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85
제84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놀라게 해드릴 참이오
굳었던 안면을 풀며 독왕이 미소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난 또 뭐라고. 그깟 얘기를 하려고 그렇게 뜸을 들였단 말이냐?”
“저로서는…….”
“어찌 그리 어리석더냐? 죽긴 왜 죽어? 나한테 준만큼 내 걸 가져가면 되잖으냐?”
나는 짐짓 감읍했다.
“아아!”
“내가 아무려면 한낱 그 물건의 피 따위에 눈이 멀어 하나밖에 없는 사손을 죽도록 내버려두겠느냐?”
나는 조금 감동했다.
“자, 아무 염려 말고 네가 바꾸었다는 구결이나 읊어보려무나.”
불현듯 불안해졌다. 혹시 순진한 쪽은 내가 아닐까. 이 늙은이는 나를 안심시킨 후 내 피를 취할 속셈이 아닐까. 그런 연후 말라비틀어진 나를 제 소굴로 끌고 간 후 목내이로 만들어 두고두고 원력마저 뽑아먹을 심산이 아닐까.
독왕의 눈을 주시했지만 짙은 녹광이 고인 그의 동공에서는 아무 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잠시 그와 눈싸움을 벌이듯 강렬한 눈빛을 주고받은 나는 결단을 내렸다.
“제가 변형한 구결, 그리고 무상심공과는 무관하게 개발한 운용비법을 차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나는 일다경에 걸쳐 내가 터득한 비결을 독왕에게 일러주었다. 독왕은 무려 스물여덟 번이나 반복을 요청했다. 이렇게나 둔재였던가?
어느새 날이 밝았다. 그러고도 해가 중천에 떠오르고서야 비결을 숙지한 독왕이 환혈(換血) 작업으로 넘어갔다.
피를 교환하기 위한 특수한 도구는 불필요했다. 뾰족한 손톱으로 자신과 나의 양 손목의 양지혈(陽池穴)에 생채기를 낸 독왕이 허공섭물의 묘를 발해 피를 돌렸기 때문이었다.
독왕과 내 손목 사이에 대각선을 그린 두 줄기의 혈선이 햇살을 받아 검붉게 빛났다. 피를 전부 바꿀 수는 없을 터이기에 독왕은 그가 정한 적정선에서 환혈대법을 중단했다. 그러고는 곧장 운공에 들었다.
나는 다소 놀랐다. 독왕은 나를 앞에 두고 무방비 상태에 든 것이었다. 내가 암습을 하더라도 대처할 자신이 있다는 걸까. 아니면 나를 무조건적으로 믿는다는 뜻일까.
슬쩍 독왕을 찔러보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며 나도 운공을 시작했다. 장난을 쳤다가 자칫 경을 치를 수도 있었다.
눈을 떴다.
예상한 대로 특별한 부작용은 없었다. 수혈에 있어 가장 우려되는 점은 피의 적합성 여부였다. 서로 섞이는 피들과 얽히는 종류가 있다는 것은 의가(醫家)와 독문의 상식이었다. 맞지 않는 피를 몸에 들이면 그 양에 따라 죽을 수도 있었다.
이 부분에서 나와 독왕은 사전 검사를 할 필요가 없었다. 전날 독전에 끌려간 아이들은 전원이 독왕의 피와 어울리는 피를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모의 피를 대량으로 흡수한 내가 멀쩡하다는 것은 그들과 같은 혈종이라는 방증이었다.
하지만 이질감은 상당했다. 독왕의 독혈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었다. 조금만 더 들어왔더라면 꽤 고생을 했을 터였다.
독왕은 이미 운공을 마치고 비법을 시험까지 한 듯했다. 자국을 보니 팔뚝을 물어뜯은 모양이었다. 덜 아문 상처와 그의 떨떠름한 표정을 본 나는 결과를 짐작했다.
“익숙해지려면 부단한 연습이 필요합니다, 사조님.”
나는 독왕이 다시 시도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이모의 치유력을 체화하기 위해서는 극악의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다칠 일이 없을 독왕이 극통을 참으면서까지 노력할 성싶지는 않았다.
독왕이 심술을 부렸다.
“네가 해 보거라.”
고소를 지은 나는 즉시 그의 명을 이행했다. 그처럼 무식하게 이빨로 물어뜯는 대신 철봉 끝으로 팔뚝을 깊게 그었다. 피분수가 솟구치며 뼈까지 드러났다. 무형지기로 피를 빨아들인 나는 집중했다. 곧 갈라진 부분이 붙었다. 흉터도 순식간에 엷어졌다. 이모처럼 자연발생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리고 그녀만큼 빠르지는 않았지만 경이로운 치유력이 아닐 수 없었다.
