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92
제91화 너무 나가는 거 아니오?
새파랗게 어린 강호 후배로부터 반말을 들은 충격과 분노를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백염노인이 물었다.
“친구라 함은?”
나는 인상을 쓰며 반문했다.
“몰라서 물어?”
백염노인이 면상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노기의 발로가 아니라 당황한 것이었다. 코가 찌부러진 중년 무인이 백염노인에게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전음을 보내지 않은 건 나를 의식했기 때문일 터였다. 초절정 극상 이상의 무인들에겐 전음이 무용지물이었다.
중년 무인에게서 보고를 받은 백염노인이 확인에 나섰다.
“혹시 그 친구란 이가 전원 소월루의 집사를 말하는 게요?”
“맞아. 여기 있다는 걸 알고 왔으니까 발뺌할 생각하지 마.”
내가 구출하러 온 이는 진청운의 오른팔이자 나와도 약간의 친분이 있는 조봉이었다. 나현에 따르면 현가에 잡혀 온 그는 모진 고문에도 불구하고 진청운이 자금을 보관한 비처를 실토하지 않았다고 했다.
현가는 조봉을 죽이지 않고 진청운을 낚을 미끼로 삼았다. 흑문의 모든 분타에 조봉을 살리려면 보성으로 오라는 전언을 보낸 것이었다. 유치한 수작이었으나 실제로 그 전언을 받았다면 진청운은 죽음을 무릅쓰고 보성으로 달려갔을 터였다.
사흘 전 진포 흑문에서 정보를 가져온 광객이 그 전언을 빠뜨린 것은 진청운의 안위를 고려해서가 아니었다. 정체의 노출을 꺼려 일반적인 강호 사정만 알아본 탓에 흑문의 첩인이 그에게 진청운과 관련된 정보를 주지 않았던 것이었다.
나현에게서 조봉의 처지에 대해 들었을 때 나는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나 때문에 친인들과 그들의 구족까지 몰살된 진청운을 위해서라도 그의 오랜 충복이자 동지인 조봉을 구해야 했다.
백염노인은 내 의도를 곡해했음에 틀림없었다. 내가 하잘것없는 자를 빌미삼아 본격적으로 시비를 걸어올 참이라고 여기는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그가 오판을 바탕으로 실수를 범하기 전에 방문목적을 다시 한 번 밝혔다.
“내 친구를 데려와. 시간 끌지 말고. 나, 바쁜 사람이야.”
“그를 내주면, 그냥 떠날 테요?”
“당연하지. 그러려고 왔는데.”
백염노인이 노골적으로 반색했다. 그러나 그의 지시를 받은 중년 무인은 난감해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짐짓 투기(鬪氣)를 일으키며 윽박질렀다.
“지금 뭐하는 거야? 설마 그를 죽인 건 아니겠지?”
삐뚤 코 중년인이 사색이 되었다.
“아, 아닙니다. 그는 살아있습니다.”
“그럼 당장 데려와!”
중년 무인이 허둥지둥 어디론가 달려갔다. 그리고 반각 후 들것에 조봉을 싣고서 장내로 되돌아왔다.
나는 현가의 중년 무인이 금간 도자기 다루듯 살살 내려놓은 들것을 향해 걸어갔다.
내가 다가간 만큼 현가의 무인들이 물러섰다. 하여 오륙 장의 거리는 계속 유지되었다.
들것에 누운 조봉은 말쑥한 차림이었다. 경황 중에도 중년 무인이 급하게 몸을 닦고 새 옷을 입혔음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엉망진창이 된 얼굴만은 가릴 수가 없었다.
나는 들것 앞에 쪼그려 앉았다.
“내가 보입니까?”
퉁퉁 부은 눈 속에서 빛이 반짝였다. 그러더니 찢어진 입술에서 미약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마웅……. 여긴 어떻게……?”
조봉은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들것을 타고 오면서 현가의 고수들이 운집한 모습을 보았을 터이고 그들이 전전긍긍하는 분위기도 감지했을 것이었다.
“데리러 왔습니다.”
조봉의 질문에 답하며 나는 그의 몸을 살폈다. 전신에 고문의 흔적이 가득했다. 내가 고개를 들어 쳐다보자 코가 삐뚤어진 중년 무인이 황급히 내 시선을 피했다.
나는 조봉을 내버려두고 몸을 일으켰다. 그를 안고 가는 건 무리였다. 척추가 상해 두고두고 후유증에 시달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절곡에서는 그를 치료할 방도도 없었다.
“잘 들어. 친구를 여기 두고 가겠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책임지고 이이를 회복시켜라. 만약 이이가 그때까지도 건강을 되찾지 못한다면 대가를 치러야 할 거다.”
일이 이 정도로 끝나서 다행으로 여겼는지 바짝 굳어있던 백염노인의 안면이 풀렸다.
“반드시 고쳐주겠소. 그런데 언제쯤 다시 본가를 방문할 것인지 알 수 있겠소?”
“왜? 함정이라도 파고 기다리게?”
