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yo Black Prince RAW novel - Chapter 148
148화
19장 밀당
왕식의 말에 세늘부진은 끙끙거리더니, 이내 거칠게 머리를 박박 긁고는 짜증과 진심이 섞인 말과 함께 반쯤 승낙의 의사를 밝혔다. 현 상황이 결코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언제 올지 모르는 카치운 왕가의 사람과 조정의 감찰관에게 동요국과 첩가의 배후만이 아니라 금 황녀 소문도 옷치긴 왕가에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 알려지는 것도 상당히 좋지 않았으니, 둘 다 별로라면 일단 들어보기로 한 것이다.
“젠장. 그래서 고려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안 그래도 예의 없던 세늘부진의 말투가 더 거칠어졌음에도, 그것이 먹히고 있다는 증거라는 것을 아는 왕식은 눈 하나 찡그리지 않고 순순히 요청을 들어놓았고 둘은 1시진하고도 반시진(총 3시간) 동안 갑론을박, 조건, 조정 등의 밀당 끝에 겨우 밀약을 맺을 수 있었다.
* * *
“이상 이 결과만 나온다면 아조는 절대 테무케 님의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오.”
“…나는 모르겠습니다. 일단 말해보기는 하겠는데 테무케 님께서 이를 어찌 받아들일지 나는 장담을 못 한단 말입니다.”
“하하하. 그렇다면 아조는 이웃한 테무케 님께서 아량을 베풀어주시기만을 빌 뿐이오.”
“…그러나 이것을 전부 승낙하시든, 불가하시든 요왕의 문제는 우선 태자께서 알아서 설득해 주셔야 할 것입니다.”
“물론입니다.”
* * *
“그리 말하란 말인가?”
“…….”
“…아니. 과인에게 다른 길이 없는 이상 그리 할 수밖에 없겠군.”
“이것으로 요국은 존속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려 태자는 그것을 존속하는 것이라고 봐주는가?”
그 질문에는 나도 차마 바로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동요국은 좋든 싫든 마지막 재기를 노린 전쟁에서 패했다. 그 때문에 자국의 힘으로 부국강병(富國强兵)을 하는 길은 끝이 났다. 그런 그에게 남은 길은 가족들의 목숨을 구명하는 것과 요국이라는 나라 이름을 아직은 내걸 수 있는 것뿐이며, 이마저도 원 역사대로 해도 결국 손주 대에 형식뿐인 나라의 문패마저 내리고, 어쩌면 이 일로 더 빨리 속령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그러나 다행히 야율설도도 현실을 알기에 이 이상 내게 원망의 소리를 내뱉지는 않았다.
“미안하네. 과인이 무능하여 일어난 일일 뿐인데. 타국의 태자에게 말하는 것이야말로 수치이거늘… 태자는 그저 패자의 헛소리라고 듣고 한 귀로 흘려주게.”
“…전하께선 본국에 해를 끼치려 했습니다. 이에 대해선 따로 재고할 이유도, 가치도 없습니다. …그러나 국왕 전하께서 자국을 위해 한 노력과 행동만은 절대 폄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야율설도는 내 말에 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잠시 침묵하더니 작게 답했다.
“…그런가.”
그렇게 답하는 왕의 속내가 어떨지는 나는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다. 아니, 너무나 이해할 것 같기에 더욱 저 입장이 되고 싶지 않을 뿐이다.
* * *
“이번 사태는 귀국의 장수 설무아지란 자가 첩가와 손을 잡고 일으킨 사태란 말입니까?”
“그렇네. 고려국을 친 것은 결코 본국의 진의가 아니었네. 설무아지는 본국의 장수이긴 하여 본국의 병장기를 사용하긴 했으나 그것은 본왕의 의지와는 달랐네.”
“또 반란이라니….”
카치운 왕가에서 온 감찰관에게 대답하는 야율설도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힘이 없었다.
통주에서 죽은 설무아지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까지 오면 그가 야율설도의 몇 안 되는 충신이자, 장수라는 것 정도는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그런 그를 자기가 보내 죽인 것도 모자라 반군이라고 까지 하는 상황이었으니 얼마나 착잡하고 비통할까.
그러면서도 나라를 지키고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그 충신을 반군으로 몰아야 하는 왕의 모습은 그야말로 애처롭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압록 이남의 지역에서 고려를 친 것도 그 설무아지와 손을 잡은 주르첸들의 움직임도 결코 국왕 전하의 뜻과는 달랐다. 이것도 사실인지요?”
“…그렇네. 과인이 부덕하고 능력이 부족한 터라 이런 참변이 일어나 참으로 고려에는 유감스럽게 생각하네.”
