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86
제85화 몇 층이냐?
착각이었다.
진소월을 속이는 건 불가능했다.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던 그녀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복수를 결행할 심산이군요. 마왕을 상대할 무위에 이르기 전에.”
“이미 오래 참았소. 그리고 그에게 필적할 무력에 도달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싸워야 하오. 그것이 내가 강해지는 방식이오.”
“……나도 같이 하겠어요.”
“……내 일이오. 더 이상 친인들을 위험에 빠뜨릴 순 없소.”
“한 노야는 내게도 소중한 분이셨어요. 그리고 전 공자 일은 내 일이기도 해요.”
“…….”
“같이 해요. 같이 싸워주지는 못하겠지만 도움은 줄 수 있어요. 실은 종일 전 공자를 기다리며 이런저런 구상을 해두었어요.”
“…….”
“제발.”
“……알겠소.”
“고마워요. 그럼 일단 그날의 일부터 듣고 싶어요. 아버지께 들은 걸로는 뭔가 부족해요. 힘들겠지만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상세히 알려줬으면 해요.”
나는 마왕이 쳐들어온 순간부터 그가 떠날 때까지의 상황을 기억이 닿는 한 자세하게 설명했다. 한우경과 이모에게 벌어진 참사를 묘사할 때는 심장이 아렸다. 하지만 나는 고통을 내색하지 않고 담담하게 회상을 이어갔다.
질문을 자제하고 끝까지 경청한 진소월이 내가 진술을 마치자 아미를 찡그렸다. 그러더니 뜬금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별 일 없어야 할 텐데.”
나는 직감적으로 그녀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았다. 그래서 직설적으로 물었다.
“노인장에게 변고가 생겼을 것 같소?”
“글쎄요. 곧 알게 되겠죠. 광객 어르신은 늦어도 내일 오전까지는 돌아오실 거예요.”
“그러지 말고 말해보오. 그날의 일이 대체 정맹에 간 노인장과는 무슨 연관이 있다는 거요?”
“…….”
내가 거듭 독촉할 태세이자 침묵하던 진소월이 입을 열었다.
“마왕은 사후에 마뇌에게 전 공자의 명줄을 붙여놓았다는 걸 말해주었을 거예요. 마뇌는 당황했을 테고요. 아무리 철저히 싹을 밟았다고 해도 뿌리를 뽑아 후환을 완전히 제거한 것은 아니니까요. 그래서 즉시 후속조치를 취했을 듯싶어요. 괴선과 광객 어르신이 운신불능 상태임을 몰랐을 테니 팔마의 절반 이상을 비처에 파견하지 않았을까요?”
그 정도는 나도 예측했던 바였다. 그래서 서둘러 피신하지 않았던가.
“비처에서 허탕을 친 마뇌의 다음 수는 무엇이었을까요?”
“계속 나를 찾았을 테지.”
“그래요. 하지만 마련의 정보망만이 아니라 다른 세력의 힘도 빌렸을 거예요.”
“사벌 말이오?”
“그들은 당연하고요.”
“그가 정맹을 끌어들였단 말이오? 하지만 작년 십일월의 재판 이후 현가는 나를……, 아!”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나는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키웠다.
“이모! 이모였어.”
진소월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요. 마왕에게서 비처에 엄청난 무력을 지닌 독인이 있었다는 얘길 들은 마뇌는 그 사실을 사벌과 정맹의 수뇌부들에게 전했을 거예요. 정맹을 실질적으로 관장하는 원로원은 그 문제를 가볍게 취급하지 않았을 거고요. 아마 전 공자를 정파 무림의 원수였던 독곡의 앞잡이로 규정하고는 공적으로 공표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렇다고 해도 노인장에게 위해를 가했을 거라고 보는 건 억측이 아닐까 싶소만. 단지 내 친인이라는 이유로…….”
“나는 그렇게 말한 적 없어요.”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잖소? 어제 광객 어르신을 보내며 보안을 그토록 강조한 것도 그 때문이잖소?”
“전 공자 말마따나 억측일 뿐이에요.”
나는 진소월이 이 화제를 마무리 짓도록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정맹이 설령 노인장을 나와 한통속으로 묶었다고 해도 기껏해야 거기 붙잡아두는 정도지 노인장의 몸에 손을 대지는 않았을 거요. 노인장은 오대세가의 원로들과 친분이 상당하잖소?”
“…….”
진소월이 입술을 깨물었다. 불길한 징조였다.
“행적을 따지면 강호육기 중 괴선과 광객 두 어르신만이 정파의 인사로 분류될 수 있어요. 하지만 역설적으로 정파, 특히 오대세가의 명숙들은 두 어르신을 가장 못마땅하게 여겨요. 광객 어르신은 광양 성가와 구원이 있으니 말할 것도 없고 괴선 어르신의 경우도 오대세가와 관련된 시비에 끼어들 때마다 그들이 아닌 상대의 편을 들었으니까요. 두 어르신은 그들에게 이를 테면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어요. 하지만 두 분을 손보려면 자신들도 상당한 피해를 감수해야 하니 억지로 참은 것뿐이에요.”