“그렇지 않소. 우리는 귀하와 충돌할 생각이 없소.”
“그래? 작년 가을 집법전에 압력을 넣어 유죄를 사전에 확정한 가소로운 재판에 나를 회부한 건 뭐야? 몇 달 전엔 나를 독인으로 몰고는 공적으로 선포해야 한다고 앞장서서 설쳤다며?”
“그, 그건…….”
“신필주, 그 늙은이를 죽인 건 정당방위였어. 재판에서 내가 했던 얘기는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었다고. 그럼에도 나는 나를 잡아먹으려 안달이었던 너희를 내버려두었어. 괴선 노인네가 귀가 따가울 정도로 잔소리를 한 데다, 너희 입장을 어느 정도 이해했기 때문이야. 하지만 더는 안 돼. 다시 나한테 이빨을 드러내거나 내 친인들을 건드리면 너희의 씨를 말려버릴 테다.”
자존심과 우월의식으로 똘똘 뭉친 집단이었지만 아무도 내 경고와 협박에 반발하지 못했다. 흠, 이 맛에 강자가 되려고 모두들 아등바등하는 게 아니겠는가.
나는 다시 자세를 낮춰 조봉을 가까이서 바라보았다.
“미안합니다. 내 거처 주위엔 변변한 의원이 없어서. 다소 불편하더라도 당분간 여기서 지내십시오. 혹시 저들이 조 집사를 소홀히 대하면 다 기억해두었다가 나중에 알려주세요. 혼찌검을 내줄 테니까.”
조봉은 응답이 없었다. 그러더니 횡설수설했다.
“참으로 이상한 꿈이구려. 헌데 어째서 이리도 생생한지 모르겠소. 뼈마디가 쑤시는 걸 보니 생시 같기도 한데, 어떻게 이런 일이…….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아아, 헛것이 보이고 환청이 들리니 이제 갈 때가 되었나 보오. 형님께 내가 끝까지 신의를 저버리지 않았다고…….”
나는 조봉의 손을 잡았다.
“꿈이 아닙니다. 진 루주님께는 잊지 않고 조 집사의 충정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아무 걱정 말고 데리러 오는 날까지 마음 편히 지내십시오.”
조봉이 들것 위에서 들썩거렸다.
“정말 이게 현실이란 말이오? 아아, 어찌 이런 일이. 어찌 이런 일이…….”
조봉의 혼잣말은 현가 무인들의 황망한 심사를 대변하고 있었다.
* * *
나는 절곡으로 돌아왔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강태수가 나를 보고는 부리나케 달려왔다.
“소주가 기다리고 있어요, 전 공자. 어서 들어가 보세요.”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가 서천에 걸려있었다. 진소월은 진종일 눈을 붙이지 않고 나를 기다린 것이었다.
“다들 어디 갔소?”
“숲 어귀에 갔어요. 괴선 어르신을 위한 집을 만든다고.”
나도 가보고 싶었으나 일단 진소월을 만나기로 했다. 보성에 들르느라 예정보다 늦은 탓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터였다.
동굴에 들어가 모퉁이를 두 번 꺾으니 호롱불이 아른거렸다. 불빛을 받은 진소월의 뺨이 발그레했다. 하지만 그녀의 분홍빛 입술에서 빠져나온 음성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어떻게 됐나요?”
“그럭저럭 잘 됐소.”
“그런데 왜 이렇게 늦은 거죠?”
“예정에 없던 일이 생겨 처리하고 오느라 그랬소.”
“무슨 일인데요?”
나는 진소월이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고는 대답을 주는 대신 질문을 던졌다.
“왜 이리 화가 났소?”
“몰라서 묻는 건가요?”
어찌 모르겠는가. 절곡 안에서는 바깥소식을 알 길이 없었다. 그러니 머릿속에 온갖 그림이 떠올랐을 터였다. 시진 단위로 내 일정을 계산했을 그녀는 돌아오기로 한 시간이 지나면서부터는 안절부절못했을 것이었다. 아니, 그 이전에도 내 안위를 염려하며 노심초사했을 게 뻔했다.
“말리지 않은 걸 얼마나 후회했는지 몰라요. 괴선 어르신을 구출하러 가는 것은 시급한 일이었지만 사사문과 검마류를 치는 건 그렇지 않았잖아요. 좀 더 준비가 된 후에, 전 공자가 좀 더 강해진 후에 실행했어도 될 일이었어요. 사사문도 걱정거리였지만 진짜 마음에 걸린 건 검마류였어요.”
나는 뜨끔했다. 설마 알고 있었단 말인가.
“전날 비처에서 마왕의 마기에 침탈되지 않았나요? 그래서 그를 떠올리기만 해도 등골이 오싹하고 식은땀이 나지 않았나요? 마기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정면으로 부딪칠 작정이었죠? 전 공자의 무모한 도전에 간을 졸일 여자 따윈 신경도 쓰지 않았죠?”
“꼭 그런 건 아니오. 헌데 알고 있었다면 왜 나를 말리지 않았소?”
