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yo Black Prince RAW novel - Chapter 12
12화. 12장 화약(和約)
“…그게 무슨 말이지?”
“방금 말한 대로입니다. 전하의 진심이라 하였습니다.”
“그 말은 즉슨?”
“예. 저 연기 밑에 있는 아조의 군사들이 있습니다.”
김방경의 말이 통역이 되어 전달되자마자 몽골 장수들의 얼굴이 하나 같이 굳거나 백지장 마냥 새하얗게 질렸다. 사방 곳곳에 피어오르는 연기 밑에 고려군이 있다는 말은 자신들이 영락없이 포위되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어, 어디서 감히 예케 몽골 울루스의 군대를 겁박하는 것이냐! 고려국이 서경성에서 분투하였던 것은 인정하나 야전에서도 우리 군대를 이길 것이라 믿고 있는가!”
“천조의 군대가 천하무쌍하여 천지를 요동시키는 것은 천하가 다 알진데 어찌 그러한 마음을 품겠습니까? 그저 겁과 분노로 이성을 잃은 백성들이 밤낮으로 들이닥쳐 상국의 군대가 피로하지 않을까 걱정을 할 뿐입니다.”
“그것이 겁박이 아니고 뭐란 말이냐! 내 너의 말을 잠자코 듣자하니 무례함에 한도가 없구나!”
김방경이 최대한 부드럽게 타일렀지만 테케의 표정은 곱지 않았다. 도리어 당장이라도 허리춤에 달린 칼을 뽑을 기세였다. 이에 방경은 더욱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처음부터 그러한 불미스러운 일을 막기 위한 것이 전하의 뜻이라 하였습니다!!”
일견 무례하다면 무례했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험악한 표정을 짓던 장수들은 물론, 태케도 언성에 반사적으로 움찔했다.
“눈앞에 있는 현실에 눈을 돌리고 순간의 오해로 소장을 죽이시고, 전하의 뜻을 듣지도 않은 채 이대로 저들 사이를 뚫고 나가실 것입니까?”
멈칫하던 테케는 허리춤까지 갔던 손을 제자리로 돌리곤 다시 경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두 눈에서는 언제든지 다시 칼을 뽑을 것이라는 적의와 경계를 숨기지 않았다. 김방경은 그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설명을 이어 시작했다.
“앞서 말하였던 대로 아국의 백성들은 상국의 군대가 남하하면서 일어난 일에 큰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들이 저렇게 요동치고 맞서 싸우는 이유는 모두 근래 들어 퍼져 있는 상국의 군대가 침입할 것이라는 소문 때문입니다. 이 소문에 피해를 받은 백성들과 북방의 병사들은 오해로 왕래한 것이 아니라 상국이 진실로 아조를 침략하고자 온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돌아가는 상국의 군대에 달려드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것은 양국에게 있어서도 딱한 것이라 우리 전하께선 모두가 오해였음을 알리자고 하시는 것입니다. 대대적으로 알림으로써 북방의 백성들과 병사들을 진정과 안심시키고, 나아가 아조가 상국에 봉사하는 것을 계속할수 있게 말입니다. 허나 말로만 말한다면 이미 광란과 불신에 달한 저들이 어찌 쉬이 믿겠습니까? 하여 양국에서는 솔직한 의사를 내비치며 공식적으로 화약을 맺어 저들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테케의 눈에서 일순 당황함이 나타났으나 그것도 잠시 고려의 왕자가 진정으로 자신들을 몰살시킬 의도를 가진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는지 적의와 함께 사그라들며 말투가 조심스러워졌다.
“그러니까, 정말로 우리 군의 회군을 막지 않기 위해 고려의 세자께서 너를 보냈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만일 돌아가시던 도중 벌써 전투를 치뤘다면 더욱 어려웠겠으나 철가 원수님의 넒은 마음으로 서경의 일전 이후 살생을 일으키시지 않아 아직은 가능성이 있사옵니다.”
소리 없이 빠지기 위해 일으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일으키지 못한 것임을 양쪽다 알았으나 김방경도 철가도 넘어가기로 하였다. 그런 것으로 치는 것이 예케 몽골 울루스의 체면에도, 그리고 대화를 함에도 편했기 때문이다.
“…그 전에 한가지 물을 것이 있다. 우리 군의 원수이신 살리타이 님께선 이번 서경 전투에서 화살에 왼눈을 맞고 전사하셨다.”
“심히 유감을 표하겠습니다.”
“그 때 살리타이 원수께서 맞은 화살의 촉은 철이 아닌 뼈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 뼈 화살은 누구의 것이냐?”
