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98
제97화 웁
백성의 수로만 따지만 서경은 원중을 훌쩍 능가했다.
나현이 준 정보에 따르면 서경의 인구는 일백이십 만에 달했다.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숫자였다. 그러나 이는 자연적인 번영의 결과가 아니라 인위적인 정책의 산물이었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는 마천루도 원중과의 경쟁이 낳은 성과물이었다. 원체도 중원 서북부를 대표하는 거도(巨都)였으나 사벌이 들어선 이후 서경은 규모가 세 배 이상 커졌고 번화함도 배가되었다. 살을 찌우고 근육을 키워 체격 자체를 바꾸는 외공무사처럼 변모를 거듭한 결과였다.
사벌도 사정이 비슷했다. 일백만 평의 대지에 일만 명의 무인과 일천 개의 전각을 품은 정파 무림의 본산에 뒤지지 않으려 기를 쓴 탓에 모든 방면에서 정맹을 앞질렀다. 사벌의 면적은 일백이십만 평이었고 거느린 무인의 수는 일만 이천 명이었다. 그렇다면 전각은 얼마나 많을까. 정확히 일천이백 채였다.
진소월은 서경을 두고 지상 최대의 무덤이라고 했다. 수십 년 간 그 도시의 몸집을 불리기 위한 작업에 강제동원되었다가 죽어나간 이들이 수십만에 달하기 때문이었다. 마도가 지배하는 땅의 노예들보다는 낫지만 사벌의 통치 하에 든 민중의 삶도 곤궁하고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진청운이나 나현 같은 의인들이 내가 하루 빨리 사마의 무리를 멸하고 대륙 서편의 주인으로 우뚝 서길 바라는 이유였다.
* * *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만큼 화려 무쌍한 도시를 내려다보며 나는 내 사냥감에 대해 생각했다.
독의 성관은 여러 모로 기인이라는 호칭이 잘 어울리는 위인이었다. 젊은 날 천하제일미남자라 불리며 수많은 절세가인들의 구애를 받았으면서도 한 번도 여자와 관련된 추문에 휩싸인 적이 없었고 명문의 적통이자 후계자였음에도 보장된 미래를 박차고 나와 거친 광야를 떠돈 이단아였다.
마음만 먹으면 천하제일의 거부가 될 수 있었음에도 물욕(物慾)이 ‘개구리 코딱지’만큼도 없는 탓에 평생 거지로 떠돌았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목숨을 살렸으면서도 천하에서 가장 많은 욕을 들어먹는 모순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그의 이력에서 가장 특이한 점은 불세출의 무재를 타고났으면서도 무림이 아니라 잡인들의 영역으로 치부되는 의계(醫界)에 투신했다는 것이었다. 만약 그가 무인지로(武人之路)를 걸었다면 사왕(邪王)에 버금가는 무존(武尊)이 되었으리라 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무공 수련보다는 의학 연구에 훨씬 큰 공을 들이고도 초절정 극상의 고수가 되었으니 그들의 평에는 상당한 근거가 있었다.
성관은 사파칠문의 하나인 건곤문(乾坤門) 출신이었다.
건곤문의 전전대(前前代) 문주인 불패옹(不敗翁) 성만(成滿)이 늘그막에 얻은 독자였던 성관은 일찍이 특출한 무재를 드러내며 부친과 문파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그리고 그들의 기대에 십분 부응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소년 시절에 이미 건곤문의 중견 강호들에게 필적하는 무위에 오른 성관은 훗날 사파 무림의 제왕에 등극하게 될 사사문의 초신성 공우와 함께 천하쌍룡으로 불렸다. 대기만성의 대명사라 할 마왕 공손정과 오대세가의 후예들을 누르고 정파 무림의 제일기재로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될 무왕 견사휘가 등장하기 훨씬 이전에 중원과 새외를 아우르는 무명(武名)을 떨친 것이었다. 워낙 전대미문의 압도적인 성취를 과시했기에 그가 장차 천하제일인의 권좌를 놓고 공우와 자웅을 겨룰 거라는 데 아무도 이견이 없었다.
그러나 십오 세에 접어들 무렵 성관의 운명은 극적으로 바뀌었다. 별안간 의술에 관심을 가지더니 무공 수련을 등한시하고 의서를 탐닉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부친을 비롯한 문파의 어른들이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소용이 없었다. 원하는 공부를 막으면 무공을 아예 익히지 않겠다고 버티는 통에 건곤문의 원로들은 그의 기벽을 허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때의 광풍이기를 바랐던 그들의 소망은 일 년도 지나지 않아 무참히 깨졌다. 성관이 의학에 심취하다 못해 급기야 의계의 명가들을 찾아다니며 본격적으로 의원지로를 걸을 태세이자 건곤문은 초상집 분위기가 되었다.
