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95
제94화 나 같은 절대고수의 기감을 속이다니
경내에 혼자 남은 나는 그대로 궁구에 들고 싶은 욕구를 간신히 억눌렀다.
사방에 이는 아우성은 균천전에서의 참패가 삼절문에 운집해있던 사파 무인들에게 전해졌고 그들이 조금 전 도주했던 자들을 따라 달아나고 있음을 알려주었지만 어쨌든 여기는 적진이었다. 어디에나 호기심 왕성한 골통들이 있는 법이었다. 무아지경에 빠진 채 묵상에 잠겨 있다가 혹시나 하고 현장을 보러온 자에게 칼을 맞으면 비명횡사를 면치 못할 터였다. 나는 만년한철보다 단단한 갑피를 두른 철마가 아니었다.
마비가 풀리자 바로 치유에 들어갔다. 어깨와 두부와 다리의 부상은 꽤 중했으나 반각도 지나지 않아 운신이 가능해졌다. 무리를 하면 경신도 펼칠 수 있었지만 서두를 까닭이 없었기에 나는 걸어서 삼절문을 빠져나갔다. 그 많던 무인들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삼절문이 텅 빈 것은 아니었다. 도처에서 불안정한 숨소리가 잡혔다. 간혹 창가에 붙어서 나를 훔쳐보는 간덩이들도 있었다. 그러다 내가 그리로 고개를 돌리면 헛바람 들이켜는 소리와 함께 허둥지둥 창에서 떨어지는 인기척이 났다. 아무리 대담해도 내 시선을 받아낼 용기는 없는 모양이었다.
삼절문을 나올 즈음 나는 신형을 날렸다. 경공을 전개하며 바라보니 평화롭던 봉평은 아수라장으로 변해 있었다. 도망친 놈들이 다음과 같은 헛소문을 퍼뜨린 탓이었다.
첫째, 마웅이 쳐들어왔다.
둘째, 마웅을 물리치는 데 실패했다.
셋째, 마웅은 삼절문에서 무자비한 학살을 저질렀다.
넷째, 마웅의 학살은 봉평으로 이어지고 있다.
앞의 두 개는 사실이었지만 뒤의 두 개는 날조였다. 나는 저자로 떨어져내려 사실관계를 바로잡으려다 참았다. 나를 본 봉평의 민초들이 가만히 서서 내 말에 귀를 기울이겠는가. 그런 연후 고개를 끄덕이며 진상을 알았음을 알리겠는가. 내 등장은 불난 데 기름을 끼얹는 꼴이 될 게 뻔했다. 아수라장은 아비규환의 지옥도로 바뀔 것이었다.
나는 억지로 천공으로 치솟았다. 구태여 봉평을 공포의 도가니로 만들 까닭이 없어서였다. 그러면서 의아했다. 내가 이렇게나 배려심이 깊은 위인이었던가.
* * *
봉평에서 남으로 사오십 리가량 떨어진 이름 모를 험산의 협곡에서 운공에 든 후 눈을 떠보니 어느새 해가 중천에 떠있었다. 몸이 팔 할 이상 회복되었지만 나는 바로 출발하지 않고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삼절문의 결전에서 수확한 성과를 음미했다.
차분히 즐길 생각이었으나 절로 흥분이 일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터져 나온 신수는 내 무학과 경험의 집대성이자 그를 바탕으로 한 도약이었다. 그것은 뇌전십이검과 구환도법의 요체를 담고 있으면서도 그들과는 다른 차원의 무리(武理)를 현시했고 한우경의 검공과 무왕의 춤사위에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독자적인 절기임을 자부할 수 있는 나만의 비학이었다.
나는 뇌리에 마왕을 소환했다. 대번에 심중을 장악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를 직시했다. 마왕의 입가에 조소가 걸렸다. 나는 그에게 신수를 날렸다. 마왕에게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러나 내 신수는 그의 안면을 쪼개지 못했다. 역으로 그의 사슬이 내 심장을 뚫었다. 완벽한 패배.
나는 다시 도전했다. 이번엔 십여 장을 떨어져 원거리 공격을 시도했다. 양상은 달랐으되 결과는 동일했다. 나는 그에게 별다른 타격을 입히지 못했고 그는 나를 즉살했다.
다음번엔 내 특장기인 신법을 최대한 활용해 치고 빠지는 수법을 구사했다. 조금 나아졌다. 나는 삼초를 버텼다. 그러나 내 신수는 그에게 생채기를 내는 수준에 그쳤다.
