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yo Black Prince RAW novel - Chapter 190
190화
37장 역모(2)
나는 정치를 잘할 줄 모른다.
그런 내가 어째서 상대적으로 유능한 만전(최항)이 아닌 만종을 허수아비로 골랐는지는 간단하다.
너무나도 단순하고도 간단명료한 이유로 최항도 무능하다는 것이다.
만약 최항이 최충헌이나 하다못해 지 애비인 최우급의 능력이라도 된다면 탐욕의 정도를 보고 기용하는 것도 조금은 생각해 봤을 것이다.
그렇지만 국방 문제를 제외한다면 적절히 이용할 줄 아는 최충헌과 자기 권력 보존에서는 탁월한 능력을 가진 최우와 달리 만전은 여러모로 미숙했다.
본래 역사에서도 최항을 기점으로 든든하던 최씨 정권이 흔들리고 몰락을 시작했던 것도 그의 무능함이 때문이 아니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문제는 그러면서 탐욕은 조부와 부친과 비슷하거나 이상이라 여러모로 답이 없다.
그래서 이용해 먹기 편한 만종을 택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른다는 생각으로 보험 개념으로 놔뒀는데 이번에 보여준 걸 생각하면 정말 기용 안 하길 잘했다.
가만히 있으면 반은 간다는 말이 사실이다. 만종 녀석 봐라. 그에 비해 만전과 이 지방은….
‘거사가 끝난 지도 벌써 1년이 다 되어가는데 여즉 조정보다 우봉 가문의 눈치를 보는 이들이 이리 많으니… 생각해 보니 우봉 가문의 힘과 헛된 욕망을 거세시킬 때가 되긴 한 것 같기도 한데 이번 기회에 만종의 힘도 좀 더 빼둘까?’
물론 만종을 죽이거나 할 생각은 없다. 무능한 놈이 있어야 이용하기 편한데 왜 지우겠는가.
적당히 정도전~이방원이 조선 초 호족들의 사병을 혁파하면서 자기 측근들을 달랬듯이 무력은 거세시키되 적당한 관직이나 상, 임무를 맡기면서 이용하는 것도 좋으리라.
일단 만종에 서찰을 보내는 것은 물론 조정에도 이번 일을 장계를 적어 보냈다.
만종에게 보내는 데 무슨 일이 생기는 게 아니냐고?
만종 놈이 그럴 놈이었다면 옛날 옛적에 서해에 계신 이 몸의 조상님과 면담시켜 줬을 거다.
그 녀석은 서찰을 받아 우왕좌왕할지는 모르지만 내게 덤비는 우를 범할 담력은 없다.
* * *
강화도.
“…미친… 이, 미친놈아! 내가 그렇게 누차 조심하라 일렀거늘 기어코…!!”
완전히 예상치 못한 사태에 만종은 분통과 공포, 억울함 등 복합적인 감정에 울먹이며 이 자리에 없는 우제(愚弟)를 향해 울부짖었다.
난데없이 송광사로 갔던 태자로부터 서찰이 보내져 무슨 곡절인가 읽었더니 이게 무슨 하늘이 꺼지고 억장이 무너지는 내용이란 말인가.
어리석은 우제가 사고를 쳐도 대형 사고를 쳤다는 내용이었다.
“아무리 미쳐도 그렇지. 태자 전하의 이름을 이용해 재물을 갈취하고 겁박까지 하다니! 이놈이 미쳐도 제대로 미쳤구나. 아이고. 이를 어쩐다. 이를 어쩐단 말인고!”
만종은 발을 동동 구르며 궁리해보았으나 결국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소식을 전한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세자 본인이었다는 점에서 한 줄기 희망을 내려 준 것 같긴 하지만 그의 아둔한 머리로는 이것이 희망이란 것을 알아도 명쾌한 돌파구를 떠올릴 수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받았음에도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 그래. 서찰이라고 했지. 이랬다면 십중팔구 상소도 올라갈 것이다. 이것이 대왕 폐하께 올라가게 된다면….”
동생 덕분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마음속으로 움켜쥐며, 태자의 서찰을 들고 궁궐을 향해 가야 했다.
어차피 상소로 알게 되고, 동생의 문제를 알아차린 것이 세자인 이상 발뺌도 무리였다.
사적으론 자신의 목숨을 구명하고, 혈족으론 가문의 존속을 위해서라도 먼저 혹은 재빨리 이 사실을 알려 동생의 독단임을 알리고 형으로서 죄를 청하는 것이 그나마 죄를 덜 받을 지름길이라고 판단 한 것이다.
