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yo Black Prince RAW novel - Chapter 158
158화
25장 논공행상(論功行賞)(2)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해동명장전은 조선 1816년(순조 16년)에 신라·고구려·백제·고려 및 조선 인조 때까지 가장 걸출했던 한국의 명장 46명의 전기를 엮어 간행된 책으로 서양으로 치면 플루타르크 영웅전(Lucius Mestrius Plutarchus)과 비슷하다면 비슷하다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신라의 김유신(金庾信), 고구려의 을지문덕(乙支文德), 안시성주(安市城主*양만춘이라 알려진 위인.), 고려의 유금필(庾黔弼), 강감찬(姜邯賛), 최영(崔瑩). 조선의 이순신(李舜臣), 권율(權慄) 등 이름만 들어도 아는 명장들도 수록되어 있다.
이 이야기를 지금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김경손과 함께 갈라전으로 갔던 ‘송문주(宋文胄)’도 이 해동명장전에 당당히 이름을 기입되어 있었는데, 그가 바로 내가 장계를 보다가 갑자기 시선을 집중하게 만든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이게 사실이면 정말 명장전에 넣을 만한 실력인데?’
부령에서 벌인 전투 과정을 읽으면 타카차르가 이끄는 몽골 기병을 송문주가 이끄는 소수부대가 날개의 본군이 올 때까지 막았고, 그렇게 시간을 번 사이에 고려군이 첩가가 있는 군대를 궤멸시켜 이긴 것 같다.
이 말은 송문주는 타카차르가 이끄는 몽골 기병을 소수부대로 야전에서 막았다는 말이 된다.
요동에서 구유크를 따르는 몽골군들이 사냥터에서 보여준 실력을 생각한다면 내가 저 상황에서 송문주처럼 가능했을지는 자신이 없다.
원역사에서 송문주는 박서와 함께 귀주성에서 활약을 했고, 이후 죽주산성에 있다가 몽골군이 쳐들어오자 귀신같이 몽골군의 작전을 매번 완벽히 예측하고 대응하는 작전을 짜서 다시 격퇴했다고 한다.
‘이에 주변에선 그의 귀신 같은 선견지명을 가져 승리로 이끌었다 하여, ‘귀신(鬼神)’, 귀신 같은 장수, 라 하여 ‘신장(神將)’ 또는 ‘신명(神明 : 천지(天地)의 신령.)’이라 불렀다고 했나? 순행 때나 거사 때 뭔가 재주가 있다고는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송문주가 세운 공적은 몽골군만이 아니다.
타카차르가 두만강을 건너 도주하자, 고려군은 당연히 두만강 이내에 있는 몽골에 붙어 있던 여진족들을 소탕하거나 진압하기 시작했는데, 이때도 송문주가 크게 활약을 했다고 한다.
사실을 말하면 나는 송문주를 처음 봤을 때 만해도 그가 해동명장전에 이름을 올린 명장이란 것을 눈치 못 챘다. 아니, 기억 못 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예전에 할아버지 집에서 해동명장전이란 책을 읽은 적이 있긴 했지만, 송문주가 적힌 기록 자체가 너무 적었기 때문이다.
송문주 기록은 박서와 함께 기입되어 있는데 그곳에서도 반 이상이 박서에 대해 적혀 있고 송문주는 뒤에 짤막하게 그도 참여하였다는 것과 그가 독자적으로 여몽전쟁에서 활약을 하였다는 정도의 기록뿐이었다.
내가 뒤늦게 해동명장전의 송문주라는 것을 떠올린 것은 이미 거사를 성공한 이후였고 이때 주변에선 그를 흐름에 따라붙은 것일 뿐, 완전히 신뢰하기엔 부족하다는 평이었다.
‘솔직히 거사 이후 떠올린 것도 안경후 녀석의 머리가 아픈 말투에서 송문주 별명을 기억하고 떠오른 것이니… 그래도 갈라전에서 이렇게 공을 세웠다면 이제 중용해도 뭐라 할 자는 없겠지.’
