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yo Black Prince RAW novel - Chapter 105
105화. 85장 국본을 바로 세우다(5)
“많이 취하신 것 같습니다. 상국.”
“껄껄껄. 아직, 멀쩡하오. 멀쩡하고 말고, 뭐하느냐! 저 불꽃에 어울리는 풍악을 울려라!”
취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최우의 얼굴은 이미 취기로 붉어질 대로 붉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가 취했다고 그의 명을 무시할 수 있는 자는 이 자리에 없었기에 예인들은 지시대로 풍악을 울리기 시작했다.
퍼퍼엉!
“껄껄껄! 황실과 우봉 가문이 연결이 되고, 나가신 태자 전하께선 돌아오시어 이리도 멋진 폭죽을 선물해주셨으니 내 생에 오늘과 같이 좋은 날이 다시 있겠는가?”
불꽃 아래에서 잔을 높이 들며 외치고는 술을 들이켰는데 얼마나 기뻤는지 술의 대부분이 흘러내리고, 옷을 적셨는데도 전혀 눈치를 못채고 있었다.
그 때 하늘에서는 폭죽 소리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폭죽이 다 떨어진 것인가?’
장내 사람들이 그리 생각하는 찰나 다시 폭죽이 날아와 터졌다.
이어 날아온 폭죽들은 급히 쏘아 올리기라도 한 것인지 지금까지 터진 폭죽들에 비하면 뭔가 동시다발적, 무규칙적인 폭발에 다소 기시감이 느껴졌지만, 폭죽에 해박한 이는 없었고 모두가 풍악과 술에 취해 있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이때 연회석에서 앉아 있던 왕식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대전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세자의 손에는 활이 쥐어져 있었지만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세자는 계단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고 앞서 활로 폭죽을 보여주었으니 이번에도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으며 무엇보다 이번에는 주변에 아무도 없었고 세자의 손에는 활 외에는 무엇도 쥐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세자가 문득 자리를 멈추고 주변과 최우를 바라보는 상황에 장내 사람들은 역시 세자가 무엇인가 보여주려고 나간 것이라고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앞서 보여준 모습은 물론이오, 권신의 외손녀와 국혼, 서경의 분사, 육지에서 일부나마 병권, 그리고 부친인 왕 마저 이 혼사를 허락한 상황이다.
이만한 조건이 제시된 마당에, 세자가 청혼을 걷어찬다는 선택지는 남아 있지 않았다.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거절하고 반격을 한다고 해도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 자리에 있는 이들이 모두가 그리 생각했다. 그렇기에 세자의 말이 끝날 때까지 그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고 안심했다.
“그 옛날 은문상국은 구국의 결단으로 거병을 하여 의종 대왕을 시해하고, 나라를 어지럽혔던 난신적자 이의민을 처단하여 나라가 구한 공이 있도다. 또한 거병 이후 타락한 동생인 최충수가 황실을 겁박하고는 역모를 벌이려 하자 육참골단의 심정으로 동생을 처벌하여 또다시 황실을 구하였으니 그 공도 결코 작지 않다고 할 수 있도다. 육친마저 처벌하는 은문상국의 그러한 행동과 각오를 들었을 때 과인은 그에 대해 거듭 경탄을 마지않을 수가 없었도다.”
예상대로 세자의 입에서 나온 것은 최우의 부친인 최충헌의 공적과 찬사였고, 이에 그들은 웃으며 맞장구를 쳤으며 최우 또한 흡족해하는 미소를 지으며 경청하였다.
만약 최우가 취기에 빠지지 않았거나 연회에 너무 빠져 있지 않았더라면 이 시점에서 방금까지만 하여도 자신을 처외조부라고 부르며 반존대를 하던 세자가 자신의 부친. 즉, 처외증조부에 대해 다소 하대하는 것에 기시감을 느꼈을지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미 잔뜩 취해 있었고, 분위기에 팔려 그 차이를 인식하지 못했다.
“오호통재라. 어찌 자신의 혈육들을 처리하고도 고통을 느끼지 않으리. 역적 최총수 또한 과연 처음부터 권력만을 노린 난신적자였단 말인가? 그 또한 과거 은문상국과 함께 난신적자 이의민을 토벌하는 거병에 참여하였던 그가 어찌 그리되었단 말인가? 이는 비단 그만이 아니다. 이의방과 정중부, 이의민 모두 난신적자가 되기 이전과 이후의 차이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이는, 대의를 가지고 거병하였으나 정작 권세를 쥐고 나자 권력의 맛에 타락하여 대의와 거병의 초심을 잃은 탓이로다.
