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yo Black Prince RAW novel - Chapter 243
243화
2부 외전-후일담(4)
“그래서 채 장군은 간 것이옵니까?”
“그렇지. 형의 유지를 잇겠다는 군. 그러나 채 장군은 형 충평공과 비슷하게 가족을 챙기되 형과 달리 제법 사욕도 챙겨 제법 재밌는 청을 하더군.”
“무슨 청을 하였습니까?”
“이 나를 상대로 청탁을 하더군. 말이야 충평공을 흉내 내어 부친의 품계가 마음에 걸린다는 등, 자신이 잘못될 경우를 대비하여 조카와 자식들을 부탁한다 하더구나.”
“…하여 어찌하였습니까?”
“부친 태묘서령(太廟署令) 채영(蔡泳)은 그 연세가 연세인 만큼 무산계를 내려도 이상하지 않으니, 두 자식 모두 변방에 보내진 것을 참작하여 현 관직 보다 높은 무산계(武散階)를 내리도록 하였고, 조카와 자식들은 국자감(國子監)에 넣고 그 비용을 나라에서 대주는 것으로 하였지.”
태자의 대답에 김방경은 채화 본인은 제대로 된 관직과 음서와 같이 바로 관직을 내려주거나 측근으로 기용해달라는 것을 태자께서 잘못 생각한 것이 아니었는가? 생각했지만 좀 더 생각하니 눈앞의 젊은 태자 전하께서 그것을 모를 리 없고, 일부러 명예직과 합법적으로 응시할 기회를 주는 것으로 답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런데 방경, 너는 탐라국의 병력이 얼마쯤 되는지 아느냐?”
“자세히는 알지 못하나 대략 8백여 명 정도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 다앗!”
“8백 명이라….”
하루일과 와도 같은 궁술 단련을 하던 왕검은 옆에서 같이 단련을 하던 김방경의 대답에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러자 김방경은 다시 활시위를 당기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그 수에는 현 제주에 주둔하고 있는 병력은 아조의 천병(天兵)까지 더한 수로 그들을 제외한다면 실제론 5백 명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탐라에서 군을 동원한다면 얼마나 되겠느냐?”
방금 전 김방경의 대답은 어디까지나 주현군, 주진군처럼 상비군을 말하는 것으로 군적에 올라 있는 인원까지 포함한다면 그보다 많을 것이 분명했다. 물론 군적에 오른 명단과 실제 인원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는 전근대 막론하여 흔하기 때문에 전원이 필요 시에 제때 소집될지, 평시에는 알 수 없다.
“많이 동원하여도 2천 5백도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제주는 탐라국을 표방하고 있으나 그 나라를 통틀어도 황도는커녕 서도(西都 서쪽 도읍. 서경을 말함.)의 수보다도 적습니다. 과거 본조에 치화에 들기전 탐라국의 수는 8천이라 하였으니 그 수가 배로 늘었다 한들, 1만 하고도 6천밖에 되지 않으니 2천이나 동원한다면 대단할 것입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하나 더 물어보지.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탐라국에서 내란이 일어나 본조에서 개입을 하게 되고 내가 너에게 병력을 주어 내란을 진압하라 지시를 내린다면 네게 병력을 얼마나 주면 되겠느냐?”
왕검의 그 물음에 김방경은 잠시 활을 내려놓고 고민 후 말했다.
“만약 소신에게 그러한 지시를 보내는 것이고, 더욱이 급하게 보내는 것이라면 소신의 최선의 답은 다다익선(多多益善)이 옵니다. 제주가 본조의 지배와 통치를 받고는 있으나 변방에 속하여 제주의 지리를 아는 자는 적습니다. 때문에 제주를 칠 경우 최대한 많은 병력을 끌고 가 반군과 제주의 백성들의 전의를 확실히 끊거나 혹은 물 샐 틈도 없이 포위하여 확실히 잡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합니다.”
“…맞는 말이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라. 전쟁을 하기 앞서 상대를 알아야 하는 법이다. 만약 알 수 없다면 압도적인 수로 상대의 전의를 초기부터 꺾는 것이 나을 것이다.
다만 다행스럽게도 내가 탐라의 상황을 어느 정도 아는바, 난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 수는 3천을 넘지 못할 것이고, 더욱이 탐라의 모두가 하나 되어 반란을 하지는 않을 것이니 우리 군이 간다면 그곳의 지리를 아는 토인들을 어렵지 않게 포섭할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혹 제주를 칠 생각이시옵니까?”
다시 활을 쏘려던 김방경은 다시 화를 내리고 물었으나, 왕검은 말없이 화살을 계속 쏘았다.
“전하께서 용강후와 제주에 대해 의논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그 목적이 제주를 징벌하려는 것이었습니까? 전하. 제주는 이미 본조의 강토이옵니다. 구태여 치는 행위를 하는 것은….”
지금도 제주도를 탐라국이나 탐라라고 부르는 이가 적지는 않고 탐라를 통치하는 성주와 왕자라는 직위가 아직 이어져 그들의 권한도 다른 지역의 호족들보다 강하긴 하나 제주도는 이미 고려의 속현에 편입이 되어 있었다. 제주도를 무력으로 처리할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태자는 김방경의 대답을 끊고는 화살을 계속 쏘며 대답하였다.
