이 없어서였다. 괴선이 악다구니를 써댔지만 나는 귀를 막고서 아래쪽에만 집중했다. 이윽고 이질적인 암질이 감지되었다.
나는 온힘을 다해 뗏목을 위로 던졌다. 그러고는 그 직후 착지했다. 충격의 여파는 컸다. 다리뼈와 척추가 으스러진 듯했다. 두개골이 울리는 바람에 기절할 뻔했지만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나는 허공으로 치솟았다 떨어지는 뗏목을 받아냈다.
“괜찮은가, 은공?”
광객이 물었다.
“끄떡없습니다, 어르신.”
나는 큰소리쳤다.
괴선은 나와 광객의 다정한 대화를 두고 볼 위인이 아니었다.
“십 년 감수했다, 이놈아. 네놈 고집 때문에 하마터면 모두 골로 갈 뻔했잖으냐? 그러기에 내 말대로, 엇!”
괴선이 말하다 말고 헛바람을 들이켰다. 뗏목을 받아내느라 찌그러졌던 내가 벌떡 일어서며 뗏목을 뒤로 떨어뜨렸기 때문이었다. 괴선의 잔소리가 듣기 싫어 고의적으로 그런 건 아니었다. 그것은 내 몸에 갑작스럽게 일어난 기변으로 인한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섬전에 나는 소스라쳤다.
번갯불은 회오리로 변해 내 내부를 휘돌았다. 전신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 나는 희열감을 느꼈다. 이모의 치유력이 발현된 것이었다. 무상삼공을 운용하지 않았음에도!
깨졌던 뼈가 순식간에 다시 붙었다.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골수에 원력이 꿈틀거렸다.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듯이.
튕기듯 일어섰던 나는 도로 좌정했다. 그리고 운공에 들었다.
눈을 뜨자 먹물 같은 어둠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하지만 나는 친인들이 내 주변을 둘러싸고 있음을 알았다. 내기를 일주천하니 전신에 활력이 장마철의 강물처럼 흘러넘쳤다.
내가 몸을 일으키자 바로 뒤에서 괴선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이놈아! 어찌 된 일이냐?”
그를 돌아보며 반문했다.
“얼마나 지났소?”
느낌상으로는 길어야 두 시진 정도 경과했을 듯싶었지만 한 달여 전처럼 며칠 내내 운공에 들었을 수도 있었다. 괴선은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무슨 소리냐?”
“내가 얼마나 오래 앉아 있었느냐는 말이오.”
“오래는, 이놈아. 기껏해야 반각도 안 될 텐데.”
나는 놀랐다. 그렇다면 최초의 기적이 일어났을 때와 비슷한 시간이었다. 치유 효과도 흡사했다. 나는 크게 고무되었다. 이제야 비로소 이모가 선사한 ‘경이로운 치유력’을 제대로 활용할 비법을 찾은 것이었다.
괴선이 다시 물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된 게냐? 안 다쳤느냐?”
나는 동문서답했다.
“어서 갑시다. 한 시진 내로 내 보금자리를 소개해주겠소.”
나는 친인들을 재촉해 뗏목에 태웠다. 넝쿨로 그들을 묶은 나는 천공으로 비상했다. 뗏목 위에서 동요가 일었다. 기성을 토해내며 괴선이 같은 질문을 세 번째 반복했다.
“으어어!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이놈?”
나는 비행속도를 끌어올림으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마왕에게 중상을 당하기 이전에 전력으로 펼쳤던 경신에 버금가는 빠르기였다.
내 부활을 축하하듯 온 하늘을 덮고 있던 암운이 개이고 찬연한 월광이 쏟아졌다. 그러나 내가 십칠 년을 머물렀던 절곡에 든 친인들은 실망을 금치 못했다.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황무지 너머에 덩그러니 자리한 바위산의 골짜기는 내가 봐도 기경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그 절곡은 수련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사방 어디에도 한 눈을 팔 곳이 없기 때문이었다.
기가 막힌 지 괴선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광객은 헛기침만 했다. 진청운이 주위를 둘러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먹을 것, 아니 마실 물은 있는가?”
“물론입니다. 저 모퉁이 뒤에 샘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석곡을 나가면 나름 울창한 산림이 나옵니다. 고래나 기린만 빼고 어지간한 동물들은 다 있습니다. 다만 독무(毒霧)가 자주 끼니 숲으로는 저와 소 어르신만 출입했으면 합니다.”
괴선이 구시렁거렸다.
“결국 우리는 이 삭막한 곳에서만 지내라는 소리로구나. 못된 놈 같으니.”
나는 괴선과 입씨름을 하지 않고 그를 달랬다.
“노인장도 이제 두어 달 후면 완전히 회복되지 않겠소? 그러면 독무 따윈 개의치 않고 얼마든지 숲에 드나들 수 있을 거요. 나름 경치도 볼만한 데다 도처에 산삼이 자라고 있으니 가끔 몸 보신도…….”
내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괴선이 불쑥 물었다.
“정말이냐?”
“뭐가 말이오?”
“산삼 말이다. 도처에 자란다며?”
“그렇소.”
괴선의 면상이 흥분으로 발갛게 달아올랐다. 광객이 핀잔을 주었다.
“왜 그리 침까지 흘리며 좋아하는 게요? 그깟 산삼에…….”
광객의 말을 자르며 괴선이 싱글벙글했다.
“모르면 나서지 말고 주둥이 닫고 있게, 태산. 선인에게 산삼은 공청석유나 만년하수오가 무인에게 의미하는 바와 비견할 만한 귀물이라네. 다시 말해 이 몸은 천고의 기연을 얻었다는 뜻이지. 하아, 개똥도 쓸모가 있다더니 이놈이 이런 횡재를 가져다 줄 줄이야.”
나는 ‘개똥’에 반격하지 않고 자중했다. 내심 찔리는 바가 있어서였다. 방금 전 무심코 말을 내뱉긴 했지만 십 수 년에 걸쳐 내가 별미삼아 눈에 띄는 족족 뽑아먹은 탓에 남은 산삼이 얼마 없을 터였다. 어쩌면 하나도…….
나를 유심히 보고 있던 괴선이 눈을 가늘게 떴다.
“너, 혹시…….”
나는 괴선의 뒷말을 막았다.
“자자, 피곤하실 텐데 다들 편한 곳에 자리를 잡고서 여독을 푸십시오. 저는 잠시 부모님 묘소에 다녀오겠습니다. 너도 쉬어라, 광아.”
괴선이 나를 잡을 세라 나는 말을 하는 도중에 깎아지른 석벽 위로 솟아올랐다. 괴선의 고함이 나를 쫓아왔다.
“이놈아, 얘기하다 말고 어딜 튀는 게냐? 거기 안 서? 산삼이…….”
내가 워낙 빨리 날아간 탓에 괴선의 목소리는 아득히 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