경인년 난(무신정변) 이후 조정에 권세를 쥔 다른 난신적자들과 달리 우봉 가문만이 2대에 걸쳐 조정과 사직을 지킬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은 모두 은문상국의 그와 같은 사태를 대비, 경계하여 끊임없이 자기성찰과 대의의 초심을 잃지 않으려 했던 노력이었으니, 은문상국은 죽는 그 순간까지 타락을 경계하고 증오했으리라!
혈육을 베어낸 그야말로 타락을 경계하고 증오하였으며 그 앞에는 혈육도 예외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도다. 이 자리에 있는 그대들도 그런 은문상국의 신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으… 음?”
이 시점에서 장 내에 있던 신료들은 이전 권신들을 대의니 초심을 가지고 있었다느니 하는 세자의 말에서 뭔가 묘하다고는 느꼈지만, 결국 은문상국은 대의를 지키고 있었던 충신이라는 결말에 세자가 아직 어려서 말이 서투를 뿐이라며 납득했다.
혹은 조금 취기에 벗어났거나 머리가 있는 이들도 오늘의 우호를 잊지 말고 지속해달라는 말을 다소 거칠게 한 것이리라고만 생각했다.
그러한 와중에도 세자의 연설은 이어졌다.
“과인은 국본을 바로 세워야 한다는 말에 찬성한다. 나라의 뜻이 이러할 진데 어찌 국본을 바로 세우는 것을 꺼려하겠는가? 그렇기에 황상께서 국사와 왕사에게 말씀을 구하듯 과인은 이곳에 오기에 앞서 송광사와 쌍봉사에 시주를 하고 그곳의 승려들에게 이번 국본에 대한 말을 듣고자, ‘국본을 바로 세우려고 하는데 답을 해주겠는가?’ 이렇게 물으니 그들은 이렇게 전해주었도다.”
송광사에는 최우의 서장자가, 송광사의 말사에는 최우의 서차자가 승려로 지내는 곳으로, 비록 그 둘이 권력에는 멀리 떨어져 있는 애물단지 취급이었지만 이 또한 우봉 가문의 눈치를 보고자 한 것이라면 이상할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 나온 말과 행동은 그곳에 있는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는 바였다.
“국본을 바로 세우기 위해 난신적자를 처단하라! 만종은 그대를 가리켰다! 대의의 초심을 잃고 권력에 빠진 난신적자 최우! 죽어라–!”
“…!!!”
세자는 재빨리 긴 흑룡포의 소매 속에 숨겨 놓았던 잘 깎은 검은 색의 나무 화살 하나를 빼내 활시위를 겨누며 외치고는 그대로 냅다 최우에게 쏘았다.
쉬이이익!
퓨슉!
“커억!!”
나무 화살은 바람을 가르고 날아가 최우의 두터운 목을 관통하였다.
본래라면 몸을 날려 막아야 했을 최후의 호위무사들이었으나 순식간에 일어난 데다가 어느 사이에 접근 해 있던 척인사가 세자가 활시위를 빼내려는 것을 목격한 순간 대도로 최우 가장 근저에 있던 무사들을 도륙 내며 호위를 막자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케켁. 케엑! 케흐흑. 흐으윽.”
최우는 화살에 박히고 비틀거리는 지금의 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왕식을 노려 보았고, 그런 권신 시선에 왕식은 눈을 피하지 않고 똑같이 노려보며 우렁차게 외쳤다.
“최우. 너는 그대의 숙부와 같은 우를 범하였으니 그 죄는 천 번, 만 번 죽어도 마땅할 것이니 오늘 과인은 그대를 참하여 나라의 사직을 지키고 황실의 지엄함을 천하에 보일 것이다!!”
어린 소년이 내뱉은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연회장을 울리는 우렁찬 호통에 장 내는 다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뒤늦게 자신들의 주인이 치명상을 당한 것을 목격한 최우의 사병들이 움직였으나 척인사는 이미 물러나 둘러싸이는 위기를 피한 상태였다.
그리고 세자와 세자의 호위군인 척 낭장의 이러한 사태에 장내에 있던 내솔부 병력들도 대전을 내려가 척인사와 세자에게 합세하여 최우의 사병들과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은 당연한 전개였다.
연회장 내 병사들의 수는 최우의 사병이 훨씬 많았지만 수괴인 최우가 이미 죽어가는 상태였고, 상대는 고려의 세자였으니 그들로서도 감히 덤빌 수가 없었다.
“우봉별초들은 들으라! 나는 고려국 왕태자로서 이번 거병에는 함께한 만종에게 우봉 가문의 다음 당주 자리로 인정하였고, 그 공을 인정한다. 그러니 너희들은 지금 당장 무기를 내려놓고 순순히 대의에 참여할 것인지 아니면 저 난신적자의 대역에 가담하여 역적의 죄를 받을 것인지 말이다! 지금 선택하라!”
술렁술렁.