“신 진평후 만종. 야심한 시간 임은 알고 있으나 사태가 시급하여 황상 폐하께 아우의 죄를 고하고 용서를 구하고자 이 자리에 왔사옵니다! 부디 알현을 하신 뒤 신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이미 날이 어두워 신료들도 퇴근한 시각. 갑자기 찾아와 석고대죄하며 아우의 죄를 고하겠다는 진평후의 소(訴)에 미처 왕검의 장계를 받지 못했던 고려왕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황상 폐하께선 지금 진평후께서 무슨 이유로 밤이 다 되어가는 시각에 온 지 궁금해하고 계십니다.”
“기거주는 서둘러 전해주게. 너무나 참람한 일이라 감히 크게 말하기 저여 되어 예가 아님을 알고도 이 시각 찾아와 알현을 허락하여 달라고 청하다고 말이네. 나는 지금 죄를 빌기 위해 온 것이네.”
기거주는 만종의 말을 전하러 들어갔다 얼마 뒤 다시 나와 말했다.
“이미 날이 늦었으니 내일 일찍 대전에 나와 고하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되자 만종은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간절한 목소리로 청하였으나 기거주는 단호하게 불가하다고 대답했다.
“정녕 그리 말씀하시었는가? 내 그것이 아니 되니 이렇게 온 것인데….”
“황상의 뜻은 그러하니 부디 내일 오시지요.”
“…아니 되네! 이 일은 조금이라도 빨리 폐하께 전하여야 한단 말이네!”
그렇다고 돌아갈 수도 없으니 결국 큰 소리로 고하며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참소할 수밖에 없었다.
“일어나시지요. 지금 황명을 어기실 생각시입니….”
“폐하! 폐하께서 직접 말하라 하시니 감히 고하겠나이다. 대고려국 진평후라는 과한 자리에 있음에도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역적을 관망하였으니 죄를 청하옵니다!”
역적이라는 이야기가 나오자 그곳에 있던 왕을 수호하던 견룡군과 궁녀들은 모두가 당황했고 말리려던 기거주 또한 당황하며 서둘러 내실로 들어갔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다시 전하고 오겠습니다.”
얼마 뒤 왕은 만종을 대전으로 불러들였고, 만종은 대전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다시 무릎을 꿇으며 용서를 빌었다.
“진평후는 어찌하여 이러한 늦은 시각에 찾아와 역적이라는 끔찍한 말을 입에 담으며 짐을 알현하기를 청하였는가?”
“황상 폐하. 신의 아우는 쌍봉사에서 주지로 있어 마땅히 불공을 닦아야 하며 그릇된 일들을 해서는 아니 되는 신분이온데, 올해 능성현의 상소에서 ‘쌍봉사의 주지는 승려의 신분으로 술과 고기를 할 뿐만이 아니라 음주가무(飮酒歌舞)를 즐기고, 사람들에게 폐를 주니 해결하여주시옵소서’라는 글이 올라온 일이 있었사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소신은 아우에게 편지를 보내 ‘너는 공적으론 어려운 중생들을 도와야 하는 승려이고, 사적으론 나라의 녹을 먹는 우봉 가문의 사람인데 어찌 이렇게 하느냐. 차후 다시는 이런 오만방자한 짓거리를 하지 말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행하라’고 꾸짖었나이다.
그 후, 능성현에서 더이상 이야기가 없어 우제가 드디어 철이 들었나 생각하고 관심을 끊었는데 근래 올라온 이야기에 따르면 조정에 알려지지 않게 하였을 뿐 여전히 패악질을 저지르고 금품을 갈취하였다고 하옵니다.
심지어 우제가 있는 절에 모은 무기와 병장기와 패거리의 수는 절의 수호만을 목적으로 하였다기엔 너무나도 과하다고 하니 마땅히 그 죄를 논한다면 마땅히 죽여야 하는 데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
이것만 하여도 우제의 죄는 고려 땅을 전부 덮고도 남는다 할 수 있는데 여기에 그치지 않고 갈취를 할 때는 간혹 태자 전하께 바칠 선물이니 아끼지 말고 시주하라는 참으로도 무도한 언행을 일삼으며 갈취를 하였으니 이는 하늘조차 덮을 정도의 죄를 지은 것입니다. 이것을 어찌 황실을 기망하고 나라를 욕보인 역적이 아니라 할 수 있겠사옵니까.