“우선 몇 가지 정정해 주지.
첫째. 탐라가 제주라는 이름으로 본조의 속현이 되긴 하였으나 아직도 탐라라는 나라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탐라의 백성들은 자신들을 본조의 백성이라기보다는 탐라의 백성이라 생각하고 그들을 다스리는 성주와 왕자가 있는 것이 그 증거가 아니겠느냐? 나는 그것을 존중한다.
둘째. 탐라와 전쟁을 할 생각은 없다. 탐라는 본조의 충실한 번신이니 어찌 탐라를 치겠느냐. 만일 본조의 군대가 탐라로 간다면 그것은 탐라국과 전쟁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탐라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다.
셋째. 탐라와 본국과 다른 이국이라면 탐라국이 한 것을 본국이 모른다 한들 이상할 것은 없다.
마지막으로 넷째. 지금 탐라에 본조에 대한 앙심이나 흑심을 품는 자가 있으니 그 싹은 일찌감치 제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전하. 설마?”
김방경은 그제서야 태자의 계획을 편린으로나마 유추할 수 있었으나 그때 마침 화살을 다 쏘았는지 태자는 말을 마무리하였다.
“다행히 지금 탐라에 적재적소의 인재가 갔으니 그에 대한 문제는 그가 돌아온 후 재차 논의하도록 하자.”
* * *
성주가 머무르는 성주청은 무척이나 웅장했다. 규모가 고려 판관이 머무는 관청과 비슷하거나 혹은 이상은 되는 것 같았고, 정문 앞에는 수십 명이나 되는 군사들이 창칼을 들고 늘어서 있었다.
실제 고려에서 받는 취급은 어찌 되었든 다른 탐라 호족들에 비한다면 분명 왕이나 군주를 자처할 만한 건물과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성주청에서 살고 있는 탐라의 성주 고적은 때아닌 ‘귀빈’의 방문에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귀빈’을 안내해 온 김 판관을 돌아보자 그도 난처해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에 고적은 김 판관에 대한 원망은 접었다.
표정을 보니 그도 예상하지 못한 사실이고, 그나마 판관 김구가 서둘러 그가 성주청에 방문할 것이라는 소식을 알려주었기에 영접 준비를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결국, 양자가 갑작스러운 방문에 어렵긴 하나 이대로 멀뚱히 서 있을 수만도 없었다.
“대인께서는 어서 상석에 오르시지요.”
고적은 연회의 상석을 양보하였다. 그러나 상대는 상석을 거절하였다.
“성주 저하께서는 크게는 탐라국의 주인이시며 작게도 보아도 이 성주청의 주인이시라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바인데 어찌 손님 된 신분으로 주인을 두고 상석에 앉을 수 있겠습니까. 상석은 마땅히 저하께서 오르셔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고적은 그 말을 듣고도 순순히 상석에 앉을 수가 없었다. 성주는 탐라국의 군주를 칭하는 것으로 일단은 ‘왕작(王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탐라가 고려의 제후국인 만큼 성주의 위치도 고려의 ‘제후국왕(諸侯國王)’에 속한다고도 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하면 제후국의 왕인 성주는 당연히 고려에서도 높은 위치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실상 고려 시대 탐라국 성주의 위치는 무척이나 애매했다.
본래 일국의 군주인 제후왕들이 받는 왕작은 보통 ‘군왕(郡王)’에 해당하는데 이것은 품계로 치면 1품에 해당했다.
설령 ‘왕작’은 받지 못한 제후왕들도 어지간하면 ‘국공(國公)’의 작위는 받아 2품의 품계는 받는 것이 기본이었는데, 정작 탐라국의 성주가 1품이나 2품에 해당하는가 하냐면 참으로 애매했다.
고려에서 무산계가 도입된 이후 얼마안가 탐라국의 성주들도 고려의 무산계를 받았는데 역대 성주들 중 가장 높은 무산계의 직위가 종 3품의 운휘대장군(雲麾大將軍)이었으나 작금 고려 후작에 겨우 버금가는 수준에 불과했다.
심지어 이 운휘대장군 무산계마저 역대 성주가 줄곧 받은 것이냐고 한다면 아니었는데 오히려 대부분의 성주들은 남작과 동등한 종 5품의 유격장군(遊擊將軍)을 더 받았고 간혹 그보다 훨씬 떨어지는 8, 9품의 교위직을 받기도 하였으니 성주가 제후국의 군주라는 신분이 무색할 정도였다.
그런 성주에게 지금 성주청을 방문한 귀빈은 문산계로는 정 3품에 해당하는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를, 작위로는 3품에 해당하는 후작 위에 있었고, 개인 소유는 고려에서 명성이 자자한 용강상단을 거느리고, 그 본인도 계사지주의 공신으로 활약하여 고려 태자의 장인이 된 용강후 정안연이었으니 나라 구실도 제대로 되지 않는 섬의 성주로서는 도저히 눈 딱 감고 상석에 앉기가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하여 상석에 앉으라는 권유에도 거듭 사양하며 다시금 상석에 앉히려 하였다.