테케는 마음 속 깊이 궁금했던 질문을 토해냈다. 꼭 필요한 질문은 아니었지만 너무나도 궁금했다. 예케 몽골 울루스의 원수의 눈을 맞춘 이 짧다막한 뼈 화살이 어디서 날아왔고, 누가 쏘았단 말인가? 원수가 죽기전 내뱉은 의미불명의 주장이나 왕자가 쏘는 것을 보았다는 주장이 걸리긴 하나 그렇기엔 재료가 이상하였고, 일반 뼈 화살이라고 하기에도 골촉이 너무나도 작았다. 이 호기심은 비단 (테케)자신만의 것이 아닐 것이다. 이 자리에 있던, 그리고 그 전장에 있던 모든 몽골 장병들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던 호기심이기도 하였다.
“그것은 죽은 서경 낭장의 것 입니다.”
웅성 웅성
“지금 농을 하는 건가? 지금 그대가 말하는 서경의 낭장이 홍복원이라는 것을 우리라고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나”
“그렇습니다. 그 홍 낭장입니다. 그리고 전투가 일어나기 전에 이미 죽었지요.”
“그렇다. 그렇다면 그대는 지금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서 전투에 참여했다 말하ㄱ…”
테케는 농을 하고 있는 듯한 김방경의 대답이 무척이나 화가 났지만 곧이어 무슨 의미로 말하였는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안색은 단번에 새하얗게 되었다. 깨달았음에도 믿기 싫어 확답을 요구하는 시선을 보내니 김방경은 기어코 고개를 끄덕이며 확답하였다.
“전하께 남긴 홍 낭장의 마지막 유언이었다고 합니다.”
“…….”
“부원수. 이번 사태는 전하께서 답하신대로 서경의 일은 ‘서경의 총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부터의 일은 아조 ‘북방의 총의’일 가능성도 없다고는 못합니다.”
미간은 꿈틀리고 눈썹을 파르르 떨렸다. 입술은 달싹 달싹 움직였으나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여태껏 머릿 속을 차지하고 있던 의문의 화살을 쏜 자가 누구인지, 화살의 재료가 누구였는지 밝혀졌으나 이제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죽어서까지 남긴 홍가의 광기와 집착이 저들이 말한 서경의 총의란 것과 맞물려 지금까지 헛소리와 허세로 일축했던 고려의 광기라는 것이 저 연기 밑에서 또아리틀 틀고 언제든지 들이닥칠지 모른다는 무형의 압박이 되었다. 자신은 지금 그 광기의 편린을 본듯한 오싹함을 느꼈다. 그렇게 한참을 입술을 달싹 거리던 테케는 결국 한보 물러나기로 했다.
“……그대가 생각하기에는 화약을 맺는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적당하다 싶다고 하던가?”
이 일촉즉발의 광기가 고작 세자의 선에서 결정된 것으로 가라앉을 리가 없었다. 섬에 있는 고려 왕과 직접 소통하여 정식으로 맺는 것이 나을 것이다. 또한 아무런 대가 없이 퇴각을 하는 것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원수가 전사한 시점에서 이번 전쟁은 예케 몽골 울루스의 패배 혹은 고전한 것으로 밖에 안보일 것이며 실제로도 포위되어 위험한 상황이었다. 여기서는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고려국의 체면을 세우기 위해 이쪽도 어느 정도 양보해야 한다. 그렇게 화약을 맺을 의사를 보여야 북방의 고려인들도 인정 할 것이다. 그리고 테케의 생각을 김방경 또한 이해 한 바였다.
“그렇군요. 어디까지나 소견에 불과하지만 이 경우에는….”
“그렇다면 그 경우 고려국에서는….”
테케는 김방경을 상대로 조건을 내밀며 한참을 후일 문제의 소지가 되는 일 없는 것을 검토하였다. 둘은 그 자리에서 생각 해낼수 있는 모든 대안을 검토한 끝에 조건을 내밀었다.
“알았다. 그대와 세자 전하의 뜻은 잘알았으며, 화친에도 응할 것이다. 허나, 화친을 먼저 청하는 사람을 보내는 것은 귀국이 해야 할 것이다.”
테케는 화약을 순응하면서도 예케 몽골 울루스에서 먼저 나오는 것은 상국의 체면이 서질 않고 그렇게 돌아간다면 대칸께서도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니 형식상 정식 사자는 고려에서 먼저 보낸 것으로 한 것으로 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김방경도 이 문제에 대해선 공감이 갔던지라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확답은 할수 없으나 아조에서도 그럴 것이라 생각되는 군요.”
* * *
“보아라. 서경에서 올라온 보고에 따르면 몽골군의 원수 살례탑이 서경성에서 화살을 맞고 전사하였다고 한다. 살례탑이 누구더냐? 지난 전쟁 때에도 아국의 국토를 불태우고 백성들을 살육한 잔혹무도하고 탐욕적인 몽골군의 총 사령관이 아니던가? 그런 자가 서경성에서 화살을 맞고 죽고 그가 이끌던 몽골의 정예군은 패군(敗軍:패한 군대)이 되어 퇴각을 하다가 아조의 군대에 포위되어 화약만을 청하고 있다고 한다. 일찍이 아조가 몽골군과 대적하여 이런 대승을 거둔 적이 있더냐?”
“감축드리옵니다. 폐하!”