부친인 성만이 동반자살까지 들먹이며 협박하고 눈물로 애원도 해보았으나 성관은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대라신선의 화신이 되겠다는 아들의 의지를 꺾지 못한 성관은 쓸쓸히 발길을 돌려야 했다. 불패옹이라는 그의 별호에 무색하게 완벽한 패배였다. 참고로 당대 최강을 다투던 혼세십삼군의 일원이었던 성만은 그 일 이후 홧병을 얻고는 급격히 무력이 쇠퇴했고 사상 최고를 구가하던 건곤문의 성세도 한 순간에 꺾여버렸다.
부친의 가슴에 못을 박고 그를 길러준 문파에도 심대한 누를 끼친 성관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제 갈 길을 갔다. 그러고는 무공만큼이나 의학에도 재능이 있었던지 의계에 든 지 십 년도 지나지 않아 천하의 내로라하는 명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명성을 얻었다.
성관은 특히 회춘 방면에 일가견이 있었다. 그가 골골한 촌로들을 팔팔한 청년처럼 만들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도처의 거부들이 그의 비방을 얻기 위해 앞 다투어 그를 초빙했다. 그러나 성관은 억만금을 보상으로 내건 그들의 요청에 일절 응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하잘것없는 이들에겐 한 푼의 대가도 받지 않고 젊음을 되돌려주었다.
이런 행보가 이어졌다면 성인(聖人)은 몰라도 덕인(德人)의 반열에는 오르고도 남았을 터이나 성관은 어느 날부터 기행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강호엔 괴의(怪醫)가 탄생했다.
* * *
구름이 끼긴 했지만 내가 바라는 정도의 암흑이 깔리지는 않았다.
날씨를 가늠한 나는 더 기다리지 않고 사벌에 잠입하기로 했다. 독의가 산책을 즐긴다는 시간에 잣나무 숲에 대기하고 있으려면 서둘러야 할 터였다.
도시에서 올라오는 빛 무리를 감안해 비행을 자제하고 저자로 들어간 나는 나현의 정보를 바탕으로 진소월이 짜준 경로로 나아갔다. 희한하게도 가는 내내 사람의 코빼기도 볼 수가 없었다. 일백만이 넘는 인간들이 득시글대는 곳에 이런 으슥한 공간들이 남아있을뿐더러 이어진다는 게 신기했다.
가끔 진소월이 주의하라고 했던 지역을 통과할 때는 주위에 인기척이 나기도 했다. 그럴 때는 최대한 신중하게 움직였다. 이미 정맹을 대상으로 두 번이나 동일한 성격의 침투작전을 수행한 바 있었기에 나는 능숙하고 수월하게 과제를 해치웠다. 이러다 긴장이 너무 풀어질까봐 걱정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사벌이 가까워지자 절로 긴장감이 일었다. 사사문과 삼절문에서 연이어 나에게 참패를 당한 탓에 사벌은 독이 바짝 올라 있을 터였다. 잘못 건드렸다간 화를 입을 터이니 조심해야 했다.
기실 내가 염려하는 건 단 하나였다.
다름 아닌 사왕이었다.
사벌엔 칠사 중 아직 생존한 삼사 전원이 들어있을 테지만 그들은 내게 위협이 되지 못했다. 삼절문에서 광환을 초현한 이후 불과 이십일 만에 나는 더 강해졌다. 공(空)이나 광환을 더 다듬었다거나 순간 가속의 연속 성공 횟수를 늘려서가 아니었다. 원력의 증가가 내 무력 증강의 이유였다.
독왕과의 비무 직후 운공에 들었을 때 나는 기이한 현상을 경험했다. 그 동안 다양한 시도에도 좀처럼 체화되지 않고 있던 이모의 원력이 골수에 녹아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보름 동안 운공을 할 때마다 내 원력은 유의미하게 불어났다. 무인으로 치면 일 갑자 이상의 공력이 갑자기 생긴 셈이었으니 기연이 아닐 수 없었다. 더욱이 이모의 원력은 아직도 절반 이상 남아있었다.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우려되는 점도 있었다. 독왕의 독무에 침습 당했을 때 그 동안 별 느낌이 없던 그의 피가 존재감을 드러낸 것이었다.
내 것보다 훨씬 진한 그의 독혈은 독무의 기운에 맹렬하게 반응했다. 운공 시 몇몇 요혈들이 침에 찔린 것처럼 따끔거릴 뿐 심각한 피해를 주는 건 아니었지만 내 제어를 따르지 않았기에 심히 불안했다. 혹시라도 비상 상황에서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일으킨다면 곤란해 질 터이기 때문이었다.