갈라전의 상황 보고는 이로써 얼추 끝이 났고 나도 정리해서 김경손이 합류하면 같이 가 귀환하면 될 뿐이다.
그러니 그가 오기 전까지 굵직한 논공행상과 신상필벌은 지금 결정하는 것이 좋다.
아, 참고로 첩가의 목은 몽골이 가져갔다.
갑오화약을 맺기 전 갈라전에서 요동으로 보냈고, 화약의 증거이자 몽골의 죄인을 전달하는 의미로 몽골에게 인도하면서 나도 봤는데, 지근거리서 직접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첩가가 죽은 이상 동하국은 정말로 끝이 날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서경에 살고 있는 가짜 황녀 정도인데 그녀는 가짜라고 선언된 게 오래고 상황상 다시 주목받을 가능성도 낮으니 문제없다.
“전하. 갈라전 병마사 완안자연에 대한 일은 어찌하면 되겠사옵니까?”
“그렇사옵니다. 그는 갈라전을 지키는 막중한 업무를 짊어지고 있었음에도 이번 전쟁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사옵니다. 이번 기회에 그를 내치고 부병마사를 병마사 자리에 두거나 혹은 새로 장군을 내려보내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아마도 이건 서경의 신료들만의 뜻이 아닐 것이다. 출병하기 전 조정에서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런 말이 나올 만큼 확실히 그는 병마사라는 위치에 있으면서 이번에 한 것이 너무 없다.
남갈라전과 서북면이 전쟁으로 시끌시끌한데 북갈라전에선 이렇다 할 원군을 보내오지 않았다느니, 문책해야 하다거나 하는 말은 충분히 나올 법하다.
‘그러고 보니 전쟁이 무사히 끝난 지금 이 문제로 가장 노심초사할 건 완안자연이구나. 전쟁이 없었으니 이렇다 할 공도 못 세웠고, 주변에선 아군이 위험한데 도와주지 않은 겁쟁이로 보는 시선도 생겼고, 금 황녀 발언이 진짜인지도 의심받고 있을 테니까. 지금이라면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병마사 자리에서 내려오게 한 다음 좌천 보내기도 쉽긴 한데….’
“그건 아니 될 말이다! 비록 이렇다 할 공적을 내지 못하고 남갈라전의 위기에서 수수방관을 한 것이 있긴 하나, 완안 병마사가 북갈라전에서 군대를 빼내지 않고 수비를 고집한 것은 결코 큰 죄가 아니다.
그가 병력을 빼지 않았기에 아조는 북갈라전을 지킨 것이기도 하다. 실제 적군의 경성의 퇴각은 아군을 갈라전 깊숙이 빼내려는 적의 술책이었지 않았는가!”
“하오나 병력을 일절 보내지 않은 것은 수상하옵니다. 장계에 의하면 부병마사가 원군을 청하는 전령을 보냈으나 이에 대한 이렇다 할 답이 없었다 하지 않았사옵니까?”
“그것은 북조 노왕의 병력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기에 하는 말이다. 북조 노왕은 마음만 먹는다면 수만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고 하나같이 강병들이다.
거기다 동요국 또한 노왕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것이 이번 전쟁의 전말이거늘, 확실한 방안 없이 무턱대고 군을 뺐다가 북갈라전이 탈취되면 그때 가서야 군을 빼지 말았어야 한다고 탓할 생각인가? 이는 강화 조정에서도 과인이 공언한 것이로다.”
완안자연 문제에 대해선 내가 딱 잘라 선을 긋자 더 이상 완안자연을 문책하거나 사직시키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완안자연이 진짜 전략적인 목적으로만 근거하여 안 보낸 것인지는 모르지만 구유크와의 금 황녀 건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지금 완안자연을 좌천시킬 생각은 없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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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갈라전을 구원하러 간 천군이 승전을 거두었다는 보고는 이미 들었을 것이옵니다.
