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yo Black Prince RAW novel - Chapter 103
103화. 85장 국본을 바로 세우다(3)
“되국의 공주가 고려로 넘어왔다는 것도 믿기지 않지만 넘어와 태자 전하와 연정이라니요. 어디 공주가 꼬리를 친다 한들 태자 전하께서 꿈쩍이나 하겠습니까? ”
웃으며 말하는 김연과 달리 그 말을 듣는 왕식은 차마 웃을 수가 없었다.
“만일 그 소문이 진짜였다면 소녀는 되국 공주를 첩으로 두지 말아달라고 청하려고 하였습니다.”
“…….”
“아, 죄송합니다. 소녀가 너무 수다를 떨어….”
“아니오. 혹시 괜찮다면 여진에 대해 어찌 생각하는지 답해주실 수 있겠소?”
“여진 말입니까? 그것은….”
“증오하오? 아니면 더럽다고 여기시오?”
“더럽다고 생각합니다.”
소녀는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나 왕식은 고개를 저었다.
“공녀께선 과인이 이번 갈라전을 수복한 것이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오?”
“예? 그야 태자 전하께서 능력이 출중하시어….”
“아니오. 고려와 여진이 하나였다는 이유요.”
“…전하?”
“지금 금이란 나라를 세운 여진은 고구려가 멸망하기 전만 하여도 말갈이라는 이름으로 고구려의 백성으로 살았고, 고구려가 멸망하고 우리의 형제국 발해가 건국되었을 때도 많은 말갈이 도와 부흥을 시켰고, 태조 대왕께서 후백제를 멸할 때도 도운 이도 흑수말갈인들의 병사들이오. 과연 고구려의 뒤를 잇는 우리가 그들을 남이라고 확실히 단언할수 있겠소? 과인은 그것을 잘 설명하여 그들을 다독이고 회유하였고, 이번 서경의 팔관회에서도 그들을 위로하였는데, 공녀가 그리 말을 하니 과인은 조금 안타깝소.”
“…죄송합니다. 소녀가 철이 없었사옵니다. 하오면 그 소문은….”
“아니오. 내가 괜히 크게 반응한 것 같소. 그리고 그 소문에 대해선 지금 과인이 여기에 온 것만으로 답이 되지 않았소?”
“그, 그렇사옵니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사과하는 김연이었으나 왕식은 빙그레 웃으며 답하자, 금세 기분이 풀렸는지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두 남녀는 그로부터 조금 더 화목한 담화를 나눈 뒤끝을 맞이했다.
“전하. 전하. 소녀. 전하를 다시 뵐 날이 무척이나 기대되옵니다.”
“하하하. 얼마 뒤 다시 만날 것이니 공녀께선 걱정하지 말고 가시오.”
공손히 인사를 하고 떠나는 김연이라는 아이를 문밖까지 나와 배웅한 왕식은 소녀가 완전히 떠난 것을 확인하고는 단숨에 미소를 지우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되국이라.”
사실 이번 일은 딱히 김연이 여진인들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거나 개인의 심성이 고약하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유갑수도 그러했지만, 이 시기 고려인들 중 여진인을 좋게 보는 이가 더 적었던 까닭이었다.
이는 고려 전체의 여진족에 대한 인식으로, 여진족은 고려 예종 대까지만 하여도 고려에 복속한 노예, 속민으로 좋게 봐도 고구려와 형제국 발해 때부터 신속한 자기보다 아래의 하층민이라는 인식이 강세였기 때문이다.
고려 예종 때에는 윤관으로 하여금 대대적인 여진 정벌을 감행하여 비록 손해가 크다곤 해도 완안부에게서 영원한 사대 맹약을 받아내기도 하였다.
그러한 여진이 급속도로 성장하여 급기야 요나라와 송을 밀어내고 천자국을 자칭하며, 어느 사이에 자신들을 보고 사대를 강요하였으니 그 자존심의 타격은 무척이나 컸던 것이다.
