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99
제98화 저건?
내가 사왕이라고 판단한 인영은 지체 없이 나를 추격해왔다.
신속하게 대처했지만 워낙 그가 빨리 날아왔기에 우리의 간격은 십이삼 장에 불과했다. 내가 초장부터 가속을 발한 이유였다. 그럼에도 나는 거리를 벌리지 못했다. 그러기는커녕 조금씩 줄어들었다.
나는 당황했다. 사벌에서 사왕과 맞닥뜨릴 때를 대비해서 나는 독왕을 상대로 예행연습을 해두었다. 가속을 연속으로 발할 시 그를 뿌리치지는 못하더라도 따라잡히지는 않았다. 열두 번을 잇달아 펼치면 십리 이상 버틸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독왕과 비슷한 수준일 거라고 여겼던 사왕의 경신은 의외로 그를 약간이나마 능가했다. 이러다간 십리는 고사하고 오백 장도 가기 전에 목덜미를 내줄 판이었기에 특단의 조치가 불가피했다.
순식간에 사벌을 벗어나 자정에 임박한 시각인데다 폭우가 쏟아지는 와중에도 불야성을 이룬 서경의 상공을 비행하던 나는 사왕의 일격을 기다렸다. 십여 장은 초절정의 고수들이라 할지라도 공격의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거리였으나 사왕 같은 절대지경의 초인에겐 코앞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하시라도 나를 육편으로 만들 장공을 쏘아낼 수 있었다.
내 예상, 아니 바람과는 달리 사왕은 거리가 팔구 장으로 줄었음에도 손을 쓰지 않고 있었다. 그의 의도를 몰라 불안했다. 설마 장공을 발출해 나를 뭉개버리는 대신 나에게 바짝 붙어 직접 목을 뜯어버릴 심산인가.
어쨌거나 더 가까워지면 유리할 게 없었기에 나는 사왕의 공격을 회피하는 동시에 반격하려던 작전을 포기하고 선공하기로 했다. 절(折)로써 공중에서 직각으로 방향을 튼 나는 두 줄기의 광환을 날렸다. 옥소에서 빠져나온 광환은 묵직했고 철봉 끝에서 터져 나간 빛살은 날카로웠다. 어느 쪽이건 적중되기만 하면 설령 사왕이 호신강기를 두르고 있더라도 그에게 타격을 입힐 수 있을 터였다. 그러면 나는 상당한 거리를 벌게 될 것이었다.
내 계산은 절반만 들어맞았다.
철봉의 광환을 어깨에 허용한 사왕은 휘청거렸다. 그 틈을 타 그에게서 멀어졌으면 좋았을 테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나 또한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사왕은 내가 쓰려던 전술을 구사했다.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물려고 하듯 쫓기던 내가 먼저 달려들기를 기다린 것이었다. 그러고는 강력한 반격으로 단숨에 끝장내려던 작심이었음에 분명했다.
그의 의도도 절반만 성공했다.
나는 사왕이 발출한 장공의 해일에 휩쓸렸지만 목숨을 보전했다. 공간 전체를 장악한 그의 장공을 벗어날 수 있었던 건 진보된 공(空)의 발현 덕분이었다. 전날 독왕의 독장을 맞을 때 찰나지간 명멸했던 희미한 빛이 다시 나타나서는 뚜렷한 길을 열어준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무사하지는 못했다. 숨통은 온전하되 몸통은 엉망이었다. 터지지 않은 게 기적이었다. 내부도 파괴되어 전투불능을 넘어 운신불능에 처한 나는 속절없이 추락했다. 사왕은 일수에 전력을 쏟아냈음에 틀림없었다.
사왕이 가일수를 하면 그 순간 사신과 대면하게 될 터이기에 나는 죽을힘을 쥐어짰다. 바닥까지 박박 긁은 원력을 담은 철봉이 광환을 쏘아냈다. 방금 전의 광환과는 달랐다. 광환을 바탕으로 구상한 이후 부단히 시도했으나 한 번도 구현하지 못한 수법이었다.
지상으로 떨어지는 내게 장공을 퍼부으려던 사왕이 일순간 빛에 둘러싸였다. 그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졌다. 그러나 아쉽게도 내 광폭(光爆)은 사왕의 호신강기를 깨뜨리고 그를 산산조각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의 추가 공격을 지연시킬 수는 있었다. 그것이 나를 구원했다.
땅바닥에 어깨를 박은 나는 가속을 발해 추락지점에서 멀어졌다.
펑!
굉음과 함께 내가 떨어진 자리에 분화구가 생겼다.
추락하는 도중 이모의 치유력을 총동원해 응급처치를 한 나는 필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한줌의 공력으로 최고속도를 낼 수 있는 오절신공의 공능이었다.