“폐하. 서경에서 온 전령이 말하길 이번 서경성의 전투에서 어리신 황자 전하께서 친히 견룡군들을 이끌고 성벽 위로 올라가 화살을 쏘아 적을 맞추고 서경의 병사들을 독려하여 사기를 진작시켰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이번 승리는 모두 황자 전하의 공이며, 어찌 고려 황실의 공이 아니라 할수 있겠습니까?”
“폐하. 고려의 황자 전하께서 천하를 진동케한다는 몽고국의 원수를 쓰러트렸사옵니다. 황자 전하께선 고려국 황실의 만년 흥복[萬年之興福]이 옵니다! 또한 서경에서 힘껏 싸운 병사들에게도 특별히 상을 내리고 치하하여 주시는 것이 마땅한 것으로 사료 되옵니다. ”
몽골군의 남하가 전해지자 국가비상사태에 돌입하고 있던 고려 조정은 서경에서 올라온 승전과 몽골군의 화약 요청 상황이 전해지자 분위기는 반전되었다. 왕후가 죽고 제대로 치루지 못하고 돌아온 이후 얼굴에 더 깊은 그림자를 끼고 있던 고려왕도 이 소식을 듣고는 얼굴에는 근심이 사라지고 입에선 미소가 띄어올랐으며 말을 하는 목에는 힘이 들어갔다.
“암. 경들의 말들이 모두 옳도다. 서경의 병사들은 물론이고 어린 황자도 참으로 큰 공을 세웠도다. 크게 치하해야 마땅하도다. 마땅하고 말고! 여봐라. 성벽에서 물러남 없이 지휘를 한 상장군 이자성에게 황금(12근) 1냥과 은병 20개를, 황자를 보필하여 맞서 싸운 용호군 낭장 김방경에게 은병 1개와 모시베 5필를 하사하고, 용호군을 비롯한 서경의 병사들에게도 술과 고기를 푸짐하게 보내도록 하라!”
“폐하. 저들의 화약 요청은 어찌하는 것이 좋겠나이까?”
그들도 화약의 조건을 들었다. 보낼 때는 회답이 아닌 이쪽에서 화약을 청해달라는 식으로 보내달라는 요청을 듣기는 하였으나 그것도 어디까지나 화친을 맺는다는 전제에서 논할 문제지. 우세를 점한 지금 화친을 거부하고 이대로 몽고적들을 섬멸한다는 선택지도 가지고 있었다.
“짐은 화약을 받아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만,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기탄없이 말하도록 하라!”
“받아들이는 것이 낫다 생각하옵니다.”
문하시중 최종준은 그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즉시 답하였다. 살리타이를 쓰러트려 기선을 잡았다곤 하나, 몽골 제국은 여전히 강력하였고, 병력도 많았다. 금나라의 힘에 기대여 위기를 타파해보자는 의견이 도방 내에서 거론되고는 있으나 최종준 자신이 생각하기엔 금에는 더 이상 가망이 없어 보였다. 사소한 승리에 정신을 잃고 몽골을 자극하기엔 고려는 거란족과 몽골과의 연이은 전쟁에서 입은 피해가 완전히 복구되지 않은 상황이 였다. 이에 대해선 다른 신료들도 별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폐하, 침략해온 것은 저들이옵니다. 비록 원수가 전사하긴 하였으나 상당수의 몽골군은 온전히 살아있사온데 그들을 고이 돌려보내주는 것은···.”
청하상국 최우는 화약을 맺는 것에 완곡하게 반대를 표했다. 정권을 쥐고 있는 그로서는 고려에 비간섭과 무관심하였던 금과 달리 사신들도 무례하고 고려 정치에 간섭하려는 기색이 강한 몽골과의 화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재전(再戰)을 결심하고 천도를 추진 한 것도 저들이 다루가치들을 설치하고 왕자를 보내라는 요구를 하며 노골적인 개입을 보였기 때문이다.
만약 몽골의 군대가 서경을 너머 한반도 중부,남부까지 내려오며 피해를 주었다면 최우로서도 전쟁이 이른 것을 알고 있기에 피해 복구와 다음 전쟁 대비를 위해 잠자코 돌려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몽골군과 지휘관은 서경에서 막히고 되려 저번 전쟁에서 부터 눈꼴시던 원수까지 잃고 돌아가다 막힌 패군지장이 아닌가? 피해도 적은 만큼 북방에서 좀더 전투를 벌여 몽골군의 수급을 취하는 것도 문제가 없어 보이기도 했다.
만약 몽골과의 승전을 더 얻을수 있다면, 지난 전쟁에서 받은 치욕을 전부 설욕하고 반몽을 주장한 자신의 위상이 더 빛이 나고 고려 내에서 몽골과의 저항은 더 키울수 있을 것이다. 최우에게 있어 겨우 연이은 승전으로 이어질수 있는 우세를 잡아놓고 이대로 놓고 그냥 보내는 것은 너무나 아쉬운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