나는 끊임없이 죽었고 끊임없이 덤볐다. 삼백 번 이상의 사망 끝에 도달한 결론은 아직 멀었다는 것이었다. 절망적인 결론이냐고? 천만에. 그 반대였다. 수백 번 부딪치고 깨지는 동안 나는 그와 내가 같은 전장에 있음을 확인했다. 아직은 내가 절대열세이나 역전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봉우리에서 뛰어올라 막막했던 허공에 작으나마 내 자리를 마련한 나는 비로소 천공에서 자신들의 영역을 구축한 초인들과 승부를 논할 자격을 얻었다. 지금은 그들이 위에 있지만 머지않아 나는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것이고 종래엔 그들을 발아래 둘 것이었다.
삼초지적에 불과한 주제에 설레발치지 말라고? 좀 전에 내 신수가 마왕에게 생채기를 냈을 뿐이라고 했지만 그건 그가 전력으로 나를 상대했을 시를 가정한 말이었다. 비처에서 그랬던 것처럼 방심한 상태였다면 마왕은 내 신수에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었다. 그러니 나와 내 신수를 폄하하지 마시라들.
* * *
상상 생사투를 마치고 나니 사위는 어둠에 잠겨있었다.
마왕에게 난도질당한 심혼을 달랜 나는 남동 방면으로 몸을 날렸다. 절곡에 가기 전에 우한에 들를 작정이었다.
새벽별이 뜰 무렵 우한에 당도한 나는 저자로 들어가지 않고 전날 이용했던 비로의 출구로 갔다. 만물이 잠들어있을 시간이었지만 중립지대 최대의 향락 도시인 우한에겐 가장 활기가 넘치는 때였다. 아무리 높게 비행한다고 해도 나현의 장원으로 내려가는 동안 도처에 깔린 정보조직의 촉수에 걸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양의 창자처럼 구불구불한 통로를 빛살의 속도로 내달은 나는 지하석실에 이르러 내 방문을 알리는 종을 울렸다. 그러고는 계단을 올라가니 대조적인 몸집의 남녀가 나를 맞았다. 비대한 나현이 허리를 접으며 예를 표했다.
“어서 오시오, 마웅. 아니, 이젠 전왕(戰王)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구려.”
나는 어리둥절했다.
“무슨 말씀입니까?”
“허어, 사흘 전 삼절문에서…….”
나는 나현의 말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잠깐, 사흘 전이라뇨? 어제가 아니고요?”
나현이 이상하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 나는 솔직히 말했다.
“실은 오는 길에 잠시 묵상에 들었는데 시간이 그렇게 경과한지 몰랐습니다.”
“아! 그랬구려.”
“그런데 삼절문 소식을 담은 전서응을 칠주봉에 보내셨는지요?”
“물론이오.”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내게서 전서응을 부르는 피리를 받은 광객이 칠주봉에서 가져다 준 첩지는 진소월을 안심시켰을 것이었다. 나는 원래의 화제로 돌아왔다.
“잘 하셨습니다. 그나저나 제게 새로운 별호가 생긴 모양이군요?”
“그렇소. 아직 강호 일각에서만 떠도는 정도이나 며칠이면 온 대륙에 퍼질 거라 장담할 수 있소. 칠사의 셋을 일수에 참살하는 신위를 현시했으니 그대에게 왕의 호칭을 부여하는 데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거외다.”
옆에서 경외감을 담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던 혈접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내 새 별호를 읊조려보았다. 전왕. 전왕이라. 입에 착 감겼다. 마음에 들었다. 내 최종 목표인 무황보다는 못했지만 마웅보다는 일만 배쯤 나았다.
“자, 안으로 들어갑시다. 그대에게 보고할 내용이 많소.”
나는 나현을 따라 그의 침소로 들어갔다.
하나만 빼고 전날과 똑같았다.
대형의자 하나가 추가된 것이었다. 나를 위해 준비한 게 틀림없었다. 나현과 나는 솥뚜껑보다 작은 원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큼직한 사안들부터 말씀드리겠소. 우선, 사벌은 효성창문에 두었던 또 다른 삼사(三邪)를 부랴부랴 총단으로 불러들였소. 마련과 동일한 조치를 취한 게요. 삼사 만이 아니라 절정 급 이상의 고수들은 전부 총단에 집결했다고 하오. 그대 한 명으로 인해 마련에 이어 사벌의 영토도 거대한 무주공산으로 변해버린 게요.
참고로 마련과 사벌 간의 알력이 심상치 않소. 사벌은 마련이 그대의 상태에 관해 거짓 정보를 흘린 후 자기들을 이용해먹었다고 분개하고 있소. 지난 봄 자기들이 성주 무림에서 행한 양민학살에 대한 보복으로써 그대가 마련을 두고 자기들을 집중적으로 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오.”