사왕은 공중에서 나를 추격했다. 맹폭을 자제하는 건 그도 부상을 입었다는 반증일 수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나를 독안에 든 쥐로 여긴다는 의미로 보아야했다. 다른 변수가 없다면 실제로 그러했을 터였다. 나에겐 더 이상 그에게 저항할 힘과 수단이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내게도 타개책이 있었다. 단순히 위기탈출을 넘어 전세역전도 가능한 패였다. 사왕은 내가 그런 패를 쥐고 있음을 상상도 못할 터였다.
사왕과 짧고도 강렬했던 격전을 치른 곳은 초지였다. 어느새 서경을 빠져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내 목표점인 봉산(鳳山)까지는 아직 칠팔백 장이나 남아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절망하지 않았다. 사왕과의 충돌에서 파생된 빛이 ‘그’에게 내가 처한 상황과 위치를 전해주었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지만 ‘그’가 보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나는 ‘그’가 도착할 때까지 버티기만 하면 되었다. 쉽지 않은 일이었으나 어떻게든 해낼 참이었다.
무지막지한 기운이 산사태처럼 쏟아져 내렸다. 드디어 사왕이 결정타를 날린 것이었다.
욕지기가 치밀었다. 대체 왜 이렇게 꾸물대고 있단 말인가. ‘그’의 경공이면 벌써 오고도 남았어야 했다. 애초에 일러주었던 계획에는 어긋났지만 이 정도의 융통성도 발휘할 수 없단 말인가.
나 스스로도 찬탄이 나올 만큼 경이로운 신법을 발해 간신히 황소 발에 밟힌 개구리 꼴이 되는 걸 모면했지만 나는 최후를 예감했다. 한계였다. 더는 버틸 수 없었다. 이제 염왕의 낯짝을 보러 가야할 때였다.
마음의 준비를 한 순간 극적인 반전이 일어났다. 사왕이 나를 겨냥했던 장심을 들어 엉뚱한 곳에 장공을 발출한 것이었다. 나를 짓뭉개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을 테지만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전환이었을 터였다. 허공에 유령처럼 등장한 난쟁이 노인은 그가 한 눈 팔 여유를 가져도 될 상대가 아니었다.
화르르르.
독왕의 독장과 사왕의 장공이 부딪치며 들불이 번지는 것 같은 기음을 일으켰다. 그들의 격돌은 다음과 같은 결과를 낳았다.
첫째, 독왕과 일합을 겨루자마자 사왕은 바로 몸을 돌려 사벌이 있는 방향으로 날아갔다. 줄행랑을 친 것이었다.
둘째, 독왕은 그를 쫓지 않고 나에게로 떨어져 내렸다. 어인 일인지 그의 면상은 승자의 표정과는 거리가 먼 우거지상을 담고 있었다.
셋째, 고래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옴짝달싹 못하고 쓰러져 있던 나는 독장과 장공의 여파에 걸려 곤죽이 되었다. 거리가 조금만 가까웠다면 뼈도 추리지 못했을 터였다. 어쨌거나 명줄은 붙어있었기에 나는 나를 살려준 나 자신과 독왕과 행운을 관장하는 신에게 감사했다.
* * *
사왕과의 조우는 돌발 상황이 아니었다.
사벌 행을 계획할 때부터 염두에 두었던 일이었다. 진소월은 그녀가 전날 자신보다 윗길의 두뇌라고 평했던 사벌의 책사가 독의를 미끼로 삼을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했다. 괴선을 구출하고 백운영을 납치하기 위해 정맹에 두 번이나 침입한 내가 사벌이라고 두려워 할 리 없으리라 생각할 터이기 때문이었다.
사왕이 독의가 들었다는 비로전으로 날아왔을 때 나현을 정보 유출자로서 의심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기실 진소월은 진즉 그에 대한 검증을 마쳤다. 그녀는 나를 통해 독왕에게 나현이 전서응을 보내는 칠주봉에 한 동안 머물러있도록 부탁했다. 나현이 그 정보를 흘렸다면 필히 나를 잡기 위해 칠주봉으로 왔을 사왕이나 마왕을 대비한 조치였다.
그러나 여러 차례 전서를 수거하는 동안 적들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나를 처치하거나 적어도 내 소재를 알 친인을 포획할 절호의 기회를 그냥 보냈다는 건 나현이 사벌이나 마련에 정보를 알리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각설하고 내가 사벌 행을 결행할 시 무사귀환의 관건은 사왕이 나를 잡으러 나왔을 때 그의 추적을 뿌리치고 서경 외곽의 봉산으로 유인할 수 있는지 여부였다. 비로전에서 봉산까지의 직선거리가 십리였다. 그래서 진소월은 내가 그 거리 내내 가속을 유지할 수 있는 경지에 들기 전에는 절대로 사벌로 떠나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던 것이었다.