야율 형제는 지난 전투에서 패전으로 저항은 무의미하다는 것도 알 것이고… 순순히 말을 맞춰주었다. 그거 외엔 자신들이 더 피해를 받을 것이 뻔했으니 말이다. 덧붙여 카치운 왕가에서 온 감찰관은 현 카치운 왕가의 왕인 알차다이 노얀이 마침 오르콘강에 가 있어 본인에게 명을 받고 오지는 않았고 어디까지나 대리자에게 허락을 받고 와 그 위계는 세늘부진보다는 높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감찰 임무를 게을리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도리어 조금이라도 조정의 감찰관이 오기 전 많은 것을 알고자 조금이라도 의심스럽다 싶은 것은 재깍재깍 물으며 거듭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
“고려 세자께선 정녕 군을 이끌고 와야 했습니까? 이야기는 들었지만 구태여 이렇게까지 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보이진 않습니다.”
“감찰관이 말하고자 하시는 바는 알겠으나 소방은 병자년(丙子年=고종 3년=1216년)에 요동에서 요국에서 분열한 요수국 금산왕자(金山王子)가 무리를 이끌고 쳐들어왔을 때 제때에 대응하지 못해 초기의 화를 잡지 못하였고,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게 되었소. 그 결과 수년 동안 백성들과 나라가 고통에 헐떡이다가 무인년과 기묘년(戊寅年~己卯年=고종 5~6년=1218~1219년)에 겨우 상국의 은덕을 받아 힘을 합친 끝에야 거란적들을 완전히 소탕하였소.
이번에는 제때 통주에서 막기는 하였으나 저들은 본군이 올 것이라는 말로 아조를 겁박하고, 동하는 물론, 상국도 아조를 칠 것이라는 낭설도 떠돌자 아조를 겁박하였고, 동북면에서는 동하의 침공이 오는 데다가 상국에서 아조를 칠 것이라는 낭설이 떠도니 다시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사직(社稷)을 폐허로 만들 것이 뻔한 일이었소.
이 때문에 자세한 진상을 규명하고자 서둘러 강을 건넌 것인데 국왕 전하께서는 내가 간곡히 드린 말을 자세히 살펴보지도 않고 떠도는 말만 듣고서 군을 보내 쳤다가 천산에서 크게 싸운 것이오. 아조가 어찌 은혜를 받은…
(중략)
…하여, 이제 상국의 감찰관들이 와 아조의 억울함을 풀어주실 것이니 어찌 기쁘지 않겠소?”
나는 그 말을 끝으로 할말을 다했다는 듯 한 표정을 지었다. 실제 이쪽에서 현재 하고 싶은 말은 이것으로 끝이다.
“…세자의 말은 잘 들었습니다. 하나 본인은 말을 삼가겠습니다. 직접적으로 관여되고 현지에 있었던 테무케 님이나 요와 고려와 달리 본인은 보고가 올라오는 동안 이런 사태가 일어나고 있는지도 몰랐으니 어찌 함부로 판단하고 입을 놀리겠습니까. 그저 조정의 정식 감찰관이 오면 건네줄 수 있게 조사를 할 뿐이지요.”
이번 감찰관은 좀처럼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 * *
강화도.
강화도의 조정은 통주에서 고려군이 거란군을 상대로 대승을 이루었다는 승전 보고가 올라왔을 때 만하여도 모두가 왕식의 승전을 찬양하고 있었다. 다른 곳도 아닌 수십만 장병이 와해된 전적이 있는 통주에서 거란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것이 퍽이나 기뻤으며 당장 왕식이 올린 장계 말미에도 이로써 현종대제 때 삼수채의 패전(2차 여요 전쟁 시기 통주 전투)을 설욕하여 한을 갚게 되었다고 명시하여 더욱 승전을 기쁘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며칠 후 동북면 갈라전에서도 승전을 하였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고려는 이걸로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연회를 벌이려는 등 그야말로 샴페인을 터뜨리는 분위기가 만연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왕식이 강을 건너 동요를 치려 한다는 소문이 올라오자 이러한 화기애애함은 단번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며 박살이 났고,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폐하! 어서 어사(御史)를 보내 태자 전하를 회군토록 하여야 하옵니다!”
“그렇사옵니다. 동요국은 북조의 속국이옵니다. 우리가 그들과 전투를 벌이고 통주에서 크게 이기긴 하였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침을 방어한 것이지 요동으로 가서 동요국의 성을 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태자 전하께서 하시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이며, 이는 종달새가 매의 날개를 찢으려는 짓으로, 백성들로 하여금 도탄에 빠지게 하고 사직(社稷)을 폐허로 만드는 일입니다. 서둘러 칙사를 보내 막아주시옵소서!”
세자의 활약이 뛰어난 것은 사실이나 이것은 안 된다. 입을 연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반대하였고, 왕 또한 내심 그것에 공감하였지만 정작 사람을 보내는 것에는 선뜻 명을 내리지는 않았다.
“…….”
“폐하. 부디 태자 전하에게 회군의 명을 내려주시옵소서!”
“폐하. 이리되면 요국이 문제가 아니옵니다. 외지로 갔다가 북조… 아니 몽고적들에게 납치라도 된다면 나라의 국본이 흔들리게 될 것이옵니다.”
“회군이 안 된다면 부디 태자 전하만이라도 소환시켜 주시옵소서!”