세자의 지시에 무사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말을 무턱대고 믿고 무기를 내려놓을 수도 없었다.
만약 최우가 멀쩡하였다면 저런 권유는 아랑곳하지 않고 세자를 제압하였겠으나 자신들의 주인이자 뒷배인 최우는 이미 목에 화살이 박혀 죽어가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최우의 복수를 하고자 달려들 수도 없어 그저 서로의 눈치를 보며 대치만 하였고….
“케흑. 흐윽. 너… 태… 해에, 자아….”
최우는 고통에 일그러진 채 목에 박힌 화살을 부여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태자의 거짓말이다. 그 멍청한 아들놈들이 태자들과 작당하여 자신의 뒤통수를 쳤을 리 없다.
하물며, 만종. 그 비루하고 겁도 많은 돼지 놈이 이런 대담한 짓을 했을 리 없었다.
즉, 이것은 세자의 허세이고, 거짓이다. 설령 맞다고 해도 만종은 세자에게 이용당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최종준 놈의 말을 믿지 말고 처리했어야 했어! 자고로 문인놈들과는 대사를 논하지 말라 하였는데… 크윽. 이런 애새끼 때문에 우리 우봉 가문이….’
사라져 가는 의식 속에서 최우는 손을 뻗어 지시를 내렸다.
“여… 흐… ㅡ모, 오어….”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피와 바람 빠진 기침뿐이었다. 그리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는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한 시대를 풍미하고 나라를 좌지우지한 권신의 죽음치고는 참으로 허망한 최후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죽은 것은 최우였지 당여들은 아니었고, 또한 그곳에는 그 최우가 자신의 아들들보다 신임하고 총애한 후계자도 동행하고 있었고, 그 또한 최우와 비슷한 생각과 결과에 도달하였고 최우가 무엇을 하려고 하였는지도 간파하였다.
지금 이 자리에서 세자를 반드시 막아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태자가 역모를 저질렀다!!”
그는 최우의 사위이자 후계자인 김약선이었다.
그는 최우가 죽자마자 냅다 소리를 지르며 공격을 지시하였고, 긴장된 연회장은 그의 고함으로 파국을 맞이하였다.
“지금부터 내가 너희들을 지휘한다. 청하상국을 시해한 태자 전하를 잡고, 그를 관리하지 못한 내솔부를 척결하라!!”
“하, 하오나.”
“멍청한 놈! 역적의 사병이 되면 무사할 성싶더냐! 영공 저하께서 나를 후계로 삼은 것을 모르지 않을 터! 내 지시에 따라라!!”
김약선은 다급히 꾸짖으며 재차 지시를 내렸고, 번민하던 최우의 사병들도 결국 긴장을 버티지 못하고 세자에게 달려가는 병사 한 명을 시작으로 개전이 시작되었다.
“크, 크윽!”
“자, 잡아라!!”
“내솔부의 수는 얼마 되지 않는다. 태자를 사로잡아라!”
“과연 그것이 너희들의 선택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좋다! 오늘 내가 황실의 힘이 굳건함을 증명하겠다! 역도들을 참하라!!”
세자의 지시에 내솔부 병사들도 함성을 지르며 최우의 우봉별초들과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중과 부적의 승부에 전투는 금세 끝이 날 듯하였으나 그 순간 연회장으로 통한 정문들이 열리면서 2백여 명의 병사들이 함성과 함께 들이 닥쳐오기 시작했다.
“와아아아!!!”
“…!!!”
“내, 내솔부다! 내솔부의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문밖에 있던 유갑수가 이끄는 우내솔부의 병사들이었다. 그들이 합세하자 전세는 단번에 역전되었고, 금세 진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 * *
연회장에 있던 신료들을 제압한 왕식은 매우 실망스러운 소식을 들어야만 했다.
“김약선을 놓쳤다고?”
“죄송합니다. 난전 중에….”
난전 중에 재주도 좋게 몸을 뺀 김약선의 행동에 왕식은 입술을 깨물었다.
대집성과 달리 그 최우가 친자식들을 대신하여 후계를 맡겼고 원 역사에서도 딸의 모함에 처벌한 이후 진상을 알았을 때 딸과 두 번 다시는 대화를 하지 않았을 정도로 총애하고 높게 평가한 인간이다.
실제 최우가 죽자마자 신속히 세자를 진압하려 하였던 만큼 왕식은 김약선을 최우 다음가는 척결 대상으로 잡고 있었던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았고 지금에 와서는 더욱 강한 상태다.
“…김약선은 반드시 잡아야 한다. 만일 아직 궐과 궐 밖에 있는 우봉별초들은 물론 군부를 장악하기라도 한다면 사태는 금세 뒤바뀌게 될 것이다!”
“곧바로 추격하겠습니다.”