나아가 그녀는 사왕과의 교전도 극력 반대했다. 그러고는 나에게 강적과의 사투를 통한 비약이라는 욕심을 부리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아내고서야 출전에 동의했다.
결과적으로는 그녀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셈이었다. 하지만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상황에서 도주에만 전념했더라면 아무 것도 못해보고 이승을 하직해야 했을 것이었다. 나는 사정을 들은 진소월이 내 행동을 이해해주리라 믿었다.
* * *
긴장이 풀리고 보니 비로소 상세가 엄중함을 알았다.
마왕과의 일전에서 당했던 것을 제외하면 강호에 나온 이래 입은 가장 심한 부상이었다. 봉산에서 내-외상을 치유하며 나는 아직도 갈 길이 멀었음을 절감했다.
하지만 좌절하거나 낙담하지는 않았다. 그 반대로 크게 고무되었다. 비록 삼사 초에 불과했지만 나는 전력을 쏟은 사왕의 공세를 버텨낸 것이었다. 나아가 그에게 타격을 입히기까지 했다. 그게 그가 독왕과의 대결을 회피한 이유의 전부는 아닐지라도 작지 않은 영향을 끼쳤음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한 달 전이라면 꿈도 꾸지 못했을 성과였다. 마왕과 사왕의 발바닥에도 까마득히 못 미쳤던 내 무위가 검황자와의 비무를 기점으로 그들의 발목, 아니 무릎께까지 상승했으니 일방적인 고전에도 불구하고 내가 고무된 건 당연지사였다.
지금의 성장속도라면 내가 목표로 잡았던 삼 년이 아니라 일 년 이내에 마왕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될 수도 있었다. 하루라도 빨리 그날을 앞당기기 위해 나는 최선의 최선을 다할 참이었다.
* * *
독왕이 나를 안고 가는 것을 꺼리는 듯했고 나도 그에게 신세지는 걸 바라지 않았기에 우리는 내가 어느 정도 경신이 가능해진 후에야 봉산을 떠났다. 사왕의 장공에 실린 경력에 장기가 터지고 혈맥들이 파열된 탓에 아직도 회복이 덜 됐지만 나는 내 걱정에 잠을 못 이루고 있을 진소월을 생각해 출발을 서둘렀다.
독왕은 사왕과의 충돌 이후 줄곧 심각한 표정이었다. 짐작 가는 바가 있었기에 나는 그에게 연유를 묻지 않고 모른 척했다.
허파가 찢어지고 뼈들이 바스러질 것 같은 극통을 견뎌가며 내가 강행군을 고집한 덕분에 우리는 열서너 시진 만에 절곡에 당도했다. 동편에서 움튼 미명이 새벽어둠을 몰아내고 있을 무렵이었다.
조금만 있으면 해가 뜰 터이지만 진소월은 동굴 밖에 나와 서성이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뒤로 돌아가 오른팔로 세류요를 휘감았다. 날씬하고 탄력 있는 허리의 감촉이 내 팔뚝에 전해졌다.
“어멋!”
일순간 굳었던 진소월이 나를 보고는 내 목을 끌어안았다. 나는 그녀가 원하는 입맞춤을 선사하지 못했다. 강태수가 그녀의 옆에 서있었기 때문이었다. 노골적인 기대감을 단춧구멍처럼 작은 눈에 담고서.
나는 진소월을 떼어놓았다.
“다녀왔소, 소월.”
쓴웃음을 지은 진소월이 내 상태를 살피고는 물었다.
“독왕 어르신은?”
“숲으로 가셨소.”
“아! 무사하셨군요. 그렇다면 사왕을 처치한 건가요?”
“그렇지는 않소.”
“그가 비로전에 오지 않았나요?”
“오기는 했소.”
“그러면…….”
“들어가서 얘기합시다. 곧 해가 뜰 것 같소.”
“그래요.”
진소월과 나는 손을 잡고서 동굴로 향했다. 그녀의 처소에 들자마자 무언가 내 주의를 끌었다. 전날 진청운이 집법전의 소환령을 알리러 진소월의 장원에 왔을 때 들고 온 것과 같은 주황색 첩지였다.
“저건?”
내 눈길을 따라 첩지로 시선을 돌린 진소월이 뜻밖의 대답을 주었다.
“그제 정맹이 온 천하에 뿌린 공문이에요. 쌍십절에 전 가가를 초대한대요. 내용만 알려도 될 것을 나 대인이 굳이 보내주셨더군요.”
나는 입술을 비틀었다. 뭔가 기분이 좋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