하오니 공을 세운 이들에게 후한 상을 내려주시옵소서. 또한 의병 이안사 외 5인에겐 품계를 내리고 그들로 하여금….
(중략)
…장성 이북에 성 쌓는 일과 군량(軍糧) 수송 등의 일을 전에 이미 의논드렸으나, 제대로 땅을 갈지 않아 장성 이남만큼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따로 사람을 보내어 취정(吹正) 한다 해도 한두 달 안에는 마칠 수 없습니다.
거기다, 이곳에 살던 자를 지내게 하였다간 곧바로 강을 건너 도주할 수도 있어 감히 이번 전쟁에서 잡은 동요 포로들을 전부 사변하여 촌락을 만드는 것은 힘들다 사료되옵니다.
소신이 생각하기엔, 장성 이북에는 일부 병력을 보내 방책을 형성하고 북계의 군대가 지낼 둔전을 만드는 것이 어떠한가 생각되옵니다.
이때 둔전을 만들 인력은 이번 전쟁에서 잡은 포로들 중, 거란보다는 한인(漢人)들과 배신한 갈라전 여진인들 위주로 맡기는 것이 마땅하다 사료 되옵니다.
그리고 이들을 관리할 자는 장성이북은 북계의 안전에 중요한 땅이므로 기량이 상당한 무재(武才)가 있는 사람을 차임(差任)하여 보내는 것이 합당하옵니다.
(중략)
대장군 채송년과 전 서북면병마사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 문하성의 정4품 관직.) 유준공(劉俊公)을 모두 외임(外任)으로 개차(改差)하여 장성 이북 지역과 각장 문제에 맡기어 양국의 다툼이 없도록 하여주시옵소서.
갈라전은 근자의 변란(變亂) 때문에 무신을 차임하여 보내는 것이 좋아 보이나 이곳은 땅이 넓고 그 땅에 토관(여진 추장)들이 각자 사병들로 다스리고 있으니 이전처럼 갈라전을 병마사와 부병마사에게 맡기어 주십시오.
다만, 소신이 지난번 순행을 갔을 때 (여진) 부락이 많아 자기들끼리 부딪칠 경우 이 문제로 부병마사에게 송사(訟事)하는 것이 빈번하다 하니, 이를 해결하기 위해 추가로 사람을 보내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하오니, 무재(武才)가 있는 문신(文臣)을 보내 송사를 판결하고, 그 외에는 부병마사와 본국에서 벼슬을 내린 토관(이안사 등)을 통해 관리 한다면, 변방 방어와 백성 다스리는 일 두 가지 다 잘될 것입니다.
이때, 갈라전의 여진인들이 함부로 경시하지 못하게 문신 중에 무재(武才) 있는 사람이라면 직급(職級)의 차례가 상당하지 못하면 품계(品階)를 올려 차임해서 보내더라도 또한 무방할 것입니다.
신이 생각하기에 이 소임은 현 왕경유수 김인경이 적임이라 생각하옵니다. 왕경유수 김인경은 예서를 잘 쓰고 시사(詩詞)가 청신했으며, 문인으로서 명망이 있사옵니다.
그리고, 문신임에도 무예와 행정 면에서도 능력이 뛰어나 진의 엄숙함과 배치하는 능력은 몽고의 장수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이니 갈라전의 병사들에게 진을 가르쳐 국방을 지키게 하는 것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옵니다.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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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준공은 1232년에 동북면 병마사 박돈보와 더불어 서북면 병마사에 올렸는데 2차 여몽전쟁에서 살라타이의 진군을 막지 못한 것을 빌미로, 거사 이후 강첨과 교체되었는데.
이번 갈라전 전쟁에 김경손 부장으로 동행하며 경성과 부령에서 힘껏 싸워 공을 세운 것이다.