“…전하. 소장이 한 가지 아뢰고 싶은 것이 있사옵니다.”
서둘러 자신의 실책을 만회하려던 유갑수는 갑자기 끼어든 송 낭장의 개입에 인상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송 낭장께서 말입니까? 실례인 것은 압니다만 송 낭장님께선 이번 거병에 대해선….”
“상관없다. 말하라.”
“전하. 거병을 하시어 난신적자를 처리한 이상 남은 당여 김약선을 추격하는 것도 매우 중한 일이긴 하오나 가장 급선무의 일은 그것이 아니라 사료되옵니다.”
“그렇다면?”
* * *
“설마 김방경도, 최 시중도 전부 배신하였던 말인가!”
불과 3명의 병사들만 데리고 허겁지겁 몸을 빼낸 김약선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미 거병이 일어난 이상 자신은 자신이 해야 할 일뿐이다.
“그 얼간이들이 태자와 손을 합쳐 이렇게 뒤통수를 칠 줄은 몰랐지만, 아직, 아직이다!”
내솔부만으로 움직였다는 것은 아직 견룡군은 태자의 손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이며 황실 또한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렇다면 아직 가망이 있다.
“지금부터 황상 폐하를 모시러 갈 것이다.”
“황상 폐하를 말이옵니까?”
“태자가 영공 저하를 난신적자 운운하며, 시해하였으나 그 어디에도 황명을 거론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태자는 궐에서 황명도 없이 병사들을 일으킨 것이니 이는 역모다!”
황제만 확보한다면 대의는 이쪽에 있으며 견룡군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걸면 귀걸이라고 황명의 이름으로 구금한 뒤 처리한다면, 나아가 만종과 만전 그 형제들도 잡아 처리한다면 자신의 권좌를 위협하는 자는 사라진다.
그때야말로 자신은 새로운 권신이 되는 것이다.
“어서 가자!!”
위기를 기회로, 지금껏 태자가 하였던 것을 자신이라고 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자신이 어린애 따위에게 질 정도로 녹록지 않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줄 것이다.
* * *
“폐하. 신 우내솔부 낭장 척인사. 태자 전하의 명에 따라 사직을 보호하고자 이번 거병에서 황상 폐하를 보필하고자 왔사옵니다.”
고려 왕은 고민했다. 처음 소란을 듣고 거병이 일어난 것 같다는 환관의 보고만 들었을 때만 하여도 새로운 이의민, 최충헌이 나온 것인가 한탄하며, 겨우 화합을 이룬 지금 태자를 위해서 금군을 출동시키고자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 거병을 일으킨 병사들이 찾아와 이런 말을 한 것이다.
내솔부라고 한다면 이번 거사에 태자가 연루되었음은 분명했다.
여기서 태자를 도왔다가 거사가 성공하기라도 하면 의종 대왕의 경인년 이래로 추락할 대로 추락한 황실의 권위와 조정이 바로잡아지는 것은 명백했다.
그러나 실패를 한다면 자신의 의지고 나발이고 잔뜩 화가 난 난신적자들에 의해 조정과 궁궐에는 또다시 피바람이 부를 것이고, 사랑스러운 태자 또한 잘해야 유폐 심할 경우 의종 대왕님의 전철(죽음)을 밟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자신 또한 조부명종 대왕님과 희종 대왕님처럼 퇴위 될 것도 자명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무시한다 해도 태자를 버리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이른바 진퇴양난이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 고민 끝에 고종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날 국가의 종사와 대업이 태자와 그대들에게 달렸도다. 짐이 지존이자, 아비 된 자임에도 덕이 부족하여 태자에게 거사를 맡기니 그대들은 태자를 도와 종사를 회복하라! 내관은 지금 당장 견룡군을 불러 난신적자들을 추포하라 전하라!”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이러든 저러든 방도가 없다면 이제 아들을 믿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거기다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모르나 최우도 이미 죽었다고 하였으니 이대로 기세를 타서 태자가 성공하기만을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기호지세에 오른 왕이었으나 문득 또 다른 자식. 차자(次子)가 떠올랐다.
‘안경후도 걱정이구나. 부디 쓸데없는 짓에 휘말리지도, 하지도 않았으면 좋으려만….’
근래 들어 장자만이 아니라 차자도 이상하게 변해가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조정과 태자의 일로 바빠 크게 신경 쓰지 못했다.
일단 이상한 말과 고집은 혼을 내듯 멈추고 근래 들어 냉랭하긴 하지만 열 손가락을 물면 그중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고 아버지로서 걱정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장 산원이 알아서 잘 호위하겠지.’
평소 그런 차자가 걱정되어 견룡군의 산원을 안경후에게 보냈지만 불안함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대자대비하신 부처시여. 부디 태자와 안경후 모두 보살펴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