희소식이었다. 마련과 사벌이 연수할 시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전력이나 그들이 갈라선다면 얼마든지 해볼 만 했다. 우리에겐 독왕이라는 절대패가 있었다. 함부로 쓰기엔 위험부담이 컸지만 결정적인 순간 엄청난 역할을 할 터였다.
혀를 내밀어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른 나현이 말을 이었다.
“다른 사안은 정맹의 동향에 관한 거외다. 그제 해가 뜨기도 전에 원로원이 소집되었다고 하오. 삼절문 사태가 전해지자마자 부리나케 모였던 게지요. 여섯 시진에 걸쳐 갑론을박을 벌인 끝에 그대에게 걸린 올가미를 벗기기로 결의했다고 하오. 그대는 더 이상 정파 무림의 공적이 아니외다.”
궁금했다. 나중에 내가 독왕과 긴밀한 관계임을 알게 되면 정맹은 어떻게 나올까. 체면불구하고 다시 공적으로 선포할까. 아니면 모른 척 넘어갈까.
“이건 여담이오만, 회의에서 그대를 독곡과 결부시킬 근거가 희박하다며 강력하게 삼월의 결정을 철회하자고 주장한 이들은 보성 현가와 주천 백가의 인사들이었소. 현가는 얼마 전 그대를 대면하고도 큰 불상사 없이 넘어가 그렇다 쳐도 백가의 태도는 납득하기 어렵구려. 금풍검과 관련된 그대의 행사가 온 천하에 알려졌는데 말이오.”
헛웃음이 났다. 두 세가는 시쳇말로 알아서 긴 것이었다. 삼절문에서 내가 과시한 무력에 겁을 집어먹고는 나와 대적할 의사가 없음을 그런 식으로 알리고자 했음에 틀림없었다.
나는 그들의 처신을 가소롭게 여기지는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무림은 철저한 강자존의 세계였다. 오대세가는 누구보다 그 생리를 잘 이해하고 이용해온 족속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수백 년 동안이나 생존하며 성세를 이어오지 못했을 터였다. 피아의 강약을 판별하는 예민함과 그에 따른 유연한 대응이야말로 그들의 진정으로 무서운 점일지도 몰랐다.
* * *
나현은 이레 전 첫 만남 때 내가 부탁했던 자료들을 내주었다.
관 크기의 궤짝에 특수지로 제작한 서류들이 가득했다. 그것은 진소월이 바라마지 않았던 고급정보의 보고였다. 진소월의 머리에 든 내용들은 방대하기 이를 데 없으나 흑문 분파 정보력의 한계로 인해 부족하거나 부실한 구석도 많았다. 사벌 본산의 구조나 인원배치 현황 등에 관해서는 까막눈이나 진배없었다. 조만간 사벌에 침투해야 할 나에겐 절대적으로 필요한 정보임에도.
진소월이 제안한 보안의 보완사항을 나현에게 전달한 나는 정오경에 그와 작별을 고하고 자미원을 떠났다.
삼천리가 넘는 장도였지만 나는 해가 떨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절곡에 당도했다.
진소월이 내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강태수의 말을 듣고는 동굴에 들어갔더니 그녀는 호롱불을 켜놓은 채 잠이 들어있었다. 출발한 날부터 따지면 꼬박 나흘하고도 반나절 동안 눈을 붙이지 않았을 터이니 곯아떨어진 것도 당연했다.
고개를 모로 돌린 채 호피에 엎드려 자는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러워 나도 모르게 그녀의 머리맡에 다가가 손을 뻗었다. 그러나 진소월의 뺨에 손가락 끝이 닿을락 말락 했을 때 도로 거두었다. 그 순간 진소월의 분홍빛 입술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러더니 불만을 쏟아냈다.
“왜 하다 말아요? 사내가 변변치 못하게. 일단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지. 만진다고 내 볼이 닳는 것도 아닌데.”
나는 탄복했다.
“대단하오. 나 같은 절대고수의 기감을 속이다니.”
“흥, 지금 그게 중요한가요?”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소? 제법 늘었다고 자부했는데 무공도 익히지 않은 여인의 호흡마저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다니, 자만이었나 보오. 안 되겠소. 이제부터 더욱 더 수련에 매진해 다시는 이런 굴욕을…….”
풋!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진소월이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히죽 웃었다. 그러고는 정식으로 재회인사를 건넸다.
“다녀왔소, 소월.”
내가 이름을 부르자 진소월의 만면에 기쁨의 미소가 번졌다. 그러나 그녀는 ‘전 가가’로 화답하지 못했다. 밖에서 이광의 다급한 음성이 날아들었기 때문이었다.
“어서 나와 보세요, 큰 형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