그 외에도 장계에는 갈라전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송문주와 김경손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으며, 승진을 해줄 것을 거듭 청하는 내용과 구유크에게서 백두산을 고려의 땅으로 인정받았다는 사실과 백두산을 얻은 것을 천하에 천명하고자 제문을 올려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아태자가 공을 세웠구나. 또 공을 세웠어! 이제는 아예 세 치의 혀로 영산을 반환받았다는구만! 우리의 영산을! 아암! 태백산(*이 시기 백두산보다는 장백산, 태백산으로 더 자주 불렸다.)은 본국의 영산이지. 영산이고 말고! 이러한 영산이 본국의 손에 완전히 돌아왔으니 본국의 기운이 다시 창성하게 필 것이로다. 참지정사는 서둘러 태백산에 올릴 제문을 짓도록 하라.”
사실 이 시기 백두산은 고려의 영산 중 하나긴 하더라도 아주 높게 본 영산은 아니었으나, 이 백두산을 인정받은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세자라는 것과 세자 본인도 장계에 백두산은 고려의 영산으로 절대 가벼이 여기거나 허투루 봐서는 안 되니 제문을 올려 만천하에 알리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적은 것이다.
이렇게 되자 왕은 왕실의 권위와 공을 치계하기 위해 크게 치하한 것이다.
왕은 백두산에 올릴 제문을 짓는 인물을 결정하는 문제에 대해선 일말의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참지정사 이규보에게 맡기었다.
이규보가 명문(名文)이라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것이었고, 실제 여러 산에 제문을 올린 경험도 있으니 그가 짓는 것만큼 백두산에 대한 예우를 다 하는 것이 없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이규보는 제문을 정말 짓고 싶지 않았다.
백두산에 제문을 올리는 행위 자체를 꺼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요새 정말로 피곤했기 때문이다.
거사 이후 세자의 눈밖에 들지 않게 열심히 시키는 대로 한 이규보는 근래 들어 자기의 업무가 너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친구 최종준도 내부에서 세자가 바라는 대로 온건하게 유도하는 일을 하고는 있었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자신은 일이 많다고 느낀 것이다.
해동의 문자 창제와 사용문제 경우는 명성으로 봐도 일의 주제로 봐도 자신이 빠질 수 없는 문제였기에 담당해야 했고, 소싯적에 만든 동명왕시조 가무는 자신의 체면상 빠질 수 없는 문제였다.
이것만 해도 힘든데 근래 들어 안경후의 청까지 더해져, 당분간 글을 짓는 것은 쉬고 싶은 심정이었던 것이다.
그렇다 보니 지금 제문 관련은 어지간하면 다른 문인들에게 양보하고 싶었다.
최안(=최자)이나 김구 등 적절한 인사는 따로 있다고 말하며, 거부하고 싶었다.
“실로 합당한 처사이옵니다. 분명 태자 전하도 참지정사의 제문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옵니다.”
“그렇사옵니다. 태자 전하는 평소에도 참지정사를 보고 ‘우리나라에 이러한 문인이 있어 참으로 자랑스럽구나. 문과 관련된 일에선 참지성사에게 맡기는 것이 적임이로다’라고 평하였사옵니다. 이 제문을 참지정사께 맡긴다는 것을 알게 되면 태자 전하도 분명 기뻐할 것이옵니다. 폐하.”
“그렇다. 짐이 생각하기에도 이 제문을 짓는 대사의 적임은 참지정사 외에는 없도다. 참지정사는 어찌 생각하느냐?”
“…자자손손 이름을 남길 대사를 맡겨 주시어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그 날, 이규보는 가택에 돌아오고 난 다음 과음을 하였다고 한다.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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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19년(1232년) 1월
기해일. 대장군 박돈보(朴敦甫)를 동북면병마사로, 우간의(右諫議) 유준공(劉俊公)을 서북면병마사로, 최임수(崔林壽)를 지서경유수(知西京留守)로 각각 임명했다.
– 고종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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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준공은 충주 유씨 조상분 중 한 분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