신료들은 회군의 요청이 안 먹힐 것 같다고 판단하자 세자를 구명하기 위해서라도 세자만이라도 소환시켜달라는 주청을 올렸다. 그러나 출병한 군대에서 총지휘관인 세자만이 소환된다면 어찌 되겠는가? 신료들은 세자를 소환한다면 자연히 병사들도 회군시키라고 명을 내릴 것이라 판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왕은 이번에도 그래도 이렇다 할 말을 하지 않았다.
결국, 왕이 이에 대한 명확한 답을 내리지 않고 대전을 떠나자 다음 날 대전 안에 참가하지 못하던 무인들도 문신들처럼 돗자리를 펴고 태자 전하를 구명해달라고 애원하기 시작했다.
“폐하! 태자 전하를 구명하여 주십시오!”
“폐하. 차라리 신에게 출병의 명을 내려주시옵소서! 신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태자 전하를 구해 오겠사옵니다!”
문신들과 무신들의 목적이 달랐다곤 해도 문무신료 모두가 왕에게 주청을 하는 그 모습은 권신이 왕을 압박할 때의 광경을 연상케 했고, 이 사태가 되면 왕들이 버티지 못하고 수락했던 것을 알던 신료들은 이번에도 얼마 버티지 않고 세자에게 회군을 요청토록 할 것이라 믿었다.
“…….”
환관 고행은 미간을 찡그린 채 침묵만 하고 있는 왕의 모습에 불안을 느껴야 했다.
왕의 이러한 모습은 흔치 않았다. 그러나 현재 어떠한 생각을 하고 하려고 하는지 환관인 그도 짐작도 못 했다. 권신들이 있을 때도 제대로 속내를 들어놓지 않던 왕이었는데 거사 이후로는 더욱 알기가 힘들었다. 그렇기에 고행은 뭐라 말을 건네야 할지 몰라 더 불안을 느껴야 했다.
그런 침묵 끝에 왕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기거주는 지금 동궁으로 가 태자비를 불러오라.”
“황명 받잡겠사옵니다.”
고행은 떨리는 목소리를 겨우 진정시키며 동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근래 들어 소문이 자자한 세자비를 부르다니 분명 뭔가 생각을 하고 계신 것은 분명한 것이다.
* * *
“…….”
“…….”
그러나 세자비를 부른 왕은 정작 부르고도 한참을 말도 없이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세자비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왕이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왕은 세자보다 어느 날 갑자기 며느리가 된 세자보다 훨씬 큰 세자비를 물끄러미 주시하며 차를 마셨다.
그에 세자비는 그저 요지부동 침묵만 했다.
양자 모두 침묵 속에서 반각이란 시간이 지났고 왕은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태자비는 세간에 들리는 말은 알고 있는가?”
“…알고 있사옵니다.”
“…금 황녀의 소문도 말인가?”
“…그렇사옵니다.”
“그렇다면….”
순간 진상을 확인하려고 하였던 왕은 별안간 말을 멈추고 다시 침묵했다. 세자비도 침묵했다. 다시 방에는 침묵에 잠겼다.
이번 침묵은 반각도 가지 않아 다시 왕이 입을 열며 깨졌다.
“알겠다. 근래 들어 나라의 소문이 흉흉하고, 태자가 북방에서 힘을 쓰고 있다 하여 태자비가 근심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불러보았다. 태자비는 이만 물러나 자숙하고 있으라.”
왕은 그렇게 세자비를 보냈고, 세자비가 공손히 인사를 하고 떠나자 세자비가 떠나자 왕은 큰 한숨을 내쉬며 질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후우. 태자는 어찌하여 이 애비의 속을 썩이기만 한단 말이냐.”
왕은 그 직후 벌떡 일어나 대전 앞에서 돗자리 상소를 올리는 문무신료들이 있는 곳까지 가서는 엄숙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경들은 짐을 보고 태자에게 황명을 내려 소환을 하라고 청하고 있는데 짐은 그리 생각지 않으니 그 이유 3개를 설명하겠다.
이 보고는 태자의 이름으로 올라온 것도 아니라 북계 주둔군 이자성의 부장 홍희가 제 임의로 올린 것이니 인정할 수 없는 것이 첫째로 불가한 이유다.
또한, 태자가 이미 강을 건넜다면 이미 활은 시위를 떠난 것이나 다를 바 없으니 지금 와서 회군이나 소환령은 안 하는 것만 못하니 불가한 둘째 이유다.
마지막으로 태자는 엄연히 군권을 쥐고 전시 작전권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활용한 것이니 태자가 전시판단 하에 압록강을 건넌 것에 어찌 전시에 전후 사정도 따지거나 알아보지 못한 채 장수를 소환한단 말인가? 이것이 세 번째 이유다.
태자가 진정 그러한 결정을 내렸다면 그러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짐의 대답은 이것이 끝이니 경들은 이만 물러나라!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얼마 안 가 아태자에게서 장계가 올라올 것이니 그때 다시 판단하여 결정하면 될 일이로다.”
왕은 확실한 뜻을 밝히고는 다시 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선언이 끝나기 무섭게 날이 채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세자의 장계가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