이 때문에 요나라 상대로도 접대, 관리하는 기구인 예빈성(禮賓省)의 이름을 객성(客省)으로 고쳐 접대한 것도 고작 몇 년 동안만 행하고 다시 예빈성으로 복구시켰다.
여기서 예빈성의 이름을 번역하면 귀한 손님을 예의 바르게 접대한다는 뜻인데, 객성으로 고쳤다는 것은 귀한 손님이 아니라 그냥 손님을 접대한다는 것이 된다.
좀스럽지만 동시에 고려의 자존심을 아는 사례인데, 금나라 경우엔 인종 시기 예빈성을 예빈시(禮賓寺)로 격하되는 동시에 대금 외교 문제를 동문원(同文院)에 상당수 전담시켰고 이 방식은 금이 멸망할 때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대붕이는 이 사례가 고려가 금에 대한 문화적 우월성과 자존심을 알 수 있다고 설명한 바가 있었다.
그러한 고려가, 그러한 고려인들이, 이제 힘도 잃고 멸망만 기다리는 금의 사람을 좋게 볼 이들은 그리 많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런 여진인들을 조금이라도 끌어들여 대몽전쟁을 대비하려는 왕식으로선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었던 것이다.
‘갈라전 여진인들에게나 완안자연에게 들리지 않게 해야 할 텐데.’
“전하. 용강남 정안연이 뵙기를 청하옵니다.”
“훗. 드디어 왔는가. 모셔오너라.”
왕식은 정안연의 방문 소식을 듣고서야 겨우 표정을 풀 수 있었다.
정안연은 겨우 모은 돈들을 왕식을 위해 또 아낌없이 사용했다.
그와의 대화는 순전히 그의 넋두리라 할지라도 조금 전 김연이라는 철부지 소녀와의 대화보다 훨씬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 * *
“태자 전하와 태자비 전하를 보시면 원앙 한 쌍이 따로 없으시니 그야말로 천생연분이란 단어가 두 분들을 위해 만들어진 단어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사옵니다. 태자 전하께서 국혼을 하시니 이제 아조의 미래가 저 떠오르는 해와 같아 소인은 참으로 감동스러워 눈물이 다 나옵니다.”
“허허허. 소 공은 벌써부터 취한 것 같소.”
아직 국혼을 치르지 않은 이상 김연은 태자비가 된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국혼 상대로 결정되었다는 것은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국혼에 앞서 두 남녀가 만나 담화를 나누었다는 이야기는 이미 여럿에게 알려지며 김연을 태자비라고 부르는 것에 그 누구도 개의치 아니하였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정식으로 혼인도 치르지 않은 여인을 다른 곳도 아닌 궐에서 함부로 태자비라고 운운하는 것은 결례이긴 하다.
하지만 그 불경 이전에 그 장소에 있는 이들 대다수는 알고 있었다.
‘김연이 태자비가 되는 것을 막을 자는 없다.’
조부는 현재 이름을 떨치고 있는 반정을 진압한 공신이며, 차대 제일 권신이요.
외조부는 해동천자조차 눈치를 보는 만인지상의 해동 제일의 권신인데 누가 막는단 말인가.
그렇기에 그 자리에 그것을 지적하는 이는 없었고, 그들도 개의치 않고 김공의 자녀 김연을 태자비라고 부르며 축하하였다.
“과인이 상국께 한 잔 올리려고 합니다. 받아주시겠습니까?”
“태자 전하 무슨 그런 황송스러운 하교를 하시옵니까? 일개 노신에게 잔을 올리다니요. 듣잡기 황망하옵니다.”
“옛말에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하였습니다. 상국께서 처의 외조부니 과인에게 있어서도 집안 어른이 되니 올린다고 한 것이니 받아주시지요.”