“뼈나 혈맥도 가능하더냐?”
“물론입니다.”
“어디 해 보거라.”
이런 제길! 하마터면 욕설을 뱉을 뻔한 나는 왼손의 손가락들을 뒤로 꺾었다. 손등에 붙은 내 손가락들이 포악한 주인에게 원성을 퍼부었다. 나는 그들의 항의를 무시하고 회복에 전념했다. 몇 번 손가락을 꼼지락거린 후 주먹을 쥐어보이자 독왕이 탄성을 내질렀다.
“호오! 참으로 훌륭하도다.”
나는 입에 발린 소리를 했다.
“모두 사조님의 은혜 덕분입니다.”
“아무렴. 그렇고말고.”
기분이 좋아진 독왕이 뜻밖의 말을 했다.
“멋진 걸 받았으니 나도 선물을 주마.”
* * *
나는 휘청거리며 절곡으로 걸음을 옮겼다. 척추에 철심을 박은 것처럼 등짝이 뻐근했고 백만 근의 거석을 짊어진 듯 다리가 후들거렸다.
독왕의 선물은 원력이었다. 옥소를 통해 내 목덜미의 대추혈로 흘러들어오는 뭉근한 기운을 접한 순간 나는 즉시 이모의 유산임을 알아차렸다. 독왕은 그녀의 사체에서 뽑아낸 원력의 일부를 내게 전한 것이었다.
두 가지 중 하나일 터였다. 먹다가 배가 터질 지경에 이르자 남은 것을 저장해 두었다가 내게 주었거나 아니면 정말로 자신의 것을 떼어주는 선심을 썼거나.
적잖이 궁금했으나 나는 독왕에게 대놓고 물어보지도 않았고 사실을 캐기 위한 유도질문도 삼갔다. 그의 선물이 내 무력을 증강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러리라 예감했다.
하늘에 노을이 깔렸다.
볕이 잘 듣지 않는 절곡은 벌써부터 어둑어둑했다. 하지만 아직 일광이 남아있었기에 나는 해가 지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데 강태수가 달려와서는 진소월의 전언을 알렸다. 일몰 전에라도 독왕과의 용무가 끝났으면 자기 처소로 오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진소월을 위해 파놓았던 석굴로 들어섰다. 동굴의 길이는 육칠 장 정도였다. 그리 깊지는 않았으나 중간에 두 번 꺾었기에 햇빛이 들 염려는 없었다. 야명주 같은 기물을 둘 형편은 아닌지라 통로는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어두웠다. 컴컴한 공간을 지나며 나는 새삼스레 진소월의 천형이 안쓰러웠다. 얼마나 불편하고 답답할까.
두 번째 모퉁이를 돌자 내 발소리를 들었는지 진소월이 목소리를 마중 보냈다.
“전 공자?”
굳이 답을 줄 필요가 없었기에 성큼성큼 석실로 발을 들여놓았다.
갑자기 시야가 환해졌다. 진소월이 호롱불을 밝힌 것이었다. 불빛에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물결처럼 아른거렸다. 새벽부터 한숨도 자지 않고 나를 기다렸는지 눈 밑이 퀭했다. 그래도 예뻤다.
“좀 자 두지 그랬소? 피곤할 텐데.”
“괜찮아요.”
짧게 응답한 진소월이 호피가 깔린 자기 옆자리를 가리켰다.
“여기 앉아요.”
나는 고개를 젓고는 그녀 맞은편의 맨바닥에 엉덩이를 붙였다. 진소월은 재차 권하지 않고 은근히 물었다.
“독왕 어르신은?”
“숲에 있소. 앞으로도 거기서 지내겠다는구려.”
“왜요?”
“여자와 아이를 싫어한다더군요. 여긴 둘 다 있잖소?”
진소월이 분홍색 입술을 살짝 비틀어 특유의 고소를 머금었다.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라 울컥했다. 비로소 그녀와의 재회가 실감이 났다.
“어젯밤에 그 어른이 말한 ‘비결’이라는 게 뭔가요?”
나는 이모의 치유력을 체화한 과정을 진소월에게 들려주었다.
“독왕을 검총으로 부르려면 뭔가 확실한 미끼가 있어야 할 것 같았소.”
진소월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질책의 언사를 쏟아냈다.
“당신이 돌아온 걸 보니 일이 잘 풀린 모양이지만, 잘못 되었으면 어쩔 뻔했어요? 그가 당신 피만 빨아먹고 당신을 버릴 수도 있었잖아요? 왜 그렇게 무모한 짓을 했어요?”
나는 나 자신을 변호했다.