신은 여기서 만 번 머리를 찧고 용서를 빌어도 모자랍니다. 부디 신의 아우이자 역적 만전을 참하여 주시옵소서!”
난데없이 자기 아우를 역적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왕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진평후는 지금 이야기하는 바를 처음부터 끝까지 찬찬히 말해보라. 경의 아우가 역적이며, 황실을 기망하였다니?”
“제 우제가 역적 최충수의 전철을 밟은 것이 옵니다. 부디 신의 조부 은문상국(恩門相國)이 역적 최충수를 참하여 황실의 지엄함을 나라에 평안을 가져온 것처럼 신의 우제를 참하여 황실의 위엄을 굳게 세워주시옵소서!”
물론 먼저 직고(直告) 한다 한들,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 시기 연좌제는 딱히 이상한 문제는 아니었고, 역모에 관련된 것이라면 더욱 그러했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은 왕에게 있어서 최우 사후 많은 권력을 잃은 우봉 가문을 가장 합리적이고 문제가 적게 완전히 처리할 기회이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쉽게 처결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였다.
분명 최충헌, 최우 시기에 비한다면 지금 만종이 가진 권력은 세자가 있었을 때는 물론 없는 지금 와서도 이전 권신들의 힘에 비해 조족지혈에 불과했다.
그러나 강화도로 넘어올 때 귀족들과 신료들 중 가장 사병이 많은 것은 당연히 최우였고, 거사 이후 최우가 처리되었음에도 관군을 제외한다면 최우를 뒤이어 우봉 가문의 가주가 된 만종의 것이다.
우봉 가문의 사병들은 예전보다야 줄어들었으나 여전히 많이 주둔하고 있다는 점인데 공신이라는 이유로 완전히 해산되지 않았다.
이쪽의 우군이었을 때는 그 사병마저 이용하여 새로운 권신이 나오려 한다면 사전에 막거나 제압하는 힘은 되는데 보탬이 되는 정도는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세자가 자리를 비웠다는 점도 매우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여기에는 진평후의 입장도 마냥 무시할 수 없다는 것도 있었다.
거사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단속사에 있던 그가 단숨에 우봉 가문의 당주가 되고 공신이 되어 진평후로 봉해진 것은 순전히 거사의 지휘자인 세자가 공신이라고 말하고 지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자가 없는 이 상황에서 세자에 죄를 진 것 같으니 용서를 구하는 그를 단숨에 삭탈관직(削奪官職)한 후 처리한다?
어찌 되었든 세자의 일행인 그를 세자의 말 없이 처리한다면 세자의 대계를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닌지 왕은 문득 걱정이 든 것이다.
“진평후의 갸륵한 충정은 알았도다. 허나, 이 일은 진평후가 지금 고한 대로 가벼이 넘길 사태가 아니니, 지금 이 자리에서 바로 결정을 내리는 것은 어려운 바이다. 하여 진평후는 일단 자택으로 돌아가 자숙하고 있으라.”
그렇게 돌려보낸 왕은 정확한 상황을 알지 못하니 결정 내리기를 보류한 자신의 선택이 맞았다 생각하며, 내일 대전에서 신하들에게 이 문제는 세자가 온 후 처리하자는 뜻을 전달하기로 마음먹으며 잠에 들었다.
그러나 왕은 알지 못했다.
불안하여 보류하는 이가 있다면, 불안한 상황만을 기다리는 이들도 있는 법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다음 날.
“폐하! 아우가 역적인데 형이 모를 리가 있겠사옵니까! 지금 당장 진평후를 구금하고, 그의 사병들을 무력화하여야 할 것이옵니다!”
“제신들은 진정하라. 진평후는 아우의 죄를 듣자마자 바로 고하였다. 다짜고짜 역적으로 취급하는 것은 공신에 대한 도리가 아니지 않은가?”
“아우가 역적인데 형이 역적이 아닌 경우는 흔치 않사옵니다. 진평후가 비록 이실직고를 하긴 하였으나….”
언제나처럼 자신의 뜻을 알리면 그에 따를 것이라 생각했던 신료들은 맹렬히 만종을 구금하고 추국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얼마 안 가 세자의 장계가 올라왔으나 그럼에도 신료들의 주장이 죽기는커녕 만종을 당장 처리해야 하는 것이야말로 태자 전하의 뜻이라는 주장을 내놓자 어젯밤 이상으로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