무엇보다 단 위에서 황상 대신 앉아 있는 태자부터 아랑곳하지 않고, 그 곁에 겸상을 하고 있는 최우를 보며 처외조부라고 하며 잔을 올리니 마니 하고 있었으니 누가 그리 말하겠는가.
최우도 입으론 황송하다니 황망스럽다느니 하면서 당연하다는 듯 흡족해하는 그 모습에서 권세가 얼마나 강한지 일목요연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렇게 말씀하시오면 이 최모 감히 분에 넘치는 어주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최우는 껄껄 웃으며 냉큼 태자가 건네는 어주를 받아 마셨다.
“상국께선 과인께 섭섭한 것이 많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과인이 어리고 철이 없어 상국과 문무신료들의 속을 많이 썩이게 한 점 이 자리에서 사과하고 싶어요. 모두 받아주시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태자는 단 아래에서 연회를 베푸는 신료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만인지상 일인지하의 태자가 고개를 숙이니 조금이라도 정신이 깨어 있는 이들은 놀라 만류하며 아니라 부정했다.
“사, 사과라니요. 고, 고개를 들어주십시오. 전하! 전하께서 출전하신 이래 아조의 명성은 드높아지시었고, 고토 마저 탈환하시었….”
“허허허. 뭐,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아니라곤 할 수 없겠지요. 태자 전하의 능력이 출중하시어 번번이 위기를 타파하시고 공을 세워 나라를 드높이셨으나 그때마다 이 늙은이는 태자 전하의 옥체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실까 봐 몹시나 조마조마하였습니다.”
그러나 최우는 긍정했다. 걱정했다. 능력 있다고 긍정하면서도 태자가 떠나서 자신을 고생시켰다는 것을 결코 부정하지 않았다.
물론, 이것도 신하가 태자에게 할 발언은 아니었다.
정면에서 면박에 가까운 투정에 그 자리에 있던 당여들도 조금 몸을 움츠리며, 태자의 안색을 살펴볼 지경이었으나 다행스럽게도 태자는 화를 내지 않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과인이 어려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자 생각 후 전후를 보지 않고 달려나가 황상 폐하와 상국은 물론 모두에게 노고를 끼쳤습니다. 이후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진력을 할 것입니다. 그때야 상황이 상황이라 과인이 뭣도 모르고 나섰으나 이제는 상국께서도 돕지 않으실 것입니까? 황실과 우봉 가문이 함께하고, 신료들과 백성들이 따른다면 이까짓 사태를 어찌 해결하지 못하겠습니까?”
“…허허허. 전하께서 소인을 이리도 높이 평하시니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물론 옳으신 말씀이시옵니다. 우리가 어떠한 나라입니까? 그 옛날 수와 당의 대군에 맞서 싸워 나라를 지킨 고구려를 잇는다 하여 고려이옵니다. 옛 고려와 달리 우리는 이미 통일이 되어 있습니다. 이제 신분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단결한다면 이런 위기는 능히 타파할수 있다. 이 말입니다. 태자 전하께서 구국에 대한 의기가 노인의 뜻과 같으니 이 늙은이도 당연히 동참할 것이옵니다.”
“하하하. 참으로 듣기 좋은 말씀이십니다. 그런 처외조부께 다시 잔을 올리려고 하니 받아주시지요.”
“껄껄껄! 감사합니다.”
둘은 그렇게 웃으며 담화를 나누었다
그 자리에 있는 치들 중 머리가 돌아가는 자들은 방금 이야기가 태자가 자기가 잘못하였고 앞으로 같이 국정을 돌보긴 하지만 국방 문제만큼은 반드시 주의해달라는 요청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즉, 태자는 국혼을 꺼려하는 것이 아닌 국혼으로 얻을 권리를 목적으로 하였음을 안 것이다.
“태자께서 송화사(松廣寺)와 쌍봉사(雙峯寺)에 소금 100석을 시주하셨다지요?”