“천조에서 온 대신(大臣)을 어찌 하좌(下坐)할 수가 있겠습니까? 부디 앉으시지요.”
“저는 지금 황상 폐하의 사신으로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찌 주인보다 상석에 앉을 수 있겠습니까? 만일 저하께서 계속하여 상석에 앉지 아니하신다면 저도 계속 서 있을 것입니다.
또한 저하께서 서향(西向)을 하신다면 저는 북면(北面)을 할 것이고, 저하께서 남면(南面)을 하신다면 저는 동면(東面)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주의 그런 마음을 아는 건지 모르는지 용강후 정안연도 결코 물러나지 않았고, 결국 성주는 용강후는 동과 서로 대좌하는 것으로 합의한 끝에 겨우 앉을 수 있었다.
* * *
고적이 당황하고 있을 때 정안연과 함께 함께 대좌를 한 김구는 현 상황이 당혹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가 탐라로 온 지 벌써 1년이 지났다. 탐라로 부임 오기 전 태자로부터 성주에 전할 언질을 들었기에 태자가 탐라 성주를 부추기려 하고 있는 것은 알고 부임해 온 그였다.
언질을 들을 당시만 하여도 구태여 성주를 부추겨 애꿎은 제주도에 소란을 일으킬지 모르는 일을 하는 것에 의문도 없지는 않았으나 그 의문은 탐라에 온 이후 탐라 사정을 알게 되면서 자연히 감탄으로 바뀌었다.
‘오늘날 탐라는 성주 고가(家)와 왕자 양가(家)가 둘로 나뉘어 반목하고 있으니 이 반복은 어제, 오늘 사이 일어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들 중 성주는 아조에 우호적이나 왕자인 양가는 제주의 아조 군현 편입에 반감을 품고 있으며 성주를 몰아내 자신이 성주가 되려 하는 기질이 있다. 태자 전하께서 성주를 부추긴 연유는 이러한 사정을 일찍이 알고 계셨기 때문이시구나.’
김구는 태자의 심계와 안목에 감탄하며 외직이 끝나고 태자의 측근으로서 흠이 잡히지 않도록 청렴결벽, 성실히 판관 일을 수행하였다.
김구의 외직이 끝난 후 태자의 측근이 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 큰 무리는 아닌 것이 딱 봐도 공공히 떠벌리면 안 될 만한 언질을 자신에게 알리고 성주에게 전하도록 맡긴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일개 외직에게 알려준다는 것이 무슨 뜻이겠는가? 하는 것이다.
다행히 왕검도 김구를 어느 정도는 눈여겨보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으니 완전한 착각은 아니었다.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데 어느 날 난데없이 태자의 중신이자 장인이 대뜸 찾아왔고 성주와 만나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저 산을 보니 태자 전하께서 북방에는 백두산이 있으면 남방에는 한라산이 있으니 탐라로 가면 꼭 한번 견식해 보는 것이 좋다라 하신 말씀이 이해가 갑니다.”
“그, 그렇소?”
성주청에서의 연회를 하던 도중 담벽 너머 저 멀리 우뚝 서 있는 한라산을 보며 장안연이 평가하자 성주는 다소 기쁜 얼굴로 반응했다.
고려에서 백두산이니 장백산이니 여러 다른 명산을 숭산이라 부르지어도 제주도의 사람들에게 진정한 숭산은 오직 제주도 어디에서도 눈에 들어오는 한라산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자신들의 숭산을 외인이, 그것도 고려 태자가 백두산과 함께 언급을 해주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으니 내심 기분이 좋았던 것이다. 그렇게 다소 호감을 느끼며 연회는 이어졌다.
“그러고 보니….”
그리고 그런 호감의 담화 속에서 문득 고적도, 김구도 따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때가 되었다고 자각하였을 때 정안연은 입을 열었다.
“태자 전하께서는 제게 천조의 남방에서 삼한이 분립하였을 시절부터 존속해 온 탐라국에 대해 관심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탐라를 대대로 다스려온 성주‘와’ 저하께도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방금 전과 다를 바 없는 사람 좋은 미소와 어조였으나 그 말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라는 것은 모두가 직감할 수 있었다.
“한데….”
# 작가의 말
*작중 김방경의 제주도의 인구는 1만 6천 운운은 조선시대 세종 시기 제주도의 인구는 약 6만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고려 시기. 그것도 작중 시기와 근 시기인 원종 시기 삼별초 진압 후 제주도의 인구는 약 1만 명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1270년 삼별초가 제주도로 온 이후 삼별초가 전라도, 경상도 해안가 사람들을 납치하기도 한 것처럼 제주도민들도 무리하게 징발하고, 그 후 수년 동안 여몽 토벌군과 교전을 하며 일어났을 희생도 적지 않은 것을 감안한다면 원종 시기 집계한 제주도 인구는 여몽전쟁 전에 비해 줄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 다소 편의적 해석도 섞어 만든 작중 설정입니다.