“그 조건이 달라진 것은 아니잖소?”
“그렇지 않아요. 명분이 생겼으니 합세해서 괴선 어르신을 제압했을 공산이 커요. 그들과 사투를 벌일 수는 없었을 테니 어르신은 죽기 살기로 저항하지는 않으셨을 거고요.”
“그렇더라도 억류 이상의 처벌을 내렸을 것 같지는 않소만.”
“보통의 상황이라면 그랬겠죠.”
“무슨 말이오?”
“그들은 괴선 어르신에게 전 공자의 은신처를 추궁했을 거예요. 어르신은 거부했을 테고요.”
나는 더 듣기가 괴로웠다. 내 심정을 헤아린 진소월이 뒷말을 아꼈다.
“지금으로서는 추측에 지나지 않으니 광객 어르신이 돌아오신 다음에 다시 얘기해요. 그때까지 내가 구상한 방책들을 의논했으면 해요. 실현되기만 하면 우리는 절대열세에서 벗어나 적들과 대등한 전력을…….”
나는 진소월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괴선을 적진이나 다름없는 정맹에 보낸 내 경솔한 처사에 대한 분노와 그의 안위에 대한 걱정으로 속이 타들어갔다.
* * *
진소월의 당부로 밤에만 이동한 탓에 광객은 다음날 해 뜰 무렵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꼬박 이틀 밤을 새웠지만 진소월은 피로를 내색하지 않고 나와 함께 광객이 들고 온 정보를 들었다.
유감스럽게도 진소월의 예측은 어김없이 적중되었다. 정맹은 공공연하게 나를 독왕의 후인으로 규정하며 나에게 협조하는 자들은 이유 여하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엄벌에 처할 것임을 선포했다. 이로써 나는 정사마(正邪魔) 모두의 공적이 되었다.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그들의 공조는 시늉이 아니었다. 사벌은 전원과 안평 등지에 대규모 조사단을 파견하여 대대적인 색출작업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무려 이만여 명이나 희생되었다. 진청운이 주도하는 해원사와 조금만 연관이 있으면 사돈의 팔촌까지 잡아다 족치고 그 과정에서 아무 상관도 없는 무고한 이들을 마구잡이로 죽인 모양이었다. 성주 무림은 명목상으로는 중립지대에 속하나 사실 상 정파 무림의 관할권에 든 지역이기에 사벌의 그러한 만행은 정맹의 묵인 하에 이루어진 거라고 보아야 했다.
나는 진청운에게 고개를 들 면목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소식을 듣고도 나를 비난하지 않고 침통한 표정을 지었을 뿐이었다.
광객은 괴선에 관해서는 알아온 바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진소월의 추측이 틀리지 않을 것임을, 그의 신변에 이상이 발생했을 것임을 알았다. 시급히 정맹으로 출발해야한다는 뜻이었다.
* * *
어둠이 내린지 오래였다.
그러나 천하제일도(天下第一都) 원중은 갈수록 더 밝아졌다. 산등성이에 서서 불야성을 이루어가는 광대한 도시를 내려다보며 나는 상념에 잠겼다. 작년 십일월 보름 바로 이 자리에서 괴선과 함께 지금과 똑같은 광경을 감상했던 기억이 떠올라서였다.
삼천오백 리를 쉬지 않고 날아왔지만 나는 육신의 피곤함을 느낄 수가 없었다. 무한대의 원력을 가져서가 아니라 심중을 채운 불안함 때문이었다.
진소월은 조심스럽게 괴선이 고문을 당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보다 두려운 건 그가 선력을 상실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혈도를 점하는 정도로는 안심할 수 없는 초절정 극상의 고수이기에 정맹은 아예 그의 무력을 박탈해 우환거리를 원천제거하려 들었을 수도 있었다. 어차피 나와 한 데 묶어 이참에 제거할 작정이었을 테니 그런 짓을 하는데 거리낌이 없었을 터였다.
괴선이 선력을 잃은 상태라면 그를 구출함에 있어 극도의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아주 작은 충격도 평범한 노인이 된 그에게 치명적인 여파를 미칠 터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정맹 무인들과의 충돌은 절대적으로 피해야 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럴 수 있을는지는 의문이었다. 내가 괴선을 데려가도록 그들이 수수방관하고 있을 리 만무했다.
나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조건만 있는 건 아니었다.