“예. 국본을 바로 세우는 일이고 이후 안녕을 위해 부처님의 은혜를 받고자 송화사와 쌍봉사 지주께 시주를 하였습니다. 그러니 두 불자께선 이번 일에 대해 기뻐하며 잘되길 바란다고 글을 적어주셨습니다.”
“껄껄껄. 그 아이들도 참.”
송화사는 전라도에 있는 사찰이고 쌍봉사는 송화사의 말사이다.
이 두 사찰에는 최우의 자식들이 승려로서 살고 있었는데 이중 쌍봉사의 현 주지는 최우의 둘째 아들 만전.
원 역사에서는 최우 사후 마지막 최씨 무신 정권의 집권자인 최항이다.
구태여 먼 전라도에 시주를 하였다는 것과 구태여 권신의 아들이 있는 사찰에 보냈다는 것 또한 태자가 우봉 가문에게 잘 보이려고 아양을 떨고 있음은 명백했다.
그렇게 두 노소(老少)는 화목함은 계속 이어졌다.
“과인이 노고를 한 상국과 대소신료들을 위해 자그마한 선물을 준비하였습니다. 보시지요.”
그렇게 말하곤 태자는 계단 아래로 내려가 준비한 궁녀에게서 화살 2개를 들고 왔다.
태자의 궁술을 익히 들은 최우의 호위병들은 최우를 지키고자 나섰으나 최우는 손을 들어 그를 물러나게 했다.
노신은 태자가 결코 자신을 해할 리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상대로 태자는 활시위는 하늘에 향해 겨누고 있었다.
“삐이이이익!”
효시가 울리자 조만간 하늘 아래에서 소음과 함께 하늘에서 갑자기 터졌다.
퍼퍼펑! 퍼엉! 퍼어엉!
갑자기 들려온 폭음에 순간 연회장은 웅성거렸으나 곧이어 위험한 것이 아니라는 것과 밤중에 화사한 수놓아진 아름다운 불꽃을 보곤 탄성이 흘렸다.
“호오!”
“저 불꽃들은….”
“저것은 폭죽이 아닌가?”
보통 사람들의 인식과 달리 이 시대의 고려인들이라고 화약을 아주 모르진 않는다.
고려 시대의 사무역이 신라 시대에 비하면 많이 쇠퇴하긴 했으나 아예 없지는 않았고 이 시기 금과 송에선 폭죽으로 불꽃놀이를 즐기고 있었던 지라 상인들이나 사자로 간 이들 중엔 폭죽을 아는 이들이 몇 있었고, 제작법까지는 못해도 폭죽 정도는 벽란도의 송상들도 가끔 들고 오기도 해서, 왕실에서도 폭죽 정도는 목격한 이들도 몇몇 있었다.
물론 그들이라고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 보니 이곳에 있는 귀족들은 말로만 듣거나 보기 힘든 폭죽에 경탄을 하였고, 심도의 백성들은 난생처음 보는 불꽃놀이에 불안을 느끼면서도 아름다운 경치를 관람하였다.
“이번 벽란도에 온 금상이 들고 온 폭죽이 옵니다.”
“으, 으음.”
그리고 당연히 최우도 그 광경에 기분 좋은 듯 씨익 웃었다.
폭죽 때문이 아니었다. 그 골칫덩어리 같던 태자가 이제 자기 사람이 되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최종준의 예측대로 태자는 명석하기에 자신의 조건에 만족할 것이다.
이후 어떻게 성장하냐에 따라 상황이 변할 수는 있으나 적어도 지금은 황실을 위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신과 손을 잡을 것이다.
이자겸만 되지 않는다면 이 어린 태자 또한 인종 대왕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퍼엉! 콰앙! 퍼엉!
저 폭음 이후 빛나는 밤하늘처럼 자신의 앞길도 그럴 것이라고 최우는 생각했다.
* * *
모두가 불꽃놀이와 풍악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때’는 천천히 가랑비에 옷 젖듯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