“말린다고 들을 사람이었으면 백 번 천 번 그랬을 거예요. 내가 아무리 말렸어도 전 공자는 기어이 뜻대로 했을 거라고요. 아닌가요?”
부인할 수가 없었기에 나는 잠자코 있었다.
“전 공자가 나갈 때마다 물가에 아이를 내놓은 어미가 된 심정이에요. 무사히 돌아온 걸 볼 때까지는 먹지도 자지도 못한다고요. 마치 또 다른 천형을 받은 것 같아요.”
나는 그러지 말라는 말을 목구멍에 가두었다. 무책임한 소리임을 자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녀인들 그러고 싶어서 그러겠는가.
그래서 나는 다른 처방을 내렸다.
“미안하오, 소월. 앞으로는…….”
기대대로 진소월이 냉큼 내 말을 낚아챘다.
“방금 뭐라고 했나요?”
“뭐 말이오? 앞으로는 심려를 끼치지 않도록 최대한…….”
“아니 그것 말고요. 그 앞에.”
“미안하다고 했잖소?”
“그 뒤에요.”
“또 반복해야 하오? 앞으로는…….”
내가 계속 시치미를 떼자 진소월이 눈을 흘겼다.
“그만 놀려요. 내 이름을 불렀잖아요.”
“어? 내가 그랬소?”
“장난 그만 쳐요. 일부러 그런 거 다 알아요. 화제를 바꾸려고. 내 주의를 딴 데로 끌려고. 어쨌거나 축하해요. 성공했으니.”
“고맙구려.”
진소월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난번 검총에 왔을 때도 나를 이름으로 불렀죠? 왜 그랬나요?”
나는 솔직히 대답했다.
“진 소저를 기쁘게 해주려고 그랬던 것 같소.”
“그렇게 부르지 말아요.”
“…….”
“그럼 좀 전엔 왜 이름을 불렀죠?”
“그야 진 소저 말마따나 화제를 바꾸려…….”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요.”
“그럼 뭐라고…….”
“소월이라고 불러줘요.”
“…….”
“한 번 불러 봐요.”
“…….”
“어서요!”
“……소월.”
“왜요, 전 가가?”
“…….”
“왜 불렀느냐고 묻잖아요, 전 가가?”
“…….”
“듣기 싫은가요? 하지만 나는 진즉 이렇게 부르고 싶었어요. 그래도 되죠?”
어떻게 안 된다고 하겠는가? 그렇더라도 답을 주지 않았는데 진소월은 제멋대로 허락을 받은 걸로 간주했다.
“좋아요. 지금부터 전 가가는 나를 소월이라고, 나는 전 가가를 전 가가라고 부르기로 해요. 호칭을 바꾼 기념으로 우리 입맞춤이라도 할까요?”
나는 거침없이 밀고 들어오는 진소월에게 제동을 걸었다.
“너무 나가는 거 아니오? 이제 보니 처음부터 이걸 노리고 화가 난 척…….”
“사내대장부가 그렇게 의심이 많으면 못 써요. 어쨌든 이미 결정되었으니 도로 물릴 순 없어요.”
나는 자충수를 두었음을 알았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자, 그럼 이제 세상을 뒤집어놓았을 전 가가의 영웅담을 들어볼까요? 그 전에 입부터 맞추면 좋으련만. 그 이상도 대환영이고요.”
진소월의 야릇한 눈빛에 반응해 하초가 묵직해지자 당황한 나는 급히 무상심공을 운용했다.
* * *
손발의 힘줄이 잘린 괴선은 걷지도 못할뿐더러 기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편안히 누워서 먹고 자고 싸기만 하면 되니 이보다 호사스러운 삶은 없다며 능청을 부렸다. 나와도 예전처럼 티격태격하며 지냈다.
괴선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굴었고 실제로도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거기에서 긍정적인 면을 찾는 듯 했으나 나는 그를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그래서 그가 지명했던 두 사람을 잡아오는 일을 최우선과제로 설정했다. 그들에게 보복한다고 괴선이 정상으로 돌아오지는 않겠지만 최소한의 위로를 줄 수는 있을 터였다.
절곡으로 돌아온 지 사흘 후 나는 정서(正西) 방면으로 칠백 리가량 떨어진 칠주봉으로 갔다. 나현에게 받은 피리를 불자 천공을 휘돌던 매가 내 팔뚝에 내려앉았다. 매의 발목엔 불에 타지도 않고 물에 젖지도 않는 특수지가 매달려있었다. 종이를 펴보니 깨알 같은 글씨가 가득했다.
나는 며칠 전의 내 행사로 인해 벌어진 강호의 충격과 대혼란을 설명한 부분을 건너뛰고 뒷내용부터 확인했다. 내가 조사해달라고 부탁했던 두 사람의 소재와 동향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나는 둘 중 상대적으로 쉬운 자를 먼저 잡기로 했다. 진소월과는 이미 상의를 해두었기에 절곡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바로 그자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