좀 더 시간을 두고 살펴보고 싶었지만 이제나저제나 하며 독의와의 대면을 기다리는 괴선을 위해 나는 불안요소를 안은 채 출전을 강행했다.
* * *
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졌다. 빗줄기가 굵어지더니 곧 장대비가 되었다. 내겐 호재였다.
나는 사벌의 남문 근처에 잠복해있었다. 넓이가 이십 장에 높이도 십이 장이나 되는 천하제일의 대문이었다. 기실 문이라고 부르기엔 지나치게 컸다. 이 또한 정맹의 상징 중 하나인 동대문을 의식해 만든 것이었다.
나는 남문의 양쪽에 붙어있는 여덟 개의 소문(小門)들 중 한 곳으로 들어갔다. 경비무사들이 교체하는 공백을 틈타 쏜살 같이 통과했기에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다.
첫 고비를 넘기니 그 다음은 의외로 쉬웠다. 소문 너머엔 사각지대들이 촘촘히 붙어있었다. 삼엄한 경계망이 깔려있었지만 오륙 장 정도를 찰나지간에 건너뛰는 것쯤은 내게 식은 죽 먹기였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도 도움을 주었다.
이 경로를 택한 건 침투가 용이해서가 아니었다. 독의의 처소인 비로전에서 가장 가깝기 때문이었다. 사벌에 들어선 지 일다경 만에 나는 고적한 잣나무 숲을 등에 진 사층 전각의 경내에 이르렀다.
매미처럼 나무에 붙은 나는 기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전각 안에 든 수십 명의 기운이 잡혔다. 그 중에 독의가 들어있을 터였다. 전각을 훑은 나는 탐지의 범위를 넓혔다. 전각 지붕이나 주변 어딘가에 은신해 있을지도 모를 비영(秘影)을 찾기 위해서였다.
비영은 신비한 인물이었다. 천하에서 가장 유명한 기인들을 묶은 중원육기의 일인이면서도 아무도 그의 내력이나 신상에 관해 알지 못했다. 이름이나 나이는 물론이고 심지어 성별조차 아는 이가 없었다. 몸매가 드러나지 않은 두터운 장포를 걸친 데다 복면을 쓰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삼복에도 늘 장갑을 끼고 있었기에 손으로 나이나 성별을 측정할 수도 없었다.
비영의 무위에 대해서도 말들이 많았다. 비무나 강자와의 대결 등을 통해 무력을 현시한 적이 없어서였다. 그럼에도 그, 혹은 그녀를 초절정 극상의 고수들로 이루어진 중원육기에 포함시킨 건 초절한 경공 때문이었다. 혹자는 경신에 관한 한 그이가 십왕에게도 뒤지지 않을 거라 주장하기도 했다. 그만큼 그이가 독의를 쫓아다니는 과정에서 예닐곱 차례 드러낸 경신공의 수준은 엄청난 것이었다.
방금 독의를 쫓아다닌다고 했는데 그 점도 비영의 수수께끼 중의 하나였다. 그이가 독의의 그림자 노릇을 하는 까닭을 두고 온갖 억측이 난무했다. 크게 두 가지 설이 지지를 받고 있었는데 하나는 (비영이 사내일 경우)남색의 기벽을 가진 그이가 독의에게 반해 집착한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독의가 그이의 지병을 치료해준 데 대한 보답으로 호위무사를 자처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어느 것도 본인에게 확인받지 못했기에 사실이라는 보장은 없었다.
진소월은 사왕에게 복면을 벗겨 정체를 들통날 것을 두려워한 비영이 사벌에 들어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했지만 그래도 십 할의 장담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탐색을 지속했다. 어차피 독의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거르는 법이 없다는 자시(子時) 산책을 나오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기에 달리 할 일도 없었다.
역으로 비영이 내 잠입을 알아차렸을 수도 있지만 그렇더라도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이는 독의가 분쟁 상황에 처하지 않는 한 끼어드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내가 독의에게 손을 쓸 때는 이미 늦을 것이었다.
좀 과장을 보태 개미들의 우중전쟁까지 감지해가며 사방을 샅샅이 뒤지던 나는 어느 순간 숨을 들이켰다.
‘웁.’
네 호흡을 닫게 만든 건 소리였다. 허공을 뚫고서 무언가 내가 몸을 감춘 나무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빗줄기가 튕겨나가며 내는 기음의 쇄도는 미지의 인물이 발하는 속도가 무시무시함을 웅변했다.
나는 찰나지간 갈등했다. 그러고는 몸을 날렸다. 소리가 날아오는 쪽과 반대방향으로. 그 소리의 주인공이 비영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엔 지나치게 묵직한 위압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일만이 넘는 고수들이 도사린 사벌 안에 내게 그런 압박감을 줄 수 있는 자는 단 한 명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