진소월은 괴선을 가둔 곳의 경계가 삼엄하지 않으리라 예상했다. 마뇌가 정맹과 사벌의 수뇌부에게 내가 회복불능의 중상을 입었음을 알려주었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사벌의 고수들이 성주 무림에 들어와 마음 놓고 설쳤던 것이 그러한 판단의 주된 근거였다.
괴선이 갇힌 장소를 특정할 수 있다는 점도 내겐 호재였다. 정맹은 정파문파들의 연합체답게 형식과 관례를 중시하는 조직이었다. 괴선 건은 집법전에서 다루었을 터였고 그의 비중을 감안하면 문초 후 옥형전에 집어넣었을 가능성이 십 할에 가까웠다.
굳이 진소월의 지식을 빌릴 것도 없이 나는 옥형전의 위치와 구조를 알고 있었다. 그 삼층 전각은 전날 정맹에 갔을 때 미래의 정파제일검으로 불리는 백운영과 담소를 나누었던 곳이었다.
백운영을 생각하자 착잡했다. 그는 내게 일종의 은인이었다. 그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호천봉에서 무왕을 만나지 못했을 터였고 그 만남이 없었더라면 나는 오랫동안 미로 속을 헤매야 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진소월은 그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철저하게 계산적인 성격 상 내가 이용가치가 없어졌다고 여기고는 나에게 편의를 봐준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라도 괴선에게 거칠게 굴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었다. 백운영에게 남다른 호감을 품고 있었기에 나는 진소월이 잘못 짚었기를 빌었다.
밤이 깊어지자 나는 산을 내려갔다.
야심한 시각이었으나 원중의 거리는 인파로 넘쳐흘렀고 장터처럼 시끌벅적했다. 당당하게 대로를 활보하며 나아갔던 작년과 달리 나는 으슥한 곳으로만 이동했다. 사방을 살피며 움직였기에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았을 터이지만 혹시 누군가 나를 보았다면 곰이 지나간 것으로 착각했을 터였다.
진소월이 알려준 경로를 따라 은밀하게 전진한 나는 정맹을 둘러싼 스물여덟 개의 문들 중 동북소문(東北小門) 근처에 이르렀다. 동북소문 좌우는 벽이 아니라 대숲이었다. 촘촘하게 늘어선 청죽 사이로 스며든 나는 정맹 경내로 들어섰다. 때마침 자시(子時)를 알리는 종이 길게 울려 퍼졌다.
종소리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나는 백호단의 무인들이 연무장으로 쓴다는 대웅광장에 이르렀다. 수백 년 수령의 소나무가 늘어선 광장의 우측 가장자리를 쏜살 같이 통과한 나는 일차 목표지였던 집보각(執報閣) 후원의 화원에 당도했다.
꽃밭에서 나는 숨을 골랐다. 집보각에서 집법전까지의 거리는 팔십여 장에 불과했다. 그러나 도처에 경비무사들이 배치되어 있고 처처에 순찰대가 돌아다녔기에 신중하게 움직여야 했다. 직진은 불가능했고 세 번의 우회가 불가피했다. 하지만 그나마 이 방면의 경계가 가장 허술했다.
한식경 이상 유령 노릇을 한 끝에 나는 겨우 집법전의 북쪽 담장에 붙었다. 안쪽의 인기척을 살핀 나는 구렁이처럼 벽을 타고 넘었다. 담벼락 너머는 진소월이 일러준 대로 내 허리 높이의 관목 띠였다. 나는 바닥을 기었다. 그러고는 단층 석조 건물로 옮겨갔다. 전날 내가 재판을 받았던 장소였다.
이곳을 고른 건 집법전 내의 다른 전각들과 동떨어져 있어서였다. 입구에는 경비무사도 없었다. 기감을 끌어올린 나는 건물 내부에 두 사람이 있음을 알았다. 진소월이 얘기한 대로 평소엔 비어있고 최소한의 인원만 관리 차 두는 모양이었다. 나는 건물로 잠입했다. 그러고는 각자 다른 방에 들어있던 자들을 차례로 제압했다. 한 명은 그대로 수혈을 짚어 잠재우고 둘 중 상급자로 보이는 중년의 문사를 취조용으로 삼기로 했다. 내 정체를 알아본 문사의 낯빛이 사색이 되었다. 나는 그에게 전음을 날렸다.
‘묻는 말에 정직하게 답하면 살려주겠다.’
아혈을 봉했지만 마혈을 찍지는 않았기에 문사는 동작으로 응답할 수 있었다.
‘괴선이 옥형전에 있나?’
문사는 일고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다음 질문을 이었다.
‘지하에 있을 테지?’
끄덕끄덕.
‘몇 층이냐?’
문사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기운을 일으켜 그를 압박했다. 내 압기에 내장이 터질 지경이 되었음에도 문사는 필사적으로 도리질을 계속했다. 나는 그의 수혈을 짚었다. 그러고는 석조건물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