“도박이 아니었소. 소 어르신을 통해 독왕의 성정을 파악해두었기에 별 탈이 없을 거라는 나름의 확신을 갖고 있었소. 물론 위험요소가 아주 없지는 않다는 걸 아오. 하지만 구더기가 무섭다고 장을 안 담그면 손해 아니오?”
내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도 나와 언쟁을 벌이는 건 부담스러웠던지 진소월이 화제를 바꾸었다.
“호천봉에서의 일은 어떻게 되었나요?”
나는 일순 어리둥절했다. 그러다 그녀에게 무왕과의 만남에 대해 말해준 적이 없음을 깨달았다. 무왕과 헤어지고 비처로 돌아간 바로 그날 그곳에 와있던 검왕이 그녀를 데리고 갔기 때문이었다.
“더 바랄 나위가 없었소.”
나는 무왕의 심득을 전해 받은 최고의 기연에 대해 진소월에게 상세히 들려주었다. 그녀는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그래서 송 공자를 손쉽게 이길 수 있었군요. 솔직히 조금 걱정했어요. 당신을 믿었지만 그의 각오가 여간 아님을 알고 있었거든요. 그는 지난 반 년 동안 단 한 번도 나를 보러 오지 않았어요. 가끔 멀리서 날아오는 그의 시선을 느끼긴 했지만 내 앞에 나타난 적은 없어요. 그는 당신을 꺾고 나를 차지하기 위해 정말로 뼈를 깎는 노력을 했을 거예요.”
절로 쓴웃음이 났다. 결코 손쉬운 승리가 아니었다. 그와의 대결이 늘 그러했듯 누가 이겨도 이상하지 않았을 승부였다. 물론 내가 욕심을 부려 확실한 길을 두고 모험을 택하긴 했지만 최대치의 원력과 이모의 치유력을 동원했더라도 무조건 승리했을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만큼 검황자는 무서운 상대였다.
그러나 나는 진소월의 오해를 바로잡지 않고 넘어가기로 했다. 진상을 알면 그녀는 내 이기심에 실망할 터였다. 어쩌면 질책하거나 비난할 지도 몰랐다. 결과가 좋다고 다 용서되는 건 아니었다.
진소월이 기대감을 담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지금 전 공자의 무력은 어느 정도인가요?”
만약 어제 검황자와 붙기 전에 동일한 질문을 받았다면 난처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당당하게 답할 수 있었다.
“한 노야와 싸워도 밀리지 않을 것 같소.”
기대 이상이었던지 진소월이 탄성을 토해냈다.
“아!”
나도 덩달아 들떴다. 검황자와의 비무에서 얻은 성과는 단순히 신수 하나를 건진 정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갈망해마지 않았던 비약이었고 돌파구였다. 이제 봇물이 터졌으니 새로운 무학들이, 아마도 무왕이 현시했던 춤사위와 닮아있을 절학들이 내 심상으로 쏟아져 들어올 터였다.
“노야는 중원육기에 속하는 두 어르신의 합공을 어렵지 않게 물리쳤다고 들었는데, 맞나요?”
“그렇소.”
“그렇다면 전 공자는 현재 십왕을 제외하면 천하에서 가장 강한 무인이라는 뜻이네요?”
“그건 알 수 없소. 한 노야도 완전히 무명이었잖소? 세상 곳곳에 그 어른처럼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강자들이 도사리고 있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닐 거요.”
“그래요. 새외 무림의 해왕도(海王島)나 빙궁, 천랑성(千狼城) 등에는 미지의 고수들이 즐비하다니까요. 명교(明敎)와 도천(刀天)도 한 노야처럼 외부에 드러나지 않은 초고수를 보유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지상 최강의 무인을 목표로 삼은 전 공자에겐 참 빡빡한 시대네요.”
한우경 같은 이가 그리 흔할 성싶지는 않았으나 내가 먼저 꺼낸 말이었기에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흠칫했다. 진소월의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안해요. 갑자기 한 노야 생각이 나서. 전 공자의 성취를 알면 얼마나 흐뭇해하셨을까요.”
가슴이 먹먹했다. 그러나 나는 눈시울을 붉히는 대신 억지웃음을 그렸다.
“이 정도는 약과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놀라게 해드릴 참이오.”
진소월이 반색했다.
“그러면 당분간 수련에만 전념할 생각인가요?”
‘당분간’이 정확히 어느 정도의 기간을 가리키는 지는 불분명하나 내가 염두에 둔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날 터였다. 그럼에도 나는 그녀가 원하는 답을 주었다.
“그럴 작정이오.”
진소월은 안도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그녀는 알지 못했다. 내 수련이 절곡에서만 이루어지지 않을 것임을. 내가 적들과의 전쟁을 통해 무위를 끌어올릴 작심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